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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델 신부(제6대 조선교구장 주교)의 복사였던 구한선은 열정이 넘치던 젊은 신앙인이었다. 묘역에 있는 복자 묘와 순교 현양비. |
관아서 태형 받고 장독으로 숨 거둬
뒤늦게 발견한 묘, 함안으로 이장
교구·신자 힘 모아 순교자 묘역 조성
구한선(타대오,1844~1866)은 리델 신부의 복사로 거제도 전교 활동을 다녀온 시간을 생각하면 마음이 뛰었다. 리델 신부가 집전하는 전례나 예식을 보조하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한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다.
하지만 구한선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전교 활동을 다녀온 직후 1866년 봄, 경남 진주 집에서 지내던 그는 진주 관아 포졸들에게 잡혀 끌려갔다.
그는 자주 호된 문초와 매질을 당했다. 특히 바지를 내린 채 곤장으로 볼기를 맞는 장형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착! 착!’ 두터운 나무 장이 구한선의 볼기에 내리꽂혔다. 볼기가 차츰 검붉게 멍들기 시작하더니 10여 대가 넘어가자 결국 살이 터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한선은 앓는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관장이 물었다. “어찌하여 아프다 소리를 한 번도 하지 않는 게냐?”
구한선이 답했다. “늙으신 어머니가 문밖에 계십니다.” 그는 어머니가 자신의 앓는 소리를 듣고 기절할 것을 걱정하였다.
관장은 “어찌 그런 자가 제사를 지내지 않는 천주교를 믿을 수 있단 말이냐?” 하며 호통쳤다.
구한선은 더욱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주교는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딱 죽지 않을 만큼 맞는다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 것이었을까. 온갖 형벌로 만신창이가 된 구한선은 석방돼 집으로 보내졌다. 관아 안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관장의 뜻이었으리라.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구한선은 7일 동안 장독으로 앓다가 결국 숨을 거두었다. 겨우 그의 나이 22세였다. 그는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됐다.
구한선의 고향은 경남 함안 근처였다. 당시 가족들은 그의 시신을 함안 대산면 하기리에 있는 신씨들 묘소 구석에 안장했다. 박해시기였기 때문에 그의 아들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뒤늦게 발견된 구한선 묘는 1977년 함안 대산면 가등산 근처 교우 묘역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2002년 5월, 마산교구는 그곳을 순교자 묘역으로 조성했다. 교구의 지원과 대산본당 신자들의 정성이 이뤄낸 결과였다. 이 묘역이 순교 복자 구한선의 유일한 흔적이다. 그 신앙의 열정을 찾아 복자 구한선 묘역으로 갔다.
▲ 묘역 가는 길. |
교우촌 찾아가던 마음으로
“아침 7시 30분, 10시 30분, 오후 1시….”
고속철도 함안역에서 내려 묘역을 관할하는 마산교구 대산성당으로 향하는 버스 시간을 확인했다. 약 3시간에 한 대. 뒤늦은 겨울바람 속에서 버스를 기다린 30분은 꼭 3시간 같았다.
발을 동동 구르다 겨우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히터 온기가 느껴졌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창밖을 보니 버스는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달리고 있었다.
신앙 선조들도 산속 교우촌으로 숨기 위해 고불고불 산길을 걸었다. 복자도 이런 길을 걸었을 것이다. 버스가 달리는 길을 보니 그 모습이 그려져 한동안 창문 밖 풍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대산면사무소가 보이는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다. 식당과 상점이 모여 있는 작은 시내였다. 정류장에서 약 100m 떨어진 곳 대산농협 바로 옆에 대산성당이 있었다.
“보통 단체 순례객 분들은 가져온 차를 이용하는데 그렇지 않은 분들은 보통 저희가 택시를 불러 드려요.”
묘역으로 가는 방법을 묻자 대산본당 사무장이 친절하게 대답했다. 택시를 타고 대산성당에서 함의로로 빠져나와 취무사거리에서 마산 방면으로 200m 정도 달리니 묘역 표지가 보였다. 날씨가 좋다면 천천히 기도하며 걸어와도 좋을 거리였다.
▲ 복자 구한선 묘역 입구에 놓인 비석. |
따뜻한 정성이 느껴지는 곳
묘역 입구에는 순례객 방문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작은 언덕이 보였다. 묘역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언덕 초입에는 ‘순교자 구다두의 묘’라고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다두’는 이전에 사용되던, ‘타대오’의 한자어 표기다.
언덕을 오르니 아담한 잔디 동산이 펼쳐졌다. 묘역 입구에서 둘러만 봐도 전경이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그중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묘역 가운데에 놓인 높이 4m 정도의 하얀 십자가.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 구한선의 묘가 있었다.
묘는 잡초 없이 단정했다. 주변에 있는 꽃과 나무ㆍ잔디도 깨끗하고 잘 정리돼 있었다. 복자를 사랑하는 신자들이 정성으로 묘역 곳곳을 돌보기 때문일 것이다.
복자의 묘 옆에는 ‘구다두 순교자와 동료 순교자들의 시복을 위한 기도’가 적힌 검은 비석이 있다. 얼마나 많은 신자가 이곳에 와서 기도를 바쳤을까. 그 기도가 마침내 이뤄졌다. 지난해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례한 124위 시복식이 떠올랐다.
묘 뒤에 있는 십자가의 길 14처를 지나, 성모님께 두 손 모아 인사드리고 대산성당으로 발길을 되돌렸다.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대산성당에서 주임 최문성 신부를 만났다.
최 신부는 “2년 전 묘역 앞에 들어선 공장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그곳 소음과 심한 가루 날림으로 묘역이 훼손될 위기에 처해있다”고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다. 또 “설상가상으로 곧 반대편에도 다른 공장이 들어올 예정”이라며 “복자의 묘역을 옮길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 신부의 목소리에는 절망보다는 희망이 엿보였다.
“복자 묘지를 100년 넘게 방치했던 것이나, 묘역을 제대로 보존하지 못한 것은 아파하고 반성해야 할 점입니다. 이번 성찰을 계기로 순교자 공경에 더욱 힘쓸 것입니다. 많은 관심과 기도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