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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폼페이의 로사리오의 성모
묵주의 9일기도의 시초
[요약]
바르톨로 론고 복자(Bl. Bartolo Longo)는 로사리오의 성모성지를 세웠으며
그 성지에 기적의 이미지를 봉헌했다.
포르투나 아그렐리를 포함하여 수많은 기적의 치유가 연이어 일어났다.
성모님께서는 "로사리오의 여왕"의 모습으로
1884년 3월 3일 포르투나 아그렐리에게 발현했다.
그녀의 부모님들이 딸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 바로 다음에 발현했다.
1884년 5월 8일 아르렐리는 완치되었다.
[사건일지]
폼페이는 로마 제국 시대의 크고 번창한 도시였으나
서기 79년 베스비우스 화산이 폭발하여 폐허가 되었다.
그 후 수십세기가 지난 1872년 10월 바르톨로 론고는
자기 아내 푸스코 백작부인의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이 폐허의 도시에 갔다.
당시 그 도시는 대담하고 파렴치한 강도들의 소굴이라고
공식 문서에 기재되어 있을 만큼 인심이 사나웠다.
바르톨로 론고는 원래 교우 가정에 태어나 천주교 교육을 받으며 자랐으나,
유심론(唯心論)의 영향을 받아 거의 냉담 상태에 있었다.
이렇게 신앙 생활에 소홀한 그였지만
폼페이에 도착해 보니 모든 것이 너무 놀라웠다.
보잘 것 없는 성당 하나에 신부 한 사람 밖에 없는데다
미사 참례 다니는 사람이라곤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당시 대부분의 폼페이 주민들은 미신을 숭상하고 있었으며,
악신들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10월 9일 바르톨로는 폼페이시에서도 가장 황페한 어느 길을 걷고 있었다.
걸으면서 그는 생각했다. "천주교에서 가르치는 교리가 모두가 사실일까?
아무리 해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아주 그만두어 버릴까?"
이 때였다. 홀연히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만일 네가 구원을 얻기를 원한다면 묵주의 기도를 전파하라.
이것은 성모 마리아의 약속이다."
바르톨로는 놀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만일 당신이 누구나 묵주의 기도를 전파하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성 도미니코에게 약속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나도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순간에 결심을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묵주의 기도를 전파하기 전에는 이 고을을 떠나지 않으리라고."
때마침 멀리 떨어진 성당에서 삼종 종이 은은하게 들려 왔다.
바르톨로는 땅에 무릎을 꿇고 자기의 약속을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바르톨로는 우선 폼페이에 매괴회를 설립하려고 마음 먹고 일을 착수했다.
초기에는 별로 신통한 결과를 보지 못했으나,
1875년 노라의 주교를 설득시키면서부터는 생기를 띄게 됐다.
노라의 주교는 폼페이를 방문하고 바르톨로의 계획을 들은 후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다 제대를 세운다고?
제대가 아니고 아주 성당을 하나 세웠으면 좋겠는데."
주교는 손가락으로 맞은편 들을 가리키면서
"저기가 바로 폼페이를 위한 성당을 세울 곳이요"라고 말했다.
바르톨로는 농부들이 묵주의 기도를 바치면서
그들의 신심을 북돋울 수 있는
한 폭의 성화(聖畵)를 구했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농부들에게 자기가 3일 안으로
마음에 드는 성모 상본을 구해 오겠다고 약속한 후
시내 구석 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마침 어느 상점에서 대단히 마음에 드는 그림을 발견했으나
그는 곧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그림은 교회법상 성당에 모실 수 없는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교회법에서는
캔버스나 목판에 유채로 그린 성화만을 인정했다.
바르톨로는 부랴부랴 나폴리시로 달려갔다.
여러 상점을 둘러 보았으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4백 프랑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그림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어찌 할 바를 몰라했다.
약속 기간은 3일 동안이지 않은가?
이 때 나폴리에 사는 한 친구가
어느 고물상에서 샀다고 하면서 한 폭의 그림을 내 주었다.
그는 3,40리르를 지불하고 고물상에서 구입한
"로사리오기도의 성모님"을 수도원에 보관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그림은 교회법에 저촉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나 낡고 헐어서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 그림을 바로톨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그 그림은 곰팡이가 먹었을 뿐 아니라,
성모님의 얼굴은 꼭 아무렇게나 생긴 촌 부인처럼 생겼고,
입고 있는 망토에는 금이 가 있는 데다가
그림 한 쪽은 찢어져 없어져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모양도 어찌나 흉칙하게 생겼든지
매괴회의 창립자인 성 도미니코는
꼭 길가에 떠돌아 다니는 부랑자 같았다.
성모님의 왼쪽에는 성녀 로사가 그려져 있었는데
나는 후에 성녀 로사 대신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를 그려 넣었다.
나는 그 그림을 받아야 좋을지 안 받아야 좋을지
한참 동안 망서리다가
그날이 내가 약속한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라고 바르톨로는 후에 말했다.
바르톨로는 그 그림이 너무나 커서 자기가 직접 운반하지 못하고
봄베이와 나폴리 사이를 매일 정기적으로 황복하는 짐꾼에게 맡겼다.
짐꾼은 그 그림을 종이에다 싼 후 이웃 마을에 갈
퇴비 위에다 얹고서 봄베이까지 운반했다.
이렇게 해서 <폼페이의 성모>는
성모님 스스로 택하신 조그만 성당에 도착했다.
이 성화는 이후 이 조그만 본당 교우들의 신심의 표적이 되었다.
바트롤로가 그 성화를 산 것은 1875년 11월이었으며,
그 다음해 1월 봄베이에 매괴회가 정식으로 설릴 될 때까지
이 성화는 부분적으로 손질을 마쳤다.
한편 나폴리에서는 12세의 소녀 크로린다 루카레리가
죽음의 문턱에서 병상에 누워있었다.
그녀는 심한 간질병을 앓고 있었으며
의사들도 모두 포기한 상태에 있었다.
크로린다의 보호자인 그녀의 숙모는
폼페이의 매괴회에 관한 얘기를 듣고서,
성모님께 마음 속으로 만일 그 가엾은 크로린다를 고쳐주시면
새 성당 건축에 희사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랬더니 그 어린 소녀는
폼페이에서 성모님의 성화가 제막되던 바로 그 날
완전히 건강한 몸이 되었다.
소녀를 치료하던 의사들은 소녀의 건강 회복은
의학적으로 있을수 없다고 했다.
다 죽어 가던 꼰세따 바스떼리라의 친척들도
그와 비슷한 약속을 봄베이의 성모께 함으로써
그녀의 병을 고쳤다.
안토니 바로네 신부는 폼페이의 성모께
자기 자신을 완전히 의탁하던 바로 그날
무서운 괴저병이 씻은 듯이 없어졌다.
모든 증상은 완전히 사라졌으며
다음 날부터 미사를 드릴 수 있게끔 되었다.
이상 예를 든 모든 일은 1876년 초에 일어난 일들이다.
새 성당의 초석이 놓인 것은 그해 5월 8일이었다.
정확하게 한 달 후인 6월 8일 폐병 3기에서 허덕이던
죠반니나 무따 부인은 폼페이의 성모님께 호소했다.
병상에 누워 있던 부인에게 홀연히
성당안에 모신 성모님의 그림과 똑같이 생긴 그림이 나타났다.
무따 부인은 늘 병상에 누워 있어 성당의 그림을 본 일은 없었다.
성모님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신 후
일종의 흰 리본을 그녀에게 던지셨다.
리본 위에는 "폼페이의 동정녀는 너의 소원을 들어 준다.
죠반니나 무따야."라고 씌어 있었다.
그녀는 즉시 나았다.
폼페이의 성모의 은헤로 병을 고친 사람들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여러 특기할만한 한 가지 경우를 적어 본다.
나폴리에 사는 소녀 포르뚜나 아그렐리는
열 석달 동안 병으로 누워 있었다.
소녀는 흑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으며, 그 아버지는
나폴리 시내에서 유명하다는 의사는 모조리 데려다가
자기의 귀여운 딸의 병을 고쳐주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절망적인 말만을 남기고 돌아갔다.
1884년 2월 16일 소녀의 가족들은 묵주의 9일 기도를 시작했다.
3월 3일 성모님은
폼페이의 동정녀의 모습으로 포르뚜나에게 나타나셨다.
성모님은 높은 옥좌 위에 앉아 있었으며
그 무릎 위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었다.
성모님의 손에는 묵주가 있었으며
양 옆에는 성 도미니코와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가 동석해 있었다.
성모님이 앉아 있는 옥좌는 수많은 꽃들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성모님의 아름다움은 황홀했다.
성모님은 어머니 같이 부드러운 얼굴로
포르뚜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포르뚜나는 입을 열어 말했다.
"거룩한 매괴의 여왕이여
나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나에게 건강을 도로 주소서.
나는 당신에게 9일 기도를 바쳤으나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나이다.
병을 고치려는 나의 간절한 소망을 돌보소서."
복되신 동정녀는
"아가야, 너는 여러가지 명칭으로 나를 불러 내 마음을 즐겁게 했다.
이제 너는 나를 내가 가장 즐겨하는 거룩한 매괴의 여왕이라 불렀으니
나는 더 이상 네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구나
9일 기도 세번을 바쳐라
그러면 너는 무엇이든 얻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포르뚜나는 성모님의 말대로 하여 병을 고쳤다.
그런 후 곧 성모님이 다시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나에게 은혜를 입기 원하는 사람은
간청의 뜻으로 세 번의 9일기도
그리고 감사의 뜻으로 세 번의 9일기도를
묵주의 기도로써 바쳐야 한다."
이것이 성모님께 대한 묵주의 9일기도의 시초이다.
이 묵주의 9일기도는
'또한 아니 들어 줄 수 없는 9일기도'라고도 불리운다.
이 9일 기도는 매일 묵주 신공 5단씩 27일 동안은 간청의 뜻으로,
그리고 그 후 27일 동안은 감사의 뜻으로 바치는 것이다.
모두 합해서 54일이 걸리는 이 기도는
성모님이 우리에게 직접 말쓰하신 아주 위력 있는 기도다.
가장 놀랍고 특기할만한 사실은 "승리의 성모께 드리는 기도문" 인데,
이것은 1883년 8월부터 폼페이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갔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매년 5월 8일이나 10월 첫주일에
폼페이의 성모께 기도하던 날로 지정되었다.
1979년 10월 2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폼페이 성지를 순례하셨다.
1980년 10월 26일에는 바르톨로 론고가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시고,
"마돈나의 성인"과 "로사리오의 사도"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폼페이의 새 성당은 완성되었다.
그리고 증축되어 1891년 5월 교황 레오13세의 특사로 온
라 바레따 추기경에 의해 축성되었다.
근처에는 큰 고아원과 순레자들의 숙소가 세워졌다.
자기가 세운 매괴회의 놀라운 결과를 본 바르톨로 롱고는
1906년 폼페이에 있는 자기의 재산을 교황청에 바쳤으며
그것은 1929년의 라떼란 조약에 의해 교황청의 직속 재산이 되었다.
1939년엔 64년전 주교가 가리키던 바로 그 장소에 교
황 비오11세의 명에 의하여 새 성당이 세워졌다.
고물상에서 나온 그 그림은 오늘날 황금의 액자 속에 담겨져 있으며,
성모님과 아기 예수 그리고 성인들의 얼굴을 제외한 모든 부분은
다이아몬드와 기타 보석으로 수 놓아져 있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은 그 앞에서 기도하며 성모님께 은총을 구한다.
2차 세계대전과 그 후 시련의 해를 통해서 순례자들은 더욱 열심히 기도했다.
폼페이의 성모는 특히 이태리 사람들에게 특별한 위안이 되었다.
1830년 이래의 성모님의 중요 발현들과 마찬가지로
봄베이의 발현은 파티마 발현의 전주였던 것 같다.
묵주의 기도는 폼페이의 핵심적인 신심이며
성모님이 파티마에 오셔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도
"매일 묵주의 기도를 바치라"는 것이었다.
묵주의 기도는 이 세계를
그리스도께 돌아가게 하는 데에 있어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축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성지의 설립자, 바르톨로 론고를
복자로 시복했으며 축일은 10월 6일 이다.
"제3 도미니코회", 폼페이의성로사리오수녀회"의 설립자인
바르톨로 론고 복자는 또한 가난한 사람들, 고아들,
투옥된 죄수들의 자녀들을 위한 숙소를 세웠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마돈나의 사람"이나 "로사리오의 사도"라고 불렀다.
"로사리오의 성모님 축일은 5월 8일 이다.
산타마리아 델 로사리오 바실리카
[폼페이 성모 성지]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녀/ 복자 바르톨로 롱고
폼페이 유적
폼페이는 1997년 유네스코에 의해 지정된 세계 문화유산이자
이탈리아 내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이다.
79년에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화산재에 묻혀 버린 폼페이는 그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당장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모든 것이 보존되어 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절대 자신의 고향인 폼페이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았다.
저주받은 도시 출신이라는 것을 알리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62년에는 대지진으로 주변 도시가 많이 파괴되었다.
79년 8월에는 베수비오 화산이 대폭발을 함으로
순식간에 폼페이 시가 화산재에 파묻혀 버렸다.
(이 참사를 소 폴로니우스가 생생하게 기록하여 남겼다.)
18세기 중반에 우물을 파던 농부가 그리스-로마 시대의 유물을 몇 점 파냈다.
이때부터 고고학자들이 답사를 하고, 발굴도 하였다.
(이 시대는 골동품 수집이 대 유행이었으므로
학문적인 연구를 위한 발굴보다는 골동품 취득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폼페이의 발굴은 그리스-로마 시대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연구자들에게도 아주 훌륭한 자료가 되었다.
성교를 묘사한 벽화가 많이 나오므로
타락한 도시에 대한 신이 벌을 내린 것이다 라고 했다.
그러나 다르게 해석하는 학자도 많았다.
1861년에 이태리 국왕 빅토르 임마뉴엘 2세가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특히 로마 시대의 미술이 그대로 살아나서 수준 높은 미술의 자료가 된다.
고대 로마인의 삶의 모습도 아주 생생하게 보여준다.
폼페이는 1748년에 본격적으로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이 발굴 작업의 여파가 굉장해서
전 유럽에 고대 그리스풍의 유행이 새로 생기기 시작했을 정도이며
유럽의 부호들은 너도나도 이 발굴 작업에 뛰어들었다.
서유럽에서 유물, 유적은 단순한 예술품 이외에
엄청난 부를 안겨 줄 수 있는 또 다른 노다지였기 때문이다.
폼페이와 화산에 직접 가봤다
첫댓글 참으로 대단 하십니다
저는 믿음에 자식이 아니다 보니
늘 댓글드리기가 망서려 집니다
양떼님, 겸손의 말씀이십니다.
공감하시고 정성된 댓글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믿음 !!
그리스도 신자건, 불교신자건, 이스람신자든 아니면 무신론자든
중요한 것은 우리마음에 깊이 간직되어 있는 양심에 따라
올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