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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경외하는 아버지
성경본문 : 잠언 22: 1-6
1.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2.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릇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3.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5. 패역한 자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거니와 영혼을 지키는 자는 이를 멀리 하느니라
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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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 목사
요즈음 아버지 부재의 시대, 아버지 상실의 시대를 말합니다.
하긴 지난 번 복제양 둘리 이후 숫컷(남성)의 존재 이유가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남성이 씨를 뿌려야 새생명이 만들어졌고 생명에 대한 이니셔티브를 남성이 갖었었습니다.
"아버지 날 나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복제 양 이후 현대 과학은 숫컷의 생식 세포없이 바로 암놈의 체세포에서 핵을 분리하여 수정하는 성공했습니다. 이제는 숫컷 없이도 생명이 나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남성의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부재의 시대를 말하는 것은 아마 여권이 신장되면서 추락하는 부권에 대한 향수와 경제위기로 인해 그나마 경제력을 자신의 존재 이유로 했던 아버지들의 몰락을 말하는 것일 겝니다.
아버지들은 "처자를 먹여 살린다" "남자는 일, 여자는 가사"라는 역할 분담의 전제 아래 자신의 존재 가치를 역설해 왔습니다. 그러나 가장 남성의 힘이 절대적으로 작용했을 것 같이 생각되는 석기시대의 수렵 채집 민족을 살펴보니 그들이 취하던 식량의 70%는 여자들이 캐내는 뿌리 채소엿다고 합니다. 남자들은 활이나 그물을 손질해서 새나 물고기, 짐승등을 잡아 왔는데 사냥이 그리 용이치 않아서 대개는 빈손으로 들어오기가 일수였다는 것입니다. 하긴 저도 낚시 잘한다는 사람들이 맛있는 매운탕 책임진다는 말에 속아 쫒아 갔다가 배만 쫄쫄 굶고 온 기억들이 있습니다. 석기 시대에도 사실 주된 식량은 여자들이 캐온 고구마등의 뿌리나 채소를 먹고 살아 왔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줄 곳 이런 식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 남성들은 환상을 집어던지고 자신들의 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제 혼자의 일은 그만 두겠어, 제발 여자도 한 몫 해다오." 그들을 피부양자의 한사람이 아니고 동반자로 인정해야 합니다. 나아가서 남성도 너무 과중한 생계의 부담을 혼자만 질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살고 싶은 방법을 택해서 살자. 회사는 필요한 만큼의 급료를 받는 곳이면 된다"라는 마음으로 맡은 일을 재조정 해야합니다. 어머니도 사회에 진출하고, 아버지도 육아에 관여 해야합니다. 여성들은 육아를 통해 "자기 안에 있는 아이"를 발견하기에 남성보다는 보다 성숙한 생각을 갖는다고 합니다.
대개 남성다움, 남성, 사나이라는 용어들 뒤에 따라오는 무용담은 마치 깡패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파렴치한 말들이 이어지거나, 아니면 온갖 창조적이고 능동적이고 좋은 가치들은 전부 남성이라는 가치 안에 묶어 놓습니다. 그러나 여성, 현모양처, 모성이라는 이미지 다음에는 서비스, 봉사, 순종, 고분고분, 인내 등의 가치가 따라옵니다. 거기다가 아름다움을 갖추고 섹시함까지 갖추었다면 금상첨화겠지요. 여성은 독자적 인격적 개체로 여겨지기 보다는 남성을 위한 도구적인 성으로 여겨집니다. 이런 잘못된 남성관과 여성관은 적어도 우리교우들은 모두 벗어 던져야 합니다.
얼마전 아내의 생일날이었습니다. 그날 아침에 집안에 바쁜 일로 생일을 챙기지 못한 채, 그날 저녁 시민단체의 수련회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거기서 "사실 오늘은 내가 여기 있으면 안되는 날이다. 케익이라도 같이 잘라야 하는 날이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중 한분이 "오늘 아침 사모님 미역국은 끓여드렸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당황해서 "무슨 미역국?" 했더니 자기는 이제 까지 아내의 생일날 한번도 거르지 않고 미역국을 끓여 대접을 했노라고 하며 "목사님 당연히 그렇게 하실 줄 알았는데... "라며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더니 미역국 끓이는 법에 대해 제게 필기하라면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저는 하루 늦었지만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곤지암까지 차를 타고 나가 미역국 재료들을 사가지고 국을 끓였습니다. 상당히 잘 끓인 국이었습니다. 그날 아내가 많이 감탄을 했더라면 제가 매일 국을 끓일 수도 있었는데...."(일동 웃음)
저는 교회에서 남신도들하고 이런 프로그램을 하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이 차린 식탁"이란 제목 아래 희망하는 남신도 몇이 계획해서 아내를 초청하고(혹은 아들이나 딸을 함께 초청해도 좋습니다) 예쁘고 정성스런 식탁을 마련해서 내 놓는 것입니다. 남편들이 모여 무슨 음식을 만들까 회의도 하고, 당신은 잡채하고 당신은 탕수육을 하고, 저는 미역국을 확실하게 끓일 수 있으니까요... 이런 식으로 분담하고 함께 연구해서 음식을 준비하는 일, 결과가 어땠든지 간에 그 음식을 먹으며 품평을 하는 일, 음식을 먹으며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도 생각해 멋들어진 파티를 준비하는 모임 말입니다. 어때요, 생각만 해도 신나지 않습니까?
남성들이 이렇게 요리하고 음식 만드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아내가 도자기일로 바쁜 때도 제가 어느날 집에 있노라면 끼니 때가 되서 밥을 차려 주느라 애쓰는 모습을 보고 "아, 내가 짐 덩어리가 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남자가 늙어서 밥도 못하고 음식도 못하고 빨래도, 청소도 못하고 있으면 그야말로 남에게 폐를 끼치고 짐 덩어리가 되는 것이지요. 남성들이 이런 기본적인 가사일도 익혀야 합니다.
언어마저도 상당히 다릅니다.
남성은 주로 명령언어를 씁니다. 명령언어는 회사나 직장에서 주로 쓰는 말로서 가장 간단하게 의사를 전달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밥줘, 몇 시에 깨워 줘, 자자..."이런 말들입니다. 이에 비해 여성의 언어는 정서언어들입니다. 이것은 우뇌적 감각, 상대의 기분을 살피는 말이나, 직장에서 좋았던 일, 학교에서 일어났던 일, 누구네 집 개가 새끼를 낳았다는 둥 하는 말입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말들인데 아내와 딸이 앉아서 아주 심각하게 이런 말을 듣고 맞장구를 치는 것을 보고, 아빠들은 "참 할 일도 없다"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날씨가 참 좋구나" "이 꽃 참 예쁘지?" 이런 말들은 특별히 의미없는 이야기 들입니다. 이런 말들은 어떤 사실을 전달하거나 내용이 있는 말들은 아니지만 어떤 말보다도 더욱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말들을 통해서 "저 사람이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구나" "나를 받아 주는 구나" 하는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이런 말들은 서로간에 서먹서먹함을 허물어 주고 서로 친구가 되게 해주기도 합니다.
사이토 사토루라는 일본의 정신과 의사는 오랬동안 가족 상담을 해왔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가족 기능연구소"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 시대에는 "강권적 힘의 아버지"의 이미지에서 요즈음은 "온순함"의 이미지로 대처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족이 온순하고 사랑스러워야 한다는 새로운 규칙이 가족 한사람 한사람의 생생한 욕구나 욕망이 표출되기 어렵게 만들기 쉬우며 이것은 또 다른 억압으로 자유를 구속하게 된다고 합니다. 핵가족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가 너무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부모나 자녀가 다 정신적으로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미성숙의 정신병적 증세를 보이기도 합니다. 사이토 선생은 사랑이 부족한 결손가정에서도 많은 문제들이 생기게 되지만 일본 사회 안에서는 일반가정에서 과잉 사랑으로 인하여 더욱 많은 문제들이 생기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사이토 선생은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서 3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품에 앉는 것(holding)입니다.
갓난 아기가 있는 집에서 "아이 울리지마, 내일 아침에 일찍 회의에 나가야 돼" 라고 하는 아버지는 실격입니다. 이 때 아버지는 아이를 안고 서성이며 "당신은 조금 자도록 해"라고 해야 합니다. 품에 안는 기능은 주로 어머니의 기능이지만 아버지가 아내에게 대하는 태도에 따라 어머니가 자신 감 있게 아이를 품도록 해야 한다고 합니다.
때로는 아버지가 육아에 대해 참여하라고 했더니 손발은 하나도 까닥하지 않으면서 "어머니에게 들어보니 이렇다 더라""집안 살림은 이렇게 해야한다"는 식의 조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몹시 귀찮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남편은 의외로 자신이 매우 좋은 아버지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식들의 행동에 한계를 설정하는 일입니다(Limit Setting).
핵가족 등에서 흔히 보는 예로 욕구 충족이 과도하게 일어날 경우 사람은 겉잡을 수 없이 됩니다. "밥먹어라" "잠자라"하는 말들은 한계를 설정하는 말인데 이런 기능은 아버지가 수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 쪽에서 이런 주문을 하는데 다른 한 쪽에서 "그럴 필요 없다"고 아이의 편을 들면 안됩니다. 아이가 과도하게 욕망을 충족시키게 되면 아이는 "어디까지 괜찮은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끝없이 요구하게 되는데 부모로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서는 결국 "화"를 내게 됩니다. 그러면 아이는 '아버지의 한계' '부모의 한계'를 보게 됩니다. 그는 곧 부모에게서 실망하고 부모에 대한 적개심과 반감을 갖게 됩니다. 그 다음 아이는 자신의 한계를 설정해 주는 환상적인 부모를 그리면서 위험 수위를 넘나드는 자극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데 물건훔치기, 공갈, 폭력등 반사회적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이토 선생은 일본사회에서 부모를 살해하고 학원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등의 아이들을 분석한 결과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사랑의 결핍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정상적이고 사랑을 많이 받은 가정에서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이들의 비행은 부모를 찾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지워주고 적절히 욕망을 제한시키는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일깨워 줍니다.
사이토 씨는 아이들에게 적절한 욕구불만을 일으키는 것은 그들이 새로운 창조력을 갖게 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일본이라는 사회가 약간 우리와 다르지만 우리보다 경제력이나 사회적 현상이 조금씩 앞서서 나타난다는 것을 감안해 보면 매우 주목할 만한 이야기입니다. 이제 까지 사랑이 만능의 해결인 처럼 이야기하는 우리사회의 풍토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의 욕망을 무한히 충족시켜주려 한다면 결국은 아이를 부모를 배반하는 패륜아로 만드는 것이기에 아이에게는 어느 정도까지는 욕망을 충족시키더라도 "그 이상은 안된다. 여기까지다"라는 분명한 선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이토는 프로이드의 "문화 속의 불만"이라는 글에서 프로이드가 욕망을 단절하는 것으로 문화가 창출된다고 하는데 주목할 것을 요구합니다.
셋째는 자식 떼어 놓기입니다(Detouchment).
교육학자 융크는 어머니와 자식의 밀착된 관계를 끊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끊임없는 헌신은 자식의 정신적 발달을 방해하는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단절시키는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번째의 단절은 첫 번째와 두 번째의 포응과 적절한 한계설정이 이루어진 다음에 행해져야 할 문제입니다.
만약 부부간의 관계가 안 좋게 되면 어머니는 매우 쓸쓸한 느낌을 가지고 자식을 감싸 버립니다. 옛 신화에서 거대한 용을 살해하는 창조의 이야기들은 어머니를 딛고 일어서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사춘기는 아이들이 육신의 부모를 떠나 사회적 부성을 찾는 시기입니다. 그러기에 어머니가 자식의 대학입시에 열중한다면 아버지는 좋은 대학에 간다는 것이 인생 전체로 보아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점에서 문제를 이해시키거나 토론을 함으로 아이들이 적절한 시기에 가정이나 부모의 울타리를 떠나 사회라는 큰 틀 속으로 순항해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협조해 주어야 합니다. 그랬을 때라야 부모에 대한 존경심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이 시기에 부모에 대해 반항하지만 그러면서도 더 큰 사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부모가 자신감을 북돋우어 주고 "너는 할 수 있어" "그래도 괜찮다"고 격려 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교회 성서학당에 나오시던 양선생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그는 정년 은퇴를 한두해 남기신 분이셨는데 한번은 성서학당에서 함께 수련회를 갔습니다. 참석자 대개가 젊은 부부 중심이었습니다. 양선생님이 제 옆에서 한숨을 몰아 쉬셨습니다. 제가 무슨 걱정이 있으시냐고 묻자 자신의 사정을 말했습니다.
본인은 신앙을 가진 분이었는데 믿지 않는 아내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생각이 자유로운 분이라 신앙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치 않고 아내더러 교회에 나갈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아이를 낳고 기르게 되니 더욱이 신앙에 소홀하게 되었고 자신도 아주 교회에 나가는 것이 서먹해져 믿지 않는 사람 같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부인이 불교의 열렬한 신자가 되었고, 아주 맹렬한 신자가 되어 양선생님과 많은 의견 차이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생각과 종교의 차이로 집안의 불화가 잦아지게 되면서 큰 아들이 유사 기독교의 사이비 종교에 깊이 빠져 들어갔습니다. 이렇게 되자 신앙적 문제가 나오면 온 가족이 양보없는 논쟁을 하다가 서로 마음을 상하게 만들었습니다. 딸은 이런 모습이 싫어 철저한 무신론자가 되어 집안의 색깔을 다양하게 하는데 한 몫을 보탰습니다.
양선생은 말을 이었습니다. "우리 집은 완전히 콩가루 집안 이예요. 제가 나이가 먹고 애들이 머리가 크니 아버지의 권위 같은 것이 통하지도 않고, 누가 무슨 의견을 내면 서로 딴판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비판하고 마음을 상하게 하기만 하니 자연히 집 안에서의 대화도 끊기게 되고 식구들이 매일 얼굴은 맞대지만 같이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 그저 단순히 한 지붕 아래 모여 있을 뿐입니다. 서로 비위를 긁지나 않으면 다행이지요. 제가 크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가장으로서 단지 집안에 필요한 물질이나 대어주면 다 되는 줄로 크게 잘못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제와 돌이켜보니 집안에 가장 중요한 정신을 세우지 못했어요. 가장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은 빼어 놓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을 얻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하며 살아 왔다는 것입니다. 이제와 크게 뉘우치지만 돌아보면 제 인생은 실패입니다. 지금 저기 아이들과 부부가 함께 손잡고 수련회를 가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보니 더욱 제 실수가 뼈저리게 느껴집니다. 아마 저 젊은 부부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큰 은총 속에 있다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이 긴 고백 속에서 새삼 크리스천의 가장이 얼마나 소중한 가를 새길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잠언은 "많은 재산보다는 명예를 택하는 것이 낫고, 은이나 금보다는 은총을 택하는 것이 낫다(1절)"고 합니다 또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4절)"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유교에서는 인의예지(仁義禮智).....등의 덕목을 말합니다. 그러나 퇴계 선생님은 그 모든 덕목 중 가장 뛰어난 덕이 경(敬)이라고 했습니다. 남에게 인자를 베푸는 것보다 그를 경외하는 것이 분명 한수 위이지요. 남에게 예를 지키는 것보다 그를 존경한다면 예가 문제이겠습니까? 신 없는 유교에서 공경하고 경외하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정신인가를 안 것입니다. 그래서 조상을 섬기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상이나 부모는 오히려 그 자녀가 그 한계를 빤히 알 수도 있습니다. 천지를 만드시고 우주를 사랑과 공의로 섭리해 가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는 가정입니다.
오늘 본문 5-6절은 "자기 영혼을 지키는 사람은 그런 길을 멀리한다. 마땅히 걸어야 할 그 길을 아이에게 가르쳐라. 그러면 늙어서도 그 길을 떠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아버지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버지, 자신과 가족의 영혼을 지키는 아버지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