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1-7
왜? 하필 까마귀로.... / 한서노회
어제 미스테리 극장이라는 T.V 프로그램을 잠깐 시청하다보니까 마치 사주나 팔자가 엄청나게 근거가 있고 신빙성이 있는 것처럼 보여지게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거기 등장하는 몇몇 점장이들 소위 역술인들을 엄청난 능력이 있는 사람인 양 착각하게 만들어 어찌보면 점보는 일을 고무시키는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이 나라가 어떤 길로 가려고 이러나 하는 측은한 생각이 내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을 없다고 외면하고 한없이 우상숭배에 빠져서 악행의 극치를 이루던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왕시대를 보는듯한 기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시대를 거듭하여 갈수록 더욱 악한 왕에 의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철저하게 도망하고 떠나기만 하는 그런 악한길로 줄달음 치고 있었습니다. 악한 왕 오므리가 통치할 당시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 헛된 것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하였더라] (왕상16:25∼26)
악한 왕 오므리는 결 국 7년만에 죽고 맙니다. 악한 왕 오므리가 죽은 후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왕이 나타나리라는 기대는 또한번 물거품으로 돌아간 채 이제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 아함이 아버지 오므리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특히 아합왕의 우상숭배는 도저히 눈뜨고는 못볼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성경은 아합왕의 악한 행실을 이렇게 기록 하고 있습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사마리아에 건 축한 바알의 사당 속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 (왕 상16:30∼33)
그 아버지 보다 한술 더 떠서 아합은 아버지 오므리가 행했던 죄악쯤은 오히려 가벼운 것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에 분연히 일어서서 아합의 잘못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분노와 징벌을 선 포하는 [오직 야훼만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엘리야가 나타납니다. 그 는 죽음을 무릅쓰고 아합 앞에서 하나님의 징벌을 아합앞에서 선포합니다.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결국 엘리야의 이런 예언과 선포는 이후의 그의 인생을 너무도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길로 이끌고 맙니다. 당장 그는 아합의 눈을 피해 도망하여야 만 했습니다. 열왕기상 18,19장을 보면 심지어 아합의 부인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지 아니하면 신들이 자신에게 벌을 내릴 것이라고 저주하며 그를 죽이려 했고 엘리야 자신도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었던지 차라리 자신의 생명을 취해가실 것을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해있는 엘리야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를 요단강 앞 그릿시냇가에 숨게 하시고 까마귀를 통하여 떡과 고기를 날라 그 생명을 연장하도록 준비하여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하필이면 까마귀를 통해 엘리야를 공궤하셨을까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탈무드나 종교제의적 문서들을 보면 까마귀는 틀림없이 흉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몇몇 부정한 음식, 부정한 동물과 더불어 까마귀는 부정한 새로 기록되어 있 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부정한 새 까마귀를 통하여 엘리야를 먹여 살리 셨습니다.
이는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꼭 까마귀를 통하여야만 했을까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비둘기를 통해서는 안되었을까요?
왜 하필 부정해서 가까이 하기조차 도 꺼리는 까마귀를 통하여 역사하셨을까요?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부정한 것을 사용하셔서라도 우리의 삶을 선한 길로 인도하신 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는 어떤 부정한 것도 없다는 것을 교훈해 줍니다. 이 사실은 어떤 것도 우리에게 어떤 선입관이나 잘못된 감정을 가지고 사물을 대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바라보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바른길 가치있는 삶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가장 귀한 도구의 하나라고 생각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선입관이나 나의 잘못된 감정을 가지고 사람이나 사물 그리고 환경을 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고아와 결연하여 후원금을 대 줄 수 도 있다, 고아원에 가서 열심히 봉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육원을 우리 마을에 세우면 안된다. 왜냐하면 보육원이나 집단 수용시설이 마을 안에 들어오면 아이들이 물들게 된다라는 식의 어떤 선입관 때문에 소위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을 동정하고 약간의 선심을 쓰는데 불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고아들조차도 하나님의 섭리속에 태어난 귀중한 한 생명이며 바로 이 생명들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바로 세워주실 수 있다는 가정속에 하나님의 뜻을 찾을 때 그들을 진정 나와 동일한 가치를 갖는, 또 내 자녀와 동일한 가치를 갖는 한 생명으로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 앞에서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듯한 모든 사람이나 상황들을 사랑할 수 있고 감사하며 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모든 부정한 모습들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될 때 비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 현재 활동하고 있는 한 여류작가는 돌팔이 의사의 오진 때문에 40년이 넘는 세월을 한 다리가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어렵고 힘들게 살아왔습니다. 그녀는 두 살때 다락에서 굴러 떨어져 다리를 다쳤습니다. 바로 그 때 한 돌팔이 의사가 소아마비 증세가 있다고 오진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치료해 볼 생각도 못하고 그녀는 자라났습니다. 드디어 헌신적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였고 두발이 되어주는 남편의 사랑을 입어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결혼 15년이 지난 어느날 이 여인은 병원에 갔다가 엄청난 분노와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녀의 다리를 본 의사가 [탈골된 뼈만 한 번 교정했더라면 아무 이상 없이 활동할 수 있었을 텐데 지금까지 왜 이렇게 살았느냐]고 질책을 하였습니다.
순간 이 여인에게는 40년전의 그 돌팔이 의사에 대한 증오와 미움이 물밀 듯이 밀려 왔습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의 행복은 다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짜증과 분노만이 풍겨나는 그런 생활로 돌변하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고통중에 헤매이고 있을 때 15년간이나 헌신적으로 보살펴주던 남편이 아내의 등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만일 당신에게 그런 장애가 없었다면 나같은 사람과 결혼했겠어?]
이 한마디에 여인은 지금까지의 모든 불행감을 털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원망하던 돌팔이 의사에게 까지도 감사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후에 인공 관절수슬을 시술받고 지금은 건강한 두 다리로 열심히 저작활동을 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한 번의 적이 영원한 적일 수는 없습니다. 한 번 부정하다고 여겼다해서 영원히 부정한 것 역시 아닙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여리고로 가다 강도 만남 사람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 불쌍한 유대인을 도운 사람을 유대인들에게 멸시받고 천대받으며 부정한자로 치부되어 개만도 못하게 여겨지던 사마리아 사람으로 설정 해놓고 계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탈무드의 기록에 보면 다윗이 사울왕에게 쫓겨 피하고 있을 때에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아주 좁은 굴의 틈새에 숨었습니다. 드디어 다윗을 잡으려 쫓아다니는 군사들이 그 굴속으로 들어왔을 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 마리의 거미가 다윗이 숨어있은 틈새의 입구에 거미줄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다윗이 숨은 틈새앞까지 온 군사들이 틈새를 살피기 위해 들여다보려는 순간 한 군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게 헛수고 말게 이렇게 거미줄이 쳐져있는데 무엇이 들어갔겠는가?]
그리고 그들은 길을 돌이켜 굴 밖으로 빠져나갔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평소에 가까이 하지 않거나 부정스럽게 보고 더럽게 보는 그런것 들을 사용하셔서 바로 나를 고쳐주시고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부정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단지 종교적으로 부정한 것 외에도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 부정적이고, 멀리하게 만드는 많은 사람, 사물, 상황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나를 인도하시 는 하나님의 섭리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히려 그것들을 더욱 좋아할 수 있고 사랑 할 수 있는 삶의 모습으로 자신을 세워가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뜻이라면 인간적으로 생각해서 최악의 선택이라 할지라도 아멘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만일 엘리야가 까마귀가 부정한 새라하여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면 과연 어떤 결과가 일어났을까요? 단적으로 우리는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환상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게서 베드로에게 명령합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베드로가 대답합니 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 습니다] 이런 대화가 세 번이나 반복된 후 환상은 그칩니다. 베드로가 부정한 음식을 세 번씩이나 하나님의 명령을 부인하면서도 먹지 아니하려 하였다는 사실은 부정한 새인 까마귀가 물어온 고기 역시 먹지 아니하려 하였을 확률이 상당히 높다는 사실을 시사하 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베드로가 부정한 이방인에게 세례를 주고 복음을 선포함으로 놀라운 전도의 역사가 나타났듯이 엘리야가 부정한 새 까마귀가 날라 온 음식을 먹었기에 결국 아합왕의 모든 사탄적 역사를 이기고 야훼 하나님을 이스라엘 의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즈음 같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우리는 여러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 게 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결단과 선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적으로 생각하여 가장 최선의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비록 인간적으로는 최악의 선택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선택을 진정 가치있는 선택으로 만들고 우리의 인생을 이 모든 어려움으로부터 승리하는 성공의 삶으로 이끌 것입니다.
조지 애틀리 라는 영국의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꿈은 중앙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헌신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그의 꿈이 이루어져 중앙아프리카 선교사로 파송받았습니다.
그러나 언어, 문화, 기후, 음식, 배타성등 많은 장벽이 그의 선교에 커다란 장애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숙소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원주민의 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손에는 아주 성능이 좋고 실탄이 여러 발 장전된 장총이 있었습니다. 반사적으로 장총을 들어 원주민을 향해 겨누었던 그는 조용히 총을 땅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원주민들이 쏜 화살과 던진 창을 온몸으로 그대로 받았습니다. 그의 주검앞에 놓여있는 총 속에 실탄이 가득 장전된 것을 발견한 원주민 추장은 자신이 죽음으로서 원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으려 노력하며 죽어간 조지 애틀리의 고결한 뜻을 기리며 온 부족이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인간적으로 보면 바보같고 철저히 손해보는 최악의 선택인 것 같았지만 조지 애틀 리의 선택은 결국 중앙아프리카 선교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최악의 선택같 아 보이지만 하나님의 뜻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믿음이야 말로 가장 좋은 열매를 맺는 최 선의 선택이 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섭리하심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확신 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셨던 모든 일들은 한결같 이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선하고 복되게 만들기 위함이셨습니다. 외아들을 아낌없이 죽음으로 내 모신 것도 바로 우리를 생명과 선으로 이끄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성령을 우 리에게 또 다른 보혜사로 보내주신 것 역시 우리를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드시기 위 함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를 향하신 모든 사역이 하나도 남김없이 바로 나를 굳게 세우 고, 나에게 복주시며, 내가 하나님 앞에 더욱 가까이 가게 하시고, 나로하여금 하나님 주신 길에서 떠나지 않게 하시기 위한 모든 사역 즉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역사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훈목사님은 이렇게 고백하고있습니다.
할 수 있으면 많이 걷는 것이 좋다는 말을 듣고 반나절, 한나절을 걸어다녔던 내 유년의 가난이 은총이었음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될 수있으면 섬유질 음식으로 식단을 개선하는 것이 좋다는 말을 듣고 고구마 서너개 무잎 물김치로 점심을 대신했던 내 유년의 배고픔이 은총이었음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언제나 나누고 살아야 건강에 좋다는 말을 듣고 눈깔사탕 나눠물고 차마 깨물지 못한 눈물같은 세월이 은총이었음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진정 모든 아픔과 고통 그리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모든 기억들이 세월을 흘려 보낸후 생각해 보면 그보다 더 큰 은총이 없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살 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왜 하필이면 까마귀입니까?,
왜 하필이면 그 방법입니까?
내가 원하는 방법대로는 해 주실 수 없나요?
그러나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앞에서 오히려 지금의 이 고통의 방법, 인내의 방법이 결국 나를 진정한 성공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유인의 모습으로 로마에 가기를 너무나도 사모했습니다. 그러나 매번 하나님께서는 그의 길을 막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자유인의 몸이 아닌 죄수의 모습으로 비로서 로마의 입성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황제에게 상소하는 죄 인의 몸이었기에 바울의 입을 통해 나오는 모든 증거가 로마의 귀족들에게 전해질 수 있 었고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을 수 있었으며 결국 기독교를 전세계 땅끝까지 전파하는 귀중한 계기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만일 바울이 원했던 대로 자유인의 모습으로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했다면 어땠을까요?
몇몇 일반인들에게만 복음이 전파되었을 것이요 단지 로마교회 하나를 개척하는데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방법이 아닌 바로 하나님의 방법을 통해 더욱 크고 놀라 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감사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어려움 과 고통이 오히려 나를 승리하는 삶으로 이끄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과정, 연단과정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 보며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안고있는 가장 큰 문제는 I.M.F 사태가 아니라, I.M.F사태가 우리의 삶 을 극도로 어렵게 만들 것이라는 우리의 부정적인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아 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진정 하찮은 작은 일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쉽게 이루어 집니다.
그러나 하나 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손에든 떡을 입으로 가져가는 일보다 쉬운 일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겨 야 합니다.
매 순간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과 자비 그리고 감사의 삶으로 이끌어가야 할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이들, 마음의 응어리, 나의 선입관, 이런 모든 것들을 다 떨쳐버리고 오직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눈으로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가 원하는 방법이 아니라 할지라도 아니 내가 보기에는 최악의 선택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아멘으로 순종합시다.
하나님 왜 이렇게 안해주세요.
하나님 왜 하필이면 이 방법입니까?
하나님 왜 하필이면 까마귀입니까?가 아닙니다.
주님 주님께는 내가 깨닫지 못하는 더욱 소중한 방법이 있으시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귀한 뜻을 제가 압니다.
주님 이 부족한 삶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만 이끄소서.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맡기는 삶 이 될 때에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그 어떤 장애물도 고통도 사탄의 역사도 결코 우리 를 쓰러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오 주님 까마귀라도 좋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한것이라 도 상관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이 몸과 삶을 통해 이루어 지게 하옵소서.
출처 한서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