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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신자와 초보 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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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 나눔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장코뱅 추천 3 조회 373 24.06.29 08:29 댓글 27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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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4.06.29 08:41

    첫댓글 우리는 흔히 칭의의 결과는 성화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야고보서는 칭의의 결과인 성화에 대해 강조하는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아래에 비전 성경의 햐설을 올립니다.

  • 24.06.29 09:39

    네, 야고보서를 오해하면 안 되겠습니다.

  • 작성자 24.06.29 08:45

    구원 받으려면, 행해야 하나 믿어야 하나?

    신약성경을 읽다보면 "야고보와 바울은 구원에 대한 견해가 서로 달랐었나?"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바울은 믿음을, 야고보는 행함을 주장하여, 마치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과 야고보는 '구원'이라는 동전의 양면 중 어느 한 면을 부각시켜 주장했을 뿐이다. 바울은 예수 믿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율법이나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편지를 보냈기에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강조했어야 했다(갈라디아서).

    이와 달리 야고보는 흩어진 유대 신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당시 그들은 로마 제국을 포함한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고보는 이미 진리를 알고 있던 교인들에게 환난 가운데 인내하며 사랑과 믿음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강조하는 글을 써 보냈던 것이다.

    "야고보서", <비전성경>, p.373.

  • 24.06.29 09:42

    칭의의 대한 강조와 성화에 대한 강조 정도로 보면 되겠습니다. 두 복음의 책 모두가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할 것입니다.

  • 24.06.29 14:12

    @노베 네, 공감합니다.

  • 작성자 24.06.29 08:54

    C. 회개하라는 명령 (약4:4~10).

    야고보는 놀랍게 어조를 바꾸어, 자신이 관례적으로 쓰던 “나의 형제자매들"이라는 말을 버리고, 독자들을 ”간음한 여인들아"라고 부른다. 이 변화는 초점이 바뀐다는 표시다. 야고보는 지금까지 시기의 죄와 그 결과로 생긴 다툼에 대해 분석했다. 이제 야고보는 그 죄에서 철저히 떠날 것을 요구한다. 헬라어서, "간음한 백성"(개역개정에는 "간음한 여인"-옮긴이)은 여성형이다. 야고보는 구약의 전통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자신의 택하신 사랑을 통해 생겨나게 하신 친밀한 영적 연합 가운데 있는 '여호와의 신부"로 묘사된다(사 54:1~6; 렘 2:2; 그리고 특히 호 1:1~3:5를 보라). 그렇다면 세상과 시시덕거리는 것은 여호와께 대해 영적 간음의 죄를 짓는 것이다(4:4). 5절 해석에 단서를 제공하는 것은 이런 배경이다. 많은 역본들(NIV 1984, HCSB, NET, NLT)은 성경의 인용문을 시기하기 좋아하는 인간 정신의 경향에 대한 경고로 본다. 이런 해석에 대해서는 상당히 타당한 이유가 있다. 야고보가 여기에서 사용하는 '시기' 또는 '질투'라는 말은

  • 작성자 24.06.29 08:54

    말은 다른 곳에서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닌다. 하지만 전후 문맥을 보면, 야고보가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질투에 관한 구약의 가르침을 언급하고 있을 것임을 시사한다(NIV, ESV, NRSV를 보라).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참고, 출 20:5; 34:14; 슥 8:2)는 것이다. 세상의 유혹에 굴복하는 우리의 경향(4:4)은 너무 심각하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를 요구하시기 때문이다(4:5).

    하지만 하나님의 요구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인 반면, 하나님의 은혜는 그 필요를 충분히 채우고도 남는다. 잠언 3장 34절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약속한다(4:6).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4:7)해야 하며 "주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4:10)어야 한다. 이 명령들은 7~9절에 나오는 세 쌍의 명령을 형성한다. 첫째, 우리는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 각각에는 약속이 수반된다. 마귀는 피할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하실 것이다(또한 벧전 5:5~9를 보라. 이것은 약 4:6~10과 유사한 점이 매우 많다). 둘째, 구약 제사장들처럼

  • 작성자 24.06.29 08:55

    우리는 "손을 깨끗이"해야 한다. 외적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그런 죄를 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내적 태도 역시 올바르게 가져야 한다. 즉 우리 마음이 순결하게 되어야 한다. 셋째, 구약 선지자들의 말을 사용해(욜 2:12를 보라), 야고보는 우리를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죄에 대해 깊고 진지하게 애통하라고 명한다(4:9). 참된 기독교적 기쁨은 죄를 무시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을 경험하는 것에서 온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죄에서 참으로 돌아서고 용서를 찾으려면, 우리 죄의 심각한 결과들을 보아야 한다. 예수님도 비슷하게 “애통하는 자"(5:4)에게 복을 선포하셨으며,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5)라고 경고하셨다.

    『베이커 성경주석: 신약편』, pp.650~651.

  • 24.06.29 09:48

    @장코뱅 님의 논조와 비슷한 내용이 나오네요. 주석의 내용도 함께 잘 참고하겠습니다.

  • 작성자 24.06.29 09:11

    <약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이에 해당하는 헬헤어 ‘모이칼리데스'는 여성 명사로 문자적으로 간음하는 여자들'을 가리키나 실제로는 구약성경에서 자주 나타나듯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영적인 불충실성을 나타낸다(렘31:32; 젤 23:45: 호 2:2-5: 말 3:5, Burdick, Adamson). 야고보는 이 비유를 통해 수신자들의 육신에 속한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Gibson, Tasker, Manton).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야고보는 본문에서 ’세상'과 '하나님', '벗'과 '원수'를 대조시키고 있다.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영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사람이 세상과 벗 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고 원수 관계를 맺는 것이다. 야고보는 수사학적인 질문을 통해 수신자들의 세상과 벗 됨을 지적함으로 그들이 '쾌락'과 정욕에 사로잡혀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 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불레데‘는 ...할 작정이다'라는 의미를 가진 '불로마이' 의 단순과거로 무엇을 하려고 계획한 자가 정해진 계획대로 이루었음을 의미한다

  • 작성자 24.06.29 09:13

    (딤전 2:8; 5:14; 딛 3:8, Burdick, Robertson, Manton). 이것은 하나님께 불충성스런 자들이 저들의 계획된 목적에 따라 '고의적으로 세상과 짝한 것을 뜻한다. 한편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는 말은 사람들이 스스로 세상과 벗 되는 것이 결국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결과로 나타나며 하나님과 원수 된 책임이 인간에게 있음을 시사한다(Manton, Reicke).

    <4: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본문은 해석상 두 가지 문제를 갖고 있다. ① 본문에 나타난 인용문의 근거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 혹자는 70인역의 창 6:3-7과 출 20:5이라고 주장한다(Mayor, Knowling, Ropes). ㉡ 혹자는 신약성경의 마 6:24:롬 8:7;요일 2:15 이라고 주장한다(de Wette), ㉢ 혹자는 상실된 히브리 복음서나 외경 가운데서 인용한 것으로 주장한다(Resch, Moffatt, Spitta, Debelius). ㉣ 혹자는 축자적인 인용이 아니기 때문에 출 20:5:34:14 그리고

  • 작성자 24.06.29 09:12

    슥 8:2이라고 주장한다(Burclick, Moo). 이러한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② '성령'의 헬라어 '프뉴마'에 대한 해석의 차이이다. ‘프뉴마'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① 인간의 영(NIV, NEB, GNB, Phillips). ㉡ 성령(JB, Martin, Aclamson, Burclick). 전자의 견해는 '시기하기'에 해당하는 헬라어'프노돈’의 사용례에서 비롯된 해석이다. 즉 '프도논'은 하나님의 행위를 수식하는데 사용되지 않으며(Mitton, Mayor) '선한 행위'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Trench) 본문에서 '프노도‘는 이 수식하는 '프뉴마'는 하나님께서 창조 때에 인간에게 불어넣어 주신 '인간의 영'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노돈'은 '젤로스'('열심', '시기')와 혼용되어 하나님의 질투'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며(I Macc 8:16; 1 Clem. 3.2;4.7;5.2, Martin, Mussner) 개역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에'('혹은')가 헬라어 본문에는 삽입되어 있어 본절과 앞절이 연관된 것임을 나타낸다. 따라서 '프뉴마'는 '성령'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 작성자 24.06.29 09:13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혹자는 본문이 5절과 연속된 구문이라고 주장하나(NIV, Manton) 5절과는 대조를 이루는 독립된 문장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Burdick, Martin, Moo). 야고보는 앞에서 언급한 내용 즉 하나님께서 질투하기까지 자기 백성을 사랑하셔서 그 요구하시는 바가 엄격할지라도 또한 더욱 큰 은혜를 주셔서 백성들의 결점을 보완하신다는 점을 들어 수신자들을 위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본문은 잠3:34(LXX)의 인용이다. 본문에서의 '교만이 잠3:34에서는 '거만으로 언급되어 있다. '교만'은 남을 비웃거나 업신여기며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며(Manton) '겸손'은 자신의 부족을 인식하여 영적인 통회痛悔)를 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의미한다(Tasker). 야고보는 인용문을 통해 하나님에게서 떠나 자신만을 인정하고 자기 만족을 위해 '쾌락'을 추구하는 '교만한 자'와 자신의 부족을 인식하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순종하는 '겸손한 자를 대조시켜서 수신자들에게 '쾌락을 추구하는 자'와

  • 작성자 24.06.29 09:14

    같이 되어 하나님과 원수가 되지 말고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며 순종하는 자가 될 것을 권면한다(7절).

    『뉴호쿠마주석: 신약편』, pp.2807~2808.

  • 24.06.29 10:23

    @장코뱅 뉴호크마 주석에는 성경 원어의 의미가 나와서 나름 더 있어 보이고 내용도 더 풍성한 것 같습니다.

  • 작성자 24.06.29 09:31

    저는 성경을 묵상한 후 글로 적을 때 주석을 베끼지 않습니다. 글로 다 작성을 한 후에야 저의 글에 오류나 어거지가 없었는지? 확인합니다.

    아울러 독자들의 이해를 더 돕기 위해 특히 주석이 없는 분들을 위해서 주석을 타붙하여 올립니다.

    그러므로 바쁘신 분들은 댓글을 읽지 않고 포스팅 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 24.06.29 09:58

    네, 알겠습니다.

  • 24.06.29 09:59

    야고보서를 통해서 은혜를 받고 묵상을 읽으며 더 음미하고 주석을 통해서 심화학습을 하니 금상첨화인 것 같습니다.

  • 작성자 24.06.29 12:30

    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 24.06.29 11:59

    야고보가 이 서신을 기록할 당시에 로마 제국에는 선진화 된 스포츠와 오락거리들이 제국 내에 흩어진 유대인들에게도 유입되어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벤허에도 나오듯이 마차경주대회도 있고, 레슬링이나 올림픽 육상 종목들 등등과 각종 축제들로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고대에도 그랬는데 고도로 문명화 된 현대는 종류도 다 알 수 없이 현혹하는 오락이 너무 발달해 있죠.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있어 오감에 대한 욕구들을 충족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규모 있고 건전하고 올바른 사회생활을 위해서는 절제가 필요하죠. 무엇이든 지나침은 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해롭게 하기 때문이죠.
    오늘 말씀은 현대 기독교인들의 취약점을 다루고 처방전을 써주신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도 신자들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게 될까봐 두렵다고 한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세마포를 입고 신랑을 위해 단장하고 기다려야 할텐데 여기에 미달하여 도태되지 않을지 성찰해보는 기회를 주십니다.
    세상이 화려하고 요란할수록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께 더욱 향해야겠다는 것을 느낍니다.

  • 작성자 24.06.29 12:30

    사실 뉴스에도 언론 플레이가 많고 가요 순위도 조작이 많습니다. 청승 맞은 트로트와 킬링 타임 연속극에 노인과 소외계층이 중독되어 사리분별이 희미해지는 것도 봅니다.

    우리는 정신과 마음과 영혼을 가다듬고 하나님을 가까이해야만 하겠습니다.

  • 24.06.29 14:14

    @장코뱅 네, 두 분 말씀에 공감합니다.

  • 24.06.29 12:10

    사회가 고도로 문명화되니 인간 영혼은 더 병들기 좋은 환경이 되고 있네요.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으로 자기 마음을 잘 붙들어야지 안 그러고 하나 둘 동조하고 기웃거리다간 휩쓸려 떠내려갈 것 같아요. 가독교인들도 그럴싸한 논리에 속기가 쉽죠.
    중독거리가 왜 이리도 많은지...컴퓨터 게임, 오락, 쇼핑, 스포츠(운동), 마약과 술, 니코틴, 탄수화물, 음식, 유튜브, 인터넷...

  • 작성자 24.06.29 12:27

    네, 좋은 예사입니다.

    배우자를 과하게 사랑해도 중독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음녀를 과하게 좋아하면 그게 섹스 중독이고 그 비유와 논리는 하나님께 배은망덕한 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 24.06.29 12:16

    신약의 성도들은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모두가 거룩한 세마포 옷을 입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 즉 의로운 행실로써 믿음을 증명해야 할 존재들이라는 것을 명심합니다. 아멘 🙏 😊

  • 작성자 24.06.29 12:25

    성경 본문의 핵심을 확 집어 주셨습니다. 공감하고 댓글에 감사합니다.

  • 24.06.29 14:17

    아멘!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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