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약 4:4∼10
제목: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 기독교는 세상과 벗이 되지 않고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신앙입니다.
약4: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하면서도 세상과 벗이 되고 자신의 욕심을 따라서 사는 것은 신앙적으로 간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약4:4의 간음한 여인들은 문자적으로 성별로 여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간음하고 세상과 벗하는 자들 모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과거 하나님의 신부였는데 여자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남자 포함)가 하나님의 신부로 여인으로 비유되고 의인화(擬人化) 된 것입니다.
사1:21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 렘3:6 요시야 왕 때에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배역한 이스라엘이 행한 바를 보았느냐 그가 모든 높은 산에 오르며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서 행음하였도다 호1:2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
위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 신실한 것의 반대는 행음이고(사1:21) 하나님께 배역한 것이 행음이며(렘3:6)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음란함(호1:2)입니다.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에게 적용된 위 논리는 신약 교회에도 적용됩니다.
고후11:2.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3.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계19:7.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계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
그리스도인의 남편은 그리스도이고(고후11:2) 어린 양과 혼인한 신부가 성도이며(계19:7) 새 예루살렘이 그리스도의 신부인데요(계21:2). 이 신부의 세마포는 정결함이며 성도의 옳은 행실이고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모습이 간음한 것이고 이 간음한 여인 같은 자들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약4:4)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 구약 성경에는 질투하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신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
하나님은 속성 상 지극히 거룩하신 영이시므로 일체의 죄악된 것에 대해서 소멸하는 불이시며 하나님의 백성이 간음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시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신실하고 성결하며 정결한 처녀이고 성도의 옳은 행실로 만든 세마포 옷을 입고 단장한 성도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사랑과 복으로 대하시지만 그렇지 않고 간음한 여인들에 대해서는 원수로 취급하시는 논리가, 구약의 율법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약의 복음에도 여전히 나오는 것입니다. 성도의 옳은 행실은 현대 구원의 서정에 나오는 ‘칭의의 결과인 성화’에 딱 맞는 표현입니다. 세마포라는 현대인의 일상생활에서 잘 쓰지 않는 단어는 개역개정 기준으로 성경에 34회 등장을 합니다. 구약과 신약에 고루 분포되어 있는데요. 린넨(linen)이라는 물리적인 옷감의 의미를 넘어서 세마포의 의미를 살펴봅니다. 세마포는 쉽게 보면 ‘모시’입니다. 새번역 등에는 ‘거룩한 속옷’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6:4 (공동번역) 그는 맨살에 모시잠방이를 걸치고 모시로 만든 거룩한 속옷을 입어야 한다. 새번역) 그는 모시로 만든 거룩한 속옷을 입고, 그 안에는 맨살에다 모시로 만든 홑옷을 입어야 한다. |
잠방이는 가랑이가 무릎까지 내려오도록 짧게 만든 남자용 홑바지(Daum 국어사전)입니다. 모시잠방이인데 거룩한 ‘속옷’이라는 것에 착안해야 합니다. 속옷은 거룩한데 겉옷이 불결한 것은 그나마 나은데 겉옷은 거룩한데 속옷이 불결하다면 그것이 바로 위선(僞善)이고 위장(僞裝)입니다.
● 성경에 나온 세마포의 용례들 중 옷감이라는 물리적 의미는 차치하고 신앙적 의미를 찾는다면, 세마포는 제사장과 참 성도가 입는 옷입니다. 신약교회의 성도들은 모두 제사장이라는 점에서 세마포는 참 성도들이 입는 옷입니다. 아래 말씀을 보면 택함 받은 성도는 제사장들입니다.
베드로전서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
왕 같은 제사장은 세마포 옷을 입어야 합니다.
레위기 16:4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속바지를 몸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그의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 |
세마포라는 옷만 입는다고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세마포를 입기 전에 몸을 먼저 깨끗하게 씻어야 합니다. 이는 성도의 성화를 의미합니다. 세마포로 된 옷을 입는 궁극적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성결해지는 것입니다.
출39:28.세마포로 두건을 짓고 세마포로 빛난 관을 만들고 가는 베 실로 짜서 세마포 속바지들을 만들고 29.가는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수놓아 띠를 만들었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더라 30.그들이 또 순금으로 거룩한 패를 만들고 도장을 새김 같이 그 위에 ‘여호와께 성결’이라 새기고 |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성결해야 하고 신약교회의 참 성도들은 그냥 제사장이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들로서 성화되어 가야합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인(행11:26, 벧전4:16)이며 그리스도의 신부들인데요.
계19:7.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며 구원의 서정에서 성화(sanctification)라고 앞에서 말씀드렸는데요. 세마포를 입는 것은 그 이전에 이미 먼저 참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며, 이미 먼저 그리스도의 신부로 예정되었다는 것이고, 성도가 현재 아내답게 자신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구약 성경의 질투하는 하나님은 신약성경의 오늘 본문에 시기하는 하나님으로 표현되었다고 보아도 큰 무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약4:5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
위 말씀의 번역들을 읽으면 완전하게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공동번역)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심어주신 영혼을 질투하실 만큼 사랑하신다.” 하는 성서 말씀이 공연한 말씀인 줄 압니까? 새번역)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그 영을 질투하실 정도로 그리워하신다”라는 성경 말씀을 여러분은 헛된 것으로 생각합니까? 현대인의성경) 하나님이 우리 속에 살게 하신 성령님은 우리를 질투하시기까지 사랑하신다는 성경 말씀을 여러분은 하찮은 말로 생각하십니까? NIV) … the spirit he caused to live in us envies intensely?(그가 우리 가운데 살게 하신 영이 강하게 시기한다) IVP 성경주석) …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살게 하신 그 영을 하나님이 시기하면서 갈망하신다(God jealously longs for the spirit he made to live in us) |
그러나 위 번역들이 공통되게 일치하는 것은, 하나님이 성도들을 질투하고(=시기하고) 사랑한다(=그리워하다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가지시는 질투는 극진하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성령의 단어들을 헷갈려하며 난해하게 생각하기 보다는, 이를테면 '성령께서 시기하실 정도로‘ 하나님이 성도들을 사랑하신다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심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면 됩니다.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로 보는 측면에서 전환하여 믿음의 대상자(하나님)와 믿는 주체(성도)의 관계로 보면 아래 말씀과 같습니다.
약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
은혜를 받는 자 성도는 은혜를 내려주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참 믿음의 속성과 태도는 겸손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간음한 자가 하나님의원수가 되듯이(약4:4)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 배척을 받고, 푸대접을 받는 수준을 넘어서, 하나님의 대적(對敵)이 됩니다(약4:6).
현대인의성경) 약4:6 더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고 쓰여 있습니다. |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고 교만한 자의 우두머리와 표상은 마귀였습니다.
약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
그러한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은 참 믿음입니다. 참 믿음은 마귀를 대적하고 세상과 벗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신앙입니다.
약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신앙적으로 간음하지 않고 성결한 신부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혹시 성도가 일시적으로 죄를 지었을지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성결하게 되어 성화의 삶을 살면 하나님은 귀히 여기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완전한 불신자가 회심(개종)하고 믿음의 삶을 시작해도 하나님은 기쁘게 받아주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이미 중생∙회심∙칭의된 성도가 마음을 성결하게 하게 할 때와 불신자가 개종하고 마음을 성결하게 할 때 모두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슬퍼하며 애통하며 우는 것, 즉 회개입니다.
약4:9.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
웃으면서 회개하는 것은 이상합니다. 회개할 때 보통으로 정상적인 감정은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 것이고, 이러한 신앙 감정에서 나오는 신앙 태도는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것입니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은 자에게 하나님은 즐거움을 주시고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은 위로 북돋아 주시고 격려해 주실 것입니다. 이 묵상을 읽은 우리 모두에게 그러한 축복과 은혜가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첫댓글 우리는 흔히 칭의의 결과는 성화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야고보서는 칭의의 결과인 성화에 대해 강조하는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아래에 비전 성경의 햐설을 올립니다.
네, 야고보서를 오해하면 안 되겠습니다.
구원 받으려면, 행해야 하나 믿어야 하나?
신약성경을 읽다보면 "야고보와 바울은 구원에 대한 견해가 서로 달랐었나?"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바울은 믿음을, 야고보는 행함을 주장하여, 마치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과 야고보는 '구원'이라는 동전의 양면 중 어느 한 면을 부각시켜 주장했을 뿐이다. 바울은 예수 믿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율법이나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편지를 보냈기에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강조했어야 했다(갈라디아서).
이와 달리 야고보는 흩어진 유대 신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당시 그들은 로마 제국을 포함한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고보는 이미 진리를 알고 있던 교인들에게 환난 가운데 인내하며 사랑과 믿음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강조하는 글을 써 보냈던 것이다.
"야고보서", <비전성경>, p.373.
칭의의 대한 강조와 성화에 대한 강조 정도로 보면 되겠습니다. 두 복음의 책 모두가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할 것입니다.
@노베 네, 공감합니다.
C. 회개하라는 명령 (약4:4~10).
야고보는 놀랍게 어조를 바꾸어, 자신이 관례적으로 쓰던 “나의 형제자매들"이라는 말을 버리고, 독자들을 ”간음한 여인들아"라고 부른다. 이 변화는 초점이 바뀐다는 표시다. 야고보는 지금까지 시기의 죄와 그 결과로 생긴 다툼에 대해 분석했다. 이제 야고보는 그 죄에서 철저히 떠날 것을 요구한다. 헬라어서, "간음한 백성"(개역개정에는 "간음한 여인"-옮긴이)은 여성형이다. 야고보는 구약의 전통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자신의 택하신 사랑을 통해 생겨나게 하신 친밀한 영적 연합 가운데 있는 '여호와의 신부"로 묘사된다(사 54:1~6; 렘 2:2; 그리고 특히 호 1:1~3:5를 보라). 그렇다면 세상과 시시덕거리는 것은 여호와께 대해 영적 간음의 죄를 짓는 것이다(4:4). 5절 해석에 단서를 제공하는 것은 이런 배경이다. 많은 역본들(NIV 1984, HCSB, NET, NLT)은 성경의 인용문을 시기하기 좋아하는 인간 정신의 경향에 대한 경고로 본다. 이런 해석에 대해서는 상당히 타당한 이유가 있다. 야고보가 여기에서 사용하는 '시기' 또는 '질투'라는 말은
말은 다른 곳에서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닌다. 하지만 전후 문맥을 보면, 야고보가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질투에 관한 구약의 가르침을 언급하고 있을 것임을 시사한다(NIV, ESV, NRSV를 보라).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참고, 출 20:5; 34:14; 슥 8:2)는 것이다. 세상의 유혹에 굴복하는 우리의 경향(4:4)은 너무 심각하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를 요구하시기 때문이다(4:5).
하지만 하나님의 요구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인 반면, 하나님의 은혜는 그 필요를 충분히 채우고도 남는다. 잠언 3장 34절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약속한다(4:6).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4:7)해야 하며 "주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4:10)어야 한다. 이 명령들은 7~9절에 나오는 세 쌍의 명령을 형성한다. 첫째, 우리는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 각각에는 약속이 수반된다. 마귀는 피할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하실 것이다(또한 벧전 5:5~9를 보라. 이것은 약 4:6~10과 유사한 점이 매우 많다). 둘째, 구약 제사장들처럼
우리는 "손을 깨끗이"해야 한다. 외적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그런 죄를 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내적 태도 역시 올바르게 가져야 한다. 즉 우리 마음이 순결하게 되어야 한다. 셋째, 구약 선지자들의 말을 사용해(욜 2:12를 보라), 야고보는 우리를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죄에 대해 깊고 진지하게 애통하라고 명한다(4:9). 참된 기독교적 기쁨은 죄를 무시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을 경험하는 것에서 온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죄에서 참으로 돌아서고 용서를 찾으려면, 우리 죄의 심각한 결과들을 보아야 한다. 예수님도 비슷하게 “애통하는 자"(5:4)에게 복을 선포하셨으며,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5)라고 경고하셨다.
『베이커 성경주석: 신약편』, pp.650~651.
@장코뱅 님의 논조와 비슷한 내용이 나오네요. 주석의 내용도 함께 잘 참고하겠습니다.
<약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이에 해당하는 헬헤어 ‘모이칼리데스'는 여성 명사로 문자적으로 간음하는 여자들'을 가리키나 실제로는 구약성경에서 자주 나타나듯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영적인 불충실성을 나타낸다(렘31:32; 젤 23:45: 호 2:2-5: 말 3:5, Burdick, Adamson). 야고보는 이 비유를 통해 수신자들의 육신에 속한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Gibson, Tasker, Manton).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야고보는 본문에서 ’세상'과 '하나님', '벗'과 '원수'를 대조시키고 있다.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영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사람이 세상과 벗 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고 원수 관계를 맺는 것이다. 야고보는 수사학적인 질문을 통해 수신자들의 세상과 벗 됨을 지적함으로 그들이 '쾌락'과 정욕에 사로잡혀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 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불레데‘는 ...할 작정이다'라는 의미를 가진 '불로마이' 의 단순과거로 무엇을 하려고 계획한 자가 정해진 계획대로 이루었음을 의미한다
(딤전 2:8; 5:14; 딛 3:8, Burdick, Robertson, Manton). 이것은 하나님께 불충성스런 자들이 저들의 계획된 목적에 따라 '고의적으로 세상과 짝한 것을 뜻한다. 한편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는 말은 사람들이 스스로 세상과 벗 되는 것이 결국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결과로 나타나며 하나님과 원수 된 책임이 인간에게 있음을 시사한다(Manton, Reicke).
<4: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본문은 해석상 두 가지 문제를 갖고 있다. ① 본문에 나타난 인용문의 근거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 혹자는 70인역의 창 6:3-7과 출 20:5이라고 주장한다(Mayor, Knowling, Ropes). ㉡ 혹자는 신약성경의 마 6:24:롬 8:7;요일 2:15 이라고 주장한다(de Wette), ㉢ 혹자는 상실된 히브리 복음서나 외경 가운데서 인용한 것으로 주장한다(Resch, Moffatt, Spitta, Debelius). ㉣ 혹자는 축자적인 인용이 아니기 때문에 출 20:5:34:14 그리고
슥 8:2이라고 주장한다(Burclick, Moo). 이러한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② '성령'의 헬라어 '프뉴마'에 대한 해석의 차이이다. ‘프뉴마'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① 인간의 영(NIV, NEB, GNB, Phillips). ㉡ 성령(JB, Martin, Aclamson, Burclick). 전자의 견해는 '시기하기'에 해당하는 헬라어'프노돈’의 사용례에서 비롯된 해석이다. 즉 '프도논'은 하나님의 행위를 수식하는데 사용되지 않으며(Mitton, Mayor) '선한 행위'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Trench) 본문에서 '프노도‘는 이 수식하는 '프뉴마'는 하나님께서 창조 때에 인간에게 불어넣어 주신 '인간의 영'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노돈'은 '젤로스'('열심', '시기')와 혼용되어 하나님의 질투'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며(I Macc 8:16; 1 Clem. 3.2;4.7;5.2, Martin, Mussner) 개역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에'('혹은')가 헬라어 본문에는 삽입되어 있어 본절과 앞절이 연관된 것임을 나타낸다. 따라서 '프뉴마'는 '성령'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혹자는 본문이 5절과 연속된 구문이라고 주장하나(NIV, Manton) 5절과는 대조를 이루는 독립된 문장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Burdick, Martin, Moo). 야고보는 앞에서 언급한 내용 즉 하나님께서 질투하기까지 자기 백성을 사랑하셔서 그 요구하시는 바가 엄격할지라도 또한 더욱 큰 은혜를 주셔서 백성들의 결점을 보완하신다는 점을 들어 수신자들을 위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본문은 잠3:34(LXX)의 인용이다. 본문에서의 '교만이 잠3:34에서는 '거만으로 언급되어 있다. '교만'은 남을 비웃거나 업신여기며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며(Manton) '겸손'은 자신의 부족을 인식하여 영적인 통회痛悔)를 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의미한다(Tasker). 야고보는 인용문을 통해 하나님에게서 떠나 자신만을 인정하고 자기 만족을 위해 '쾌락'을 추구하는 '교만한 자'와 자신의 부족을 인식하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순종하는 '겸손한 자를 대조시켜서 수신자들에게 '쾌락을 추구하는 자'와
같이 되어 하나님과 원수가 되지 말고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며 순종하는 자가 될 것을 권면한다(7절).
『뉴호쿠마주석: 신약편』, pp.2807~2808.
@장코뱅 뉴호크마 주석에는 성경 원어의 의미가 나와서 나름 더 있어 보이고 내용도 더 풍성한 것 같습니다.
저는 성경을 묵상한 후 글로 적을 때 주석을 베끼지 않습니다. 글로 다 작성을 한 후에야 저의 글에 오류나 어거지가 없었는지? 확인합니다.
아울러 독자들의 이해를 더 돕기 위해 특히 주석이 없는 분들을 위해서 주석을 타붙하여 올립니다.
그러므로 바쁘신 분들은 댓글을 읽지 않고 포스팅 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야고보서를 통해서 은혜를 받고 묵상을 읽으며 더 음미하고 주석을 통해서 심화학습을 하니 금상첨화인 것 같습니다.
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야고보가 이 서신을 기록할 당시에 로마 제국에는 선진화 된 스포츠와 오락거리들이 제국 내에 흩어진 유대인들에게도 유입되어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벤허에도 나오듯이 마차경주대회도 있고, 레슬링이나 올림픽 육상 종목들 등등과 각종 축제들로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고대에도 그랬는데 고도로 문명화 된 현대는 종류도 다 알 수 없이 현혹하는 오락이 너무 발달해 있죠.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있어 오감에 대한 욕구들을 충족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규모 있고 건전하고 올바른 사회생활을 위해서는 절제가 필요하죠. 무엇이든 지나침은 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해롭게 하기 때문이죠.
오늘 말씀은 현대 기독교인들의 취약점을 다루고 처방전을 써주신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도 신자들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게 될까봐 두렵다고 한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세마포를 입고 신랑을 위해 단장하고 기다려야 할텐데 여기에 미달하여 도태되지 않을지 성찰해보는 기회를 주십니다.
세상이 화려하고 요란할수록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께 더욱 향해야겠다는 것을 느낍니다.
사실 뉴스에도 언론 플레이가 많고 가요 순위도 조작이 많습니다. 청승 맞은 트로트와 킬링 타임 연속극에 노인과 소외계층이 중독되어 사리분별이 희미해지는 것도 봅니다.
우리는 정신과 마음과 영혼을 가다듬고 하나님을 가까이해야만 하겠습니다.
@장코뱅 네, 두 분 말씀에 공감합니다.
사회가 고도로 문명화되니 인간 영혼은 더 병들기 좋은 환경이 되고 있네요.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으로 자기 마음을 잘 붙들어야지 안 그러고 하나 둘 동조하고 기웃거리다간 휩쓸려 떠내려갈 것 같아요. 가독교인들도 그럴싸한 논리에 속기가 쉽죠.
중독거리가 왜 이리도 많은지...컴퓨터 게임, 오락, 쇼핑, 스포츠(운동), 마약과 술, 니코틴, 탄수화물, 음식, 유튜브, 인터넷...
네, 좋은 예사입니다.
배우자를 과하게 사랑해도 중독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음녀를 과하게 좋아하면 그게 섹스 중독이고 그 비유와 논리는 하나님께 배은망덕한 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모두가 거룩한 세마포 옷을 입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 즉 의로운 행실로써 믿음을 증명해야 할 존재들이라는 것을 명심합니다. 아멘 🙏 😊
성경 본문의 핵심을 확 집어 주셨습니다. 공감하고 댓글에 감사합니다.
아멘!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