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스포츠 기사 머릿말에 기자가 대구의 최용술선생님의 자택에 가서 최용술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기사를 쓴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한국합기도의 창시자 도주 최용술!!
최용술옹은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무술계에서는 젊은 날의 화려한 일화를 남기고 있는 인물이다. 160cm의 단구 에 여전히 짜랑짜랑한 목소리, 그리고 유난히 젊은 피부를 느끼 게 하는 그는 요즘도 술기시범을 통해 제자를 가르치며 노익장 을 과시하고 있다. 좀처럼 자기를 밝히려 들지 않는 최옹이 대구 자택을 찾아간 기자에게 과거를 들려 주었다.
최옹은 1903년 충북 황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는 일본명치 말년으로 일본인들이 서서히 조선 땅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의 고향도 예외는 아니어서 8살 무렵 일본인들이 동네에까지 들어와 장사를 벌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때 사귄 장사치가 일본인 구마모또 에아찌로 부부였다. 그를 귀엽게 본 이들 부부는 거의 1년 간을 같이 지내다시피 하여 정을 쏟아주었다. 더욱이 이들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어느 날 부부는 최용술님에게 연의 일종인 아메다마를 주면서 여행을 갔다오자고 말했다. 평소에 하루 이틀 같이 지내기 일쑤이어서 그는 아무 의심 없이 따라나섰다. 그 여행이 영영 부모를 잃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그가 모든 것을 알아챈 것은 일본 땅 시모노세끼 항에 닿고 주위사람들이 불쌍한 것을 유괴했다고 이들 부부에게 마구 욕을 퍼붓자 당황한 채 이들 부부마저 도망쳐 버렸다.
그 후로부터 1년 반가까이 그는 오사까 요꼬하마등을 전전하면서 거지나 다름없는 고아생활을 보내야했다. 1913년 여름 그는 여느 때처럼 공원벤치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인기척이 있어 눈을 떠보니 삿갓에 장삼을 입은 어느 노인이 지팡이로 턱을 이리저리 건드리며 살피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노인은 인력거를 불러서 태우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찾아 간곳은 경도시의 어느 절이었다. 그 노인은 오따나베 긴따로었다. 그는 긴따로노인의 손자들과 함께 여기서 2년을 보냈다. 노인은 그에게 그의 희망을 묻자 그는 즉시 칼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며칠 후 자그마하고 구부정한 사람이 그를 찾았는데 눈살이 얼마나 매서운지 쳐다보기조차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가 바로 그의 스승이된 다케다쇼오가꾸이며 다음날 그를 데리고 일본의 악산으로 유명한 신수 니이가따산으로 데리고갔다. 산등성이에 여남은 평의 정자가 있었다.
여기서 그는 무려 17년 간을 다케다쇼가꾸로 부터 합기도를 배우게 된다. 합기도의 3천8백가지 기술을 전수 받게 되는 것이다. 처음 3년 간은 밥과 빨래 심부름 등이 그의 차지였다. 그 후 14년은 한마디로 각고의 세월이었다. 처음 입산할 때는 모두6명이었지만 하산할 때는 스승과 그뿐이었다. 그의 나이 28세때였다
이때 일본합기회 합기도의 창시자인 우에시바 모리하사는 소오가쿠에게 입문하여 다케다쇼가꾸와 최용술님에게 합기도를 지도 받게된다. 하지만 그 후 스승이 우시에바에게 도주직을 넘기려하자 그는 한때 앙심을 품게된다.
하지만 이를 알아챈 스승은 그를 불러 "날 원망하고 있는 줄 알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이 내뒤를 잇는다면 너는 내명에 못산다. 대동아 전쟁은 일본이 진다. 그때 너는 고국으로 돌아가라! 그 길만이 네이름을 남기는 길이다"
그는 한때 북해도에서 광산입구의 도로확장공사를 맏은적이 있었다. 인부만도 2백50여명에 달했다. 어느 날 한국인인부와 일본인경찰간에 다툼이 벌어졌다. 소식을 들은 그는 민족의 자존심에 분통을 터뜨려 그만 경찰을 살해하고 말았다. 즉시 그는 체포되어 경찰서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발뒤꿈치에 구멍을 뚫어 거꾸로 매단 것이다. 그때의 그 상처는 그의 평생의 상처로 남아있었다. 당연히 사형감이었으나 천황궁등에 무술시범을 다니던 그의 공과가 그를 살려주었다.
일본이 전쟁에 패하자 당시 장관 고노이 시소가 그를 불렀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했다. 남자로서 전쟁에서 패했으니 이제 국민들의 기를 키워야겠다. 일본인이면 다 무술을 가르쳐주게 낳은 부모도 중요하지만 일본이 자네를 키웠으니 은혜를 잊지 말아주기를 바라네!"
그러나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곧 가산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34년만에야 해방된 고국 땅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이다. 42세때였다.
무작정 대구까지 도착한 그는 이곳에서도 그의 신비로운 무술에 대해서 금방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의 밑에는 정식무술을 배우려는 사람으로부터 깡패 건달까지 몰려들었다.
그가 처음으로 도장을 연 것은 시청옆 무덕관.... 모두 78명을 데리고 시작한 것이 오늘날의 합기도였다. 합기도가 창설된 것은 65년이었다.
최용술님은 말한다.
"모든 동양무술은 중국에서 태어나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합기도는 신라인에 의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궁중무술이 되었으며 검도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형이 이룩된 것이다. 나는 우리 전통의 무예를 다시 찾아온 것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의 도미키 교수는 "합기도는 신라의 삼랑원의광을 그 시조로 하여 막부의 미나모토가에 전한 후 이어서 다케다가에 남아 7대를 지난 다케다 소오가쿠에 전했다" 고 기록하고 있다.
다케다 소오가쿠의 또 다른 제자가 되었던 우에시바 모리하사는 독특한 일본합기도인 합기회 합기도의 창시자로 유명한데 현재의 일본합기도 2대도주 우에시바는 그의 아들로 일본합기도의 맥을 잇고 있다.
우에시바 모리하사를 가르쳤던 최용술님은 합기도의 창시도주가 돼 한국으로부터 전승된 전통합기도의 새로운 맥을 내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