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 文
「조론肇論」의 조자 肇字는 이 논서를 짓는 사람의 이름인데
그의 이름은 승조僧肇이다.그 시대에는 그를 조공肇公 이라고 호칭하였다.
論 은 승조가 자기의 견해를 수립한 논문이다.
이는 지은 사람으로서 논문의 명칭을 붙였으리라,
조공은 구마라집鳩摩羅什 문하에 뛰어난 제자였다.
그는 구마라집 불경을 번역했던 도량에서 모든경전을 한역漢譯하면서
오랫동안 구마라집 대사를 참례하고 불교의 실제모습 實相을 심오하게 통달하였다.
그 즈음엔 서역에서 건너온 불법의 경전이 매우희소하고 불교의 대의가 환하게 드러나지
못하였었다. 그 시대의 사람들으 <노장학>에서 말하는 <허무주의虛無主義>를
으뜸의 근간으로 여기고 이로써 불교의 의비를 담론하면서 각자
가기의 견해를 따라 종파를 수립하였다. 가령
晉나라의 도항道恒 은 「무심론無心論」을 저술
東晉의 도림道林 은 「卽色遊玄論」을
晉 의 죽법태竹法汰은 「본무론本無論」을
이들 모두의 견해는 有에 상대적인 無를 말하며
다들 단멸斷滅 의 空에 떨어 졌던 것이다.
조공의 대승의 도가 세상에 밝혀지지않는 것을 민망하게 여겼다,
그 때문에 불교가
현상로으로서의 「물불천론物不遷論」
본질론으로서의 「부진공론不眞空論」
이 두논문에 대한 인식론으로서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
인식의 결과론으로서의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을 지어
그들의 빗나간 집착을 타파 하였다.
論이란, 빈賓 과 주主를 가설정으로 수립하여
문제를 따지고, 분석하고,의론하고 인식하여
지실한 이치를 발현하고 빗나간 집착을 타파하여
꺽는다는 의미이다
. 「조론肇論」이라는 제목 두글자는 작자로서 사람과
논리에서 나타낸 벽을 쌍으로 드러냈다.
때문에 「조론肇論」이라고 말한 것이다.
후진의 장안에 사는 석승조는 짓는다
(後秦長安釋僧肇 作 )
부견符堅 나라를 세우고 관중지방의 장안에 의거하여 국호를 대진大秦
이라 하였고,후진의 요장姚長은 부견의 왕위를 찬탈하고 왕위에 오르자
역시 국호를 진秦 이라 하였다.
그 때문에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이 前秦과 後秦으로서 이들을 구별하였다.
요장이 죽고나서 그의 아들인 요흥姚興 이 나라를 계승하였다.
구마라집 역경사업은 바로 요흥의 시대에 해당한다.
때문에 그의 제자인 조공은 後秦사람이다. <양고승전梁高僧傳>에서
「조공전肇公轉」을 조사 해보고 그의 내력을 간략히 말해보겠다.
법사승조는 서울장안 사람이다. 어려서는 집이 가난하여 다른사람의
책을 배껴써주는 품팔이를 하다가 이윽고 제자 백가와 모든역사 서적을 방대
하게 관람하였다. 그가 지향했던 뜻은 <허현虛玄>의 경지를 좋아하여 매양
<노장학>으로서 心要를 삼았으며 <노장학>을 익히고나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용이 훌륭하긴 하나 높은경지에 정신을 깃들게하는 처방에 있어선
아직도 훌륭함의 극치는 아니구나」 라고 하였다.
그뒤로 「구역유마경舊譯維摩經」을 보고 환희하는 마음으로 경전을
<정대수지頂對受持>하였다. 그리고 말하였다.
「내가 귀의할곳이 어디인지 이제사 알았다」 이로인해 출가하여
스무살에 사문이 되어 그의 명성은 長安지방에 진동하였다.
그때 나집공은 서역지방인 고장古藏 에 있었다. 조공은 그에게 달려가
의지 하였는데 나집이 그와 말을 나눠보고는 깜짝놀라며 말하였다
「불법가운데 뛰어난 용상대덕龍象大德이로구나」.
나집이 관중지방의 장안으로 돌아와 경전과 논서를 자세히 살피고
의미를 판정하자 시방에서 학자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들 서로가 질문을 던지자 조공은 문제를 맞이 하는대로 풀이 하였는데,
그의 답변은 모두가 일상적인 의식밖으로 초월하였다. 조공은 그때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을 저술하여쓴데 , 나집은 이를 보며 말하였다.
「내가 견해로야 그대에게 양보하겠는가마는 문학적인 문장의 경지에
있어서는 그대에게 양보해야겠군」 그가 지은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이
유전하여 광산匡山에 이르자 유유민劉遺民이
이를 혜원공慧遠公 에게 드렸더니 혜원은 무릎을치며 찬탄하였다.
「이런저술은 일찍이 없었다」
조공은 다시「물불천론物不遷論」등 네 논문을 저술 하였는데
이들모두가 불법대도의 정미함을 오묘하게 더하였다.
진왕인 요흥은 승조의 천제적인 자질과 인품을 알고
그를 등용하여 재상을 삼고자 하였다.
출가하여 사문이된 승조를 환속하라고 명한 것이다.
승조의 환속을 구마라습에게까지 설득해줄것을 청했다 한다.
하지만 승조는 세상의 부귀영화와 벼슬이란 허망한 것이라면서
왕의청을 거절하였다.
거듭거절하면 목을치겠다. 승조는 막무가내로 거절했다.
그리하여 결국 왕의 노여움을사 감옥에 갇혀 있다가
승조는 꼭 죽이려면 이래동안 말미를 달라고 했다.
그런뒤 붓과 종이를 청해 글을 썻는데 이것이 승조의
또다른 저서인 「보장론」이라는 것이다. 유명한
임종게를 남기고 칼날아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나이 서른둘에 죽으니 당시에 너무세상을 빨리 떠났다고
애석히 여겼다고 하였다.
明 匡山沙門 감산 釋德淸 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