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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羅喆) 연보
나철(羅喆, 1863년 12월 2일 생~1916년 9월 12일 몰; 향년 54세)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아버지
“민족의 영웅”
―10만 명의 독립군의 순교를 대가로 민족정신을 되살리고 나라의 독립을 쟁취한 민족의 영웅
―“독립운동의 아버지이자 국학의 스승, 민족종교의 중흥자”(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우리나라 민족종교운동의 지도자
대종교의 창시자 대종교 도사교
―단군 계열 민족 종교 개창 지도자
―제2대 후계자 김헌(김교헌)
단군교(檀君敎)의 중광자•민족 종교의 중흥자
―동학이나 천도교, 증산교 등의 신흥 종교와는 달리 나철 선생의 대종교는 단군교의 중광이었다는 데에서 우리나라 민족 종교의 부활을 도모한 민족의 으뜸가는 천재적인 지도자라고 높이 평가된다.
국학의 선구자•국학의 스승
―나철 선생은 국어학, 국사학, 군사학 등 민족 교육을 국학을 기초로 실천한 민족 교육과 국학의 선구자이다.
“조선의 마지막 선비”
―유학과 한학을 전통으로 하고, 국학을 유산으로 남긴 조선의 마지막 선비
―조선의 명멸을 몸소 외교적으로 항쟁하고, 군사적으로 투쟁하고, 학문적으로 연구한 조선의 실천적인 마지막 선비
독립운동가
독립운동의 선구자
3부자 독립운동 가문의 아버지
우리나라 최초의 동양평화론자
조선 시대 후기•대한제국 시대 관료•민족 종교인•독립운동가
대한제국의 관료•민족 종교인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만세의 종사”
―민족사에서 가장 빼어난 인물(박은식 추도사)
외세의 식민지 지배에 항거한 우리나라 최고의 내셔널리스트(nationalist, 민족주의자)
우리나라 최고의 독립운동 가문
본관 나주(羅州), 나주 나(羅) 씨
전남 보성 벌교 출신
본명 나두영(羅斗永)
개명 나철(羅喆)•나인영(羅寅永)
―나인영을 이름으로 쓰다가, 밝을 철(喆) 자를 외자로 써서 나철이라고 개명한 것은 “밝은 마음으로 조국의 광복을 밝히겠다는 일념”의 표현이라고 한다.
자 문향(文鄕)
아호 경전(耕田)
도호 홍암(弘巖)
29세 과거급제
조선 시대 후기 식년문과병과 급제•성균관강독관•홍문관강독관/보좌원/비서원/부정자/가주서•탁지부 징세서장(현 국세청장) 역임
대한제국 시대 탁지부징세서장
대한제국 시대 자신회 대표 회장•오적암살단 대표 단장
일제 강점기 대종교 대종사(1910년 제1대 교주)
관직 후에 10년의 낙향 기간을 거쳐 독립운동 활동
―유신회, 대한협동회, 자신회, 대한자강회, 호남학회, 대종교 활동
증조부 나석채(羅碩采)
조부 나수천(羅壽天)
외조부 한위정(韓位廷)
부 나용집(羅龍集, 한학자)
모 청주(淸州) 한(韓) 씨
자녀 3남
1남 나태영
1남 나정수
2남 나인영(나철, 본인)
1남 나정련
2남 나정문
3녀 나금포
4남 나정채
5남 나정강
6남 나정기
3남 나완영
1남 나정복
본인 나철
장인 송주원(宋柱元)
처 여산 송 씨 송주원의 여식
자
1남 나정련(羅正練, 1882년 9월 17일 생~1943년 9월 17일 몰; 독립운동가, 1968년 대통령 표창, 1991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2남 나정문((羅正紋, 1892년 11월 28일 생~1944년 2월 7일 몰; 독립운동가, 1968년 대통령 표창, 1991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나철 선생은 본인과 두 아들이 모두 독립운동가인 부자 독립운동가 가문이다.
3녀 나금포(사위 백호 안종익)
4남 나정채
5남 나정강
6남 나정기
왕석보(王錫輔)•김윤식의 문인
―왕석보는 양명학에 밝았고, 다산 정약용을 신봉하는 진보파로 알려져 있다.
1863년 1세 철종 14년 계해년 12월 2일 조선국 전라도 낙안군 남상면 금곡리(현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 출생
―주 거주지. 대한제국 전라도 낙안군 일대
―전남 보성 벌교에서 출생해 낙안 토박이로 성장하면서 유학을 학문으로 학습
―『문과방목』에는 나철 선생의 생년이 1859년으로 기록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서당 선생이 금곡마을에 해동공자가 태어났다고 감탄
1871년 9세 전남 구례의 큰선비 왕석보(王錫輔)에게 사사
―큰선비 왕석보(王錫輔)는 이기(李沂, 이암의 후손)•황현(黃玹, 『매천야록』(梅泉野錄)의 저자) 등의 제자들을 가르쳤으나 나철이 어린 시절에 사망했다.
1882년 20세 서울로 상경해서 김윤식에게서 사사. 소과 급제
1883년~1916년 21세~55세 주요 활동기
―1916년 9월 1일 활동 중단
1883년 21세 조선 시대 고종 20년 서울에 상경해 운양 김윤식(金允植)의 집에서 수학. 충청도 충주진영 유학설
1886년 24세 고종 23년 경기도 수원유수부 유학설
1888년 26세 고종 25년 한성부 유학설
1891년 29세 고종 28년 성균관 유생으로 응제(應製) 합격. 전남 순천시 낙안(樂安)면에서 식년시 문과 병과 과거 장원급제(16위). 정7품 승정원가주서 임명. 10월 승문원부정자 임명. 관직을 하다가 낙향
―독립유공자 포상자 공적조서에 본적이 전남 순천으로 기록
―김윤식의 『속음청사(續陰晴史)』에 나철의 과거급제 기록
1894년 32세 고종 31년 청일전쟁. 승문원권지부정자
1895년 33세 고종 31년 홍문관가주서 역임. 탁지부징세서장(현 국세청장) 임명
1896년 34세 건양 원년 탁지부징세서장. 2월 11일 아관파천으로 김윤식 실각
―수년간 관직 봉직 후 사임. 관직을 포기한 나철이 징세서장(국세청장)에 다시 임용된 배경에는 그의 스승 김윤식이 있다는 설이 있다.
1897년 35세 12월 김윤식 제주 유배. 나철이 제주 동행
1898년 36세 대한제국 시대 광무 1년 귀향(약 15년여 이향 생활 후)
1900년 38세 전북 전주에 거주하며 이름을 나두영에서 나인영으로 개명
―『황성신문』 1900년 5월 3일~5일 97~99호 광고 기사(廣告: 前注書羅斗永名改以璌永辱知君子僉諒)
1901년 39세 처의 사망으로 나철이 제주를 떠남. 김윤식 전라도 신안 지도(智島) 이배
―김윤식은 지도 유배에서 풀려 서울로 복귀
1904년 42세 러일전쟁. 관료 이후 비밀 결사체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해서 구국운동. 대한협동회(대한보안회 후신) 평의원(일제 황무지개척권 반대운동 전개, 지석영•김석항 등 참여)
―전남 강진 출신 오기호(吳基鎬), 전북 부안 출신 이기(李沂), 최전(崔顓) 등 참가
―일제가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고 독도를 일본 영토에 불법 편입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미국과의 가쓰라-테프트밀약으로 미국의 필리핀 식민 통치를 인정하고 일본의 조선 식민 통치를 미국으로부터 인정받았으며, 포츠머스조약으로 러시아로부터 조선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1905년 43세 5월 일제 강점기 관직 사임. 자신회 조직. 미국 포츠머스에서 러일전쟁 강화회담이 열리자 회담에 참석키 위해 도미를 시도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 6월 오기호, 이기, 홍필주(洪弼周) 등과 외교 항쟁을 하기로 합의. 7월 26일 1차 도일로 제1차 대일외교항쟁(1905년 7월 26일 도일~1906년 1월 24일 귀국)을 전개해서 한일 선린 외교를 주장하고 일본 궁성 앞에서 3일간 단식 농성. 이토 히로부미가 한일신협약을 체결한다는 소식을 듣고 매국노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일본에서 단도 2자루를 사서 품에 넣고 귀국. 서울에 귀국해서 서대문역 근처에서 숙소로 가는 길에서 백전(佰佺) 도인을 만나 2권을 책을 받았는데, 이 책들은 『삼일신고』(三一神誥)와 『신사기』(神事記)로서 이 책을 읽고 나철 선생은 도를 크게 깨달았으며, 이를 계기로 대종교를 창시하게 되었고, 이 책들은 후에 대종교의 경전이 되었다.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반대 운동 전개
―이 시기에 나철은 함께 도일했던 이기, 홍필주, 오기호 3인의 동지와 같이 정장 차림으로 사진을 촬영했다.
―일제는 을사늑약을 체결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해 조선의 국권 침탈에 나섬.
―포츠머스회담을 앞두고 민간인 자격으로 도미를 시도했으나 무산되었다. 나철 선생의 미국 외교 활동의 흔적으로 Na Chul이라는 영문 이름을 표기한 홍암 나철 선생의 명함이 남아 있다.
―을사늑약 이후에 나철 선생이 일본 왕에게 보낸 편지가 『대한매일신보』에 크게 보도되었고, 그의 의로운 행동은 “동양평화론”과 “한국독립론”을 주장하는 대사건이라고 보도되었다.
1906년 44세 제1차 대일외교항쟁이 이기의 부친상으로 1월 24일 귀국. 양력 2월 13일 음력 1월 1일 을사오적 신년 하례식에서 처단을 기도했으나 결사대원이 늦어서 실패. 박대하, 이홍래 등 결사대 30여 명을 선발하고 권총 50여 정을 구입해서 음력 2월 5일, 8일, 12일 3회에 걸쳐 처단을 시도했으나 실패. 7월 3일 2차 도일로 제2차 대일외교항쟁(1906년 7월 3일 도일~12일 이전 귀국) 전개. 나철 선생은 자진해서 자수하고 7월 12일 신안군 지도 10년 유배형을 받았으나 12월 7일 4개월여 만에 고종의 특별 사면으로 오기호, 이기 등과 함께 석방(병보석). 석방 후 3차 도일로 제3차 대일외교항쟁(1906년 12월 20일경 도일~30일 귀국) 전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이토 히로부미의 한일신협약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귀국길에 폭탄 장치 선물상자를 구입해 을사오적의 제거를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조선 말기 고종은 온갖 실정을 거듭했으나 나철의 유배를 4개월 만에 특별 사면하는 고종으로서는 드문 선정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후에 고종은 헤이그밀사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되었다.
―4차에 걸친 대일외교항쟁의 귀국길에 나철 선생은 을사오적 제거를 위해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단도 2자루, 폭약이 든 선물상자, 권총 등을 반입했다(권총 50여 자루는 인천에서 구입). 그러나 의열 투쟁의 결과는 단도로 저격하지 못하거나 권총으로 명중시키지 못했고, 박제순과 이지용에게 외국인이 보낸 것으로 위장된 폭탄이 든 선물상자는 폭탄이 목표물에 도착하기도 전에 발각되었다고 한다.
1907년 45세 1월 을사오적의 암살 계획. 을사늑약 체결 후, 2월 3일 이철, 강원상(康元相) 등과 자신회(自新會, 후신 오적암살단, 회원 2천여 명)를 결성하여, 2월 13일 음력 1월 1일 김동필이 권총 50정을 구입하여 조선 궁궐의 신년하례식에서 실행하려 했으나 일경의 경계 강화로 결사대원 집결에 실패. 3월 18일, 3월 21일, 3월 25일 3차례 더 을사오적의 암살을 기도했으나 실패. 관련자들(서창보(徐彰輔) 등)이 체포되자, 오기호, 최인식 등과 평리원에서 자수하고, 정부전복 및 대신 암살 기도사건으로 기소되어, 7월 3일 전남 신안군 지도(智島)에 10년 유형 선고(선고 내용: 죄목. 내란죄, 형량. 나철 유형 10년, 오기호 유형 5년, 이용태와 민형식 교수형). 12월 순종 1년 상왕 고종 특사로 오기호•이기 등과 함께 석방(유배 후 4~5개월만). 일제가 해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 폐위
―자신회는 을사오적의 처단을 목적으로 만든 단체이며, 나철과 이기, 오기호(나철과 동년배)를 중심으로 해서, 박대하(朴大夏)•김동필(金東弼)•이홍래(李鴻來)•강원상(姜元相) 등의 행동파 청년들이 가담했고, 김인식(金寅植), 이용태(李容泰), 윤주찬(尹柱瓚) 등이 지원했다.
1908년 46세 순종 2년 11월 12일 4차 도일로 제4차 대일외교항쟁(1908년 11월 12일 도일~1909년 1월 26일 귀국)을 전개해서 오기호, 정훈모(鄭勳謨), 이건(李健)이 동행했고, 외교적으로 구국운동 전개. 일본 체류 중 동경의 한 여관(청광관, 개평관)에서 백두산의 백봉(白峯) 신사가 보낸 단군교 신도 두일백(杜一白) 도인이 그를 찾아와 청광관에서는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 『고본신가집』을 나철 선생에게 주었고, 1달 후 개평관에서는 단군교를 포교하라는 사명으로 단군교 입교의식인 영계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1909년 1월 15일~1916년 9월 1일 47세~54세 제1대 대종교 도사교 역임
1909년 47세 융희 3년 2월 5일 음력 1월 15일 대한제국 시대 한성부 북촌 재동(현 서울 종로구 가회동) 취운정 아래에서 60여 명의 단군교 동지들과 같이 단군교(단군 신앙 민족 종교) 개창(중광절(重光節)). 음력 3월 15일 단군승천기념일 지정. 8월 단군교를 대종교로 개칭했다는 설도 있다. 오기호(吳基鎬) 등 대종교 동지 10명(강우(姜虞), 유근(柳瑾), 정훈모(鄭薰模), 이기, 김인식, 김윤식 등)과 한성부 재동에서 단군을 교조로 제천의식으로 행하고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셔서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 공포. 나철이 단군교 초대 도사교(都司敎)로 취임하고, 나철로 개명했으며, 도호를 홍암이라고 했다.
―대종교를 중광한 이후, 나철 선생은 “國雖亡而道可存”(나라가 비록 망해도 도인 정신은 존재한다)고 하며, 나라는 도인 정신이 존재하는 한 망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910년 48세 융희 4년 1월 15일 단군교 개창 1주년. 8월 1일 단군교를 대종교로 개칭. 나철 선생이 대종교 제1대 교주 취임. 신도 수 2만여 명 확보(서울 신도 2,748명, 지방 신도 18,791명). 동간도 지사 설치. 한일병합조약 이후 일제 탄압을 피해 교단을 만주로 이동. 서일 등 대종교인들이 독립운동 참여. 나철 선생이 백두산 전경 사진 직접 촬영
―대종교에서 음력 1월 15일을 나철 선생이 대종교를 창시한 날인 중광절(重光節)로 기념
―당시 대종교인들은 대다수가 양반 관료들로서 단군교는 양반 종교라고 불렸다고 하며, 동학에서 개칭된 천도교와는 구별되었다.
―8월 1일 일제 탄압을 피해 대종교로 개칭한 후, 정훈모 등의 일부 대종교 신도들이 단군교 명칭을 고수해 분리되었고, 정훈모가 단군교의 교주가 되었으나, 1936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대종교(大倧敎)의 명칭은 “크다”는 뜻의 대(大) 자와 “단군”을 뜻하는 종(倧) 자로 이루어져 “큰 단군”이라는 뜻으로 단군의 다른 표현이라고 한다(노세극 참조).
―대종교의 다른 풀이는 “대종”(大倧)은 “한얼님”(하느님)을 뜻하며, 한얼님이 사람으로 변화해서 백두산 신단수 아래로 강림한 분을 신인(神人)이라고 한다. 신인의 강림은 세상을 크게 널리 구제하려는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사명에 의거한다(김영조 참조).
1911년 49세 1월 나철 저 『신리대전』(神理大全) 간행(대종교의 신관(神觀)을 삼신일체의 원리로 설명). 백두산에 대종교 지사 설치. 서일 등이 만주에서 무장독립운동 단체 중광단(重光團) 설립. 나철이 백두산 북쪽 청파호 답사. 북간도에 대종교 지사 설치. 만주 청산리에 시교소 설치
1912년 50세 서일이 나철을 만나고 대종교에 입교하여 신도 수만 명을 확보하고 대종교의 주요 인물로 부각. 서울 귀국. 아들 나정문이 김윤식의 집에서 머물며 선린상업학교 수학
1914년 52세 3월 13일 일제의 탄압으로 대종교 총본사를 만주 청파호(靑波湖)로 옮기고, 만주 지역 포교 활동. 5월경 만주 화룡현 청파호에 교당과 지사 설치. 당시 신도 수 30만 명 확산. 10월 3일 총본사에서 개천절 행사. 서간도에 시교당 설립
―대종교 총본사가 단군 성지 백두산 청파호로 이전하고, 대종교는 북로군성서를 중심으로 항일무장독립운동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여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 등에서 큰 공적을 세웠다.
―대종교가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지 않는 시기에는 여러 곳에 학교(박달학원, 동창학교, 백산학교, 대종학원)를 세우고 국어학, 국사학, 군사학 등을 가르쳤다.
1915년 53세 8월 15일 나철 선생이 「예언시」 작시. 대종교 교세가 급격히 확대되자 일제가 「종교통제안」 공포 및 대종교 불법화로 대종교가 일제의 탄압 및 말살 대상이 됨. 일제가 대종교를 종교 단체가 아닌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하고 대종교 남도본사 천진전 강제 해산
―「예언시」 내용은 다음과 같다.
鳥鷄七七
日落東天
黑狼紅猿
分邦南北
狼道猿敎
滅土破國
赤靑兩陽
焚蕩世界
天山白陽
旭日昇天
食飮赤靑
弘益理化 <끝>
을유년 8월 15일에 일본이 패망하고
소련과 미국이 나라를 남북으로 분단하도다
공산주의와 외래문화가 민족과 국가를 망치고
공산과 자유의 극한 대립이 세계를 파멸할지나
마침내 한민족의 선도문화가 크게 번창하여
공산과 자유의 대립 파멸을 막고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이루리라 <끝>
1916년 54세 병진년 9월 1일 음력 8월 4일 김교헌(金敎獻)이 대종교 제2대 교주 임명. 대종교 총본사를 동만주 화룡으로 옮긴 뒤 「홍범규칙」(弘範規則) 공표. 비밀결사단체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해서 무장독립운동단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 음력 8월 5일 황해도 사리원역 앞 대기사진관에서 사진 2장 촬영(1장 단독 사진(흰색 도포, 왼손에 단주, 오른손에 단장), 2장 수제자 김두동, 엄주천 등 시봉자 6인과 합동 촬영 사진). 9월 5일경 나철 선생이 별세 전 전신 영정 사진 촬영. 9월 11일 음력 8월 14일부터 구월산 삼성사에서 3일간 단식 수도 수행을 하다가 음력 8월 15일 동포에게 유서를 남기고, 일왕과 일 의회에 한일 관계에 대한 서신을 보낸 후, 폐기법(閉氣法)으로 자결했으며(가경절(嘉慶節)), 8월 16일 새벽 제자들이 발견. 9월 12일 음력 8월 15일 일제 강점기 황해도 안악군 구월산 삼성사에서 단군 제천의식을 올린 뒤 음독 자결 순국. 유훈에 따라 백두산록 청파호 언덕에 봉안. 향년 54세
―오른손에 지팡이를 들고, 왼손에 묵주를 들고, 흰색 두루마기 차림으로 촬영
―일제 강점기 일제의 종교 탄압과 나철 선생의 독립운동으로 일제에 심하게 쫓겼던 것이 순국의 원인이라고 한다. 일제 학정을 통탄하고 고발하는 유서를 남김.
―유서 내용: 순명삼조(殉命三條, 단군에 제천 제사 드리고, 대종교를 믿으며, 단군을 숭배하고, 인류를 위하여 자결한다는 내용
―청파호에 유해를 안장하고, 대종교에서 매년 음력 8월 15일을 나철 선생이 순교한 날인 가경절(嘉慶節)로 정하여 대종교 4대절(四大節)의 하나로 기념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나철평전』을 펴내면서, 박은식이 나철 선생 추도사에서 나철 선생을 “만세의 종사”(민족사에서 가장 빼어난 인물)라고 높이 평가했다고 전했다.
저서
『신리대전』(神理大典)
「예언시」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기원하는 예언시
「백두산 천제문」
―한민족이 망국의 노예백성으로 고통받는 원인은 경봉천신을 외면한 업보라고 해설
「순명삼조」(삼법 수행에 대한 글, 대종교 제자 신규식에게 보내는 글)
「밀유」(密諭, 스스로의 깨달음에 대한 글)
「이세가」(세상과 이별하는 시)
―일제 식민지 정책을 공박하며 식민지는 악의 세상으로서 선의 세상으로 식민지 세상을 순치시켜야 한다고 다짐하는 시
「중광가」(평화로운 세상을 기원하는 시)
―일제 식민지 정책에 구속되어야 하는 대종교 교주의 운명과 순교의 속죄를 암시하는 시
「여조선총독사내서초」(與朝鮮總督寺內書抄, 대종교인 탄압에 항의하는 글, 조선 총독에게 보내는 글)
기타
―식민지 정책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민족을 식민지의 백성으로 타락시킨 것에 대한 죄의식을 토로하는 글들
동상
「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 선생」 전신 동상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지산리 천안 국학원 한민족역사문화공원 소재
기념관
홍암나철기념관
―전남 보성군 벌교읍 녹색로 5163번지(칠동리) 소재
―제1관 홍암관(나철 기념관), 제2관 대종교 독립운동관(대종교 기념관), 자료실, 천부경 기념비, 홍암사(사당), 개천문, 나철 선생 초혼비 등 소재
사당
홍암사
―전남 보성 소재(홍암나철기념관 부근)
생가
일지당
―홍암 대종사 생가
―보성 나철 생가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 소재
묘비
홍암 대종사 묘비
독립운동 지도자 홍암 나철공 유적비
묘역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허룽시, 和龙市) 룽청진 칭후촌 삼종사 소재
―대종교 3종사 홍암 나철, 무원 김교헌, 백포 서일의 묘가 나란히 자리하며, 가운데에 홍암의 묘역이 있다. 순국 후 김두봉이 이곳에 안장했다.
―묘역 우측에 작은 돌 비석에 “반일지사무덤”이라고 새겨져 있다.
―본 묘역은 현재 대한민국 정부에서 대종교 교단과 묘역의 국내 봉환에 대해서 협의 중이다.
기념사업회
홍암나철기념사업회
시비
나철 선생의 「예언시」 시비
어록비
독립기념관 나철 어록비
1910년대~1940년대 광복까지 독립운동을 펼친 대종교인에는 이상설, 이회영, 정인보, 주시경, 지청천, 홍범도, 김좌진, 신채호 등 수많은 신도들이 있다.
1919년 2월 1일 독립운동 지도자 39인(대종교인 25명 포함)이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서명
―본 선언서는 1919년 2월 8일 2•8독립선언에 앞서서 발표되었으며, 항일무장투쟁을 명시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정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청산리대첩과 봉오동전투 수행. 10월 청산리전투에서 대종교 무장독립운동단체 북로군정서가 큰 승리. 대종교 총본사가 만주 길림성 화룡현 청호촌에서 만주 길림성 밀산현 삼사통으로 이전. 간도참변으로 일본군이 보복 공격
―청산리전투는 1920년 10월 중국 만주 화룡지구에서 서일의 대종교 북로군정서 부대와 국민회 소속 부대가 협동 작전으로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함으로써 독립군의 전투 의지력 함양에 기여하고,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큰 전환점을 이룬 중요한 전투였다.
―일제가 보복으로 대종교인 교도들을 대거 학살했으며, 그 후에 김교헌이 병사했다.
1921년 제2회 상해 임시의정원 위원 29명 가운데 21명이 대종교인(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조성환, 차이석, 송병조 등). 일제의 경신대토벌작전에서 청산리전투의 보복으로 대종교도로 구성된 다수의 조선인 학살. 8월 26일경 서일이 마적단의 공격으로 청년 병사들이 학살당하자 그 책임으로 자결
―청산리전투에서 북로군정서를 이끌었던 서일은 1911년 이후 중광단, 정의단, 군정부,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단의 활동을 주도했고, 서일이 자유시참변과 소련군 지원 토비들의 습격으로 인한 독립군 궤멸에 책임을 지고 자결하자, 김좌진 장군 등이 신민부, 한족총연합회, 재만무정부주의자동맹 등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1922년 1월 22일 김윤식 사망(향년 88세). 대종교 총본사를 만주 연길도 영안현 남관으로 이전
1923년 11월 제2대 교주 김교헌 별세
1924년 대종교 제3대 교주 단애 윤세복 종사 임명
―윤세복은 여러 지역에 교당을 설치하고 신도 7천여 명을 확보했으며, 대종교와 관련 단체를 설립해서 항일독립투쟁에 앞장섰다.
1926년 일제 탄압으로 만주 길림성장 장작상(장쭤상, 張作相)이 「대종교포교금지령」을 내리자, 대종교 동서북 3도 본사가 해체되고, 서울 남도본사도 폐쇄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대종교 압박에 대종교 총본사는 만주 밀산현 당벽진으로 옮겨 6년간 피신해 있었다.
1928년 대종교 총본사를 만주 밀산현 제6보 삼사통으로 이전
1932년 만주에 일제 괴뢰정권 만주국이 설립되고 대종교인들을 공격하여 대종교가 비밀 결사화되었다. 이후로 대종교는 일제로부터 강제 해체의 대상이 되었다.
1934년 대종교 총본사가 만주 밀산현 당벽진에서 발해 지역 옛 도읍지 만주 영안현 발해보 동대와자(동경성)로 이전하고 대종학원을 설립
1942년 11월 19일 대종교 제3대 교주 윤세복(尹世復)이 발해 동경성 총본사에서 포교를 하다가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한 단체구성”이라는 죄목으로 일경에 검거되어 동료 교인들과 함께 옥사. 조선어학회사건과 임오교변(壬午敎變)으로 대종교인 학자와 교도 탄압
―조선어학회 소속 국어학자 이극로가 윤세복에게 보낸 『널리 펴는 말』이라는 원고가 일제에 의해 독립선언서로 해석되어 조선 독립을 공모했다는 죄목으로 조선어학회 사건과 때를 같이해서 윤세복 등 대종교인 25명을 검거하는 임오교변이 일어남.
―임오교변의 희생자 임오십현(壬午十賢): 권상익(權相益), 이정(李楨), 안희제(安熙濟), 나정련(羅正練), 김서종(金書鍾), 강철구(姜銕求), 오근태(吳根泰), 나정문(羅正紋), 이창언(李昌彦), 이재유(李在囿)
―나철 선생의 자녀 5남 1녀 가운데 1남과 2남 나정련과 나정문이 임오교변으로 중국 목단강 액하감옥에서 독립운동가로서 순국했다(2남 나정문은 석방 3일 후 별세).
1945년 8월 광복 후, 대종교 총본사 부활
1946년 2월 대종교가 환국하여 서울 중구 저동에 총본사 설치
1949년 대종교 중흥회 설립. 경전 『역해종경사부합편』 간행. 초대 문교부장관을 지낸 안호상 대종교 총전교가 단군 진영(眞影)을 청원해서 정부에서 인정
―단군 진영은 나철 선생에게 어느 노인이 신라 시대 솔거 작 단군 진영(그림 1부)을 건네주었고, 나철이 다른 화가에게 이 그림을 모사케 했다. 대종교에서는 단군 진영을 한배검 천진(天眞) 또는 천진이라고 한다.
1950년대 태백산 천제단이 정비되어, 제단 앞 축대에 “천제단대종교태백지사근제”라고 적혀 있다. 천제단은 중요민속자료 228호 국가지정문화재이다.
1950년 5월 도통전수제가 폐지되고 총전교제가 시행되어 3대 교주 윤세복이 제1대 총전교 취임
1955년 9월 정관(鄭寬)이 제2대 총전교로 임명됨.
1958년 4월 재단법인 대종교 유지재단 설립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965년 대종고등공민학교 설립. 대종학원 부활
1968년 나철 선생의 1남 나정련과 2남 나정문이 독립운동으로 대통령 표창. 대종교 종경종사편수위원회 조직
1971년 대종교종경종사편수위원회 편 『대종교중광육십년사』가 대종교 총본사에서 간행
1977년 사단법인 현정회(現正會)가 또 다른 단군 진영을 정부에 승인 신청해서 승인되었다. 그러나 대종교는 현정회 진영을 인정하지 않는다.
1979년 신철호, 『한국중흥종교 교조론』, 대종교 총본사 간
1982년 대종교 총본사가 홍제동에서 홍은동(서울 서대문구 홍은중앙로3길 89)으로 이전하고, 매 주일마다 경배식 거행
1983년 2월 27일 중광절에 제13대 총전교 권태훈이 중창선언대회 개최
1984년 이강호, 「나인영의 대종교사상」, 『한국근대종교사상사』(원광대출판부) 간행; 김정빈 장편 소설 『단』(정신세계사 간, 봉우 권태훈의 구술기) 발표
1986년 우원상 저 「대종교」, 『전환기의 한국 종교』(서울대 종교학과 종교문화연구실 편, 집문당) 간
1991년 1남 나정련과 2남 나정문이 독립운동으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992년 안호상 총전교 취임
1993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선정 이달의 독립운동가 나철
1997년 대종교 교세 15개 교구 102개 교당 324명의 교직자와 47만여 명의 신도
1999년 봄 안호상 총전교 별세. 이동언, 「홍암 나철의 생애와 구국운동」, 『대종교중광90주년기념학술회의 발표문』 발표
2000년대 이후 단월드는 과거 단의 개칭된 형태로, 단월드 회원들은 나철 선생을 단의 시초라고 믿는다고 한다.
2000년 4월 7일 여수 MBC 나철 선생 특집 「잊혀진 민족의 지도자 홍암 나철」 방송
2002년 대한민국 국회에서 나철 선생을 ‘독립운동의 아버지’ 명명. 7월 13일 “홍암 나철 선생의 독립운동 재조명” 학술회의 개최(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홀,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주최, 공동대표 박성수)
―김창수 교수의 「항일 외교와 을사오적의 처단 의거」 등의 논문 발표
2003년 박성수 저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북캠프) 발행; 삿사 미츠아키 저 「한말•일제시대 단군신앙운동의 전개―대종교•단군교의 활동을 중심으로」, 서울대 박사 학위 논문 발표
2004년 2월 29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74회 특집 방송 「독립투쟁의 대부 홍암 나철」 방송(연출 박정근). 7월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대표 박성수) 주최로 “홍암 나철 선생 독립운동 재조명 학술회의” 개최. 이병천 장편 역사 소설 『신시의 꿈』 발표(한문화). 오영섭 저 「대종교 창시 이전 나인영의 민족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9호 발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74회 특집 방송 「독립투쟁의 대부 홍암 나철」(연출 박정근)은 대종교에 대한 최초의 방송물이었으며, 제50회 이달의 PD상 수상(PD연합회 시상)
―나철 선생 ‘독립운동의 아버지’ 추대위원회 위원장 김희선 의원이 선언문에서 “홍암 나철 선생은 독립운동의 효시이며 독립운동의 아버지”라고 선언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이라는 소설을 쓴 역사학자 박성수는 『한겨레신문』 인터뷰에서 “근현대 100년 동안 우리 역사에 끼친 영향력이 크고 가장 기억해야 할 인물이라면 저는 나철을 첫 번째로 꼽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2005년 9월 나철 선생이 ‘이 달의 문화 인물’ 선정. 인구주택총조사에서 대종교인 3,766명 집계(20여 시교당)
―“민족 고유의 정신인 국학사상을 계승 대종교를 중광, 문화•독립운동으로 일제하 만주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문화관광부 인물평)
2007년 4월 4일 「독립운동 지도자 홍암나철공초혼비」 건립
―중국 화룡현 청파호 청호촌 나철 선생 묘역에서 사토를 채취해 선생의 고향인 전남 보성 금곡마을 입구에 안장하고 초혼비를 세움.
2008년 홍암 나철 선생 생가 복원
2009년 사당 홍암사 건립(나철선생기념관)
2011년 10월 21일 홍암 나철 선생 95주기 추모제 개최(전남 보성군 벌교읍, 홍암나철선양사업위원회 주관)
―가수 조영남이 예수와 나철을 비교하며 나철 선생 일대기를 쓰다.
2015년 허태근 저 「홍암 나철의 조천과 유서 연구」, 『역사와 경계』 96호
2016년 5월 7일 홍암 나철 서거 100주기 추모 학술회의 개최(서울시청 지하2층 워크숍룸, 사단법인 국학연구소 주관). 9월 10일 “홍암 나철 대종사 순명조천(순교) 제100주기 추모 학술회의” 개최(서울 세종문화회관 1층 예인홀, 대종교 총본사 주최). 9월 15일 홍암 나철 선생 순국 100주기 추모 행사 개최(장소: 서울 종로구 단군성전, 코리아 글로브 주최, 현정회 후원). 9월 28일 정찬주 장편 소설 『단군의 아들』(작가정신) 발행, 10월 27일 광주 MBC 창사 52주년 특집 「홍암 나철, 백년의 유산」 방송, 11월 1일 광주 MBC 프로그램 「봉오동전투의 정신적 지주 ‘대종교’를 중광한 홍암 나철」, 11월 보성군 벌교읍에 홍암 나철 선생 순명 100주년 기념 기념관 건립 및 개관. 제1관 나철 일대기 기록물 전시, 제2관 대종교 독립운동관으로 대종교 독립운동 자료 전시
―홍암 나철 서거 100주기 추모 학술회의(서울시청 지하2층 워크숍룸, 사단법인 국학연구소 주관)에서 김동환 연구원의 「홍암 나철 죽음의 대종교적 의미」, 신운용 박사의 「홍암 나철 연구에 대한 성과와 과제」, 이승호 교수의 「홍암 나철과 한국철학」 발표
―홍암 나철 선생 순국 100주기 추모 행사를 주최한 코리아 글로브 김석규 상임이사는 대종교가 “항일 독립운동의 원동력이자 민족의 가르침”이라고 말했다.
―홍암 나철 대종사 서거 100주년 학술회의에서 박광수 교수의 「홍암 나철의 대종교 중광과 종교사적 의의」, 최윤수 대종교 삼일원장의 「나철 대종사의 고유의 도의 계승과 도학」, 최경주 대종교 교화사의 「홍암 나철과 하느님 신앙」, 김정철 대종교 종학연구원의 「신리대전에 나타난 신인합일 가능성」, 김상일 교수의 「홍익인간의 논리와 구조」 등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허태근 저 「대종교 중광 전후 나철의 구국활동과 영향」, 『역사와 경계』 100호
2017년 11월 3일 홍암 나철 선생 서거 제101주기 홍암 나철 선생 추모제 개최(장소: 홍암나철선생기념관)
2019년 3월 24일 광주 MBC 다큐프라임, 「‘봉오동 전투’ 승리의 정신적 지주 ‘대종교’를 중광해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한 홍암 나철 선생」; 11월 19일 홍암사 사당 옆으로 나철 선생 초혼비와 가묘 이전
―초혼비 앞 바닥에 설치된 비석판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사)홍암나철기념사업회에서 2007년 4월 중국 화룡현 청파호 청호촌에 계시는 선생님 묘소에서 사토를 채취하여 고국 고향 금곡마을 초입에 안장하여 초혼비를 건립했으며 기념관이 완공되어 2019년 11월 19일 선생님 사당 옆으로 초혼비와 가묘를 이전하였습니다.”
2020년 노세극, 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87, 「대종교로 독립 꾀한 민족 종교 지도자 홍암 나철」, 『매일노동신문』, 2020년 12월 14일, <http://www.labortoday.co.kr>
2021년 김상웅 저 『독립운동의 선각 나철 평전』(꽃자리 간) 발표; 민인홍, 「개천절 만든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 『뉴스트리』, 2021년 5월 9일, <https://www.newstree.kr>
2022년 10월 국가보훈처가 나철, 김교헌, 서일 대종교 지도자 3인의 묘역을 국내로 봉환하기 위한 협의를 대종교와 협의 중이라고 알려져 있다.
2024년 8월 3일 STB 상생방송 프로그램 「나주 나 씨 독립운동가 홍암 나철, 대종교를 창시하다」 방영
2025년 1월 10일 정운현 저 『홍암 나철과 대종교의 독립투쟁사―대종교인 119인의 항일투쟁 이력서』(역사인) 발행. 대종교 총전교 박민자. 총본사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홍은중앙로3길 89번지. 현 신자 수 5천여 명, 교구 15개. 현 대종교인 신도 수를 비활동 신도를 포함해 50만 명으로 추계하기도 한다.
* 독립운동가 나철 선생: 독립운동가 나철 선생은 대한제국 시대에 을사오적의 암살을 모의하다가 실패하고 전남 신안군 지도로 유배를 당했으며, 고종에 의해 사면 후에 대종교를 창시하고 민족 종교 운동으로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가이다. 그의 아들 1남 나정련과 2남 나정문도 독립운동가로서 아버지 나철과 동시에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나철 선생과 아들 나정련, 나정문 3인은 부자 독립운동가 가문이다. 이들이 사망할 당시에는 일제의 독립운동 탄압이 극에 달하던 때였으며, 이들 부자들은 일제의 폭정에 항거하며 장렬하게 생을 마감했다.
* 민족 종교 대종교 창시자 나철 선생: 민족 종교 대종교의 창시자 홍암 나철 선생은 조선 후기의 관료로서 조선 말기에 한일병합에 대응해서 일본을 총 4차례 방문해서 외교 활동을 펼쳤다. 이 와중에서 1차 도일 후에 서대문역 부근에서 어느 도인이 백두산 백봉(白鳳)의 지시로 나철 선생에게 향후 대종교의 주요 경전이 되고 나철 선생에게 깨달음을 가져다준 책 2권을 건네주었다. 2차 도일 때는 동경에서 역시 백두산 백봉의 지시로 백두산에서 파견된 단군교 도인이 나철 선생을 직접 찾아와 단군교 입교 절차를 밟고 단군교 포교의 사명을 주었다고 한다. 나철 선생은 백두산 선사 백봉 도인의 추천으로 단군의 경전을 받고 깨달음을 얻었으며, 역시 백두산 백봉 도인의 추천으로 단군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이런 기회로 나철 선생은 단군교를 창설하고 이를 바로 대종교로 개칭해서 근대적인 민족 종교로 발전시켰다.
나철 선생의 민족 종교 운동은 단군 신앙의 계승이라는 관점에서 민족 종교의 정통성을 갖고 있다. 한국사에서 단군 신앙은 고려 중기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단군을 모시는 제천 행사와 제사가 주 의례이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단군을 모시는 제례 의식과 민족 종교 운동이 지속되어 왔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 중기에 외세의 침략과 국내 실정으로 인해서 이러한 단군 신앙의 제례 의식과 민족 종교의 맥이 끊어졌다고 한다. 그 후로는 조선 시대 세종조에 단군을 모시는 사당을 조선의 궁궐 안에 두었다는 것과 강화도 부근에서 정기적으로 단군 의례를 했다는 사실 외에는 별다른 민족 종교의 움직임이나 운동은 없었던 듯하다. 이러한 민족 종교 운동의 공백기가 고려 중기부터 나철 선생이 대종교를 창시하기까지 700여 년에 걸쳐서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긴 역사적 공백기는 나철 선생이 몇몇 도인과의 만남으로 단군 신앙의 도를 깨닫고 대종교를 창시하면서 막을 내렸다.
이처럼 민족 종교의 정통성을 이어온 대종교는 일제 말기 교세가 확대되고 독립운동에 관련되어 일제가 무자비하게 불법화하고 탄압하면서 비밀결사체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해방 전후에는 독립운동가 가운데 대종교인이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로 독립운동과 직결되었으며, 해방 후에도 대종교는 주요한 민족 종교로 인정되었다. 현재는 서울 홍은동 부근에 대종교 본사가 있고, 전남 보성에 홍암나철기념관이 있다.
* 대종교 교주 나철 선생: 나철 선생은 성격이 곧은 조선의 전형적인 큰선비였으며, 단군교 관련 도인들의 도움과 이암의 후손인 이기 등의 도움으로 대종교를 창시했다. 개창 1년 만에 단군교를 대종교로 개칭한 이유는 일제의 민족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도 한다. 초기 대종교 신도는 대다수가 양반이자 관료였던 양반 관료였다고 한다. 지금도 이름을 알 수 있는 유명 관료들 대다수가 대종교의 초기 신도였다. 따라서 당시에 대종교는 양반 종교로 알려져 있었다.
보성의 한학자 나철 선생은 「예언시」를 써서 이화세계를 예언했고, 기성 종교 사상이 유발한 민족의식의 왜곡과 그로 인한 민족적 위기를 민족의 정체성의 재확립 또는 쇄신에서 찾으려 했다. 나철 선생은 생전에 단군의 가호로 우리 민족이 이화세계를 되찾고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를 기원했다.
대종교 교주 나철 선생은 고려 중기 이래로 700여 년 상실했던 민족 신앙을 회복했으며, 고대와 중세의 단군 신앙을 조선 이후 근대 신앙으로 발전시켰고, 대종교 포교를 근대 교육과 접목시켜 국어학, 국사학, 군사학을 기본으로 하는 근대 교육으로서의 국학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대종교가 독립운동의 중심축이 되면서 종교적 정체성이 부정되고 일제로부터 탄압 및 말살되었던 것은 아쉬움으로 남으며, 이러한 대종교 명멸의 역사를 지금에라도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민족의식의 왜곡에 대한 진단과 그 처방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의 확립과 의식 교육으로서의 국학의 확대는 21세기 현대적 관점에서는 양반 출신 관료들에 의한 양반 종교라는 대중적 한계와 독립운동에 대한 관련성으로 인한 일제 탄압의 초점(focus)이 되었다는 식민지적 한계가 있다. 이러한 대중적 한계와 식민지적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고 극복하는 것만이 대종교가 근대 이후의 종교이자 민족 사상으로서 그 위치를 회복하는 길이다.
홍암 나철 선생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아버지라는 역사적 평가에 부합하여 당대의 민족의식을 인식하고 독립적으로 새롭게 쇄신 및 극복할 방안을 찾을 수 있었다.
* 나철 사상의 핵심: 홍암 나철 선생은 일찍이 우리나라가 국권을 상실한 원인을 민족의식의 왜곡이라고 지적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찾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유불선(儒佛仙)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사상과 교육으로는 잃어버린 민족성을 되찾을 수 없고, 국어학과 국사학 등의 국학의 진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고려 중기 몽고 항쟁 이래 700여 년을 상실했던 민족 종교 사상은 이렇게 부활된 것이다. 이것이 나철 사상의 핵심으로서, 민족의식을 회복해서 민족의 정체성을 되찾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국학의 연구와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나철의 민족 사상은 주시경, 김두봉, 이극로,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이동녕, 이상설, 이시영 등의 한글학자, 민족사학자, 민족주의자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이미향, 「나철, 대종교로 나라를 찾아라」, 지역N문화, <https://ncms.nculture.org/famous-local-people/story/ 9479> 참조). 연합뉴스 김기훈 기자는 천도교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서, “홍암 나철의 종교사상은 국가적 차원에서 다시 조명돼야 한다”고 언급했다(김기훈 기자, 「대종교, 홍암 나철 대종사 100주년 추모 학술회의」, 『연합뉴스』, 2016년 9월 7일자 참조).
나철 사상의 교훈은 기존 사상인 유불선만으로는 우리나라 민족의식의 왜곡을 초래하므로 민족의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는 단군 사상과 국학의 발전을 기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주장은 21세기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현재의 기독교(개신교•천주교), 불교, 기타 등등으로는 민족의식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따라서 현 단계 갈등과 위기는 이러한 왜곡에 따른 것으로 단군 사상과 국학으로의 회귀로 이를 극복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새롭게 확립 및 쇄신해야 한다.
* 나철 선생의 대일외교항쟁 일지: 홍암 나철 선생의 대일외교항쟁은 총 4차에 걸쳐 전개되었다. 1차 도일은 1905년 7월 26일~1906년 1월 24일 사이 오기호, 이기, 홍필주가 동행했으며, 1905년 11월 15일 을사조약 강제 체결에 항거해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2차 도일은 1906년 7월 3일~12일 이전 사이로 7월 3일 도일해서 며칠 후 곧바로 귀국했다. 3차 도일은 1906년 12월 20일경~30일 사이 오기호, 김기환의 동행으로 을사조약 강제 체결을 규탄하고 한국 독립을 역설했다. 4차 도일은 1908년 11월 12일~1909년 1월 26일 사이 오기호, 홍필주, 이건이 동행했으며, 일제 탄압으로 인한 한국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 대책을 요청했다. 추가로 나철 선생의 대일외교항쟁이 총 4차를 넘는 6차에 이른다는 설도 있고, 가쓰라-테프트밀약과 포츠머스회담 등 미국 관련 외교 사안을 해결하기 위한 도미 움직임도 있었다고 한다. 나철 선생은 생전 명함에 Na Chul이라는 영문 이름을 새겨서 소지하고 다녔다고 한다.
* 대종교의 무장독립운동: 대종교는 민족적 정체성 확립을 위해 국학을 중시했으며, 그 가운데 국어학, 국사학과 함께 군사학을 학교에서 가르쳤다. 일제가 대종교를 종교 단체가 아닌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하고 강제 해산을 했던 것처럼, 대종교의 일제 강점기 주요 활동은 무장독립투쟁이었다. 1920년 청산리전투의 승리는 대종교의 북로군정서의 덕택이었으며, 서일을 북로군정서 총재로 해서 김좌진, 이범석, 현천묵 등이 포진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무장 활동은 결국 일본군의 강제 해산과 1920년 간도참변과 같은 보복 공격으로 괴멸되고 말았다.
이양재는 대종교는 일제 강점기 무장 독립투쟁의 최선봉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 민족 종교이며, 대종교보다 더 많은 독립투쟁의 순국자를 배출한 교단이나 단체도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홍암 나철 선생은 대종교의 창시자로서 홍익인간을 주창한 데에서 고조선에서 대한민국까지 홍익인간의 건국 이념을 견지한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아버지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양재는 대종교를 대한민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양재, 「나철과 대종교를 주시한 [한국사회략설]」, 『통일뉴스』, 2023년 6월 19일).
중앙일보 배영대 기자는 「나철의 대종교에 관한 풀리지 않는 궁금증들」이라는 기사에서 나철 선생이 독립운동의 아버지거나 선구자라는 사실을 넘어서 대종교의 종교적 실체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며, 따라서 대종교 연구가 더 심화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배영대 기자, 「나철의 대종교에 관한 풀리지 않는 궁금증들」, 『중앙일보』, 2002년 7월 17일). 배 기자의 이러한 지적은 단군을 국조로 섬기며 홍익인간의 건국 이념을 민족의식으로 삼아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노력에 대해서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래도 풀리지 않고 자꾸만 희미해져 가는 대종교의 현재의 종교적 위상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은 우리나라 독립운동과 대종교의 항일 투쟁은 따로 분리하기 어려운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나라 독립운동은 대종교에 큰 빚을 지고 있다.”라는 말을 인용해서 언급했다(김영조, 「독립투쟁의 큰 등불 대종교 창시한 ‘나철’」, 『우리문화신문』, 2020년 12월 1일). 그의 말을 검토하면, 우리나라 독립운동이 대종교에 진 큰 빚을 갚는 날이 진정으로 우리나라의 독립이 이루어진 날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현재 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부단히 지속되어야 할 중심적 민족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대종교가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현동민 기자, 「[오늘의 역사] 대종교 나철, 일제 맞서 민족종교 지키려 자결」, 『인천투데이』, 2025년 9월 12일).
* 우리나라의 민족 종교로서의 대종교: 나철 선생이 700여 년의 역사적 공백기를 깨고 개창한 우리나라의 민족 종교로서의 대종교는 하늘을 섬기고 단군을 국조로 모시는 신앙 형태이다. 이러한 민족 종교는 홍익인간의 이념을 기본으로 고조선 시대와 단군 조선 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우리나라 민족 종교의 명칭은 부여의 대천교(代天敎), 신라의 숭천교(崇天敎), 고구려의 경천교(敬天敎), 발해의 진종교(眞倧敎), 고려의 왕검교(王儉敎)로 시대적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고려 중기 원종(元宗)조에 몽고의 고려 침략으로 이처럼 오래된 민족 신앙과 민족 종교가 단절되었다.
무속과 같은 민간 신앙의 형태가 존속하고 있고, 동학과 같은 혁신적인 신앙도 있지만, 민족 종교는 종교의 성격을 갖춘 합리적인 믿음 체계이다. 대종교의 중요성은 민족 종교로서 무엇보다 민족의식과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민족 교육을 통해서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나철 선생이 창시한 대종교는 고조선 이래 건국 이념이 된 홍익인간의 민족적 이념과 사상을 바탕으로 국학의 진흥을 통해서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실천 능력을 갖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족 종교이다. 이러한 면에서 대종교는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능력을 갖춘 민족 종교의 으뜸이며, 국학의 진흥을 통해 주체적인 민족주의 사관의 정립에도 크게 기여했다(대종교,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 참조).
* 우리나라 최초의 동양 평화론자 나철 선생: 홍암 나철 선생은 한일병합 이후엔 1906년부터 1908년까지 4차에 걸친 도일 및 대일외교항쟁을 전개하면서 일관적으로 중국 청나라, 대한제국, 그리고 일본 사이에 평화주권론을 주장했다. 3개국 사이의 동양 평화와 한국의 정치 경제 주권을 호소한 것이다. 그럼에도 일제 강점은 한일합병에 이어서 한일신협약과 을사늑약 체결로 이어졌다. 나철 선생의 대일외교항쟁에서 주장한 바는 한국의 독립 주권과 한중일 동양 평화이다. 이러한 주장은 의병장 허위와 안중근 의사의 평화론보다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동양평화론으로 평가된다. 그의 평화주의와 평화론은 결국 민족 종교 대종교의 발흥으로 이어졌고, 민족정신의 지주로서 기여했다. 나철 선생이 대종교를 통해서 단군 신앙을 불러일으키고 국학의 진흥을 도모했던 것은 모두 나라를 잃어 버린 위기에서의 “국권회복운동”으로 규정된다. 또한 나철 선생의 도일과 대일외교항쟁은 우리나라 민간인 최초의 구국 외교로 평가되며, 을사오적 처단 의거도 우리나라 최초의 의열 투쟁이라고 평가된다(민인홍, 「대종교 총본사 청년회장, 개천절 만든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 『뉴스트리』, 2021년 5월 9일자 참조).
홍암 나철 100주기 기획연재를 진행하던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는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홍암 나철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고 고백했다. 주변 관련국의 압력이 더욱 악화되고 남북 대결이 날로 치열해지는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 홍암 나철 선생이 되살아 온다면 어떤 말을 해줄 것인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가혹한 식민지적 현실에서 탈피하라. 망해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민족의식과 민족적 정체성을 회복하라. 국가의 독립적 자주권과 국가 주권을 지켜라. 힘들다고 한탄만 하지 말고,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는 깨달음을 터득하라. 주저앉지 말고 행동하고 실천하라.
*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서 무오독립선언: 1919년 대종교 제2대 교주 김교헌이 참여한 대종교의 무오독립선언은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서이다. 본 선언은 「대한독립선언서」가 원제이고, 「무오독립선언서」가 속칭이다. 1918년 11월 중국 만주 길림성 대종교 총본사에서 망명 독립운동가 대종교인 39인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1919년 2월 2•8독립선언보다도 앞서고, 1919년 3월 3•1독립선언보다도 빠른 최초의 독립선언서이다. 무오독립선언으로 인해서 일본 유학생 독립선언이 가능했고, 또한 대종교의 무오독립선언으로 인해서 33인의 삼일독립선언이 가능했다. 대종교 독립선언서는 조소앙이 썼으며, 한일합방의 무효를 주장하고, “정의의 칼로 나라를 훔친 적을 도결(屠決)하여 운명을 개척하자”고 선언했다. 대종교 무오독립선언은 이후의 독립선언에 비해서 무장독립투쟁 단체의 선언서로서 더욱 투쟁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 나철 선생의 깨달음: 나철 선생이 서울에서 백전 도인에게서 받은 두 권의 책에서 얻은 깨달음이란 “국파민멸(國破民滅)의 근본 원인은 사대주의 역사교육에 있으므로 이것을 타파하고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을 되찾아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는 것이며, 중국식 사대주의의 국파민멸에서 벗어나서 우리나라의 민족적 주체성을 되찾아야 함이 당시의 역사적 과제였다. 그러나 민족의식과 주체성의 회복을 논함은 식민지 시대에는 식민지적 통치의 철두철미한 증오와 탄압의 대상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나철 선생은 이러한 탄압으로부터 피하는 것이 우선이고 급선무였고, 그것이 만주로 가는 이유였다(정성환 전문기자, 「[문화역사이야기] 대종교와 독립투쟁의 대부 “홍암 나철을 찾아서”」, 『투데이광주전남』, 2024년 3월 13일 참조).
* 홍암 나철 선생의 동명이인: 홍암 나철 선생의 동명이인으로 나철(1986년 12월 24일 생~2023년 1월 21일 몰; 향년 38세)은 대한민국의 배우로서 연극배우이기도 했다. 1986년 12월 24일 경기도 고양군(현 고양시)에서 삼남매의 둘째로 출생해서, 신일중학교, 저동고등학교, 서울예술대학 연극과 전문학사를 졸업했다. UL엔터테인먼트 소속이었으며, 결혼해서 슬하에 1남을 두었다. 배우로서 출연작에는 영화에 2013년 『급격 우연 외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2014년 『그레코로만』, 『쉘터』, 『개의 역할』, 『손님』, 2015년 『러브레따』, 『에스프레소(에피소드 1)』, 『타이레놀』, 『메이드 인 차이나』, 2016년 『청춘과부』, 『팡뜨』, 2017년 『신과 함께: 죄와 벌』, 『1987』, 2019년 『극한직업』, 『뺑반』, 『유열의 음악앨범』, 2021년 『숏버스 감독행』, 2023년 유작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출연했다. 드라마 출연작에는 2013년 KBS 2 『삼생이』, KBS 2 『전우치』, 2016년 tvN 『굿와이프』, 『안투라지』, 2019년 tvN 『진심이 닿다』, 2020년 tvN 『비밀의 숲 2』, 2021년 『빈센조』, 『해피니스』, 2022년 OCN 『우월한 하루』, 『O’PENing-목소리를 구분하는 방법』, 『작은 아씨들』, 『약한 영웅 Class 1』이 있다. 출연 연극에서 2010년 안네의 일기』, 2011년 『타바코로드』, 2012년 『춘풍의 처』, 2013년 『꽃담』, 2014년 『햄스터』, 2015년 『철수영희』가 있다. 2023년 1월 21일 향년 38세에 건강 악화로 치료 중 별세했다. 빈소는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학교 장례식장이며, 발인은 1월 23일 오전 8시 30분 엄수되었고,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되었다. 평소에 지병은 없었다고 한다. 신장은 180cm이다. 2010년 연극 안네의 일기로 데뷔해서 여러 단편 영화와 독립 영화에 출연하고, 영화와 드라마에 단역, 조연, 그리고 성격 배우역을 소화해냈다.
그 외의 동명이인으로는 나철한의원을 운영하는 한의사 나철이 있다.
* 독립운동가 3부자 나철•나정련•나정문 가문: 나주 나 씨 한학자 집안 출신으로서 보성과 순천 등지 전남 지역을 기반으로 해서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했던 나철 선생의 두 아들인 첫째 아들 나정련과 둘째 아들 나정문 역시 아버지를 따라 대종교 활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탄압에 의한 임오교변으로 옥사했다. 3부자의 존재는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로서 민족 교육에 전념했고, 무장 독립운동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중심에 자리했던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가문이다.
나철 선생의 첫째 아들 나정련은 1882년 9월 17일 전남 낙안군 남상면 금곡리(현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 출생으로, 23세에 서울로 상경해 1909년 대종교 창시에 참여했다. 1914년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이주해 만주 조선족 동포들에게 대종교를 선교하고, 구룡학교 교장에 임명되어 민족 교육에 전념했다. 1922년 만주 길림성 밀산현 당벽진으로 이주해 북로군정서 기밀참모로 임명되어 군자금 모금, 군량미 조달, 독립군 모병 등의 활동을 했다. 1941년 대종교 총본사 소재 만주 길림성 영안현 동경성 발해촌에서 대종교 총본사 경의원 참의를 역임했다. 1942년 11월 19일 임오교변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만주 목단강성 목단강시 한양특별분구 액하감옥에 투옥되어, 1943년 8월 18일 옥사 순국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1945년 광복을 목격하지 못했다. 민족 종교 운동과 민족 교육, 그리고 무장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부친 나철, 둘째 동생 나정문과 함께 3부자 독립운동가로 기록되었다. 1968년 대통령 표창, 1991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나철 선생의 둘째 아들 나정문은 1892년 11월 28일 전남 보성 출생으로,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고, 19세에 김윤식의 집에서 거주하며 서울 소재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원산농공은행 2년 근무, 성진척식은행 6년 근무 후에, 1909년 1월 대종교에 입교해서 참교, 지교, 상교로 승직했다. 1942년 11월 중국 만주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영안현서, 목단강경무처에 구금되어 15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석방 후 3일 만에 1944년 2월 7일 별세했다. 나정문 역시 1945년 광복을 목격하지 못했으나, 민족 종교 운동에 투신해서 부친 나철, 첫째 형 나정련과 함께 3부자 독립운동가로 기록되었다. 1968년 대통령 표창, 1991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김명식 기자, 「[남도일보 광복 80주년 기획](7) 대종교 3부자 나철•나정련•나정문」, 『남도일보』, 2025년 9월 30일자 참조).
이들 3부자 독립운동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가문으로 남아 대대로 역사적인 귀감이 되었다.
* 대종교 남북 관계 성명: 2016년 9월 15일 홍암 나철 선생 서거 100주기에 대종교 총본산은 조건 없는 남북대화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홍암 서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홍암 나철 선생의 뜻을 따르는 대종교는 아래와 같이 천명했다. 요약하자면, 첫째 “겨레를 하나 되게 하라는 가르침에 따라 일촉즉발의 전쟁의 위기로 치닫는 남북간 동족간의 대립대결을 중단할 것,” 둘째 천만 이산가족이 상봉하도록 길을 열어줄 것, 셋째 남북 간 제2의 동족 간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결단코 반대하며, 남북 당국이 “홍익인간 정신에 입각하여 양 당국 간에 조건 없이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독립투쟁의 아버지’ 대종교 홍암 나철 서거 100주기―대종교 총본산 ‘조건없는 남북대화 촉구’ 성명 발표」, 서울의소리, <amn.kr> 참조).
* 홍암 나철 선생에 대한 학술 연구 성과: 홍암 나철 선생에 대한 학술연구정보서비스(RISS)의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 국내 학술 논문에는 신운용, 「홍암 나철 연구 100년의 성과와 과제」, 『국학연구』 19권, 국학연구소, 2015년 외에 185권이 있다. 국내 학위 논문에는 박진규, 「국학의 현대적 과제와 의의」, 국제평화대학원대학교 국내 석사 학위 논문, 2007년 외 16편이 있다. 단행본에는 박성수,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 북캠프, 2003년 외 167권이 있다. 연구 보고서에는 이승호, 『한국 근대 이후의 삼일철학에 관한 연구』, 한국연구재단, 2013년 외에 12편이 있다. <끝> <2025년 10월 27일, 나종혁 글>
* 참고 자료: 「나철」, 『위키백과』; 「나철」, 『두피디아』; 박현서, 「나철」, 『민족대백과』; 이원익, 「대종교가 없었다면」, 『미주현대불교』, 2020년 9~10월호, <www.blog.naver.com/>; 홍암 나철 대종사, 대종교 홈페이지, <http://www.daejonggyo.or.kr/html/jongsa1.htm>; 「독립운동가 홍암 나철 선생, 을사오적 처단을 꿈꾼 대종교의 창시자」, 국가보훈부 공식 블로그, <https://blog.naver.com/mpvalove/221131093978>; 「나철, 민족종교 대종교를 다시 일으키다」,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 go.kr/mobile/kc/view.do?levelId=kc_n400610&code=kc_age_40>; 장래혁 기자, 「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 재조명」, 『오마이뉴스』, 2004년 12월 15일; 「보성 단군을 중심으로 나라의 독립운동을 전개한 대종교의 창시자 나철의 고향 보성 벌교 금곡마을 홍암나철기념관」, 『현스바비큐아카데미』, <https://m.blog.naver.com/ejhyun20/222524933729>; 최평천 기자, 「‘독립운동 아버지’ 대종교 창시자 나철 선생 서거 100주기」, 『연합뉴스』, 2016-09-15; 「대종교」, 『민족백과』, 2025-10-27; 나철,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https://search.i815.or. kr>; 이양재, 「나철과 대종교를 주시한 [한국사회략설]」, 『통일뉴스』, 2023년 6월 19일자 참조; 배영대 기자, 「나철의 대종교에 관한 풀리지 않는 궁금증들」, 『중앙일보』, 2002년 7월 17일; 김영조, 「독립투쟁의 큰 등불 대종교 창시한 ‘나철’」, 『우리문화신문』, 2020년 12월 1일; 여운민 기자, 「[역사속의 오늘―12월 2일] 대종교 창시자 ‘나철 선생’」, 『미디어인천신문』, 2020년 12월 2일; 현동민 기자, 「[오늘의 역사] 대종교 나철, 일제 맞서 민족종교 지키려 자결」, 『인천투데이』, 2025년 9월 12일; 김명식 기자, 「[남도일보 광복 80주년 기획](7) 대종교 3부자 나철•나정련•나정문」, 『남도일보』, 2025년 9월 30일; 민인홍, 「대종교 총본사 청년회장, 개천절 만든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 『뉴스트리』, 2021년 5월 9일; 노세극, 「[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87] 대종교로 독립 꾀한 민족 종교지도자 홍암 나철」, 『매일노동뉴스』, 2020년 12월 14일; 김기훈 기자, 「대종교, 홍암 나철 대종사 100주년 추모 학술회의」, 『연합뉴스』, 2016년 9월 7일; 김영조, 「오늘 개천절, 단군을 교조로 받드는 ‘대종교’」, 『우리문화신문』, 2024년 10월 3일; 윤동주 기자, 「[오늘의 역사] 나철과 오기호 국권수호운동 대종교 창립」, 『인천투데이』, 2025년 2월 5일; 정성환 전문기자, 「[문화역사이야기] 대종교와 독립투쟁의 대부 “홍암 나철을 찾아서”」, 『투데이광주전남』, 2024년 3월 13일; 「대종교 개조 나철 순교•순국」, 『이 풍진 세상에』, 2025년 9월 11일, 티스토리 홈페이지 참조; 정성환 전문기자, 「일제강점기 독립투쟁의 뿌리 “홍암 나철의 대종교”」, 『투데이광주전남』, 2024년 3월 4일; 김삼웅, 「[김삼웅의 인물열전] 독립운동 앞장선 대종교 중광 나철」, 『오마이뉴스』, 2024년 12월 13일; 조현 종교전문기자, 「“독립운동 정신적 지주 ‘대종교의 혼’ 아직도 간도 떠도니 통탄스럽죠”」, 『한겨레신문』, 2021년 6월 14일; 「홍암 나철」, 『전통문화포털』, <https://www.kculture.or.kr>; 원익선 원광대 정역원 교무, 「독립운동 불씨된 나철의 순교」, 『경향신문』, 2018년 8월 3일; 김치관 기자, 「10만의 순교로 되살아난 민족의 영웅」, 『통일뉴스』, 2017년 7월 16일; 「‘독립투쟁의 아버지’ 대종교 홍암 나철 서거 100주기―대종교 총본산 ‘조건없는 남북대화 촉구’ 성명 발표」, 서울의소리, <amn.kr>; 장영주, 「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과 신의 날」, 코리안스피릿, <ikoreanspirit.com>; 윤한주 기자, 「나철의 죽음... 자살인가? 타살인가?」, K스피릿, <ikoreanspirit.com>; 하태민 기자,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 선생 재조명」, 『한국일보』; 기타 자료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