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분별지(無分別智, skt. nir-vikalpa-jňāna)>
마차푸차레(네팔, 6997m)
우리가 아는 지혜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겉모습이나 무엇을 근거로 해서 아는 분별지(分別智, skt. vikalpa-jňāna)이다.
이것은 조건에 따른 앎이다. 이것은 불확실하고 깊지 못하다.
다른 하나는 무분별지(無分別智, skt. nir-vikalpa-jňāna)이다.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 봄으로써 얻는 이것은 통찰력을 통해 얻는 지혜이다.
이것은 모든 사물이 상호의존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연기적 사고, 즉 바른 견해를 통해서 얻는 지혜이다.
구경의 깨달음을 성취한 자의 행은 무분별심의 행으로서
선악이 원융무애(圓融無礙)한 걸림이 없는 행이 있을 뿐,
스스로 악이니 선이니 하는 것을 떠나 있다.
불법의 최고 지혜인 진여지혜(眞如智慧)는
언어나 문자로 분별하고 헤아려질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무분별지혜라 한다.
즉, 반야지혜(般若智慧)를 무분별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여 모양은 형용할 수도 분별할 수도 없으므로
모든 생각과 분별을 초월한 참 지혜로서만 알 수 있다고 해서 무분별지라고 하며, 곧 공(空)을 뜻한다.
분별(分別, skt. vikalpa)이란 서로 다른 일이나 사물을 구별해 가르는 것을 말한다.
모든 사물과 존재의 본성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에 매달려 판단ㆍ사유ㆍ추론하는 의식작용을 말한다.
중생은 생멸심(生滅心)과 분별심(分別心)에 비추어 모든 사안을 생각하고 판단한다.
분별의식 속에 살아가는 게 우리의 평범한 인간들이다.
그런데 분별은 항상 집착을 낳는다. 분별심이 강하면 중생의 부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분별심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친다. 특히 우리가 가진 지식이나 경험 따위는 모두 분별에서 얻어진 것이기에
모두 버리라고 한다. 분별지로써는 사물을 바르게 볼 수 없다. 분별지는 사량 계교(思量計較)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분별지’라는 말이 생소하다. 사회 일반에서는 잘 쓰지 않는 말이다.
일반 사회는 모든 것을 분별해서 판별하고 취사선택한다. 오히려 분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회에 무분별이란 말이 통할 수 없다. 이러니 무분별이라는 말이 생소할 수밖에 없다.
무분별지(無分別智)라야 사물을 바르게 볼 수 있고,
진리를 크게 깨칠 수 있는데 말이다.
무분별지는 본래 마음에서 나온 지혜이기 때문이다.
무분별지는 분별에서 비롯된 모든 번뇌를 끊고
인식의 주체와 대상의 대립을 초월해서 얻는 절대평등하고 분별이 없는 지혜를 말한다.
무분별심으로 진리를 바르게 깨닫는 지혜가 반야이다.
따라서 무분별지는 근본지(根本智)ㆍ절대지(絶對智)ㆍ무루지(無漏智)와 같은 뜻이다.
그래서 ‘반야’를 무분별지라 한다. 무분별지는 곧 반야바라밀이다.
둘은 이름은 다르지만 뜻은 같다. ‘반야(般若)’는 일체법의 자성(自性)이 본래 공적(空寂)함을 증험하고,
그 실상(實相)을 직관해서 전여를 체득하는 것이다. 즉, 반야는 올바르게 진여를 체득하는 지혜이다.
진여(眞如)의 모양은 우리들의 언어나 문자로서는 어떻게 형용할 수도 분별할 수도 없으므로,
분별심을 가지고는 그 체성에 계합할 수 없다.
그리하여 모든 생각과 분별을 여읜 모양 없는 참 지혜
, ― 반야로만 비로소 알 수 있다. 이런 지혜를 무분별지라 한다.
불교에서의 분별(分別)은 곧 망상이자 번뇌이므로,
무분별(無分別)은 상대적인 견해를 취하지 않고,
분별과 망상을 떠나 지혜를 체득함을 뜻한다.
진리의 실체는 언어와 문자로는 표현하거나 분별할 수 없으므로
분별심을 가지고는 그 체성(體性)에 접할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생각과 분별을 여읜,
모양이 없는 참 지혜로만 진리를 알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따라서 분별로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고,
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분별지에 의지해야 한다.
중도(中道)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제일성으로 다섯 비구(五比丘)에게
“나는 중도(中道)를 깨달았노라”라고 이르시니 이것을 초전법륜(初傳法輪)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도란 다름이 아니라, 구경의 깨달음의 눈으로 본 구경의 진리인
만법의 참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여러 말이 필요 없이 간단히 말하자면,
만법의 참모습의 내용이 다름 아닌 중도이다.
사실 중도(中道)에 있어서 '중(中)'이라는 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바른 이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도에 있어서
‘중’이라는 것은 중생들의 견해가 상대적인 관점에 완전히 물들어 있기 때문에
이 상대의 관념을 타파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다.
중생은 근본적으로 무명으로 인해 나[我相]라는 관점에서 만법을 보기 때문에
남ㆍ여, 상ㆍ하, 빈ㆍ부, 귀ㆍ천, 선ㆍ악, 시ㆍ비, 주ㆍ객, 나ㆍ너 등으로
일체를 상대적으로만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을 변견(邊見)이라고 한다.
중도는 이런 변견을 극복한 진리를 지향한다. 때문에 중도에서 ‘중(中)’은 올바른,
참,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음을 뜻한다. 따라서 깨달음으로 본 만법의 구경의 바른 참모습은
상대적인 모습은 조금치도 존재하지 않고
일체법은 이사무애(理事無礙)하고 사사무애(事事無礙)해서
원융무애(圓融無礙) 한다.이렇게 원융무애한 만법의 참모습을 중도라고 한다.
중생은 깨닫지 못해 무명으로 만법을 보기 때문에 상대적 관념을 결코 벗어날 수 없으므로
중도를 벗어난그릇된 집착을 한다. 중생은 근본적으로 일체를 이 그릇된 집착으로 만법을 보는데,
바로 이렇게 중생이 무명으로,그릇된 집착으로 보는 것을 분별심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무명 중생이 보는 일체의 견해는 그것이 제 아무리 만겁토록 남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거룩한 행을 한다 해도 그것은 다 분별심의 행이고,
제 아무리 악행을 행한다 하더라도 구경의 깨달음을 성취한 자의 행은,
그것은 무분별심의 행으로서 선ㆍ악이 원융무애한 걸림 없는 행이 있을 뿐,
스스로 악이니 선이니 하는 것을 영원히 떠나 있다.
그것을 영원한 자유라고 하고 해탈이라고 하고 무여열반이라고 한다.
경의 깨달음을 성취하기 전에는 무분별지가 되지를 않는다.
구경의 깨달음을 성취하면 무명이 소멸해서 중생의 영겁토록
그릇된 집착을 놓아버리게 되므로 비로소 일체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비추어 본다.
이렇게 바르게 분별하는 것이 무분별지(無分別智)이다.
수행이 무분별지에 도달하지 못하면 바르게 분별할 수가 없다.
무분별이란,
마치 깨끗하고 맑은 거울이 모든 대상을 왜곡됨이 없이
있는 그대로를 명료히 비추듯 바르게 비추는 것을 말한다.
굽은 것은 굽게, 곧은 것은 곧게, 검은 것은 검게,
하얀 것은 하얗게, 세모난 것은 세모로, 둥근 것은 둥글게 비춘다.
거울에 때가 끼어 맑고 깨끗하지 못하면, 굽은 것도 곧게,
곧은 것도 굽게, 흰 것도 검게, 세모난 것도 둥글게, 둥근 것도 세모나게 비춘다.
중생의 탐ㆍ진ㆍ치는 마치 거울의 때와 같다. 그래서 이 탐ㆍ진ㆍ치로 인해 대상을
바르게 비추지 못한다. 탐ㆍ진ㆍ치는 마치 고요한 호수의 파도처럼 대상을 왜곡시켜 비춘다
수행을 통해 탐ㆍ진ㆍ치의 파도를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서는 대상을 바르게 비출 수 없는 것이다.
깨끗하고 맑은 거울과 고요한 호수는 무분별로 대상을 비추므로
모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왜곡됨이 없이 비추어 명료히 분별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에 탐ㆍ진ㆍ치의 중생심이 완전히 소멸해서 무분별지에 도달하면
모든 대상을 비로소 왜곡됨이 없이 명료히 분별하는 것이다. 무분별지에 도달한 자는 모든 것을 바르게 분별한다.
무분별지에 도달하지 못한 자라도 지혜 있는 자는 모든 것을 바르게 분별해서 행하기 위해 노력한다.
어떤 스님이 임제(臨濟義玄, ?~867) 선사에게 물었다.
“부처와 마군(魔軍)이 어떤 것입니까?”
“그대가 한 생각 마음에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 마군이며,
그대가 만약 모든 법이 생겨남이 없고, 마음은 허깨비 같아서,
더 이상 하나의 티끌도 하나의 법도 없어서 곳곳이 청정하다는 것을 통달하면 이것이 부처이다.
그러니 부처와 마군은 더럽고 깨끗한 상대적인 두 경계에 지나지 않는다.
산승의 관점에서는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다. 옛날도 없고 지금도 없다.
이것을 알면 그만이다. 오랜 세월 수행할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다.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어서
언제나 특별한 법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경에서 ‘설사 어떤 법이 이보다 나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다고 말한다.’ 했으니, 산승이 말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아리송한 말씀이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 굳이 보충 설명한다면 깨달음을 얻은 경계는 무(無)의 경계다.
유(有)의 경계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말도 설명을 위한 표현일 뿐 깨달으면 사실 아무 경계가 없는 것이다.
자다가 꿈을 꿀 때는 몽경(夢境)이 있지만 깨고 보면 몽경은 모두 사라져 아무 것도 없는 것과 같다.
이래서 ‘본래 아무 것도 없다[本來無一物]’는 말이 나온 것이다.
이와 같이 임제 선사는 “어떤 것이 부처와 마군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답해 주면서,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다”고 말했다.교에서 말하는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증득한
절대무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다는 말이다.
부처는 깨달은 성인이고 마군은 수행을 방해하는 무리다.
깨달음을 증득한 분상에서는 수행할 것이 없다. 수행할 것이 없을 때는 수행을 방해할 것도 없는 것이다.
임제 선사는 또 다른 장(章)에서 “도(道)도 닦을 것이 없다고 하면서 도를 닦는다고 하면
온갖 그릇된 소견만 다투어 일어날 뿐(若人修道道不行 萬般邪見競頭生)”이라고 했다.
이는 곧 분별하는 생각이 붙으면 도를 등지게 된다는 말인데,
이 장에서도 법이란 법이 특별히 있을 수가 없다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을 뜻한다.
또 법은 본래 없던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있던 법이 어느 때에 가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어느 때고 그대로이고, 있고 없고를 떠나 아무 일이 없는 것이다.
흔히 쓰는 말에 ‘능소(能所)가 끊어진다’는 말이 있다.
능(能)은 인식하는 주체이고 소(所)는 인식 되어지는 대상이다.
다시 말해 주관과 객관의 상대적인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능소(能所)가 끊어진, 주객(主客)이 없는 상태에서
나타난 지혜를 무분별지(無分別智)라 한다. 중도(中道)의 지혜를 말한다.
깨닫게 되면 이 무분별지를 얻게 된다고 한다. 분별이 없는 경지이므로 가타부타할 것이 없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다’ ‘수행할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다’고 한 임제 선사의 말이 이러한 차원에서 나온 말이다.
간화선의 교본(敎本)으로 알려진 원나라 말 몽산(夢山德異, 1231~1308) 스님 법문
〈몽산법어(夢山法語)〉에서도 “생각이 일어나고 없어지는 것이 바로 생사다(念起念滅卽生死).”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분별심 속에 생사가 있다는 말이다. 한 생각 끊어지면 생사가 없으므로
생사를 유발하는 원인이 생멸심(生滅心)이다. 이 생멸심을 벗어나는 것이 도에 들어가는 것이라 했다.
“밖으로 모든 반연(攀緣)을 쉬고 안으로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墻壁)과 같아야만
도(道)에 들어갈 수 있다(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墻壁 可以入道).”라고 했다.
즉, 달마(菩提達磨, ?~528) 대사가 제자 혜가(慧可, 486~593)에게 도에 들어가는 방편을 일러준 말이다.
또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도 학문과 도를 비교해 말하면서 학문은 쌓아 늘려가는 것이지만
도는 비워 덜어가는 것이라 했다. 분별은 늘리는 것이고 무분별은 분별이 없는 것이니까
텅 비어 아무것도 들어있는 내용이 없는 것이다.
「서로 비교하는 것은 고통을 준다. 열등하다는 생각 우월하다는 생각이 갈등을 준다.
차별하지 않은 것이 지혜다. 차별하지 않은 지혜를 무분별지(無分別智)라 한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은 존재,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지만 왼손이 쓸모없다고 차별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오른손과 왼손은 늘 함께 평화롭게 지낸다. 왼손과 오른손을 서로 잘났다고,
싸우지 않는다. 오른손으로 망치를 잡고 못을 치다가 오른손이 잘못해 왼손을 때려 다쳤다고 하자,
왼손이 아프니 자연적으로 오른손이 부여잡아 만져준다. 오른손이 왼손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왜? 왼손을 보살피기 위해 오른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른손이 왼손을 보살펴 주었으니까, 기억하고 고맙게 생각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 오른손은 왼손을 분리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왼손과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망치에 맞은 왼손도 오른손을 원망하지 않는다. 차별하지 않음이 양손에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조화롭게 같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도의 이치다.
아버지와 아들딸과 어머니도 똑같다. 결코 싸워서는 안 된다. 왼손을 괴롭게 하면
오른손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사이도 그와 같이 지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 무불 스님.
결국 무분별의 지혜가 중도의 지혜요, 반야의 경계이며, 불성, 해탈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