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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정(李光庭)은 연안 사람으로 아호는 해고(海皐)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양주목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매 한 마리를 기르면서 사냥꾼을 데리고 산에 가서 꿩 사냥을 자주하였다.
하루는 사냥꾼이 한번 나가더니 하루 밤을 지나고 돌아왔는데 발을 절며 걷는 것이었다.
이광정은 괴이하게 생각하여 물어보았다.
“왜 다리를 저는고?”
하니 사냥꾼이 웃으며 대답하기를
“어제 매를 놓아 꿩을 사냥하였는데 꿩은 달아나고 매도 도망쳐 버렸습니다. 사방으로 수색하였더니 매가 어느 마을 이 좌수(座首 : 조선시대 주. 부. 현. 군. 현 향청의 우두머리)집 문밖 큰 나무위에 앉아있지 않겠습니까! 간신히 매를 불러서 어깨에 앉혀가지고 막 돌아 오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 집 울타리 안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나기에 울타리 사이를 비집고 엿보니 미끈하고 건장한 다섯 처녀가 씩씩한 남자와 같은 모양으로 서로 손을 잡고 이쪽으로 오는데 그 기세가 어찌나 사나운지 혹 얻어맞을까 겁이 나서 급히 몸을 피하려다가 발이 미끄러져 돌에 부딪쳐 상처를 입었습니다. 때는 이미 해가 져서 주위가 어두컴컴하여 마음이 몹시 심란해 우거진 울타리나무 밑으로 피신하여 뜰 안을 가만히 엿보니 그 다섯 처녀들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한 처녀가 ‘오늘은 마침 제일 한적하고 심심하니 태수놀이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니 모두 좋다고 찬성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머리채가 땅에 닿을 듯이 길고 나이 30을 훨씬 넘어 보이며 얼굴은 크고 창백하며 꽤 늙어 보이는 처녀가 돌 위에 높이 앉고 그 밑에 모든 처녀들이 각각 좌수, 형방(刑房 : 조선시대 지방관아 6방의 하나. 형정에 관한 사무를 맡음), 급창(級唱 :군아[郡衙 : 고을의 수령이 사무를 보던 관아.]에 속하며 원의 명령을 받아 큰소리로 전달하는 일을 맡은 사령), 사령(使令 : 관아에서 심부름 하던 사람) 등을 칭하고 그 앞에 시립하니 이윽고 태수처녀가 영을 내립디다.
‘좌수를 잡아드려라.’
하고 호령이 떨어졌습니다. 형방처녀가 급창처녀를 불러 분부를 전하니 급창처녀는 또 사령처녀를 불러 위의 분부를 전해서 영을 받들어 좌수처녀를 잡아와 계하[階下 : 섬돌 아래]에 꿇리었습니다.
태수는 큰 소리로 그의 죄를 낱낱이 열거하였습니다.
‘혼인은 사람의 인륜지대사인데 너의 막내딸의 나이 20을 훨씬 넘도록 출가를 시키지 못하고 있으니 그 위의 형들은 이로써 가히 알겠다. 너는 어찌하여 너의 다섯 딸로 하여금 규중[閨中 : 부녀자가 거처하는 방]에서 헛되이 늙게 하여 인륜대사를 다 함께 저버리도록 하는고. 너의 죄는 사형에 처해야 마땅할 지로다.’
하고 추상열일[秋霜烈日 : 가을에 내리는 찬 서리와 여름의 뜨거운 태양이라는 뜻, 형벌이 엄하고 권위가 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같은 준엄[峻嚴 : 조금도 타협함이 없이 매우 엄격하다.]한 논죄[論罪 : 죄과를 논의하여 형을 결정하여 적용함.]가 떨어졌습니다. 좌수가 부복[俯伏 : 고개를 숙이고 엎드림]하여 아뢰었습니다.
‘백성이 어찌 인간의 윤기[倫紀 : 윤리와 기강]의 중함을 모르오리까마는 그러나 백성의 살림살이가 워낙 가난하여 실은 혼인 치룰 비용을 마련할 길이 없어 이렇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태수가 다시 말하였습니다.
‘혼인은 양가의 빈부를 헤아려서 할 것이지만 의복의 절차에 있어서는 빌려서 해도 무방하고 작수성혼(酌水成婚)하는 것도 예(禮)에 안 될 일이 없으니 너의 말이 대단히 우활[迂闊 : 사리에 어둡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다.]하여 현실감각에 미치지 못함이 많다.’
하고 또 신랄하게 꾸짖었습니다.
좌수가 또 아뢰었습니다.
‘백성의 딸이 한 두 사람이 아니오니 신랑감을 구할 데가 또한 없습니다.’
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태수가 또 크게 꾸짖어 말하였습니다.
‘네가 만약 성실히 신랑감을 구한다면 어찌 얻지 못할 까닭이 있겠느냐. 이 고을 안 소문으로 말하여도 살구나무 골 송 좌수, 오 별감(別監 : 좌수의 버금자리), 이 창감(倉監 : 향소의 창고 감독직), 앵두나무 골의 안 좌수, 자두나무 골의 김 별감 집에 다 신랑감이 있으니 진실로 생각이 있다면 너의 다섯 딸의 배필로 정할 수 있을 것이고 이 사람들도 너와 더불어 다 집안의 지체나 덕망이 같으니 어찌 안 된다 할 이유가 있느냐?’
고 하였습니다. 좌수가 또 대답하였습니다.
‘삼가 지시하신대로 통혼을 하려해도 상대방에서 반드시 저의 집이 가난함을 핑계 삼아 승낙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 하였습니다. 태수가 또 말하였습니다.
‘너의 집부터 주선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또
‘네 죄가 태형에 처함이 마땅하나 이제 처음이라 십분 참작[參酌 : 이리저리 비추어 보아서 알맞게 고려함]하는 것이니 바로 속히 정혼해서 성례[成禮 : 혼인의 예식을 지냄]할 것이지 만약 그렇지 않으면 뒤에 엄벌에 처할 것이니 그리 알렸다.’
하고 끌고 나가라고 명한 뒤 다섯 처녀들이 서로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는데 그 정상이 포복절도[抱腹絶倒 : 배를 그러안고 넘어질 정도로 몹시 웃다]할 지경이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날이 저물어 여관을 찾아가서 하룻밤을 자고 이제 돌아오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광정이 크게 웃은 뒤 향청의 관리를 불러 이 좌수의 내력과 가세 형편, 그리고 딸의 수를 물으니
“그는 이 고을 향청의 우두머리에 있는 사람이나 가세가 너무 가난하고 아들은 없으며 딸만 5형제 두었는데 빈한한 까닭으로 과년[瓜年 : 결혼하기에 적당한 여자의 나이]한 딸들이 다 혼기(婚期)를 놓치고 아직 성혼을 못하고 있는 처지입니다.” 한다.
이광정은 즉시 예방 관리로 하여금 이 좌수를 청해 오도록 하니 얼마 있지 않아 이 좌수가 와서 사또를 뵈었다.
이광정은
“그대는 일찍이 향소[鄕所 : 유향소(지방의 수령을 보좌하던 자문 기관)]의 수좌(首座 : 수석)를 역임하고 일을 잘 처리했다고 들었기에 내가 그대와 더불어 공사를 의논하고자 청해 오라 하였다.”
하고 따라서
“자녀가 몇이냐”
고 물으니 이 좌수가 대답하기를
“백성의 명도[命途 : 운명(運命)과 재수]가 기궁[奇窮 : 몹시 곤궁함]해서 아들 하나도 못 두고 다만 쓸모없는 다섯 딸만 두었습니다.”
한다.
“이미 성취해서 시집을 보냈는가?”
하고 이광정이 물었다. 이 좌수가 고개를 떨어뜨리며 대답하였다.
“아직 한 아이도 출가시키지 못했습니다.”
한다. 그러면
“각각 나이 몇인고?”
하니
“맨 끝 아이가 20이 넘었습니다.”
한다. 이광정이 사냥꾼으로부터 들은 태수 처녀의 분부한 내용으로 하나하나 물어보니 그 대답이 과연 좌수 처녀가 대답한 것과 같았다.
이광정은 살구나무 골, 앵두나무 골, 자두나무 골의 좌수 ,별감, 창감의 집을 하나하나 짚으며 물었다.
“왜 통혼해 보지 않았느냐?”
고 하니 이 좌수 대답이
“그 사람들은 반드시 이 사람의 집이 가난한 것을 이유로 원치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광정은 결연한 어조로
“이 일에 대해서는 내가 중매를 설 것이니 출가시키도록 하오.”
하고 이 좌수를 돌려보냈다. 곧 다섯 향소의 좌수, 별감, 창감을 청해서
“그대들 집에 신랑감이 있다고 하는데 그런가.”
하니 모두가 있다고 하였다.
“청혼 한데가 있는가?”
하니 모두가
“아직 혼처를 정한 데는 없다.”
고 하였다.
“내가 들으니 배나무 골 이 좌수 집에 딸이 다섯 있다고 하는데 생각해보니 그대들의 가문의 지체나 덕망이 다 비슷한데 어째 혼인을 맺지 않는고. 내가 중매를 서고 또한 주혼(主婚)이 될 것이니 그대들의 의향은 어떠한고?”
하고 그들의 의중(意中)을 떠 보았다.
다섯 사람이 다 주저하면서 응하지 않으니 이 광정이 정색하여 입을 열었다.
“이쪽 향소나 그쪽 향소의 문호가 서로 맞는데 그대들이 하고자 아니함은 다만 빈부의 차를 비교해서 그러는 것이니 그러면 빈한한 집의 딸은 앞으로도 머리를 땋은 채로 늙어 죽어야 하는가? 내가 이미 발설하였으니 그대들이 어찌 감히 쫓지 않을 것인가”
하고 곧 오폭 간지[簡紙 : 편지 쓰는 종이]를 꺼내서 다섯 사람 앞에 내밀어 놓고 각기 신랑감의 사주[四柱 :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의 네 간지(干支). 또는 이에 근거하여 사람의 길흉화복을 알아보는 점.]를 쓰라고 명하였는데 사또의 말소리와 얼굴빛이 엄한 기색을 띄니 다섯 사람들은 황공하여 엎드려서
“삼가 하교하심을 받들겠나이다.”
하고 각각 사주를 써서 바쳤다.
이광정이 신랑들의 나이 순서에 따라 그 처녀들의 차례를 정하고 주안상[酒案床]을 내어 대접하였다. 그리고
“이 좌수 집 혼인에 드는 비용은 내가 댈 것이니 본 집에서는 염려하지 말라.”
고 분부하였다. 그리하여 사람을 시켜 즉시 택일하니 혼례식을 거행할 날짜가 10 여일 뒤로 정하여졌다.
이광정이 포백(布帛 : 베와 비단)과 양곡, 혼인 비용에 쓰일 돈까지 후하게 보내주어서 혼수[婚需]를 갖추게 하고 혼례일에는 이광정이 이 좌수 집에 직접 나가서 병풍과 차일 등 혼례식 설비로 관아의 물건을 빌려주어 설치하게 하고 혼례 탁자 다섯 개를 뜰 가운데 설치해 놓고 다섯 신랑과 다섯 신부가 일시에 예를 행하니 인근 동리에서 구경꾼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감탄하고 존경하는 말들이 뜰 안에 가득 하였다.
이광정의 가세가 번화하고 뒤의 영달[榮達 : 지위가 높고 귀하게 되다]은 다 이 같은 적선에 연유한 것이어서 청백리[淸白吏 : 조선 시대, 이품 이상의 당상관과 사헌부ㆍ사간원의 수직(首職)들이 추천하여 뽑던 청렴한 벼슬아치]에 기록되고 관직은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기사(耆社 : 조선시대 문관 정2품 이상으로 70세 넘은 노인이 들어가 대우 받던 곳)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