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탄의 과대망상 一、妄想「一」 中心軸點은 心臟(심장) 과도같아 하루가 없어 (시간개념을 주입하여 논할 수 없다) 쉴 겨를이 없다 하리라。심장은 신진대사의 영향에 따라 그 박동의 원급을 달리할지언정 쉬지 않는다。내마음에 오는 듯한 (깨우쳐 주기 위하여 그 상상의 나래로 그린 환영이 도달하는 것 같은 것을 말함 이를 같다 如來軸이라 命名해 봤다) 또한 이와 같으리니 공간 거리 시간 설정의 영향에 따라 속도의 원급은 있을지언정 무위유동이라 無碍하니 쉴 겨를이 없다 하리라. 그 生命이 다할 때 쉰다 할 것이나 그 때가 언제인가? 쉼이 아니라 붙잡아 메고자 하던 꿈과 맴돌아놀다 싫증나 풀린 것이지 그 軸은 언제나 저 푸른 창공처럼 쉬지 않는다. 그 힘은 싱싱한 살아 있는 物體의 활동과도 같으며 언제나 꺼지지 않는 등불 멈춤 없는 계곡물°항상피어 있는 시들지 않는 볼적마다 새로운 꽃과 같으니 그 싱싱한 힘은 어디서 왔나。원래 자체적으로 생겨있다 하더라도 느껴주지 않음 없는 것과도 같으니 느끼는 이의 감관에서 생겨왔다 할 것이다。감관을 가진 자는 宇宙와 그에 存在하는 모든 森羅이다. 억겁으로 피었다지는 꽃 역시 자자손손 영생불멸 한순간에 지는 소멸된 것처럼 보여도 그 種은 떨어져 변이 될지언정 영원히 쉬지 않나니 그 힘은 어디서 왔나. 저 푸른 창공같은 軸에서 받아서 왔고 느껴서깨달아 왔으니 이것과 저것은 同平念。(같은 기움없는 생각) 없는 것 같으니 實은 없는 것이다。없음 속에 움직임이니 저 사람은 實은 걸음을 걸어도 그 사람조차 없는 것이다。그런데도 허깨비 환영처럼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사람의 정신생각에서 그려서 생겨서 갈 뿐인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 있는 것인 것이다.참 이상하지 않는가? 없는 것인데 말이다.모든게 없는 것이다.생각이 허공중에 집하고 있는 것 같기도하고 그 아닌 것 같기도 하나 이 생각이 없다해 놓곤 그려보고 있는 것이다.마치 깨끗한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이 말이다. 공간의 보는 감은 허상이고 큰소리『와 ㅡ』하는 聲粒子인주도 모른다。이것이 정신분열적 落書일 뿐 무엇을 뜻하는 글이라 할게 없다。왜|그렇게 세상생김에 관심이 많은가? 이는 확실한 손에 쥐어주는 것같은걸 몰라서 그럼인 것이다。저 꽃과 諸森羅。人間 등은 모다 한뿌리 軸으로부터 일 것이다.이를 神好輩들이 神主 生主 造主라 할지 모르겠다. 二、妄想「二」 欲望을 버린 것을 大欲望이라 한다. 왜냐하면 그 理想을 追從하는 무리가 늘어나 큰 공감대가 형성되면 큰 힘 또한 따라 生成되어 世上事를 左之右之하게 되기 때문이다.그래서 大欲望이라 한다. 즉 自身의 理想으로 世上을 支配하겠다는 것이니 棄(기)欲望은 허구에 찬 僞善의 理想인 것이다.그러므로 物事를 直示하여 바로 본 상태가 참 즉 진실된 實相觀點이라고 할 것이니 허구에 찬 관점은 사탄관점이 됨인 것이다. 생각하는 것은 기웃거리는 것이니 삿된 것이라 따라서 그 생각을 담고 있는 정신 및 육신의 행동도 되게 되는 性質로 化하여 있는 것이니 所謂 생각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사람은 사탄의 魁首家(괴수집)인것이다。사람 외에 단순한 본능적 활동 및 생활을 위해 도구를 잡는 원숭이나 수달처럼 간단한 思考만을할 수 있는 것 등 如他 諸森羅物事는 實相관점이므로 산、산。물、물인 것이며 네발 딛고 있는 동물 및 두발 딛고 두 나래로 날아 제짓거리 하는 금수는 실상관점속의 物이라 할 것이다. 三、妄想「三」 사람이 감정을 억제치 못하여 행동하는 것은 그 時刻때의 사탄의 作亂이니 정신이 마군이의 집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사탄발동하면 魔群이 湧(湧) 躍 家가 된다. 四、妄想「四」 J 道는 헤아리는 길 (헤아리게 하는 길)이다. 헤아리는 것은 갸웃거리는 마음 굴리는 생각으로부터이니 삿된 것이나 삼라에 덕이 될 수도 있다。어느 經文 한 구절을 빌린다면 (이것이 작문이 아니라 남에 글을 벳기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만인을 구제하는 것과 같은 法。그빛이 만배! 누구를 선택하느냐는 지혜로운 슬기에 있다。즉、福있는 자를 알아 봄에 있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러한 지혜로움은 어디서 오나 착하고 어진 성품이 깃들어 있는 마음 그릇에서 헤아리는데서 온다.이는 또 어디서 오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주어진 여건 즉 物事에 대한 바른 관념을 갖고 임해서 司命所任을 다할 때 생길 수 있는 개척한 運命에서 온다 할 것이니 이를 볼진데 운명 또한 돌고 도는 物事劫의 누적에서 오니 어찌 삶에 최선을 다하지 않을까이다.따지고 보면 부귀가 이유가 있고 비천함에 처한 것이 이유가 있으니 혼합해 있으나 순서대로 나타나 보이는 것이 그렇게 뵈이는 것이다。福은 힘을 갖게 되는 힘을 쓰게 되는 근원이라 할 것이다. 五、妄想「五」 一心은 굳건한 것이고 二心은 헤아리는 것이니 어질고 빼어난 슬기로움이라 뉘를옳다 그르다 선악을 논할 것인가? 충신은 불사이군이요 열여는 불경이부라 하는 것은 굳은 지조만을 가르킴만이 아니다。또한 頃國 敗身등 破落 衰하는 자와는 義를 지키기에 앞서 같이 더 불지 않는다 하니 불변과 변통 경우와 도리 時代的追以 背景 등은 當面한 世態의 序를 지키기 위한 방편 때문에 (以行不以行 固守 追從 할 것인가와 전반적 흐름이 그렇게 돼 있는 것을 시대적 배경이라 함)이니 하나를 쓰고 둘을 쓰기도 함은 그 處한 立長을따름인 것이다. 六、妄想「六」 運命家는 逆天者인가? 그렇치 않다.秘藏의 道를 밝히는 것은 人類를 利롭게 함에 뜻이 있는 것이다.神權의 侵犯이 아니라 神의 行道에 障碍를 덜어 神行이 圓活하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주제 넘은 일이라 할 것이나 覺性한 如來들이 아니면 그 누가 그런 일을 하리요.神位에서 떨어진 사악한 잡동산이나 蒺藜(질려)를 만들어 荊兢에 헤매이게 하고자 하지 참 神은 그러함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누구를 役事시켜 고닮게 할까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모두가 좋은 방면으로 균등하게 발전되면 저마다제 위치를 지켜 자기 일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리라°달갑지 않은 것을 떠맡아 하는게 곧 질곡이니 그를없애는게 운명가의 할 일이라 할 것이다. 누구나 운명을 心身一致로 좋게 태어나면 어려운 삶이 없을 것아닌가? 종사하는 業에 만족감을 갖고 있지 않는 자가 많다 한다。생애의 모든게 흡족치 못하다 한다。분수적인생각과 그 생각에 의한 행동을 하게시리 심신이 태어나면 어려운 삶이 없다 할 것이나 그래도 생각의 미련 여운은 있으니 분수적인 소심가는 작은 그릇、발전이 없다는 것이다。풍요는 게을러져 도태를 가져오고 역경은 헤쳐 나아가는 속에 부흥을 가져온다는 논리이다。이 세상은 고달픈 삶속에 연속성을 띄게 되니 어쩔수 없다는 것이다.그래도 어떻게 하면 낳아진 삶을 만들을까? 하는 연구는 계속 되어야 한다 할것이다. 七、妄想「七」 法은 왜 그렇게만 되어야 하는가? 이는 제목이다. - 왜|ᆢ 남을 저 구멍에 밀어넣고자 하는가? 그게 아니라 본의아니게 所任이나 實利를 추구타 보니 의외의 편차(염두에 미쳐 계산치 못한 差)가 생겨 그렇게 되는 것이지…。 漁夫는 고기를 잡되 시기를 가리고 장소를 잘 선택하고 도구를 그 고기에 맞는 것을 사용한다.그렇게 갖추었더라도 혹 실수하면 어떻할까 하는 도량을 갖고 있다。쉽게 말해 산란기를 가리고 어떠한 이유로 고길 잡질 말아야 할 곳엔 가지 않고 혹 치어가 잡혔으면 방생한다.모든 것은 度量을 갖고 順利를 따른다. 只今世上의 秩序維持를 위한 法이란게 어디에다 언덕하였는지 모르겠다。자연섭리에다 언덕하였는가? 도덕 순리에다 근본을 두었는가? 法은 앞서의 어부와 같지 않다。法은 그물이 되어 고기를 잡고자만한다. 모멸감을 무릅쓰고 용서해달라고 메어달려도 어느 못난 고기가 잡혀서 도마위에서 팔딱팔딱 뛰느냐는 式이다。법은 눈이 없고 집행하는 사람은 눈이 있다。재량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여탈권이 어디까지인가? 徒是 그 사람의 마음씀에 있음이니 法과 고기는 요리도구와 요리 대상일 뿐 아무런 힘이 없다. 유유작작 大江에 노니는 큰 고기도 튼튼하게 짠 그물을 던지면 잡히게 마련이고 날쌘 범도 함정을 파면 빠지게 되고 약삭빠른 토끼도 올가미를 설치하면 잡히게 마련이다。그들이 무슨 죄인가? 단지 기름진 몸둥아리를 가졌다는 것 뿐이지… 여기 열사람이 있다 일곱 개의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하나씩 먼저 차지하는 사람만이 질서를 지키고 法을 지킨 것이고 그렇치 못한 사람은 무질서하고 위법이라 한다면 할 적마다 세사람은 위법이 될 것이니 고기잡는 法이 이같으면 여반장이라 할 것이다. 흡사 학생들을 다름박질시켜 삼등까지만 상을 주고 그 나머지는 모두 탈락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法이 서로간 싸움질하여 차지할려고 하는 무질서 혼란만을 加重시킬 것 아닌가? 또한 그러함 속에서 국가의 발전 사회집단의 번영 개인의 實利를 가져온다 할 것인가? 이는 조그만치라도 執權勢한자의 強辯일 뿐이다. 또한 例로 밤은 위법이고 낮은 準法이다 한다면 한곳에 뿌리박고 있는 저 나무는 밤마다 두들겨 맞아 枯死하고 말 것이다. 뱀이 여러 마리가 기어간다。하나、둘、셋 하고 셀 때까지 내 앞에서 없어지지 않으면 이 칼로 내려친다 한다면 하나 둘 셋 하고 내려치면 꼬리가 끊어지는 놈에 머리가 박살나는 놈에 몸이 반토막이 나는 놈 등 여러 형태일 것이다。흡사 풀단을 작두로 쓸듯 말이다.그 놈에 날쌘 칼이 언제 떨어질줄 알고 몸을 사릴 것인가? - 그저 모든 뱀들은 언젠가라도 칼밥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法이 완력있는 자에겐 고개돌리듯 휘돌아가 못본체 하고 힘 없는 자에겐 날아오는 살대처럼 꿰뚫는다면 힘없는 중생은 살길이 막연하리라。그물은 작은데 포획할 고기가 원체 많다 한다면 그 그물은 있으나마나 한 것이요 오히려 많은 고기들의 살아가는方法을 터득케 하리니 항시 그물을 던져도 죄악이라 조목지은 덤이는 山같이 불어나리라. 실은 그 그물이없으면 그 죄악이라 하는 것도 본래 없었던 것이다. 실리를 취하고자 하다보니 생겨났을 뿐인 것이다.누구를 위한 실리인가? 명분은 크게 내걸지만 실제에 있어선 거저 놀고 먹고 세상보내기 무료하여 놀이 거리로 전락되는 수도 있어 그 피해는 전체에 미치고 쌓이는 원성은 夫字形을 이루게 될 수도 있는 문제인 것이다. 八、妄想「八 漁夫는 고기의 位致에 있지 않다。(그 事情 그 형편 그 處한 立長을 잘 모른다는 뜻) 어부의 위치에 있다면 굳이 고기의 위치를 필요로 하겠는가? 良心을 버리는 것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자는 良心)을 버릴이유가 없다。왜냐하면 그 지위를 부여받음과 同時에 갖은 實利나 혜택을 보장받기 때문이다。(※ 그렇치만도 않다. 사람의 심리가 보다 一定치 않아 소화 못시킬줄 빤히 잘 알면서도 장래를 대비한답시고 탐욕을 일으켜 양심을 버리게 되는 수도 있고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견물생심에서 그릇됨으로 기울게 되는 것이다。이렇게 해서 그 심신을 황폐화시키는 비수가 다달음을 미처 깨닷지 못하는 것이다. 所謂 不實하고 不足 不平 不滿이 많은 열등한 者가 저들 보기에는 살찐 고기처럼 부정 부패를 저질르는 위치에서지 어느정도 욕구가 해소되어 삶의 영위에 큰 지장이 없는 자는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좀도둑 같은 행위는 하지 않는다。(그래도 양심을 버리는 자는 쓸데없는 탐욕이다) 어부는 고기를 잡아먹고산다.따라서 어부를 먹여살리기 위하여 고기가 있다는 궤변같은 역설적 논리가 成立된다。먹고자 하는 어부가 없다면 고기는 있으나마나 무용지물 설령 고기가 있다 하더라도 없는거나 마찬가지다. 사람이 이유없이 貪하지 않는다.눈앞에 탐물이 있기 때문이다。견인차 역할을 하는 자들은 이른바 어부의 위치에 있는 자들이다。어부 되보고자 고기가 있어 고기 노릇하는 것이다。뒤집어 쓴 탈이 한계를지어 되고자 하는 길이 막연하니 혹 잡혀 먹히어서라도 어부 되보고자 함이요 길이 막연하니 이리 뛰고저리 뛰는 것이 고기의 生業 本分이요 그러다가 잡히면 먹혀주는 것이다. 끝없는 貪慾이 宇宙를 이끌고 가면서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지도 모른다.이것이 治者를 부정하고 무정부주의 視하는게 아니다. 질서유지의 名分으로 어부는 고기를 적절히 요리하여 서로간 그 씨가 없어지지 않게 하고 있는 것이다. 고기가 사람되었다면 뭐하러 또 고기노릇 하고 싶은 생각 있겠는가? 갖은 오욕을 뒤집어 쓰고 힘이 다하여 죽는 한이 있더라도 버리는 것은 해탈갈구가의 원을 들어 주는 如來이기 때문이니 여래가 아니면 그 누가 양심을 버릴 것인가? 그렇다고 棄良心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원하는 자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본연의 양심의 實體를 論하라 한다면 양심은 연약하게 만드는 주저하게 겁쟁이로 만드는) (비수와 같은 사탄의 집인 것이다. 고결한 체 하게 하는 僞善의 터로 어느면으로 가증스럽기까지 하다。(自己合理化의 以往은 결백한 바에야 하는 양심이란게 있어서 과감한게 아니라 僞善에 속임 받아서 과감해지는것이다. 버린다는 것은 승패를 떠난 마음이니 如來위에 설 자 없나니라. 보살이라고 구원에 손길 닿기를 여삼추같이 하는데 여래가 그 갖은 더러운 허물을 써주지 않으면 누가 뒤집어 써줄건가? 여래는 자기 일을 하고 있을 뿐이며 자기 일을 하는 자를 여래라 한다. 여래는 갖은 걸 담은 그릇이다.그 육신과 마음과 森羅 제것을 담는 그릇으로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九、妄想「九」 온갖 諸書를 다 뒤척거려 봐도 어디가면 황금항아리가 묻혀 있으니 너 가져 가라는 말은 없고 또 어면 휘미진 길에 가면 뒤집어쓰면 고관대작 되고 입신양명하고 사람마다 칭송하고 제격을 갖춰 훌륭하다추앙하는 감투가 떨어졌으니 너 줏어 쓰거라 하는 말도 없으니 이는 왜 그럴까? 그런 말씀이 도대체왜 없는가? 잠깐 생각해보면 없는 이치는 自明하다.그런말 있을 턱이 있는가? 그런게 있으면 저할래기지 어느 선심쓰는 上帝나 부처님이라고 남줄턱이 있겠는가? 그렇더라도 금항아리를 깨개 하고 감투를 뒤집어 쓰게 할 먼저 묻고 떨어트리고 말 퍼트리는 자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그 묻고 떨어트리는 심정으로 이 글을 집필해 보는 것이다. (※ 痴愚한 번민만 늘어놓고 있는 것을 정리한답시고 정리한 것 같다。九八年一月九日朝에 정리한 걸、검토하면서 附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