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비석의 이름은 무엇인가?
본문과 서체가 다르게 두전에 전서체로 새겨진 암호같은 글씨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지만 한문은 아홉글자인데 당자를 읽어내지 못해 "□해동고진감선사비"로 번역한것도 있고 김일손과 유몽인 선생은 쌍계사에 있는 옛 진감선사비로(쌍계사고진감선사비-雙磎寺故眞鑑禪師碑)로 읽었다.
양(敭)를 닮은 첫글씨가 당(唐)의 고자(古字) 라는게 밝혀졌다.
(유)당해동고진감선사비에서 글자배열을 위해 유(有)자가 생략되었고
해동(신라국)에 있는 진감선사비로 해석하면 되겠다.
시대에 따라 전서체는 다양한 형태로 변한다. 지금은 양(敭)자이나 양으로 읽으면 무의미한 글자가 되고, 당시에 당(唐)으로 사용했다니 비문의 본문 첫머리에 나오는 유당(有唐)에서 왔음을 짐작할수있다.
조선시대는 명나라를(유명), 고려시대에는 원나라를(유원) 사용한것과 같은 맥락이다.
참고 : https://blog.naver.com/lyg4533/221534418451
● 김일손_속두류록(續頭流錄) 1489년
1489년 4월26일, 갑인일
5리를 가서 시내를 건너는데 수석(水石)이 늘어서 있었고 동쪽으로 1리를 가니 두 시내가 합류하였다. 두 바위가 마주 대하여 서 있는데 ‘쌍계석문(雙磎石門)’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광제암문’이란 글자와 비교해보니, 크기는 더 커서 말〔斗〕만 하지만, 글씨체는 유사하지 않아서 아동이 습자(習字)를 한 것과 같았다.
석문을 지나 1리를 가니 귀부(龜趺)와 이수〔龍頭〕가 달린 옛 비석이 있었다. 그 비석의 전액(篆額)에는 ‘쌍계사고진감선사비(雙磎寺故眞鑑禪師碑)’라는 아홉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끝부분에 ‘전서국도순관(前西國都巡官) 승무랑(承務郞) 시어사내공봉(侍御史內供奉)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신(臣) 최치원이 교서를 받들어 찬하다’라고 씌어 있었으니, 바로 광계(光啓) 3년에 세운 것이다.
●유몽인_유두류산록 _1611년 4월 6일 을해일(양력 5월17일)
쌍계석문에 이르렀다. 고운 최치원의 필적이 바위에 새겨져 있었는데 글자의 획이 마모되지 않았다. 그 글씨를 보니 가늘면서도 굳세어 세상의 굵고 부드러운 서체와는 사뭇 다른 참으로 기이한 필체였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은 이 글씨를 어린아이가 글자를 익히는 수준이라고 평하였다. 탁영은 글을 잘 짓지만 글씨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은 듯하다. 이끼 낀 바위 위에 모여 앉아 맑은 물과 흰 물결을 바라보았다. 어린 종이 말하기를,
“해가 이미 서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라고 하여 쌍계사로 들어갔다.
쌍계사에는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이수〔龍頭〕와 귀부(龜趺)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전액(篆額)에 ‘쌍계사 고 진감선사비(雙磎寺故眞鑑禪師碑)’라고 씌어 있었는데, 전서체(篆書體)가 기이하고 괴이하여 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 그 밑에 ‘전 서국 도순무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 사자금어대 신 최치원이 교서를 받들어 지음〔前西國都巡撫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帒臣崔致遠奉敎撰〕’이라고 씌어 있었다. 곧 당 희종(唐僖宗) 광계(光啓) 연간 에 세운 것이다. 손가락을 꼽아 헤아려보니 지금으로부터 700년 전이다.
여러 차례 흥망이 거듭되었지만 비석은 그대로 남아 있고 사람은 옛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비석을 보면서 눈물을 떨구기보다 어찌 신선술을 배워 오래도록 이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랴. 나는 이 비석을 보고 뒤늦게 깨달은 바가 있다. 또한 나는 어려서부터 고운의 필적이 예스럽고 굳센 것을 사랑하여 판본(板本)이나 탁본(拓本)의 글씨를 구해 감상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집도 글씨도 모두 없어져 늘 한스럽게 여겼다.
내가 금오(金吾)의 문사랑(問事郞)이 되었을 적에 문건을 해서(楷書)로 쓰는데, 곁에 있던 금오장군(金吾將軍) 윤기빙(尹起聘)이 한참 들여다보더니,
“그대는 고운의 서법을 배웠는가? 어찌 그리도 환골탈태를 잘 하시오.”
라고 했었다. 지금 진본(眞本)을 보니 어찌 옛 사람을 위문하며 감회가 일어날 뿐이랴. 옛 일이 떠올라 슬픈 마음이 들었어서 종이와 먹을 가져오라고 하여 탁본하였다.
절에는 대장전(大藏殿)․영주각(瀛洲閣)․방장전(方丈殿)이 있었다. 예전에는 학사당(學士堂)이 있었는데 지금은 무너져버렸다. 날이 저물어 순지가 칠불사를 구경하고 돌아왔다.
-----‐---------------------------------------------------------
● 진감선사
진감선사 혜소의 성은 최씨이다. 선조는 한족(漢族)으로 산동(山東)의 고관이었다. 고구려를 공격하던 수나라가 을지문덕 장군에게 격퇴됐을 당시 고구려로 망명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고구려에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훗날 전주 금마[현 전라북도 익산]에 정착하였다. 아버지는 최창원(崔昌元)으로 독실한 불교 거사였다. 어머니는 고씨(顧氏)로, 서역의 승려가 나타나 아들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한 꿈을 꾼 뒤 진감선사 혜소를 임신했다고 전한다.
774년(혜공왕 10) 전라북도 전주 금마에서 태어난 진감선사 혜소는, 804년(애장왕 5) 30세의 나이에 당나라로 가는 사신의 배에 뱃사공을 청하여 들어갔고, 이후 창주로 가서 신감대사에게 출가하였다. 810년(헌덕왕 2) 숭산(崇山)의 소림사(小林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종남산에 들어가 지관(止觀)을 닦았다. 830년(흥덕왕 5) 신라에 돌아와 경상북도 상주 장백사(長栢寺)[현 칠장사]에 머물며 중생을 교화하였다. 얼마 뒤 지리산 화개곡으로 옮겨 삼법화상(三法和尙)이 창건한 옛 절터에 새로 절을 짓고 머물렀다.
이후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838년(민애왕 원년) 민애왕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왕에게 선정에 힘쓰라고 하면서 만남을 거절하였다. 이에 왕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사신을 보내 선사에게 혜조(慧照)라는 호를 내려주었다. 뒤에 소성왕의 이름을 피해 ‘조(照)’를 ‘소(昭)’로 고쳐 혜소라 하였다. 또한 황룡사의 승적에 올리고 서울[현 경주]에 와서 머물 것을 청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진감선사 혜소는 가르침을 받고자 따르는 사람이 늘어나 절이 비좁게 되자, 다시 화개의 남쪽 기슭에 옥천사[현 지리산 쌍계사]를 짓고, 조계(曹溪)의 현손으로서 혜능(慧能)의 영당(影堂)을 세웠다. 850년(문성왕 12) 나이 76세, 법랍 41세로 입적하였다.
●사상과 저술
진감선사 혜소는 심법(心法)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이름을 붙일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즉 전하지 않으면서도 전해지는 남종선 사상이었다. 전하지 않았으나 전해지고, 말하지 않았으나 마음속에 새겨지게 하는 혜소의 선종 사상은 달을 가리키는 비유로 곧잘 설명된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지만 달은 물론 가리키는 손가락마저도 잊어버리게 된다. 이렇듯 혜소는 기본적으로 강한 조사선 사상을 견지하고 있었다.
진감선사 혜소는 신라로 돌아오면서 “비록 공관(空觀)을 추구했지만 어찌 근본을 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는 귀국 전 중국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수행한 과정을 공관을 추구한 것으로 비유한 것이며, 근본을 잊지 않으려 귀국을 한다는 뜻이지만 수행하는 주체로서의 마음을 내세우려는 의도도 지닌 것이다.
진감선사 혜소는 입적에 임하여 제자들에게 “만법이 모두 공(空)하니 나는 장차 떠나려 한다. 너희들은 일심(一心)을 근본으로 삼아 힘써 노력하라.”고 하였다. 이는 그가 공관을 추구하면서도 일심을 근본으로 삼아 노력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마음속에서 불성을 찾아 깨치려는 조사선 사상은 생활 자체를 스스로 꾸려 가는 실천 수행을 강조하였다. 문인들이 거친 음식을 공양하게 되어 곤란해 하자, 진감선사 혜소가 “마음이 여기에 왔으니 거친 밥인들 상관없다.”고 말한 것이 그 예이다. 또한 그는 어린이나 어른은 물론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대하였다. 이같이 그의 조사선사상 속에 일심이 강조되어 자리하는 모습은 북종선도 함께 융섭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혜소의 남종선 사상은 북종선 사상을 포용하면서 형성되었으며, ‘일심’을 근본으로 삼아 강조되었다.
진감선사 혜소는 범패를 전하여 소리로써 교화하였는데, 이후 범패는 신라 선종계는 물론 한국 불교계에 유행하는 영향을 주었다. 또 중국으로부터 차나무를 들여 와 지리산 일대에 재배하였다고도 전한다.
진감선사는 수백 명의 제자를 길렀는데, 그 중 법량(法諒)이 가장 뛰어났다고 전한다. 산문은 나말려초 여러 선문 가운데 하나로 발전하지 않았으나, 뒤에 북종선 계통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의 정진(靜眞) 긍양(兢讓)이 진감선사 혜소의 증손 제자로 일컫는 사실에서 미루어 신라 말의 선종 사상계에 일정 부분 영향을 주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섬진강에서 뛰노는 물고기를 바라보고 지은 「어산팔영(魚山八詠)」 8수가 있었다고 하나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진감선사(774∼850)의 속성은 최씨이고 승명은 해소. 진감선사는 시호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불도를 닦으러 당나라에 들어가 창주 신감대사 밑에 있다가 810년 숭산 소림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830년 귀국하여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당시 왕들의 우러름을 받다가 말년에는 지리산 화개골에 옥천사(玉泉寺)를 창건하여 여생을 보냈다.
불교 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널리 대중화시킨 인물로 77세의 나이로 쌍계사에서 입적했고, 진감선사가 도를 닦던 옥천사를 ‘쌍계사’로 이름을 고친 후에 진성여왕 원년(887)에 이 비를 세웠다 한다. 당시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다고 한다.
이 탑비는 건립연대를 알수 있는 부분이 훼손되었으나 다행히 1725년에 목판을 그대로 본 떠 새긴 비문이 있어 887년임을 알수있다.
---------------------------------------------------------------
● 비문내용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문(智異山雙磎寺 眞鑑禪師 大空塔碑文)
최치원(崔致遠:857 ~ ?)
대개 도(道)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고, 사람은 국토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이 인도의 교를 믿어 불자(佛子)가 되기도 하고, 중국의 글을 배워 유자(孺子)가 되기도 한다. 반드시 서쪽으로 대양을 건너 통역을 거듭하며 학업에 종사하는데, 목숨은 배어 의지하지만 마음은 보배로운 땅에 가 있다. 그래서 빈 손으로 갔다가 가득 채워 돌아오니, 어려운 일을 먼저 하고 얻는 것을 뒤에 하는 것이다.
옥을 캐는 사람이 험준한 곤륜산을 꺼리지 않고, 진주를 찾는 사람이 깊은 여룡(驪龍)의 동굴을 기피하지 않는 것처럼 해야 그 빛이 오승(五乘)을 융합하는 불타의 지혜로운 횃불과 그 맛이 육경(六經)에 배부른 선유(先儒)의 아름다운 반찬을 얻게 된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다투어 선(善)에 들어가게 하고, 온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능히 인(仁)을 일으키게 한다. 그런데 배우는 자들이 혹 말하기를 “불타와 공자의 가르침은 유파가 다르고 본체가 상이하다. 마치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끼우는 것처럼 상호 모순되어 각자 한쪽만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시험 삼아 이를 노해보리라. 시(詩)를 해설하는 자는 문(文)으로써 사(사)를 해치지 말고, 사(사)로써 지(志)를 해치지 말라고 한다. [예기(禮記)]에 “말(言)이 어찌 한 갈래뿐이랴? 각각 합당한 바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봉 혜원(廬峰 慧遠)은 논(論)을 지어 “석가여래와 주공(周公:공자)는 출발점이 다르기는 하지만 귀착점은 한 곳이다. 지극한 이치를 채득하는데 겸응(兼應)하지 못하는 것은 물(物)이 두 가지를 다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심약(沈約)도 “공자는 그 단초를 드러냈고, 석가는 그 극치를 궁구하였다. “고 하였다. 이들은 대체(大體)를 아는 사람이라 할 만하니, 비로소 지극한 도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겠다.
부처가 심법(심법)을 말한 데 나아가보면, 현묘하고 또 현묘하여 이름하려고 해도 이름할 수 없고 해설하려 해도 해설할 수 없다. 달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손가락은 곧바로 잊게 된다. 끝은 바람을 묶는 것처럼 어렵고 그림자는 좇아가며 붙잡기가 어렵다. 그러나 먼 곳에 이르자면 가까운 데로부터 시작하는 법. 일상의 가까운 데서 비유를 취한들 무슨 잘못이 있으리? 또 공자가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말을 않고자 하노라.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라고 하였다. 이는 곧 정명(정명)이 문수보살에게 말없이 대하고, 석가가 가섭에게 은밀히 전한 것과 같다,. 수고롭게 혀를 놀리지 않고서도 마음이 맞아 심법을 전한 것이다.
하늘은 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말을 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좇아 나가리? 멀리서 현묘한 도를 얻어와 우리나라에 널리 빛낸 이가 어찌 다른 사람이랴? 선사가 바로 그분이시다,. 선사의 법휘(法諱)는 혜소(慧昭)이고, 속성(속성)은 최씨이다.
그의 선조는 한족(韓族)으로 산동지방의 벼슬아치였다. 수(수)나라 군대가 요동을 정벌하다가 많은 사람이 예맥(예맥)에서 죽게 되자, 그 중에 뜻을 굽히고 우리 백성이 된 자들이 이었다. 당나라 때에 이르러 사군이 통일됨에 선사의 선조는 지금의 전주 금마인이 되었다. 아버지 이름이 창원(창원)으로, 가정에서 출가의 수행을 하였다. 어머니 고씨가 대낮에 잠이 들었는데, 꿈에 인도의 승려가 나타나 “저는 어미의 자식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고는 유리항아리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선사를 잉태하게 되었다. 선사는 태어나서 울지 않았으니, 일찍부터 소리를 낮추고 말을 삼가는 좋은 싹을 보인 것이다. 이를 갈 나이가 되자, 나뭇잎을 향으로 삼아 피우거나 꽃을 꺾어 공양을 올리는 놀이를 하였다. 간혹 서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아 해가 기울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좋은 자질이 백 천 겁 이전에 심어진 것을 알 수 있으니, 발돋움을 해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머리 땋은 아이 적부터 관을 쓴 어른이 되도록, 그 뜻이 부모님의 은혜를 갚는데 간절하여 잠시도 잊지 않았다. 그러니 집에는 한말의 곡식도 없고, 또 한 뙤기의 땅도 없어서 농사 지을 방도가 없었다. 음식 공양을 오직 노력에 의지하였으니, 생선을 팔아 조석 봉양을 마련하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다. 그물을 엮는데 손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서도 마음은 벌써 물고기 잡는 법을 깨달아 능히 음식 공양의 재료를 풍성케 하였으니, 진실로 효성이 다하는 옛 노래에 들어맞는다.
부모의 삼을 당함에 이르러, 흙을 져다가 무덤을 만들고 말하기를 “길러 주신 은혜는 힘으로 갚아야 하지만, 오묘한 진리를 어찌 마음으로 구하지 않으리? 내 어찌 매달린 조롱박처럼 한창의 나이에 발자취를 묶어두겠는가? 라고 하였다,. 드디어 정원(정원) 20년 (804년) 세공사를 찾아가 뱃사람이 되기를 구하여 서쪽으로 가는 항해에 올랐다. 여러 가지 천한 일에 능하여 험한 길을 평지처럼 여겼다. 자비의 항로에 노를 저어 고통의 바다를 건넜다. 중국에 도착해서 우리 사신들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각자 뜻이 있으니, 이제 작별하고자 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길을 떠나 창주(滄洲)에 이르렀다. 신감대사(神鑑大師)를 찾아 뵙고 몸을 던져 반쯤 절하였을 때, 대사가 반가운 얼굴로 말하기를 “이별한 지 오래지 않았는데 기쁘게도 다시 서로 만났구려”라고 하고서, 즉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게 하였다. 그 자리에서 곧바로 인계(印契)를 받아 마른 쑥에 불길을 붙은 듯하고 낮은 언덕으로 물이 쏟아져 내리듯 하였다. 승도들이 서로 말하기를 “동방의 성인을 여기서 다시 뵙는구나!”라고 하였다.
선사의 얼굴이 검었던 탓에 승도들이 이름을 부르지 않고 흑두타(黑頭陀)라고 하였다. 이는 현묘함을 찾고 묵묵함에 처한 것이니 참으로 칠도인(漆道人)의 후신이라 하겠다. 어찌 읍중의 얼굴 검은 자한(子罕)이 뭇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했던 일에 비교될 뿐이겠는가? 붉은 수염의 석가와 파라나 눈의 달마와 더불어 영원토록 색상으로 드러내 보이리라.
원화(元和) 5년(810년) 숭산의 소림사 유리단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니, 어머니의 지난날 꿈과 부절을 합친 듯 완전히 들어맞았다. 이미 계율의 구슬을 빛내고 다시 학사에 돌아옴에,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다. 마치 강색이 천초보다 붉고, 청색이 남초보다 푸르듯이 스승보다 뛰어났다,. 고인 물처럼 맑은 마음을 가졌지만 조각 구름같이 떠다니는 신세였다.
신라의 승려 도의(道義)가 먼저 중국 땅에 도를 구하기 위해 왔었다. 우연히 서로 만나 뜻이 맞았으니, 서남쪽에서 벗을 얻은 것이다. 사방으로 멀리 찾아 다니면서 부처의 지견을 증득하다가 도의가 먼저 고국으로 돌아갔다. 선사는 곧 종남산으로 들어갔다.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봉우리에 올라 송실을 먹으면서, 망상을 잊고 만유의 진리를 관조하며 고요히 3년을 지냈다. 그 뒤에 자각봉에서 나와 사방으로 통하는 길에 이르러서, 짚신을 삼아 널리 보시하였다. 그 일을 하며 겨를 없이 또 3년을 지냈다. 이에 고행도 이미 닦여졌고 다른 지방도 다 유람한 터였다.
비록 만유가 공(空)임을 보았다고 하지만 어찌 근본을 잊을 수 있으리? 대승(大乘)의 진리가 우리나라를 비추자, 흥덕대왕께서 어필을 날려 맞이하며 위로하기를 “도의선사가 저번에 돌아왔는데 선사가 뒤이어 귀국하니 이 나라에 두 보살이 계시는구려. 옛날 흑의를 입은 두 호걸 이야기를 들었는데, 지금은 누더기 옷을 입은 두 영재를 보는구나. 하늘 가득히 자비로운 위엄에 온 나라가 기뻐 의지하니, 과인은 마땅히 동쪽 계림의 경내에 길상 가득한 사원을 세우리라.”고 하였다.
선사는 처음 상주 노악산 장백사에 가서 주석하였다. 명의의 집에 환자가 많듯,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절간이 넓었으나 사람들이 스스로 좁게 여겼다. 드디어 걸어서 강주의 지리산에 이르렀다. 두어 마리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며 앞길을 인도하였는데, 위험한 길을 피하고 평탄한 길로 가니 길잡이와 다름 없었다. 따르던 사람들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축이나 다름 없이 여겼다. 이는 선무외의 경지에 이른 삼장법사(삼장법사)가 영산에서 하안거 할 때 맹수가 앞에서 길을 인도하여 산의 동굴로 깊숙이 들어가서 가섭모니의 입상을 본 것과 사적이 완연히 같다. 저 축담유가 졸고 있는 호랑이의 머리를 두드려 불경 소리를 듣게 한 것만이 승사에 전하는 유일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에 삼법화상이 머물던 화개곡의 절터에 당우를 수선하니, 어엿한 사원이 조성되었다.
개성(開成) 3년(838년) 민애왕이 갑자기 보위에 올랐다. 그윽한 자비에 깊이 의탁하고자 옥새를 찍은 글을 내리고 불공을 드리는 경비를 보내 특별히 발원하기를 구하였다. 이에 선사는 “선정을 부지런히 닦는 데 있거늘 무엇 때문에 따로 발원하리오?”라고 하였다. 사신이 왕에게 복명하자 왕은 이 발을 득고 부끄러워하며 뉘우쳤다. 선사는 색(色) 공(空)이 모두 소멸되고 정(定) 혜(慧)가 함께 원융하였으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 혜소(慧昭)라는 호를 하사하였는데 성조(聖祖)의 묘휘인 소(昭)자를 피하여 바꾸었다.
이에 대황룡사에 주석하게 하려고 수도로 불렀다. 사신들이 여러 차례 오가며 선사를 불렀지만 선사는 우뚝한 산처럼 뚯을 바꾸지 않았다. 옛날 승조가 원위의 세 번 부름을 거절하면서 “산에 있으면서 도를 행해도 대도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깊숙한 곳에 처해서 고상함을 기른 것이 시대는 다르지만 취향은 같다.
몇 년을 이곳에 주석하자 배우기를 청하는 사람들이 벼와 삼처럼 줄을 지어 찾아와 송곳 꼰을 땅조차 없었다. 기이한 곳을 두루 찾다가 남쪽 고개 기슭에 땅을 얻으니 상쾌하여 거처하기에 매우 알맞았다. 선방을 지음에 뒤로는 노을 진 묏부리에 의지하고 아래로는 구름 덮인 간수를 내려다 보았다. 시야를 맑게 해주는 것은 강 건너 먼 산이요, 귓부리를 시원스럽게 해주는 것은 돌 틈에서 솟구치는 물소리였다. 봄날 시냇가에 핀 꽃, 여름 산길에 우거진 소나무, 가을밤 계곡에 뜬 달, 겨울 산마루를 덮은 눈 같은 것들이 사철 형태를 바꾸고 만상이 빛을 나누며 온갖 자연의 소리가 화음을 이루고 수많은 바위들이 다투어 빼어났다. 일찍이 중국을 유람했던 사람들이 이곳에 와보고는 모두 놀라 바라보며 말하기를 “혜원(慧遠)의 동림사가 우리 땅에 옮겨온 듯 연화세계(蓮花世界)를 평범한 상상으로 비견할 수 없지만 항아리 속에 있는 별천지라는 말은 믿을 만하다”라고 하였다.
대나무를 걸쳐서 물길을 끌어다 계단을 둘러 사방에 흐르게 하고는 비로소 “옥천(玉泉)으로 사호를 삼았다. 법통을 손꼽아보면, 선사는 혜능(慧能)의 현손이다. 이에 육조(六祖)의 영당을 세우고 흰 담장을 채색으로 장식해서 중생을 인도하고 깨우치는 데 널리 이바지하도록 하였다. 법화경에 이른바 중생을 기쁘게 하기 위해 라고 한 까닭에 여러 상에 색을 섞어 그렸던 것이다.
대중(대중) 4년(850년) 정월 9일 새벽녘에 문인들에게 이르기를 “모든 법은 다 공(空)이다. 나는 떠날 것이다. 한 마음이 근본이니 너희들은 힘쓸지어다. 탑을 세워 내 형체를 간직하지 말고, 명(銘)열 지어 내 행적을 기록치 말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앉은 채로 돌아가시니 속세의 나이로 77세요 승려가 된 지는 41년이었다.
이때 하늘에는 솜털구름 한점 없었는데 바람과 우레가 홀연히 일어나고 범과 이리가 울부짖고 삼나무와 향나무가 변하여 시들었다. 잠시 후에 자줏빛 구름이 하늘을 가리더니 공중에서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들렸는데 장례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그 소리를 들었다. [양사(梁史)]에 실려 있는 “시중 저상이 승려에게 청하여 어머니의 병을 위해 복을 빌다가 공중에서 손가락 튕기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 것은 성신이 감동하고 명귀가 감응한 것이니 어찌 속이는 말이겠는가? 도에 뜻을 둔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서 서로 조문하고 정을 잊지 못한 이들은 슬픔을 머금고 울었다. 하늘과 사람이 모두 애통해하였음을 단연코 알 만하다.
관곽과 수도를 미리 준비해서 갖추도록 했으므로 제자 법량(法諒)등이 울부짖으며 시신을 받들어 하루를 넘기지 않고 동쪽 봉우리의 무덤에 묻었으니 그의 유명을 따른 것이다.
선사는 질박한 성품을 흩뜨리지 않고 기교 부리는 말씀을 않으셨다. 헌 솜옷이나 삼베옷을 따뜻이 여겨 입었고, 겨를 섞은 밥에 나물 반찬 두 가지를 넘지 않았다. 귀인과 달인이 때때로 찾아왔지만 반찬을 달리 하지 않았다. 문인들이 좋지 않은 음식이라 하여 올리길 어려워하면 “마음이 이에 있으니 거친 밥인들 무엇이 해로우랴?”라고 하였다,.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 늙은 사람이나 어린 사람을 대접하는데 한결같았다. 왕의 사진이 역마을 타고 와 명을 전하며 멀리서 법력을 기원하면 “왕의 땅에 살면서 불일(佛日)을 머리 위에 인 자치고 어느 누가 호국에 마음을 기울여 임금을 위해 복을 쌓으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마른나무나 썩은 등걸 같은 저에게 외람되게도 멀리 윤음을 전하십니까.? 역마을 타고 온 사람은 배고파도 음식을 먹지 못하고 목말라도 물을 마실 수 없으니, 아! 이 점을 염려할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혹 호향을 선물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 질그릇에 화롯불을 담아 환을 만들지 않고 사르면서 “나는 이것이 무슨 냄새인지 알 수 없다. 마음을 정성되게 할 뿐이다.”고 하였다. 또 중국차를 바치는 사람이 있으면 곧 땔나무로 돌솥에 불을 지펴 가로로 만들지 않고 끓이면서 “나는 이것이 무슨 맛인지 알 수 업다. 배를 적실 뿐이다.”라고 하였다. 참된 것을 지키고 습속에 따르지 않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
선사는 평소 범패(梵唄)를 잘하였는데, 그 소리가 금과 옥과 같았다. 곡조를 빗겨서 소리를 날리면 상쾌하고 슬프고 완곡하여 능히 천상계의 모든 신선과 부처를 기쁘게 하였다,. 먼 지방에까지 흘러 전해짐에 배우려는 사람들이 마루에 가득 찼는데,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어산의 묘음을 익히는 자들이 다투어 코를 막고 배웠듯이 옥천사의 진감선사가 남긴 소리를 본받고자 한다. 이 어찌 성문(聲聞)으로 중생을 제도한 교화가 아니겠는가?
선사의 열반은 문성대왕 때에 해당된다. 임금이 측은하게 여겨 맑은 시호(諡號)로 은총을 표현하려다가 선사의 유언을 듣고 부끄러워하며 그만두었다. 36년이 지난 뒤, 문인들이 강산이 변할까 염려하여 불법을 흠모하는 제자들에게 불후의 인연을 청해옴에 내공봉일길간 양진방과 숭문대의 정순일이 두 마음 굳게 합쳐 비명(碑銘)을 새길 것을 건의하였다. 헌강대왕이 지극한 덕화를 넓히고 참된 종지를 우러러 진감선사(眞鑑禪師)라고 추시(追諡)하고, 대공령탑(大空靈塔)에 전자(篆字)를 새길 것을 허락하여 영원히 영예를 마치게 하였다. 아름다워라! 태양은 양곡에서 솟아 으슥한 곳에도 비추지 않음이 없고 해안에 향을 묻으니 오래될수록 더욱 향기롭구나!
어떤 이가 말하기를 “선사께서 명(銘)을 짓지도 탑을 세우지도 말라는 훈계를 내리셨거늘, 뒷날 제자들에게 이르러 스승의 뜻을 확실하게 받들지 못하였으니 그러기를 임금에게 구한 것인가. 아니면 임금께서 내려주신 것인가? 결국 흐니구슬에 흠집이 났도다.”라고 하였다. 슬프다! 비난하는 자 또한 틀렸구나. 이름을 가까이하지 않아도 이름이 빛나는 것은 대개 정력(정력)의 남은 결과이다. 재처럼 없어지고 번개처럼 사라지는 것이 어찌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때에 하여 명성이 대천세계에 울릴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같겠는가? 그런데 귀부가 아직 비석을 등에 이기도 전에 왕이 갑자기 승천하였다. 금상이 뒤를 이어 즉위해 훈호가 서로 응답하듯 부탁한 일에 뜻이 맞아 좋은 일을 그대로 따랐다.
이웃 산의 절 가운데 또 옥천사(玉泉寺)가 있어 이름이 중복되어 뭇 사람들의 귀에 혼란을 일으켰다. 같은 이름을 버리고 다른 이름에 나가고자 하면 옛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따라야 한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그 절이 위치한 곳을 살피게 하니 절의 문이 두 줄기 간수(間水)에 임해 있다고 하였다. 이에 “쌍계사”라고 이름을 지어 하사하였다. 그리고 거듭 신에게 명하여 “선사께서는 행적으로 이름이 났고 그대는 문장으로 벼슬길에 나아갔으니 마땅히 명(명)을 짓도록 하라.”고 하였다. 나 치원(치원)은 배수(배수)하면서 “예,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물러나 생각을 해보니 지난날 중국에서 이름을 얻어 중구 사이에서 살진 것을 씹고 기름진 것을 맛보았다. 그러나 성인의 도에 흠뻑 취해보지는 못했으니 깊은 우물 안의 깨어진 벽돌 사이에서 뛰노는 개구리처럼 부끄럽도다. 하물며 불법의 진리는 문자를 떠난지라, 말을 붙일 만한 곳이 없다. 굳이 말한다 해도 묵으로 향하던 수레가 하루 만에 남쪽의 영(郢)으로 가는 격이다. 다만 국왕의 외호와 문인들의 대원으로 문자가 아니면 여러 사람 눈에 밝힐 수 없어서 드디어 감히 명(銘)을 짓고 쓰는 두 가지 일에 종사하여, 날다람쥐처럼 없는 재주나만 힘써본다.
돌에다가 새기는 일이 부끄럽고 두려워할 만하지만 도란 억지로 이름한 것이니 무엇이 옳으며 무엇이 그르리오? 붓자루를 멈추고 붓끝을 감추는 것을 신이 어찌 감히 할 수 있겠습니까?
거듭 앞서 말한 뜻을 펼쳐 삼가 명(銘)을 엮는다.
입다물고 고요히 명상하며 불타에게 마음을 돌린다네.
근본이 보살에 익숙했으매 오직 한평생 불법만을 넓혀왔네.
용감하게 호랑이 굴을 더듬었고 멀리 고래 물결 건넜도다.
가서 비인(秘印)을 전해 받고 와서는 신라를 교화시켰네.
깊숙한 곳 찾아 승경을 골라서 바위 비탈에 절을 지었다오.
물 달을 보고 심회를 맑게 하고 구름 샘물에 흥을 부쳤지요.
산은 성품과 더불어 고요하고 골짜기는 범패와 함께 응답하네.
외경에 부딪혀 막힘이 없었으니 기심을 없앤 것 이로써 증명되리.
도로써 다섯 임금 협찬했고 위엄으로 많은 요괴를 꺾었도다.
말없이 자비의 그늘 드리우고 드러나게 아름다운 부름 거절했네.
바닷물이 저절로 물결쳐 움직이나 산이 어찌 동요하리오.
사념이 없고 심혜가 없어서 다듬지도 않고 아로새기지도 아니했네.
음식에 두 가지 반찬 없었고 복장은 반드시 갖추는 일 없으셨지.
비바람 그믐밤 같은 속에도 시종이 일치했다오.
지혜의 가지가 바야흐로 뻗어나는데 법계의 기둥 별안간 무너졌도다.
동학은 처량하고 연라는 초췌해졌네 사람은 갔으나 도는 남아서 끝끝내 잊을 수 없으리.
상사가 소원을 개진하니 대왕께서 은혜를 베푸셨네.
등은 해역에 널리 전하고 탑은 돌로서 높게 솟았네.
수천 겁의 세월이 흘러도 송문에 길이 빛나리라.
광계(光啓) 3년 (887년) 7월 모일에 세웠다.
승(僧) 형영(夐榮)이 글자를 새겼다.
---------------------------------------------------------
첫댓글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okukoku&logNo=220261183046&proxyReferer=https%3A%2F%2Fm.search.naver.com%2Fsearch.naver%3Fsm%3Dmtb_hty.top%26where%3Dm%26oquery%3D%25E7%259C%259E%25E9%2591%2591%25E7%25A6%25AA%25E5%25B8%25AB%25E7%25A2%2591%26tqi%3DUEb6Hsp0JWossSP7mRlsssssteZ-442329%26query%3D%25E7%259C%259E%25E9%2591%2591%25E7%25A6%25AA%25E5%25B8%25AB
다른의견
https://m.blog.daum.net/3002kumsukangsan/8450565
https://naver.me/xLEjLEdu
명칭바로잡기
https://naver.me/xCiLLgxx
도솔산인 선생님
https://lyg4533.tistory.com/16488156
최석기 교수님의『지리산 화개동, 2019, p162』의 '비석 이름의 오류'를 읽어보면, 진감선사비 전액에 대해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7.01 06:46
https://m.dcinside.com/board/mystery/1872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