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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맥을 따라’ 제12주 |
1. 북왕국 이스라엘의 약사: 기원전 922-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의 건국은 기본적으로는 솔로몬 치하의 가혹한 경제정책 때문에 기인한 것이지만, 실상 그 원뿌리는 지파동맹의 주축을 이루던 두 세력인 북쪽의 에브라임-베냐민-므낫세 지파와 남쪽의 유다 지파 사이의 해묵은 경쟁의식과 적대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지파동맹이 지니고 있던 지리, 문화, 전승의 이중구조가 궁극적으로는 남북 두 왕국이라는 정치적 이중구조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은 둘 중에서 영토도 넓고 주민수도 많았지만 불리한 조건을 안고 있었고, 이 같은 조건들은 북이스라엘이 독립체로서 단명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비교적 많은 수의 주민 역시 잡다한 편이어서 요단 강 동부와 서부 그리고 에스드렐론 평야와 이스르엘 평야 남부와 북부에 걸쳐 다양한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집단은 이익이 서로 다르고 주 관심사도 서로 달라서, 중앙정부가 성공을 거두려면 세심한 협상을 통해 상호조정하지 않으면 안 될 대상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지정학적 위치도 상당히 불리했습니다. 비교적 넓은 북왕국의 영토에 포함되어 있는 교역로와 비옥한 농경지는 제국주의적 야심을 품은 강대국들에게 정복하여 수중에 넣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다윗과 솔로몬이 세운 단일 왕조에서 스무 명의 왕(여왕 하나를 포함하여)이 355년 역사를 줄곧 통치해 온 남왕국 유다와는 달리, 북왕국 이스라엘은 2백 년이 채 못되는 짧은 기간에 무려 다섯 왕조, 열아홉 명의 왕을 맞아야 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여로보암 왕에서 호세아 왕까지)
여로보암→나답× 바아사→엘라× 시므리× 디브니× 오므리→아합→아하시야→요람× ×스가랴←여로보암 2세←여호아스←여호아하스←예후 살룸→므나헴× 브가히야× 베가× 호세아×
→ : 같은 가문에 왕권이 이양되는 표시 × : 죽임을 당한다는 표시 : 다른 가문의 사람에게 왕권이 교체되는, 혹은 왕위를 빼앗은 사람을 표시 |
열왕기 상권에 따르면 북왕조의 초대 왕 여로보암은 옛 야훼 산당이 있던 단과 베델에다 두 개의 순례소를 마련했습니다(왕상 12:26- 30). 북왕국의 북단과 남단에다 두 개의 순례소를 만든 이유는 지파동맹 시절부터 예배대상이 되어온 유서 깊은 언약궤와 이를 모셔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매력을 차단하는 데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야훼의 현존이 자리하고 있다고 믿는 ‘하나님의 옥좌’ 언약궤 대신에,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두 산당에 안치했습니다. 이 금송아지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의 현존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옥좌인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계 역사가들은 금송아지들을 우상숭배로 치부해버립니다. 신명기 역사가들은 여로보암이 예루살렘 성전에 대응하는 산당을 세운 이 행위를, 북부의 왕들이 퍼뜨린 모든 악의 뿌리로서 2백여 년이 지나 마침내 북왕국이 앗시리아의 손에 파멸하도록 만든 일종의 ‘원죄’로 규정합니다.
북왕국에서 비교적 오래가는 왕조는 오므리가 세운 왕조와 예후가 세운 왕조 둘입니다. 기원전 867년에 이스라엘군 사령관 예후는 4년 간 계속된 내전을 끝내고 권력을 확고히 장악했습니다. 그가 세운 왕조는 네 명의 왕을 배출하고 끝났습니다. 오므리는 이스라엘인이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기에 그는 고대 근동의 전형적인 군주제 양식으로 통치를 하면서도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일례로 그는 사마리아에다 새로운 수도와 왕궁을 화려하게 건설했으며, 이웃 국가들을 상대로 군사적인 모험과 상업적인 모험을 태연히 감행했습니다. 그와 그의 아들 아합은 당대의 민족과 국가들 사이에서 자기네 왕국의 이름을 떨치고 지위를 높이고자 노력한 끝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들이 통치하던 당시에 이스라엘이 누린 지위는 솔로몬 치하의 통일왕국이 누리던 것에 못지않거나 그 이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의 인물들을 최초로 언급하는 성경 이외의 기록은 앗시리아 명각들인데, 이 앗시리아의 기록들은 오므리와 아합을 언급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스라엘을 수십 년 동안 내내 ‘오므리의 땅’으로 지칭합니다.
그러나 이 두 왕의 재임 중에 예언자의 비판이 합창처럼 울려나와 그들의 제국주의적 야망이 백성 대다수에게 얼마나 깊은 악영향을 끼쳤는지 증명합니다. 그들이 왕국의 전통종교인 야훼신앙을 태연히 무시 또는 모독했다는 사실은 아합이 페니키아인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인 데서 충분히 입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세벨이 아합으로 하여금 새 수도 사마리아에 두로의 바알을 위한 신전을 건설하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은 그녀가 가나안의 종교에 깊이 심취해 있었음을 증명합니다. 이 같은 열성은 그녀가 가나안 바알신앙과 맞물리는 경제 행태에 충실했다는 사실과도 맞아떨어지는 바, 이 점은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나봇 사건에서 그녀가 담당하는 역할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아합의 궁전과 인접한 곳에 나봇이라는 이름의 사내가 가진 포도밭이 있었습니다. 아합은 이 땅을 탐내던 중에 이윽고 나봇에게 접근하여 땅을 팔도록 제의합니다. 나봇은 거절하면서 “제가 조상의 유산을 임금님께 드리는 일은, 주님께서 금하시는 불경한 일입니다” 하고 말합니다(왕상 21,3). ‘조상들이 물려준 유산’의 하나인 이 땅은 나봇 개인의 소유라기보다는 가문의 소유였습니다. 이것은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계약의 일환으로 부여된 하사품이며, 따라서 현재 세대와 미래 세대는 가족에게 가장 기본적인 삶과 생계의 원천인 ‘땅’을 언제까지나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땅 조각을 영구히 팔아 없앤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사회-경제적 기본구조와 종교적 규범에 가장 중요한 요소 하나를 파괴하는 행위였습니다. 아합은 나봇의 답변이 뜻하는 바를 최소한 어렴풋이나마 이해했음이 분명합니다. 나봇의 답변을 듣고 왕실의 변덕스러운 욕망을 충족시키기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는 욕구가 좌절되자 크게 낙담했습니다. 그래서 “화를 내며 궁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음식도 먹지 않았습니다”(왕상 21:4).
이 대목에서 아합의 왕후 이세벨이 무대에 등장합니다. 가나안의 왕녀요 열렬한 바알신앙 추종자인 그녀는 포도원 문제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바라봅니다.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왕국 내의 모든 땅은 신들이 왕인 아합에게 내려준 하사품이며, 따라서 왕이 포도원을 차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권리였습니다. 그리고 나봇이 이 작은 땅 조각을 왕에게 내놓기 거부한 소치야말로 그녀의 눈에는 반역행위요 죽어 마땅한 범죄였습니다. 이에 이세벨은 그녀에게 사주 받은 사람들의 거짓 증언을 토대로 나봇에게 독성죄를 뒤집어씌웠습니다. 그리하여 나봇은 돌에 맞아 죽고 그의 땅은 왕실로 귀속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합은 채마밭을 차지했고 이세벨의 사회-경제적 내지 종교적 복안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오므리 왕조는 기원전 842년에 예후 왕조로 대체됩니다. 예후가 일으킨 쿠데타는 오므리의 악정을 비난하는 예언이 점화제요 받침대가 되었음에 분명합니다. 열왕기하 9장에 따르면 엘리사는 예후를 왕으로 기름 바르고 그에게 반란을 일으켜 오므리 왕조의 통치자 요람을 폐위시키도록 부추깁니다. 예후는 쿠데타에 성공하여 북부를 다스리는 세 번째 왕조를 열었습니다. 이 왕조는 다섯 명의 왕에 거의 1백 년을 존속했습니다. 특히 이 왕조의 네 번째 왕 여로보암 2세가 장기간 왕위에 앉아 있던 오랜 시기(기원전 786-746년)는 북왕국이 성장과 번영을 구가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예언자 아모스의 목소리는 지배 엘리트의 억압적이고 독단적인 정책들로 수많은 주민이 절망에 시달리는 상황을 간간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후 왕조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다섯 번째 후계자 스가랴가 기원전 745년에 암살당하면서, 북왕국은 급속히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북왕국이 안고 있던 문제점들은 주로 앗시리아에서 비롯된 것으로, 당시에 앗시리아는 세력과 제국주의 야심을 날로 키우면서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서진(西進)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앗시리아의 통치자들은 시리아와 레바논의 풍부한 삼나무와 여타의 목재들, 시리아-팔레스티나의 대상 교역로, 페니키아의 항구 도시들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앗시리아가 팽창해나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기원전 722년에 앗시리아 왕 살만에셀 5세는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성경이 이 사건을 보는 시각은 열왕기하 17장에 나옵니다). 살만에셀의 후계자 사르곤 2세는 정복된 민족들에 대한 앗시리아의 정책을 전면적으로 확대 실시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지배계급 대다수는 앗시리아 제국 내 다른 지역으로 끌려가서 그곳에 정착했고, 그 대신 이 지역의 외국인들이 이스라엘로 끌려와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는 재건되어 새로 수립된 앗시리아의 사메리나 지방정부 행정중심지 구실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주민들 상당수가 여전히 남아서 야훼를 섬기고 선조들의 관습을 지켜나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개중에 일부는 남쪽으로 피난하여 유다에 거주지를 마련하고 그들의 전승과 문학을 보존했던바 엘리야와 엘리사 계열의 설화, 궁정의 연보, 엘로히스트 서사시, 신명기에 보존된 율법 전승의 초기형태 같은 것들이 거기에 해당했습니다. 그러나 국가라는 정치적 독립체로서의 북왕국은 종말을 고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네 세대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역사를 만드는’ 유다의 지배계급이 담당했습니다.
2. 남왕국 유다의 약사 : 기원전 922~587년
남왕국 유다가 북왕국에 비해 정치적으로 훨씬 더 안정을 누린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선 유다는 무역통로와 비옥한 농경지를 지닌 북왕국과는 달리 훨씬 작고 외졌습니다. 따라서 정복하여 지배하고 싶은 유혹거리가 되지 못했습니다. 유다의 생명이 오래갈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다윗과 솔로몬의 왕조 때문이었습니다. 이 왕조는 신참자가 나타나 경쟁하기 어려운 기득권을 이미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남왕국 유다의 왕들은 일찍부터 공동체-섭정제가 제도화되어서 확실한 후계자는 선왕의 재임 말기에 통치권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차기 왕이 권력을 잡기 이전부터 실제적인 경험을 쌓도록 해주었을 뿐 아니라 사전에 왕권을 다지고 강화하는 기회도 제공했습니다.
유다 왕국 왕들의 연대표 | ||||||
| 왕명 | 평가 | 통치기간 | 통치햇수 | 통치기간 나이 | 북부와의 관계 |
1 | 르호보암 | × | 922-915 | 17년 | 41-58세 | 전쟁 |
2 | 아비야 | × | 915-913 | 3년 | ? | 전쟁 |
3 | 아사 | △ | 913-873 | 41년 | ? | 전쟁 |
4 | 여호사밧 | △ | 873-849* | 25년 | 35-60세 | 평화 |
5 | 여호람 | × | 849-842* | 8년 | 32-40세 | 평화 |
6 | 아하시야 | × | 842 | 1년 | 22-23세 | 동맹 |
7 | 아달랴(女) |
| 842-837 | 7년 | ? | 평화 |
8 | 요아스 | △ | 837-800 | 40년 | 7-47세 | 평화 |
9 | 아마샤 | △ | 800-783 | 29년 | 25-54세 | 전쟁 |
10 | 아샤라(우찌야) | △ | 783-742* | 52년 | 16-68세 | 평화 |
11 | 요담 | △ | 742-735* | 16년 | 25-41세 | 전쟁 |
12 | 아하스 | × | 735-715* | 16년 | 20-36세 | 전쟁 |
13 | 히스기야 | ○ | 715-687 | 29년 | 25-5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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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므낫세 | × | 687-642 | 55년 | 12-67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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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아몬 | × | 642-640 | 2년 | 22-2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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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요시야 | ○ | 640-609 | 31년 | 8-39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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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여호아하스 | × | 609 | 3달 | 2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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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여호야김 | × | 609-598 | 11년 | 25-36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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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여호야긴 | × | 598-597 | 3달 | 1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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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시드기야 | × | 597-587 | 11년 | 22-3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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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중 ○는 야훼의 눈에 올바른 일을 한 왕,
×는 올바른 일을 하지 못한 왕,
△는 올바른 일을 하였으나 산당까지는 없애지 못한 왕을 각각 가리킴.
※ 통치기간 중 *표는 섭정 기간을 가리킴.
솔로몬 왕국이 분열되고 나서 초기에는 두 왕국 사이에 간헐적으로 전쟁이 벌어졌지만, 북왕국 오므리 왕조가 들어선 다음에는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다윗 가문의 왕 아마샤(기원전 800-783년)와 아샤라/우찌야(기원전 783-742년) 치하에서 유다는 여로보암 2세(기원전 786-746) 치하의 북왕국이나 마찬가지로 비교적 평온과 번영을 구가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700년대 초에 약화되는 앗시리아의 국력상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600년대에 유다를 다스린 왕들 가운데 언급해둘 필요가 있는 왕은 셋이 있습니다. 우선 히스기야(기원전 715-686년)는 부왕 아하스(기원전 732-715년)의 대 앗시리아 우호정책을 뒤집은 사람입니다. 히스기야는 앗시리아를 배격하고 민족주의를 키우는 운동의 일환으로 예루살렘 성전예식에 침투한 앗시리아의 요소들을 척결하고 예루살렘 이외의 야훼산당 및 여타의 산당들을 폐쇄함으로써 야훼신앙의 공식적인 입지를 강화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그는 신명기계 역사가들로부터 격찬을 받았습니다.
히스기야의 후임자 므낫세의 경우는 그와 정반대입니다. 그의 오랜 재임기간(기원전 686-642년)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므낫세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다. 그는,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역겨운 풍속을 따랐다”는 신명기 역사의 기록 말고는 별로 없습니다(왕하 21:2). 그는 틀림없이 충성스런 앗시리아 가신 노릇을 철저히 수행하면서 제왕다운 생활을 마음껏 과시하는 한편 대다수의 주민에게는 가혹하고 억압적인 정책을 펴나갔음에 분명합니다. 그의 가혹한 정책 속에는 유다의 전통적인 종교를 억누르고 박해하려 덤빌 정도까지 야훼신앙에 냉담한 태도를 취하는 소행도 포함되었습니다. 므낫세의 44년 통치가 끝나고 기원전 640년에 반앗시리아 세력이 그의 손자 요시아를 왕으로 옹립하자, 신명기 사가들은 구원을 만난 듯 반가워하며 환호했습니다. 신명기 역사에서는 요시아가 진정한 영웅이요 구원자로 등장합니다(왕하 22-23장 참조). 실제로 므낫세의 친앗시리아 입장은 급속도로 반전되고, 신명기계 인사들의 지표와 일정에 따른 사회-경제 개혁 및 종교개혁이 한동안 수행됩니다. 초기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신명기의 핵심부분으로 추정되는 ‘율법책’이 성전에서 ‘발견되는’ 것도 요시아 시절입니다. 앗시리아가 바빌론의 발흥으로 위협받고 부대끼며 쇠퇴일로에 접어든 덕분에, 요시아는 일정 정도 자유를 누리면서 유다의 영향력을 북부까지 넓혀 이전에 이스라엘 왕국에 속하던 영토와 주민 상당 부분을 거둬들입니다. 요시아는 북부 전승들을 바탕으로 하는 신명기계 노선에 따른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북왕국 백성의 후예들로부터 호의적인 환대를 받아내게 됩니다.
그러나 요시아와 신명기계 인사들이 부풀게 만든 희망은 급속도로 소멸되었습니다. 바빌론은 앗시리아를 덮쳐서 기원전 612년에 전설적인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를 파괴한 다음, 이윽고 서쪽으로 밀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혼돈과 소란이 한동안 계속되고, 요시아 자신은 609년 므깃도 전투에서 피살당했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네 명의 왕은 의지가 어떠했든지 간에 강대국 바빌론과 이집트 사이에서 볼모노릇을 하며 단명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은 이 골치 아픈 속국 유다를 처리하고자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그 결과 기원전 587년에 유다는 유린당하고 예루살렘도 함락되었습니다. 바빌론인들은 성벽을 헐고 성전을 불 지르고 왕궁을 철저히 때려 부순 다음, 지배계급과 지도적인 시민들을 끌고 가서 바빌론에 유폐시켰습니다. 이로써 정치적인 독립국가로서의 유다의 존재는 사라졌습니다. 유다는 자매왕국 이스라엘이 135년 전에 맞이한 것과 동일한 운명을 맞았던 것입니다.▩
제12주 첫째 날 | 내용 | 읽을 본문 | 시편 기도 |
왕국의 분열 | 왕상 12-16 | 시 80 |
첫째 날 참고 자료는 앞의 “북왕국 이스라엘의 약사”와 “남왕국 유다의 약사”로 대체합니다. 이 자료를 참고하시면서 성경 본문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제12주 둘째 날 | 내용 | 읽을 본문 | 시편 기도 |
예언자 엘리야 | 왕상 17-왕하 1 | 시편 94 |
“야훼가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엘리야가 역사의 무대에 혜성같이 등장한 것은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북왕국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때였습니다. 그가 아합에게 가서 던진 첫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섬기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내가 다시 입을 열기까지 앞으로 몇 해 동안은, 비는커녕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왕상 17:1). 이 말은 바알에 대한 선전포고에 다름 아닙니다. 왜 성경은 ‘엘’과 ‘야훼’는 다른 이름을 가진 하나의 신으로 고백하건만, 바알은 그토록 배격하는 걸까요?
아합 왕이 바알을 섬기게 된 배경에는 왕비 이세벨이 있었습니다. 이세벨은 바알신앙의 본거지인 페니키아(시돈)의 엣바알 왕의 딸인데(왕상 16:31), 페니키아는 지중해 연변에 위치한 고대의 상업 중심지였습니다. 상업 활동이라는 것은 소유권을 사고파는 행위이므로 명백한 소유권의 보장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므로 페니키아의 종교인 바알신앙은 개인의 소유권을 보장해주고 자유매매를 옹호하며, 소유주 개인의 의사에 따른 소유권 이양을 보장하는 사회-경제적 함의를 가진 신앙체계였습니다(이런 이유로 야훼신앙의 전통을 이해하고 있었던 아합 왕과는 다르게 왕비 이세벨은 나봇의 포도원을 아무렇지도 않게 갈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알’이란 그 문자적 의미 자체도 소유주, 주인을 뜻합니다. 이런 이유로 솔로몬을 비롯한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대 왕들은 왕정 체제를 옹호하는 바알신앙을 야훼신앙에 덧씌웠습니다(=소위 종교혼합주의). 이것은 전통적인 야훼신앙으로는 왕정에 필요한 물적 기반을 도저히 확보할 수 없기 때문에, 바알신앙을 통해서 왕정 유지에 필요한 물적 기반을 확보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솔로몬이 혼합주의를 택한 이유이며,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이 그렇게 예언자들과 역사가들에 의해 비난을 받으면서도 이방신을 따라 나섰던 진짜 이유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초기부터 야훼 유일신앙의 기치아래 바알신앙을 철저히 배격했습니다. 그것은 두 신앙이 지향하는 점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이 두 신앙은 결코 공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바알은 가진 자의 신이었습니다. 가진 자의 상징은 풍요함입니다. 농경사회에서 풍요는 다산(多産)을 전제합니다. 바알과 함께 언급되는 아스다롯(=아세라)은 다산의 여신이었습니다. 이 바알 종교는 계절 축제에서 재현됐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바알은 그의 처 아스다롯과 풍요한 삶을 누리는데 한재(旱災)를 상징하는 초여름의 신 모토(=죽음)에 의해 살해되어 바다의 신 얌의 감시 하에 억류됩니다. 그러나 부활의 계절인 가을에 비가 내림과 더불어 부활하여 비구름을 타고 돌아와 그를 죽인 모토를 벼락으로 쳐 죽이고 천상에서 다시 신으로서 즉위하여 죽음으로 갈라졌던 그의 처 아스다롯과 다시 결합합니다. 그리고 이 결합-성행위를 통해 모든 생명이 태어납니다. 이렇듯 가나안 농경사회에서는 비-생산(또는 多産)-풍요-소유가 바알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엘리야는 “비와 이슬로 땅을 적시어 풍요로운 생산을 내는 것은 바알이 아니라 야훼”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예언대로 3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사태가 이쯤 되면 왕의 관심은 가뭄으로 타 들어가는 농토와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한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합의 꼴을 보십시오, 백성이야 목이 타서 죽건 말건, 아합에게는 군마들이 마실 물이 없다는 게 문제였습니다(왕상 18:5). 가진 자의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음에 기가 막힐 뿐입니다.
드디어 갈멜산에서의 바알의 예언자 450명과의 역사적인 대결! 결과는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기에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한 가지만 언급한다면 엘리야가 제단과 장작에 물을 부은 것은 야훼의 권능과 엘리야의 믿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물로 상징되는 바알을 야훼의 불길이 삼켜버림을 분명히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주 관심은 백성들을 향해 엘리야가 던진 비수 같은 한 마디입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을 것입니까? 주님이 하나님이면 주님을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십시오”(왕상 18:21). 여기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말은 야훼와 바알을 편리한데로 선택하는 기회주의, 종교혼합주의를 뜻합니다. 이 때 엘리야는 야훼냐, 바알이냐, 양다리 걸치지 말고 둘 가운데 하나를 분명히 선택하라고 준엄하게 명령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냐, 맘몬이냐!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 6:24; 눅 16:13). 우리는 이 물음 앞에서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인가요, 아니면 우상인가요?
엘리야의 일성(一聲)은 오늘 이 시대의 종교혼합주의를 문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 생활에서는 물질우상, 출세우상, 입시우상을 숭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내 편한 대로 하나님을 채색하고, 자기 식으로만 이해하고 단정 지은 하나님 상을 맹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제12주 셋째 날 | 내용 | 읽을 본문 | 시편 기도 |
예언자 엘리사 | 왕하 2-7 | 시 107 |
엘리사는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는 뜻입니다. 그는 스승 엘리야가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 다음부터 예언자로서 공식적으로 활동을 시작합니다. 본래 엘리사는 밭을 갈다가 엘리야가 겉옷을 걸쳐주자 엘리야를 따라 나섰습니다(왕상 19:19-21). 당시 겉옷을 걸쳐주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예언자의 소명을 부여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이 엘리야의 겉옷으로 요단강을 쳐 갈라지게 함으로써, 엘리야의 염검을 이어받았음을 드러냅니다. 이후 나열되는 온갖 기적 이야기는 엘리사의 소명을 뒷받침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열왕기하 2장 23-25절을 보면 엘리사가 자신을 “대머리야, 꺼져라!”라고 놀려 대는 아이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저주하자 암곰 두 마리가 42명의 어린이를 찢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열왕기하 1장 8절을 보면 엘리야는 “가죽으로 아랫도리를 가리고 몸에는 털옷을 걸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엘리야의 복장은 당시 예언자들에게 널리 통용되던 것이었고 그가 예언자임을 나타내는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거짓 예언자들도 이런 복장을 해서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하지만 거짓 예언자들의 거짓이 탄로 나면 사람들은 그의 가죽 털옷을 강제로 벗겼습니다. 여기서 “그자는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서 머리털을 잃었다”는 중동지방의 속담이 생겨났습니다. 이 속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대머리’와 ‘거짓말쟁이’를 같은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아이들이 엘리사를 ‘대머리’라고 놀린 것은 그를 ‘거짓 예언자’라고 헐뜯은 것입니다. 이에 엘리사가 야훼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저주한 것입니다. 이때 암곰 두 마리가 나타나서 42명의 어린이를 찢어 죽였다는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제12주 넷째 날 | 내용 | 읽을 본문 | 시편기도 |
북왕국의 쇠퇴 | 왕하 8-13 | 시 62 |
넷째 날과 다섯째 날 참고 자료는 첫째 날 자료 앞 “북왕국 이스라엘의 약사”와 “남왕국 유다의 약사”로 대체합니다. 이 자료를 참고하시면서 성경 본문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제12주 다섯째 날 | 내용 | 읽을 본문 | 시편기도 |
북왕국의 멸망 | 왕하 14-17 | 시 77 |
제12주 여섯째 날 | 내용 | 읽을 본문 | 시편 기도 |
홀로 남은 유다 왕국 | 왕하 18-25 | 시 137 |
1. 히스기야의 업적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역사에서 가장 극심했던 격동기는,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을 먼발치에서 보았던 히스기야의 시대와 요시야의 아들들이 예루살렘 함락을 눈앞에서 쳐다보고 있었을 때입니다. 서기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시리아 제국의 무력에 완전히 무너지지만, 유다의 왕 히스기야는 장차 닥칠 위협에 적극 준비하여 701년 앗시리아의 예루살렘 포위에도 불구하고 해방의 기쁨을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왕하 18:17-19:37).
앗시리아 왕 산헤립이 시리아-팔레스티나의 모든 도시들을 점령하고 유다 왕국으로 침입하여 유다 땅의 강한 요새였던 라기스를 공략하여 함락하였습니다. 곧 이어 산헤립은 그의 부관을 예루살렘으로 보내 투항할 것을 종용하지만 히스기야는 천하의 제국에 맞서 항쟁하겠다고 버팁니다. 산헤립은 앗시리아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여 그곳을 완전히 봉쇄하고 아무도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하게 정찰부대를 주변에 배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산헤립의 전령은 독 안에 갇힌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히스기야가 유다를 방어하지 못할 것은 당연하며 야훼가 그들을 구원한다고 확신시키는 히스기야의 어리석은 신앙을 따르지 말라고 충동질합니다. 그리고는 뭇 민족들처럼 앗시리아의 힘에 굴복하면 예루살렘보다 더 풍요한 땅으로 데려가 행복하게 살게 해 줄 것을 약속하는 산헤립의 선전문을 히브리말로 크게 외칩니다. 이런 와중에 히스기야는 이사야와 함께 오직 야훼에게 숨 가쁜 기도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앗시리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완전히 포위한 지 몇 일이 채 지나지도 않은 아침에 성 밖을 내다보니, 수많은 앗시리아 군인들이 쓰러져 있었으며 앗시리아 군대는 온데간데 없어져버렸습니다. 열왕기는 야훼의 천사가 그들을 쳤다고 전합니다(왕하 19:35).
이보다 21년 전 앗시리아 군대는 예루살렘에서 불과 한나절 걸음밖에 안 되는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를 점거해 앗시리아의 속주로 편성시켰으며, 2년 후 그곳 이스라엘인들을 집단 이주시켰습니다. 이러한 참상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을 예루살렘 거주민들은, 앗시리아에 의해 포위된 그들도 사마리아와 같은 운명이 될 것이라는 촉박하고도 암담한 심경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앗시리아 군대가 모두 물러갔다는 해방의 기쁨을 어떻게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 당시 앗시리아는 고대 근동의 최강국이었으며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에 앗시리아의 종속국이 되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산헤립의 막강한 군사력에 버틴 것은 앗시리아에서 보면 변방의 보잘것없는 조그만 도성의 임금이 앗시리아 제국의 권위에 대해 도전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이 극적인 사건의 전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왕하 18-20장을 시대 순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18:1-8은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남왕국 유다의 왕으로 등극할 당시는 도시국가 다마스커스(=다메섹)가 앗시리아의 속주가 된지 불과 5년밖에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부왕인 아하스는 다마스커스로 가서 앗시리아 왕에게 경배하고 그들의 종교예식을 본떠 예루살렘에서도 앗시리아의 신들에게 예배하여 그들에게 아부하는 정책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가 등극하자 그는 최강국의 신상을 숭배하는 우상주의를 철폐하고 이스라엘의 야훼주의로 돌아가자고 외쳤습니다. 이는 단순히 우상타파의 차원을 뛰어넘는 대담한 정책으로, 앗시리아에 대한 항쟁의 깃발을 올린 것과 다름없습니다.
앗시리아의 위세가 극치에 달하고 있을 당시인 히스기야의 통치 4년째에 앗시리아 왕 살만에셀 5세는 사마리아로 올라와 그곳을 포위하고 이스라엘인들의 숨통을 조이며 3년을 공략했습니다. 722년 사르곤 2세가 등극하자 곧바로 사마리아는 무너지게 됩니다. 왕하 18:9-12은 이 사건에 대한 보도입니다.
사마리아를 점거하고 이스라엘을 앗시리아의 속주로 만든 사르곤 2세는 드디어 히스기야의 통치 14년(713년)에 유다 왕국의 여러 성곽도시들로 침공하여 점령하였습니다(왕하 18:13 : 이 기록에는 산헤립으로 명기되어 있지만 이때 앗시리아 왕은 사르곤 2세였습니다. 산헤립은 705년에 등극합니다). 블레셋의 여러 성읍들이 앗시리아에 반기를 들고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였기에 사르곤 2세는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원정길에 올랐던 것입니다. 사르곤 2세가 라기스를 점령하고 있었을 때, 히스기야는 그에게 전갈을 보내 자기의 잘못을 사과하며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합니다. 히스기야도 그들의 음모에 가담하였기에 앗시리아 왕의 용서를 구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왕하 18:13-16에 실려 있습니다.
한편 역대지하 29-32장에 히스기야의 업적에 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29-31장까지는 종교개혁에 대한 내용이며, 32장은 그가 앗시리아의 침공을 대비하기 위해 준비했던 일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고 망대를 높이 올리고 성벽 바깥에 벽을 더 쌓았습니다. 또한 창과 방패도 많이 만들었고,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비축하였으며, 장교들이 백성들을 단위별로 통솔하는 전시체제로 행정기구를 개편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성 밖의 기혼 샘 밑으로 수로를 파서 성안의 실로암 우물터로 연결시킨 지하수로를 완성하고 기혼 샘은 밀폐해 버렸습니다(지금까지도 그렇습니다). 예루살렘이 포위될 경우 물과 식량으로 버틸 각오를 한 것이며, 기발한 생각은 유사시 성 밖 주변의 모든 우물을 흙으로 덮어버릴 것을 계산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언제부터 전쟁준비를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아마도 721년 이후 일 것 같습니다) 그의 방어 정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712년 이후 705년 산헤립이 앗시리아의 왕으로 등극할 때까지 앗시리아 군대의 원정은 없었으며 그동안 앗시리아 장군들이 점령지역의 집정관으로 도시국가들을 통제했습니다).
열왕기 기록에 의하면 히스기야의 나이 39세, 즉 사르곤 2세가 라기스를 점령하였던 713년, 히스기야가 그에게 잘못을 사과하고 부과된 공물로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주었던 그 해에 히스기야는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그의 우환은 공물을 바친 후에 생긴 것 같습니다). 그는 예언자 이사야에게 야훼 하나님의 뜻(자기의 운명)을 물어보았습니다. 이사야는 그가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리고 야훼께 기도하며 통곡했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눈물을 들으시고 그를 치유해주시겠다고 전합니다. 그는 사흘째에 야훼의 집에 올라가게 되며, 그의 수명에 15년을 더해 준다는 희보(喜報)를 듣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가 훗날 앗시리아 왕의 손바닥에서 예루살렘을 구하게 할 것이며 야훼께서 자신과 다윗을 생각하여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이 장면은 열왕기하 20:1-11에 보도됩니다.
이 일이 있은 후 12년이 지나자 예루살렘이 앗시리아 군대에 함락되는 순간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이때 히스기야가 야훼께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자 야훼의 천사가 앗시리아 군대를 쳐서 수많은 군인이 쓰러졌고 앗시리아 군대는 돌아가게 되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히스기야에게 선물을 가져왔다는 이야기가 열왕기하 18:17- 19:37에 실려있습니다. 과연 히스기야가 갇혀 있었던 예루살렘 성 밖에서는 무슨 일이 생겼기에 산헤립은 되돌아가야만 했을까요? 역대지하 32장의 기록에 의하며 산헤립이 앗시리아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올라올 때에 히스기야는 많은 병력과 인력을 동원하여 급히 성밖의 모든 샘과 우물을 흙으로 덮어버렸다고 전합니다. 그때를 계산하여 보면 적어도 늦은 봄이었던 것 같습니다. 늦은 봄이면 샘과 우물의 물높이가 낮아져서 흙으로 덮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주변의 모든 샘과 우물이 흙으로 덮여 당장 물 공급이 마비된 상태였으니, 수십만 명의 앗시리아 군인들이 며칠을 견딜 수 있었겠습니까? 물론 한 나절 정도의 거리로 나가면 물을 공급해 줄 수 있는 샘들이 있지만, 몇 십만 명을 충당시킬 만한 물 수송은 그렇게 용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열왕기의 기록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야훼 하나님은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을 구원하는 징표를 보여줄 것이라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주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룰 것이다”(왕하 19:31). 그리고는 “그 날 밤에 주님의 천사가 나아가서, 앗시리아 군의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쳐 죽였다. 다음날 아침이 밝았을 때에 그들은 모두 주검으로 발견되었다”(왕하 19:35). 여기서 주의 열심을 실행에 옮긴 야훼의 천사는 누구일까요?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때가 늦은 봄이면 가끔 이때 즈음에 남동쪽에서 이쪽으로 황사를 동반하는 열풍이 며칠 동안 불어 닥친다고 합니다. 그 무더운 열기는 35-40도를 넘나듭니다. 그 날 밤에 야훼 하나님께서 찜통 같은 열풍을 일으키셨던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수많은 병사들이 한밤중에 샘물터를 찾아 나설 겨를도 없이 탈진되어 쓰러졌던 것이 아닐까요?
2. 므낫세의 죄
698년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12세의 나이로 등극하고 그의 55년 통치 기간 중 유다 왕국은 앗시리아와 화평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유다 왕국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친(親)앗시리아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정책의 바탕은 히스기야 자신이 그의 말년(아마도 700-699년)에 앗시리아 왕 산헤립에게 무거운 조공을 바쳤고 친앗시리아 정책을 선호함으로써 무력적인 반란을 피하려 했던 데 기인합니다.
앗시리아 왕 산헤립은 689년 바빌론을 초토화하였으나 681년 그의 아들들의 음모로 살해되고 아들들 사이에 내란이 계속되다가 에살핫돈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679년 그는 이집트로 원정길을 떠났으며 지중해 해변 지역의 모든 도시국가들과 이집트 변경의 성읍들을 다시 점령하여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서 왕권 쟁탈전으로 혼란했던 시기를 틈타 반란을 도모했던 모든 도시국가의 왕들과 부하들은 니느웨로 압송되고 그들을 우리에 가두어 사거리에 전시했으며, 많은 반란 주모자들을 처형하고 개선 행렬에서 그들의 머리를 막대기에 꽂아 시위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소도시국가 왕들을 레바논 산의 벌목 사업에 부역 일을 시켰습니다. 그 가운데 므낫세도 포함되었다고 앗시리아 기록은 전합니다. 이처럼 유다 왕국의 주변 국가들은 대부분 앗시리아의 종속국이나 속주가 되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앗시리아 왕은 앗시리아 장군들을 각 도시의 집정관으로 상주시켰으며 앗시리아 군대도 여러 지역에서 야영했습니다.
앗시리아 제국의 영향권 아래 있는 모든 도시에 친앗시리아파가 득세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유다 왕국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므낫세 주변에 친앗시리아파가 득세를 하게 되었으며, 므낫세의 55년 장기간 통치시기에 친앗시리아파는 점차 기득권층으로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친앗시리아파들은 선왕인 아하스가 앗시리아 왕(디글랏빌레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앗시리아 종교제의를 예루살렘에 들여왔던 것처럼(왕하 16:10-18), 앗시리아 종교를 예루살렘에 적극 보급하여 전례에 없었던 종교 혼합주의가 확산되었습니다. 유다 산간지방의 답습적인 민속 종교제의에서 숭배되었던 아세라와 바알과 몰렉 등은 물론, 예루살렘에서는 앗시리아 신들인 달신과 금성여신(이쉬타르), 태양신, 그 외 12별자리 등을 야훼와 함께 섬겼습니다(이는 요시야 왕이 종교개혁을 하며 철거했던 우상들을 보면 그 실상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왕하 23:4-14). 므낫세 말년에 앗시리아 집정관이 그를 쇠사슬로 묶어 바빌론으로 끌고 갔을 때 므낫세는 회개하여 야훼께로 돌아와 산당과 우상 제단을 헐고 성전 안에 세워 놓았던 이교제단을 예루살렘 밖으로 버렸다고 합니다(대하 33:10-15). 여기에서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므낫세 말년에 친앗시리아파의 종교 혼합주의에 거세게 반대하는 야훼주의자들이 복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므낫세는 죽어서도 다윗 가문의 무덤 터에 묻히지 못하고 그의 궁 정원에 묻혔다고 합니다(왕하 21:18). 유다 왕들 가운데 므낫세 전까지는 그들이 비록 종교 혼합주의자들이라도 다윗 가문의 무덤에 모두 묻혔으나 므낫세는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등극한 지 2년 만에 살해당한 므낫세의 아들 아몬도 같은 운명이었습니다).
3. 원(原)신명기
므낫세의 아들 아몬이 종교개혁자(야훼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되고 야훼주의 사제들은 8살 되는 그의 아들 요시야를 왕위에 앉히고 히스기야의 전통을 잇는 종교개혁을 실행합니다. 그동안 흥행했던 가나안과 앗시리아 종교제의를 모두 철폐하고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모든 우상들을 성 밖으로 내다 버렸습니다(왕하 23장). 어린 요시야를 왕통으로 세우고 야훼에게 돌아가는 종교개혁은 대사제 힐기야를 중심으로 결성된 야훼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었습니다. 유다 왕국의 역사에 있어서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또 한 번의 새로운 반복이었습니다. 힐기야(와 요시샤)의 개혁정책보다 200여 년 전에 대사제 여호야다는 7살의 요아스를 왕위에 앉히고 전 세대의 종교 혼합주의를 타파하며 야훼주의를 주창하였습니다. 이때 처음 생긴 제도가 성전 보수에 필요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성금궤’를 성전 담 밖에 걸어 놓아 백성들에게서 헌금을 받는 것이었습니다(왕하 11:17-12:17)
요시야가 등극한 지 18년 되던 해에 이 성금궤에서 획기적인 사건 하나가 일어났습니다. 이 거룩한 궤를 정리하던 힐기야가 어떤 토라 책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힐기야 제사장은, 주님의 성전에서 궤에 보관된 돈을 꺼내다가, 모세가 전한 주님의 율법책을 발견했습니다”(대하 34:14). 요시야는 이 책을 읽고 그 진위를 백성과 예언자들에게 문의하였으며, ‘야훼의 집’에 올라가 이 새로 발견된 토라 책(계약책)을 봉독하고 “주님을 따를 것과, 온 마음과 목숨을 다 바쳐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킬 것과, 이 책에 적힌 언약의 말씀을 지킬 것을 맹세하는 언약을, 주님 앞에서 세웠습니다. 온 백성도 그 언약에 동참하였습니다”(왕하 23:3). 요시야의 실록을 정리했던 열왕기 사가들은 아래와 같이 그를 극찬합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다 기울이고 생명을 다하고 힘을 다 기울여 모세의 율법을 지키며 주님께로 돌이킨 왕은, 이전에도 없었고 그 뒤로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왕하 23:25). 요시야 때에 발견된 토라 책은 위의 인용구에서 힌트를 주듯이 ‘온 마음과 온 목숨과 온 힘(즉 재력)으로’라는 문구가 표제어구로 나오는 신명기입니다.
4. 남유다의 멸망
요시야는 앗시리아 제국주의에 시달리던 유다 백성을 다시 한 번 ‘원신명기’의 야훼주의로 무장시켰습니다. 그 당시 국제 정세는 쇠퇴하는 앗시리아 제국과 새로 등장하는 신(新) 바빌로니아의 각축전이었습니다. 이집트의 삼각주 지역까지 점령하고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던 앗시리아 제국은, 에살핫돈의 아들 아슈르바니팔(서기전 668-627년)의 문화정책 통치가 끝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때 바빌로니아에 새로운 왕조가 건설됩니다. 사막 유목민이었던 ‘칼두’(히브리어로 카스딤, 그리스어 음역으로 갈대아)인들이 바빌로니아에 들어와 새로운 왕조(신 바빌로니아)를 세운 것입니다.
신(新)바빌로니아는 스키티족드로가 메데왕국과 연합하여 니느웨를 3개월만에 점령하였으며(612년), 앗시리아 왕은 서쪽으로 도망하여 하란 등 앗시리아 종속국에서 저항운동을 폈습니다. 한편 바빌로니아 왕 나보폴라사르(625-605년)는 앗시리아의 전(前)종속국들을 장악하기 위해 서방원정을 나갔습니다. 한편 앗시리아 왕은 이집트 왕 느고의 도움을 얻게 되어 계속 버틸 수 있었습니다. 느고는 앗시리아와 공동전선을 펴며 시리아로 원정 가는 도중에 앗시리아에 반란을 일으키고, 전투에 참여한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살해했습니다(609년, 요시야는 39세의 나이로 전사했습니다). 그 해 앗시리아와 이집트 연합군은 바빌로니아 연합군과 시리아 북쪽 벌판 가르그미스에서 대전을 벌입니다. 이 전투에서 바빌로니아가 이겨 앗시리아 왕국은 사라지게 됩니다.
서기전 604년 느부갓네살이 바빌로니아의 왕이 되고 3년 후 이집트로 원정을 갔으나 실패하였고, 유다 왕이 된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608-598년)은 바빌로니아에 조공을 거부하고 이집트 편에 붙었습니다(이때 예언자 예레미야는 그러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598년 겨울 느부갓네살은 군대를 이끌고 시리아-팔레스티나로 진격했으며 그때 여호야긴이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바빌로니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였고 여호야긴은 즉위한 지 3개월 만에 느부갓네살 앞에 나가 항복하였으며 무거운 조공을 바쳤습니다. 여호야긴은 그의 가족과 궁전 관리들과 많은 장인(匠人) 등 만여 명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바빌로니아 왕은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요시야의 아들이며 여호야긴의 삼촌인 시드기야에게 넘겨주고 바빌론으로 돌아갔습니다. 바빌로니아 문서에 의하면 바빌론에 유배된 여호야긴은 왕으로서 대우를 받았으며 그의 칭호도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시드기야(596-586)가 통치했던 유다 땅에는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민감한 예언자들이 제각기 한 마디씩 하여 우민(愚民)은 우왕좌왕하였고, 국수주의자들은 바빌로니아의 멸망을 예언하였으며, 이집트에 동맹을 호소하는 무리들의 외침도 컸습니다.
서기 전 594년 이집트 왕 느고가 죽고 전쟁용사인 프삼메티코스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 기회에 에돔과 모압, 암몬, 두로와 시돈의 대사(大使)들이 예루살렘에 비밀리에 모여 국제 정세를 논의하였습니다. 그 해 느부갓네살은 바빌로니아의 위세를 이집트에 과시하기 위해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으로 두 차례 원정을 보냈으며 시드기야는 바빌론에 가서 공물을 바쳤습니다.
한편 592년 프삼메티코스가 에티오피아로 원정 가는 군대에 유다 군인들이 대거 참여했습니다(시드기야가 이집트와 비밀리에 동맹을 맺었음은 분명합니다). 시드기야는 양다리를 걸친 것이며 필요할 때에 프삼메티코스가 도와줄 것을 확신하고 바빌로니아에 반란할 기회를 노렸던 것입니다. 이 시기에 시드기야는 바빌론에 조공을 바치지 않음으로써 바빌로니아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589년에 프삼메티코스는 죽고 호브라가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이집트 왕이 바뀐 계기에 반란을 주모하였던 유다 왕국을 다시 침입하여 시드키아의 재위 9년 겨울에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하였습니다(587년). 이집트 왕 호프라는 그들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집트 군대를 팔레스티나로 파송하여 바빌로니아 군대의 진격을 잠시 저지할 수 있었으나 실패하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예루살렘은 586년 여름까지 굶주림에도 불구하고 버티었으나 바빌로니아 군대의 줄기찬 공격에 결국 성벽은 무너졌습니다. 야밤에 시드기야는 도망쳤으나 곧 붙잡혀 느부갓네살 앞에 끌려왔습니다. 시드기야의 면전에서 그의 자식들을 처형하였으며, 그의 두 눈을 뽑아버리고 사슬에 묶어 바빌론으로 끌어갔습니다. 바빌로니아 군대는 궁전과 성전의 재물과 도시 전체를 약탈한 다음 가난하고 늙고 힘없는 사람들은 제외하고 나머지 백성을 바빌로니아의 여러 도시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유다 땅을 떠나면서 2년 전에 바빌로니아에 반란하는 것을 반대했던 온건파 지도자 게달리아를 유다의 집정관으로 지명하였습니다(게달리아의 아버지는 요시야 시대에 율법책이 발견되었을 때 한몫을 담당했던 서기관 샤판의 아들인 악히캄입니다). 바빌로니아로 유배되지 않고 피했던 유다의 몇몇 장수들과 그들의 부하들이 게달리아에게 모이자 게달리아는 그들에게 맹세했습니다. “바빌론 관리들을 두려워하지 마시오. 이 땅에 정착하여 바빌론 왕을 섬기시오.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유리할 것이오”(왕하 25:24). 게달리아는 또한 소유주가 부재한 땅을 경작하면 경작자가 소유주가 될 수 있다는 토지개혁을 하여, 유배되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이 이례 없이 많은 땅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왕족의 한 사람이 그의 부하들을 데리고 미스바에 거주했던 게달리아에게 와서 그를 살해하고 그와 함께 있던 바빌로니아 관리들도 죽였습니다. 이로써 게달리아는 집정관이 된 지 52일 만에 그의 운명을 다했으며, 유다의 자치제 또한 종말을 가져왔습니다. 미스바 사람들은 바빌로니아의 보복이 두려워 늙은 예언자 예레미야를 데리고 이집트로 도망갔습니다(렘 40-44장). 그들이 이집트로 피신한 지 8년째 되는 해에 바빌로니아 군대는 이집트를 침략하고 이 유대인들을 처형하였으며, 이 때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로 끌려갔습니다(예레미야와 그의 제자 바룩도 그들 중에 있었습니다). 한편 바빌로니아에 유배 왔던 사람들은 게달리아가 살해된 날을 기억하여 금식의 날로 정하고 유다 땅이 재생될 수 있었던 마지막 희망조차 사라진 것을 원통해 했다고 전합니다(슥 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