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황 37년 (BC 210년) 7월 시황제가 순행 중에 병사했다. 이듬해 (BC 209년) 7월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반란를 일으켰다. 소규모로 시작된 반란은 순식간에 대규모 농민봉기로 확대되었고 옛 육국(六國)의 귀족들도 가담했다. 진승은 국호를 장초(張楚)라 정하고 왕위에 올라 낙양 동쪽 대부분을 석권했다. 진승의 부하 한광(韓廣)이 옛 연나라의 수도 계(薊)를 점령하고 스스로 연왕에 올랐다. 진승의 주력군이 함곡관을 돌파하여 진나라의 도성인 함양으로 진격했으나 장한에게 참패했다. 반란군이 패배를 거듭하면서 12월에 진승이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진시황의 통일과 영토확장
진승 오광의 난을 계기로 도처에서 일어난 반란군 중에 초나라 회계에서 봉기한 항량과 항우의 세력이 가장 강대하였다. 항량이 전사하여 항우가 뒤를 이었고 독자적으로 봉기한 유방도 항우에게 가담했다. 항우가 중원에서 진나라의 대군을 격멸하는 동안 유방이 사잇길로 관중에 진입하여 BC 207년 11월에 진왕(秦王) 자영(子嬰)의 항복을 받았다. 12월에 함양에 당도한 항우가 자영을 죽이니 진나라는 시황제가 통일한지 불과 14년만에 멸망했다.
BC 206년 1월, 항우는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칭하고 2월에 18개 왕국의 제후를 봉했다. .
항우가 분봉한 18제후국
항우가 분봉할 당시 중국의 영토는 진시황 시절보다 크게 축소되어 있었다. 진시황이 점령했던 이족(夷族)의 영토는 진시황 사후의 혼란기에 옛주인들이 다시 차지했다. 남쪽의 월족은 모두 독립했고 북쪽의 흉노족은 하남 땅을 비롯하여 만리장성 이북의 실지를 모조리 되찾았다.
당시 예전 진승의 부하로 BC 209년에 연을 점령하고 스스로 연왕에 즉위한 한광(韓廣)이 여전히 왕위를 지키고 있었다. 기원전 206년 2월 항우는 燕을 분할해서 무종(无終)을 도읍으로 요동국을 신설하여 한광을 요동왕에 봉하고, 자신을 수행하여 관중까지 종군했던 장도(臧荼)를 연왕에 봉했다. 한광이 이에 불복하고 요동으로 옮겨가기를 거부하다가 기원전 206년 8월 장도의 공격으로 무종에서 살해되었고 연과 요동 양쪽 땅은 모두 장도가 차지했다.
사기 항우본기(史記 項羽本紀)
徙燕王韓廣為遼東王。燕將臧荼從楚救趙,因從入關,故立荼為燕王,都薊。..... 臧荼之國,因逐韓廣之遼東,廣弗聽,荼擊殺廣無終,並王其地。[史記 項羽本紀]
사기 고조본기(史記 高祖本紀)
燕將臧荼為燕王,都薊。故燕王韓廣徙王遼東。廣不聽,臧荼攻殺之無終。[史記 高祖本紀]
진초지제 월표(秦楚之際月表)
義帝元年 二月 燕國 王臧荼始,故燕將。都薊 , 遼東國 王韓廣始,故燕王 都無終
八月 臧荼擊廣無終,滅之
무종(無終)은 지금의 옥전(玉田)이다.
요동왕국의 영역 - 이광헌 설
한서지리지에서 무종현은 우북평군에 속한다. 위의 전한말 지도에서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이 항우가 분봉한 요동국이다. 만리장성은 임조에서 시작하여 음산산맥을 따라 요동에 이르렀고, 만리장성이 끝나는 곳에 갈석산이 있으며 진시황이 갈석산을 방문해서 기념비를 남겼다는 사기의 기록과도 부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류학계는 고대의 요동과 오늘날의 요동이 동일한 곳이라고 주장하면서 만리장성의 종착지를 청천강으로 설정했다. 또한 춘추전국시대의 燕나라 영토 역시 청천강까지 확장시켰다. 그 경계선이 위의 지도에 표시된 제2의 만리장성이다. 역사를 이처럼 날조한 목적은 오로지 고조선의 강역을 축소하기 위함이다.
오늘날 요하 동쪽을 요동으로 지칭한다고 해서 고대에 조백하의 명칭이 요하 또는 遼水라야 되는 것은 아니다. 요동(遼東)은 요하(遼河)나 요수(遼水)의 동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동(遠東) 즉 Far East라는 의미로서 고대에 천하의 중심인 낙양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이진 곳을 가리킨다. 훗날 중국의 세력이 동진함에 따라 요동의 지리적 위치도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주류학계는 요동의 위치가 고금불변이라고 주장하면서 漢代의 행정구역을 燕과 秦 시대까지 소급 적용하여 5군의 위치가 아래와 같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요동왕국의 영역은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 요동군이다.
요동군의 위치가 위의 지도와 같다면 요동왕국의 도성은 무종이 아니라 요동군에 위치했어야 한다. 이것으로 보아 진시황 시대의 요동은 무종 주변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요하 일대에 요동군을 설정한 주류설은 허무맹랑한 낭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