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6년, 10년 동안의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그 해, 총부를 돌아보기 위해 정문에 들어섰을 때였다. 항산님의 손길이 묻은 총부 정문 앞에 섰는데, 갑자기 10년 동안의 일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것 같았다. 항산님이 어제 이리(당시의 익산 이름) 시내에 심부름을 시켰는데, 재미있는 구경거리에 취해 그만 막차를 놓쳐 하루를 묵고, 마치 오늘 총부에 돌아온 것 같았다. 분명 세월로는 10년이었는데 어떻게 어제 하루를 보낸 것 같은 기분이 들까.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대종사님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성탑을 참배했다. 성탑 앞에 선 순간 하염없이 눈물이 솟구쳤다. 이런저런 일을 겪어 단련된 내게 눈물이 없을 것 같았는데 빗물이 쏟아지듯 눈물이 터진 것이다. 항산님과 함께 했던 총부가 내 마음의 고향이라는 것을 그 때 비로소 확인한 것이다.
1984년 초,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교단에 출가하기 위해 총부에 처음으로 들어섰다. 당시 경주교당 교무였던 석타원 박덕수 교무님이 총부에 가면, “먼저 항산님을 찾아뵙고 인사드려라. 그리고 모시고 살겠다고 해서 받아주면 간사생활을 거기서 하고, 그렇지 않으면 강남교당 교무인 서타원 박청수 교무님(석타원님의 언니)께 부탁해서 그곳에서 살도록 하겠다”고 하신 것이다. 항산님께 인사를 드리자, 흔쾌히 받아 주셨다. 그리고 며칠 후에, “나랑 같이 살자”고 해서 공덕원(현재 원불교백년기념성업회사무국 자리)의 방 한 칸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벗어나 처음으로 접하는 원불교의 세계이자 어른인지라 얼마나 긴장하며 살았는지 모르겠다. 같이 자고 새벽에 일어나 보면, 옆으로 몸부림을 치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몸을 위로 비트는 바람에 내 다리가 항산님 머리맡에 놓여 있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아침저녁으로는 『정전』, 『대종경』, 『정산종사법어』 공부를 했다. 내가 법문을 읽으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그 대의가 무엇인지 논의한 후, 관련된 다른 법문을 찾아 확인해서 정리된 대의와 함께 공책에다가 적어 넣었다. 교리 공부는 그때 다 한 것 같았다. 물론 그 당시 상주선원 교무였던 궁산 오광익 교무님이 간사들에게 『철자집』, 『명심보감』, 『초발심자경문』 등을 가르쳐주셔서 불가의 기초도 다지게 되었다.
당시에는 연탄을 때던 때라 방 앞 작은 마루 밑에는 연탄 때는 아궁이가 있었다. 겨울에는 타는 속도를 보아가며 연탄을 갈았다. 어느 날에는 방안에 새어 들어온 연탄가스를 같이 맡고 같이 머리가 아플 때도 있었다. 그래도 항산님은 한 마디 내색도 하지 않고 그렇거니 하고 지내셨다.
총부에는 한 40명가량의 간사들이 있었다. 저마다 법사님들을 모시고 살았다. 누구 그러면 어느 법사님 하고 저절로 떠오르고, 그 어른께 심부름 할 때도 그 간사에게 연락해서 전하면 되었다. 명절 때, 나는 집이 너무 멀어 가지 못하고 남아 있었다. 설 때는 집에 다니러 간 간사들 대신 정신원, 구정원 등 어르신들이 머무시는 방에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신나게 연탄을 갈았다.
일하는 것에 흥이 겨웠다. 항산님도 내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시곤 했다. 너무 신이나 군대에 가야하는 영장이 나왔는데도 잊어버렸다. 결국 어머니가 입대 10일 전에 나를 데리러 그 먼 경주에서 총부에 처음으로 오셨다. 나는 혹시나 내가 출가한 것을 들키지나 않을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 원광대 국문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해서 지금은 기숙사처럼 원불교총부에서 어른을 모시고 산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다행이 들키지는 않은 것 같았다. 솔직히 얘기한 것은 제대 후, 원불교학과에 복학 한 뒤, 부모님모시기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초청했을 때였다. 6년여 만에 얘기한 것이다. 아무튼 어머니는 항산님을 처음 뵙고, 매우 좋아하셨다. 출가한 것에 대해서는 그때 그렇게 좋은 어른을 모시고 산다는 것을 기억하고 안심하신 것이다.
나는 항산님의 속옷을 비누로 빨아 말려서 방의 농에 개어 넣었다. 집에서도 하지 않았던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총부법회의 단상에 서신 여러 어른들의 법문을 통해 스승을 모시고 사는 일은 모든 것을 다 바치며 사는 것이라고 배우며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에 스승을 모신다는 것은 부모님을 모시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같이 자고, 같이 먹고, 같이 출장을 가고, 같이 이야기 하는 문자 그대로 동행(同行)하는 것이었다.
스승인 어른을 모신다는 것은 또한 그 어른의 일거수일투족을 답습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통해 도가의 가풍(家風)을 전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유교에서 가문의 역사와 문화를 자손을 통해 전수하는 것처럼 원불교 또한 이러한 가풍을 어린 출가자와 함께 생활하는 것을 통해 유전하는 것이라는 문화가 있었던 것이다. 다른 간사들이 내가 합장하며 인사하는 것도 항산님과 똑같다고 놀려댄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항산님은 내가 “항산법사님, 아니면 법사님이라고 부를까요”하고 질문했더니, “그냥 항산이라고 불러라”라고 하셨다. 그때 어르신들 사이에서 불렀던 “선법사님”은 정산종사님을, “현법사님”은 대산종사님을 뜻했다. 그러니 ‘법사님’이라는 말은 어른들 사이에서도 함부로 쓸 수 있는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법사님이라는 말을 간사가 당신에게 쓴다는 것은 위의 어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참으로 스승에 대한 공경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지금도 나는 그때의 습관 때문에 항산님을 법사님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어색한 감이 있다.
어른을 모시는 것은 이처럼 심법(心法)을 그대로 체 받는 것이었다. 일요일이면 늘 서울이나 지방에 법회를 보려 다니셨다. 나는 가방모찌가 되어 옆에 붙여 다녔다. 교당에 가면, 교무님들은 그 지역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곤 했다. 나는 항산님과 같은 상에 앉았다. 꼭 내가 대접받는 기분이었다. 총부에서처럼 같은 방에서 자고 일어나 법회 때는 법복을 챙겨드리고, 법회가 끝나면 개어서 가방에 넣었다. 법문도 교도들과 함께 다 듣고, 속으로 ‘아, 저렇게 법문하면 되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함께 교당을 다니면서 깨달은 것은 다름 아닌 그 교당의 교무님과 교당을 대하는 모습이었다.
항산님은 그 교당에 가면 먼저 교무님을 만나 그 지역의 교화활동과 고충을 들으셨다. 아니 그보다는 교무님이 먼저 총부의 어른을 모시고, 그간 쌓인 모든 이야기를 다 풀어놓는 것이다. 그러면 항산님은 조용히 듣고, 부드럽게 조언을 해주셨다. 또한 교당의 회장, 부회장, 주무, 유공인들과 같이 식사하면서 교당교화의 방향에 대해서도 논의하셨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지역의 유지들과도 만나 원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며, 도와주실 것을 부탁하셨다.
말하자면 법회만을 보러 가신 것이 아니라 세세하게 미치지 못하는 총부의 역할을 현장에서 그대로 실천하신 것이다. 나는 유연하면서도 활달하신 항산님의 심법을 보면서 원불교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잘 알 것만 같았다. ‘아마도 다른 어르신들도 이렇게 각 지역에서 활동하고 계실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참으로 자상하면서도 법에 맞는 항산님의 풍모를 비로소 현장에서 체험한 것이다. 때로는 어려운 교당의 교무에게 부모님의 심정으로 다독이는 모습도 보았다. 꼭 자식을 대하듯 마음으로 어루만져 주시는 모습에 초기교단의 어르신들이 그랬던 모습을 항산님도 그대로 보여주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느지막이 이리시내로 들어오면 지금은 없어진, 역 앞에 있는 목욕탕에서 목욕을 했다. 내가 때를 먼저 밀어 드리면, 항산님도 내 등의 때를 밀어주셨다. 목욕탕 바닥에 늘 꼿꼿하게 앉아서 목욕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릴 때, 아버지랑 목욕탕에 가서 때를 밀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목욕탕을 나오면, 동생인 춘산 김춘택 교무님의 정토인 상타원님이 운영하는 태백칼국수에서 칼국수를 먹고 총부로 들어왔다. 둘이서 먹던 칼국수가 어찌나 그렇게 맛있었는지 모른다.
어느 날 항산님이 소형 카메라를 찾으셨다. 얼마 전에 공회당에서 간사회의 송년파티를 찍다가 아끼시던 카메라를 떨어뜨려 앞의 유리가 깨진 것이다. 그것을 감추려고 말씀을 드리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니, 항산님은 “그런 작은 일로 마음이 좁아지면 안 된다”고 하셨다. 내 마음을 아시고, 활달하게 키우고 싶으셨던 것이다.
항산님은 어느 시대에 그려졌는지는 몰라도 중국의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이 노는 그림을 복사해서 그 밑에는 “임운등등 무애자재(任運騰騰無碍自在)”라는 글을 손수 써넣은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셨다. 실존적 인간의 한계를 넘어 도가의 자유로운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한 것이 항산님의 평생의 목표였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 알게 되었다.
마음의 자유를 잘못 이해했는지 원광대 교학과에 복학해서는 데모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80년대 후반 90년대 초였기에 민주화의 끝 무렵으로 노동운동이 줄기차게 일어나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리고 대학학생회와 다른 사회단체와 연대하는 데모에 참가하기도 했다. 소위 가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어느 날 시내에서 데모에 참여하다가 전투경찰에 잡혀 유치장에 3일 동안 감금되었다. 풀려난 뒤, 전투경찰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아픈 몸을 이끌고 가서 항산님께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라고 말씀드렸다. 항산님은 나무라지 않으시고, 오히려 “살다보면, 정의를 위해 그렇게 할 수도 있다”라고 하시면서 들어가 쉬라고 하셨다. 크게 혼내실 것으로 알고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 그러지 않으시자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교학과의 기숙사에 매여 있어 실제로 밖으로 나가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어려웠다. 기회를 따라 양자를 병행했다. 안에서는 기숙사를 중심으로 교단이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며 소리 없는 데모를 했다. 그 목표는 교육개혁이었다. 변해가는 사회의 문제에 교단이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대처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오랫동안 굳어버린 교육체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당시 교학과 내의 주장에 동조한 것이다.
선배들은 그 문제점을 조목조목 밝힌 나의 조리를 그대로 대자보에 매직으로 써서, 지금은 향적당이 된 기숙사 식당 앞에 떡하니 붙여놓았다. 그렇게 몇 번 하고 나니, 감찰원에서는 나를 불러 “젊을 때 데모나 하고, 공부는 언제 할거냐”고 호되게 야단을 쳤다. 하도 교육개혁에 대해 떠드니 당시 교정원에서는 아예 간부회의에 나를 불러 “네가 주장하는 것을 여기서 다 얘기해보라”고 하셨다. 나는 얼떨결에 뭐라고 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어른들 앞에 서서 무엇을 주장한다는 것은 생각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몇몇 선배들과 교육개혁을 외치다가 마지막 수단으로 결국 기숙사에 짐을 싸놓고 만덕산으로 올라갔다. 승산 종사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여기서 머물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을 드렸다. 그러자 승산 종사님은 “너희들이 여기서 성불할거면 머물고, 그렇지 않으면 내려가라”고 하셨다. 어쩔 수 없이 하산 한 후, 여기저기에서 일주일을 떠돌다 기숙사로 돌아왔다. 교육부로 불려가서는 이제 진짜 짐을 싸라는 말씀을 들었다. 당시 규정으로도 일주일정도의 무단 외박은 퇴사였던 것이다.
참담한 심정으로 항산님께 가서 여차여차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야단맞을 각오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게 항산님은,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다 교단에 대한 애정이 있어 그런 것 아니겠느냐”라고 하셨다. 그리고 기숙사로 다시 돌아가라고 하셨다. 이미 모든 일을 파악하시고, 나의 뒤처리까지 해 놓으신 것이다. 세월이 흐른 후, 유학 중간에 총부에 들렀을 때, 데모 당시 교육부장이었던 태타원 송순봉 종사님이 나를 보고 말씀하셨다. “너희들 때문에 원불교 교육이 20년은 앞당겨졌다. 이제 나는 네가 무엇을 해도 믿을 수 있다”라고.
항산님은 교정원장이 되어서도 교학과를 다니는 나를 부르셨다. 교단의 중요한 정책의 원안을 놓고, 내게 물어 보셨다. 이제 막 교단의 의사를 모으는 핵심 정책들이었다. 나는 “왜 이런 어려운 정책을 제게 물어보시느냐”고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항산님은, “너같이 순수한 젊은 세대에게 물어보는 것이 사물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고 하셨다. 솔직히 교단의 전모를 잘 몰라 어떤 말씀을 하셔도 나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나에게 이런저런 중요한 교단 정책을 물어보신 것은 커서 어떤 일을 하게 되더라도 교단 전체를 보고 일하도록 훈련을 시키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유학 무렵, 한번은 일본과 관련된 일을 정리하신다고 오셨을 때, 더욱 확연히 알게 되었다. 일본의 여러 인연들과 만나는 자리에 나를 꼭 데리고 다니면서 인사를 시키시곤 했던 것이다. 후에 일본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될지도 몰라 미리 모든 일들을 잘 파악하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함께 여행을 하면서 교단의 여러 일들을 내게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앞으로의 교단의 방향이며, 원불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저러하게 나가야 한다고 하신 말씀과 공부하면서 느낀 여러 문제를 여쭤보면 신중하게 대답해주시던 기억이 새롭다. 무언가 많은 메시지를 내게 남겨주시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특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후진들과 교단의 모든 일들은 함께 하는 것이라는 삶의 기준이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말씀하실 때마다 선법사님과 현법사님이 대중과 함께 운심처사하신 심법이라고 늘 강조하신 것에서 알 수 있었다. 그러한 전통을 그대로 당신의 삶에 적용하신 것이다.
지금도 잊지 못할 감격적인 일은 10년 동안의 유학생활이 끝나고 박사학위를 받을 때, 함께 하신 일이다. 한국에서는 가족도 친척도 교단의 동지도 선후배도 아무도 학위수여식에 오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원망하지는 않았다. 다들 삶이 바쁜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호주 교령으로 계셨던 항산님은 학위수여가 있던 전날 시드니에서 토쿄(東京)로 오셨다. 나는 비행기를 잘못 타셨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쿄토(京都)하고 가까운 오오사카(大阪)의 간사이 국제공항으로 오시는 것이 더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요코하마(横浜) 교당에서 하루를 머물고 오신 것이다. 급하게 표를 구하느라 표가 없었던 것이다.
졸업식에 오신다는 연락을 받고, 학위를 받는 쿄토 불교대학의 관계자들에게 연락을 하겠다고 했더니, 그렇게 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원광대와는 자매학교로 오랫동안 학문적인 교류를 해온 터라 지인도 많이 있었다. 더구나 교단의 여러 중책을 맡으셨기에 이 대학과 정토종 교단의 인사들과도 잘 알고 지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제자 한 사람만을 위해 홀로 축하하러 오셨으니 내 기분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었다. 학생처럼 즐거워하시는 항산님과 학위를 함께 받은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에서 우여곡절 끝에 일본에서 유학을 하도록 권한 분이 바로 항산님이었기 때문이다. 이날을 기다리신 것이다. 물론 석타원님과 일산 양현수 교수님을 비롯한 많은 어른들이 유학이 무사히 이루어지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음은 필설로 다할 수 없다.
항산님은 내가 유학을 시작할 때, “기존의 방법에 매이지 않는 교화의 새로운 방법을 찾아보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시대에 맞는 교화방법을 원하셨던 것 같다. 대학의 이사장으로 계실 때에조차도 나에게 대학에 들어와 교수가 되거나 연구만 하라고 하지는 않으셨다. 교단의 실질적인 발전을 추구하셨던 것이다.
학위논문을 제출했을 때, 학위를 받을 것 같아서 당시 한국에 계시던 항산님께 전화로 연락을 드렸다. 나는 항산님께 “학위를 받고, 일본에 남으라고 하면 일본에 남고, 베트남으로 가라고 하면 베트남으로 가겠다”고 했다. 베트남은 내 개인적으로 호기심이 있기도 했고, 여행을 통해 무언가 그곳에서 해야만 할 일이 있다는 생각이 문득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항산님은 내게 “그 동안 공부하느라 고생했으니 한국에 들어와서 쉬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귀국하자마자 익산의 문화교당에서 수산 김경일 교무님을 주임교무로 모시고 부교무로 부임했다. 그러자 마침 동국대에서 일본불교 전문가를 찾고 있었는데, 내게 연구교수로 와서 일해 줄 수 없겠느냐고 했다. 수산님도 이 제의에 흔쾌히 동의해주어서 동국대에서 6년간 연구교수로 일하게 되었다. 나는 어른들이 늘 그러셨던 것처럼 원불교와 불교는 한 집안이라고 보고, 같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연구했다.
그 사이 이러한 나의 활동에 대해 항산님은 다른 말씀은 없으셨다. 내가 동국대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만족하신 것 같았다. 동국대에서 공부한 사람은 있어도 연구자의 직분으로 일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곳에서 다시 수학하는 기분으로 학문적 업적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학계와 불교계의 사람들과도 교분을 트게 되었고, 그곳 사정도 잘 알게 되었다. 나중에 한국에서 일본불교를 연구하는 모임인 한국일본불교문화학회를 창립할 때, 동국대를 중심으로 한 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추천하여 초대회장이 되었다.
가끔 한국에 와서 쉬고 나서는 무엇을 하라고 하셨을까 궁금할 때가 있다. 여쭤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가는 학문연구를 그대로 지켜보고 계시는 것을 보면, 내 스스로 알아서 개척하라는 뜻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경산 종법사님도 나를 불러, “원불교가 불교적인 문화, 역사, 사상의 토양 위에서라야 잘 성장할 수 있다. 불교계와 대질리면, 우리가 손해를 볼 수 있으므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네가 불교계와 잘 소통할 수 있도록 노력했으며 좋겠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아마도 현 종법사님과 항산님은 불교계와의 관계를 생각해서 내가 불교학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 활동을 줄곧 지켜보고 계시는 것 같다.
늦게 결혼을 하게 되어 항산님께 주례를 부탁드렸더니 흔쾌히 응해 주셨다. 그런데 결혼할 날이 가까워지자, 몸이 불편해 호주에서 한국으로 오지 못하겠기에 교산 이성택 교무님께 부탁을 해 놓았다고 하셨다. 교산님은 항산님 대신 주례를 서주셨다. 아쉽기는 했지만 다들 심신상련 하는 교단의 어른들이라서 서운하지는 않았다. 항산님이 주례를 서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결혼식을 마쳤다. 나의 도가 생활에 자식처럼 모든 것을 보호해주고, 지켜봐주신 영부(靈父)로서 먼 곳에서도 주례서는 기쁨을 기다리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예전에 내가 정남과 결혼 중 어느 것이 좋은지 여쭈어 보았을 때, 항산님은 웃으며,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어쩌면 네 운명은 너의 것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니 비록 주례를 서지는 못하셨지만, 전화로 연락을 드렸을 때, “그럼 가야지”하고 기뻐하셨던 것이다.
제주에서 열반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향적당에 운구 되어 온 항산님의 편안한 얼굴을 본 순간, 나를 바라보시며 뭐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총부 구내를 헤매며 울었다. 항산님과 함께 거닐었던 총부 구석구석이 너무나 허전하고, 제행무상인줄 알면서도 살아계실 때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이제 고아가 되는구나’하는 생각에 앞길이 캄캄했다. 무언가 큰 산이 무너지는 느낌과 함께, ‘이제 어떻게 살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발인식이 끝나 집에 돌아와서도 밤에 아파트 창문을 열고, 하늘을 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삶이 다소 지치고 힘들 때, 또한 밤하늘을 보며, ‘항산님, 도와주세요. 제 업장이 왜 이리 두꺼운지 모르겠습니다’하는 하소연을 하기도 한다.
처음 뵈었을 때, 그 소탈하고 자애롭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이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평범하면서도 주도면밀하셨던 마음의 여유, 부드러운 풍모와 인간에 대한 한없는 사랑으로 누구 하나 버리지 않으셨던 그 너른 품, 교단의 원대한 미래를 기획하시던 그 툭 트인 시야와 경륜, 대종사님을 비롯한 정산 종사님, 대산 종사님 등 역대 선진님들에 대한 한없는 경모의 정, 외딴 지방에서부터 서울, 부산, 그리고 일본, 중국, 미국, 유럽, 호주 등 세계 각지의 모든 교당과 기관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은 곳이 없던 뜨거운 교화의 열정, 선사로서의 철저한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으로 모든 중생의 고통을 녹여주시던 용광로 같은 설법을 이제 어디에서 뵙고, 들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30년 전에 내가 출가할 때, 항산님의 연세가 지금의 내 나이이셨음을 알았다. 나는 과연 항산님의 그 깊은 깨달음과 넓은 자비의 세계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고 있을까를 생각하니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서울의 한 교당에서 설법을 하신 뒤, 이리로 내려오기 위해 표를 끊고, 서울역 근처 골목길의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 “이런 골목에 진짜로 맛있는 음식점이 있어”라고 하시던 목소리가 들리고, 그 때 무럭무럭 피어오르던 김을 호호 불며 같이 먹던 된장국이 떠오른다. 가끔 그러한 골목길로 걸어가는 어떤 분의 뒷모습이 항산님 같아 보일 때가 있다. ‘혹시 여기에 와계시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앞으로 달려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허공을 쳐다보다가 문득 깨닫는다. ‘아, 나를 지켜주시던 관세음보살이셨구나!’ 항산님은 영생을 통해 나를 불문(佛門)으로 이끌어주시고, 부처님 품안에서 떠나지 않도록 해주신 관세음보살님으로 내 곁에 왔다 가신 것이다. 어쩌면 그 저자거리에서 “익선아”라고 다정하게 부르며, 나를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곤 한다.
첫댓글 글을 보며 항산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시간이었네요.
먼 인척이샸던 항산님이 저희 조카가 태어났을 무렵 부처님이라며 큰 절을 하시던 천진하셨던 모습으로 마지막 기억이 있습니다.
..
사원 그대로 다시 오셨을 것이라
앞으로 달라질 교단에
큰 일꾼으로 큰 일 해주시길 염원드립니다.
나무관세음보살 고맙습니데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