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문예대학 출신 작가 작품>
산계山鷄
이윤희
조팝나무가지에 오종종 맺힌 하얀 꽃송이들이 여린 바람결에 한들거린다, 창밖에 걸린 하늘은 그지없이 맑고, 창안 머리맡의 링거액은 서글퍼 흐르는 눈물인 듯 방울방울 떨군다, 희디흰 송이들은 튀밥처럼 점점 더 부풀어만 간다.
저 꽃만큼 흰옷만을 겁 없이 즐겨 입었던 때가 있었다. 흰색 옷은 아무런 치장이 없는 본래의 바탕 그대로다. 색깔을 입히지 않았으니 특별나게 보이려고 기교를 부렸다고도 할 수 없다. 호접 모양으로 어깨에 주름을 접은 하얀 원피스 차림으로 시댁에 첫 인사 드리러 갔던 때다. “새악시가 흰색이 잘 어울리네 그려, 참 곱구먼.” 그 원피스 차림의 사진이 시댁의 벽에 걸린 거울 한쪽에 한동안 꽂혀 있기도 했다.
그래선지 나는 하얀 조팝꽃 같은 흰색 옷을 무던히도 입어왔다. 아이가 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빳빳하게 다림질한 흰색 남방에다 같은 색 계열의 면바지를 즐겨 입혀 보냈다. 우리 아이의 차림새를 본 사람들이 얼굴도 본 적 없는 나를 검소하고 부지런한 엄마라 했다고 한다.
많이도 아프다. 명치끝과 두통에다 한기까지 엄습하는둥 안아픈 곳이 한 군데도 없다. 역병이 힘을 차츰 잃어 갈 때도 되었건만 기어이 그 올가미에 나도 걸려들고 말았다. 목구멍은 칼로 베듯이 쓰라리다. 안개보다도 더 자욱하고 빽빽한 운무 같은 것들이 가슴을 아득하게 옥죄어 숨이 멎을 것 같다. 앞서 확진된 사람의 말에 지레 질려선지 얼마 안 있으면 오장육부 전부가 점령당하지나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 난 왜 유독스러울까. 남들은 독한 감기몸살쯤으로 치르고 털고 일어난다는데 별나게도 앓고 있으니 말이다. 흘려듣고 말던 면역 저하자의 취약성과 내게 생겨나는 증세들이 연결되며 전두엽을 휘갈긴다.
몸뚱아리를 너무 쉽게 버려둔 거다, 꼭꼭 숨은 혈관을 찾느라 링거 바늘이 몇 차례 실패하고서야 겨우 찾아낸다. 팔뚝이 온통 시퍼런 멍 자국으로 번져 나의 행색이 적잖이 초췌하다. 아직 젊은 축에 드는 나는 도리어 자식 걱정하던 친정어머니 보다도 버티기가 힘드니 부모에게도 몹쓸 자식이 되어 누를 끼치고 있다.
바깥에는 4월의 바람이 더 익어가는가 보다. 살랑대는 하얀 조팝나무가 재밌어 바람이 까부르며 노는 걸까. 다닥다닥 마주 보며 가지를 온통 에워싸고서 좌우로 흔들대는 눈꽃 송이들의 무희가 가관이다.
문득 산계山鷄가 떠오른다. 위무제에게 오나라 손권이 선물로 준 산꿩 한 마리 있었다. 자신의 깃털을 매우 아끼며 자주 물가에 그 모습을 비춰보면서 춤을 추는 꿩이다. 어느 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취해 날개를 퍼덕이고 다리를 차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녀석은 점점 더 흥분하여 좀처럼 춤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기진맥진한 꿩은 아름다운 춤을 추면서 천천히 쓰러져갔다.
내가 바로 그 산 꿩이 아닌가 싶다. 부지런하고 잽싸다든가 맡은 바를 깔끔하게 잘 처리 한다는 등의 찬사를 받은 적이 있다. 이에 신명이 나서 동분서주 설쳐댔었다. ‘잘한다 잘한다.’ 는 그 부추김에 홀려서 힘든 일도 나 혼자서 감당하려 했던 것 같기도 하다. 힘들면 힘들다고 해야 했는데 참으며 끝까지 버티었던 내심은 남에게 부담을 안 끼치기 위함이라 여겼다. 이제 와서 보니 그 또한 내면에 버젓이 버티고 있는 아상我想을 내려놓지 못하여 부린 욕심이 아닐까, 한치의 지적도 받기 두려워하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기도 하리라.
정작 해야 할 일을 미루어 가면서도 봉사한답시고 감투를 쓴 채 이리저리 난분분하다. 본분이 무엇인지 혼돈될 정도로 엉뚱한 일에 매달려 혼신의 힘을 바치는 것 같기도 하다. 지인이나 식구들이 일침을 가했다. 건강을 잃고 나면 모두가 다 소용없게 되니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하라고.
그랬다. 조조의 산 꿩과는 달리 내 자신이 아름답다거나 뛰어났다고까지 착각한건 아니지만, 인정에 얽매어 거절을 못 하는 숙맥이다. 그뿐인가. 구성원들이 함께 일 할 수 있게 배분을 잘 하는 것이 일을 잘하는 사람일진데 그런 재간마저도 없으니 죽으나 사나 내 한 몸땡이로 때우게 되는 미련한 사람이 되고 만다.
새로운 일을 잘 벌이기도 한다. 한 가지도 제대로 못 하면서 또 다른 일에 눈을 돌리며 이리저리 왕왕거렸다. 얼마전 부터 시 낭송에 매료되어 쓰던 글을 마무리도 못 한 채 낭송 연습에 매달려 왔다. 그러다 보니 낭송 공연에 초청받는 일도 생기게 되었다. 얼마나 남의 앞에 서고 싶었으면 초보 낭송가로서 겁 없이 무대에 버정버정 올라가고야 말았을까, 좋은 실력을 내보이려 여러날을 연습에 매달리느라 기운이 소모 된건 아닌지. 지금 앓고 있는 병세가 그 해답이리라.
이제 멈추려나 했던 바람이 또 이는가 보다. 내 속앓이를 알아차린것처럼 얌전하던 흰 꽃가지가 다시 좌우로 흔들린다. 링거 바늘에 제압당한 산계가 창밖 산계의 신바람 춤에 또 끌린다.
(《수필문예》 제27집, 2022. 수필문예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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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프로필
《수필과 비평》 등단.
現경산문인협회부회장. 수필문예회, 수필과비평작가회. 경북문협 회원
2019 경북문화체험전국수필대전 장려. 2021년 경산예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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