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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고의 노래 원문보기 글쓴이: 사람이 하늘이다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3회)
(1) 슬프다. ‘발기의 난’이여!
고구려의 유구한 역사를 통하여 권력승계를 둘러싸고 벌어진 특기할 만한 ‘형제의 난’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고구려 초기 추모왕(鄒牟王, 재위 BC37~BC19년) 시절 유리태자와 비류‧온조 간 왕위계승권을 놓고 벌어진 이복형제들 간의 다툼이다. 둘째는 고구려 중반기 제9대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위 179~197년) 사후 형 발기와 동생 연우 사이 왕위계승권을 놓고 벌어진 ‘발기의 난’이다. 셋째는 고구려 마지막 제28대 보장왕(寶臧王, 재위 642~668년) 시절 연개소문의 아들들인 형 남생과 동생 남건‧남산이 막리지 자리를 놓고 벌인 난이다. 이들 ‘형제의 난’은 고구려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첫 번째 ‘형제의 난’은 고구려와 백제의 분열로 이어지고, 그 여파는 고구려 역사 전반에 길고 긴 파장을 미쳤다. 두 번째 ‘발기의 난’은 고구려가 한민족 상고사의 요람이었던 하북성 요동을 상실한 가슴 아픈 사건이었다. 하북성 요동을 상실함으로써 고구려는 대륙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아울러 고구려라는 균형추를 상실한 대륙은 그 후 5호 16국 시대의 대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세 번째 ‘형제의 난’은 고구려와 당나라의 국운을 건 전쟁에서 연개소문의 장남인 남생이 당나라 군사의 길잡이 역할을 함으로써 고구려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
필자는 고구려 역사기행의 첫 항로를 ‘발기의 난’으로 잡는다. 첫 항로를 개국 초가 아닌 중반기로 잡은 까닭은 무엇인가? 우리 모두는 지금 지독한 고구려 역사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다. 한민족 상고사의 요람이자 고구려 역사의 요람인 하북성 요동을 망각하고 있으며, 그 배경에는 ‘발기의 난’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큰 충격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이 그 충격의 현장을 답사함으로써 잃어버린 기억의 실마리를 찾아가듯, ‘발기의 난’을 답사함으로써 고질적인 고구려 역사 기억상실증을 치유하고자 함이다.
‘발기의 난’은 김부식의『삼국사기』와 중국의 정사인『삼국지』에서 비교적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대하는 두 사서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삼국사기』는 ‘발기의 난’이 별다른 파장없이 마무리된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 반면, 『삼국지』는 ‘발기의 난’으로 말미암아 고구려가 분열되고 새로운 나라가 건국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과연 역사적 진실은 무엇일까?
먼저 『삼국사기』에 나오는 ‘발기의 난’을 요약해 보자. 국사편찬위원회의 번역을 참고한다.
『고구려 제9대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위 179~197년) 때의 일이다. 고국천왕이 후손도 없이 갑자기 죽었다. 왕에게는 우씨라는 아름다운 황후와 발기, 연우, 계수라는 세 명의 동생이 있었다. 왕후 우씨는 초상난 것을 비밀로 하고, 밤에 왕의 첫째 동생인 발기發歧를 찾아가서 말하기를 “왕이 후손이 없으니 그대가 마땅히 이어야 합니다.” 하였다. 발기는 왕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대답하기를 “하늘이 정하는 운수는 돌아가는 곳이 있으므로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부인이 밤에 돌아다니는 것을 어찌 예禮라고 하겠습니까?”라고 핀잔을 주었다. 왕후는 부끄러워하며 곧 둘째 동생인 연우의 집으로 갔다. 연우는 일어나서 의관을 갖추고, 문에서 맞이하여 들여앉히고 술자리를 베풀었다. 왕후가 말하기를 “대왕이 돌아가셨으나 아들이 없으므로, 발기가 어른이 되어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하겠으나 첩에게 다른 마음이 있다고 하면서 난폭하고 거만하며 무례하여 아재叔를 보러 온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연우가 더욱 예의를 차리며 친히 칼을 잡고 고기를 썰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다쳤다. 왕후가 치마끈을 풀어 다친 손가락을 싸주고, 돌아가려 할 때 연우에게 말하기를 “밤이 깊어서 예기치 못한 일이 있을까 염려되니, 그대가 나를 궁까지 바래다주시오.” 하였다. 연우가 그 말에 따랐다. 왕후가 손을 잡고 궁으로 들어가서, 다음날 새벽에 선왕의 왕명이라 속이고, 여러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연우를 왕으로 삼았다. 발기가 이를 듣고 크게 화가 나서 병력을 동원해서 왕궁을 포위하고 소리치기를 “형이 죽으면 아우가 잇는 것이 예이다. 네가 차례를 뛰어 넘어 임금 자리를 빼앗는 것은 큰 죄이다. 마땅히 빨리 나오너라. 그렇지 않으면 처자식까지 목베어죽일 것이다.” 하였다. 연우가 3일간 문을 닫고 있으니, 나라 사람들도 또한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었다. 발기가 어려운 것을 알고 처자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도망가서 태수 공손탁公孫度을 보고 알리기를 “나는 고구려 왕 남무男武의 친동생입니다. 남무가 죽고 아들이 없자 나의 동생 연우가 형수 우씨와 모의하고 즉위하여 천륜의 의를 무너뜨렸습니다. 이 때문에 분하여 상국에 투항하러 왔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병사 3만을 빌려 주어, 그들을 쳐서 난을 평정할 수 있게 해주소서.” 하였다. 공손탁이 그에 따랐다. 연우가 동생 계수罽須를 보내 병력을 이끌고 막게 하였는데, 한의 군사가 크게 패배하였다. 계수가 스스로 선봉이 되어 패배자를 추격하니, 발기가 계수에게 말하기를 “네가 차마 지금 늙은 형을 해칠 수 있겠느냐?” 하였다. 계수가 형제간의 정으로 감히 해치지 못하고 말하기를 “연우가 나라를 넘겨주지 않은 것은 비록 의롭지 못한 것이지만 당신이 한 때의 분함을 가지고 자기 나라를 멸망시키려 하니 이는 무슨 뜻입니까? 죽은 후 무슨 면목으로 조상들을 보겠습니까?” 하였다. 발기가 그 말을 듣고 부끄럽고 후회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배천裴川으로 달아나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계수가 소리내어 슬피 울며 그 시체를 거두어 풀로 덮어 매장하고 돌아왔다. 왕이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서 계수를 궁중으로 끌어들여 술자리를 베풀고 형제의 예로 대접하고 또 말하기를 “발기가 다른 나라 병력을 청하여 자기 나라를 침범하였으니 죄가 막대하다. 지금 그대가 그를 이기고도 놓아주고 죽이지 않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가 자살하자 매우 슬피 우는 것은 도리어 과인이 도리를 모른다고 하는 것이냐?” 하였다. 계수가 안색이 바뀌며 눈물을 머금고 대답하기를 “신이 지금 한 마디 아뢰고 죽기를 청합니다.” 하니, 왕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계수가 대답하기를 “왕후가 비록 선왕의 유명으로 대왕을 세웠더라도, 대왕께서 예로써 사양하지 않은 것은 일찍이 형제의 우애와 공경의 의리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신은 대왕의 미덕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시신을 거두어 안치해 둔 것입니다. 어찌 이것으로 대왕의 노여움을 당하게 될 것을 헤아렸겠습니까? 대왕께서 만일 어진 마음으로 악을 잊으시고, 형의 상례喪禮로써 장사지내면 누가 대왕을 의롭지 못하다고 하겠습니까? 신은 이미 말을 하였으니 비록 죽어도 살아있는 것과 같습니다. 관부에 나아가 죽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듣고 앞자리에 앉아 따뜻한 얼굴로 위로하며 말하기를 “과인이 불초하여 의혹이 없지 않았다. 지금 그대의 말을 들으니 진실로 과오를 알겠다. 그대는 자신을 책망하지 말기 바란다.” 하였다. 왕자가 절하니 왕도 역시 절하였으며 기쁨이 극치에 달하여 그만 두었다. 가을 9월에 담당 관청에 명하여 발기의 시체를 받들어 모셔오게 하여, 왕의 예로써 배령裴嶺에 장사지냈다. 왕이 본래 우씨로 인하여 왕위를 얻었으므로 다시 장가들지 아니하고 우씨를 세워 왕후로 삼았다.』<『삼국사기』‘산상왕’편>
『삼국사기』의 위 기록을 보면, 왕후 우씨가 거짓 왕명을 내세워 고국천왕의 첫 번째 왕위 계승자인 발기를 따돌리고 둘째인 연우를 왕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거짓 왕명을 빙자한 왕후 우씨와 연우의 반역행위로 발기가 분개했음은 당연하다. 그 당시 당대의 효웅이었던 공손탁이 요동 땅의 일각을 장악하고 천하를 향한 야심을 품고 있었다. 발기는 공손탁의 힘을 빌어 왕좌를 찾으려 하였으나 전쟁에 패하여 자살함으로써 ‘발기의 난’은 뒤탈 없이 아름답게 마무리된 것으로 되어있다. 과연 그럴까?
중국 정사인 『삼국지』의 기록을 보자. 역시 국사편찬위원회의 번역을 참고한다.
『백고伯固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발기拔奇, 작은 아들은 이이모伊夷模였다. 발기는 어질지 못하여, 나라사람들이 함께 이이모를 옹립하여 왕으로 삼았다. 백고 때부터 고구려는 자주 요동을 노략질하였고, 또 유망流亡한 호족胡族 5백여호를 받아들였다. 건안(建安, 196~219년)년간에 공손강이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읍락을 불태웠다. 발기는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涓奴部의 대가와 함께 각기 하호 3만명을 이끌고 공손강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서 비류수 유역에 옮겨 살았다. 지난 날 항복했던 호족胡族도 이이모를 배반하므로 이이모는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 오늘날 고구려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 발기는 드디어 요동으로 건너가고, 그 아들은 고구려에 계속 머물렀는데, 지금 고추가 박위거駮位居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 뒤에 다시 현토를 공격하므로 현토군과 요동군이 힘을 합쳐 반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삼국지』 ‘위지동이전 고구려’>
위 『삼국사기』와 『삼국지』의 기록을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에서 ‘발기의 난’이 일어난 시기는 산상왕 원년인 197년이다. 반면 『삼국지』는 공손강(재위 204~221년) 시기로 보고 있다. 즉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것처럼 발기가 산상왕 원년에 전쟁에 패하여 자살한 것이 아니라, 산상왕 원년인 197년부터 수년간 발기의 세력과 산상왕 세력 간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계속되었음을 의미한다. 어느 기록이 맞을까?
『삼국사기』도 ‘고국천왕’편에 위『삼국지』와 같은 기록을 싣고 있다.
『고국천왕을 혹은 국양왕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남무(혹은 이이모)이며,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예전에 백고가 죽었을 때, 백성들이 왕의 맏아들 발기가 어질지 못하다 하여 이이모를 추대하여 왕을 삼았다. 한 헌제 건안 초기에 발기가 형임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가와 함께 각각 민호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동 태수 공손강에게 가서 항복하고, 비류수가로 돌아와 살았다.』<『삼국사기』 ‘고국천왕’편>
또 『삼국사기』에 의하면 『삼국지』에서 ‘발기의 난’이 일어난 시기로 말하는 공손강 재위(204~221년) 때인 209년, 고구려는 별안간 환도성으로 천도를 감행한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삼국지』의 기록에 더 신뢰가 간다. 결국 ‘발기의 난’은 발기가 형이면서도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고구려 서부지역인 연노부涓奴部와 함께 한민족 상고사의 요람이자 고구려의 요람이었던 하북성 요동 땅을 공손강에게 들어 바친 가슴 아픈 사건이다. 이로 인하여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머나먼 곳으로 수도를 옮겨야 했으며, 대륙의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고구려는 이후 광개토태왕이라는 걸출한 영웅이 나타나 잃어버린 하북성 요동을 되찾을 때까지 200여년이라는 긴 세월을 인내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요동 땅에서 대륙백제와 공손씨가 흥기하고, 모용선비가 일어나 대륙을 호령하는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2) 고구려의 강역 사방 2,000리는 어디에 있는가?
『삼국지』‘위지동이전’은 ‘발기의 난’ 이후 하북성 요동 땅을 상실하고 요동의 동쪽 천리로 천도한 고구려의 강역 및 주변국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예맥과, 동쪽은 옥저와, 북쪽은 부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환도丸都의 아래에 도읍 하였는데 면적은 사방 2천리가 되고 호수는 3만이다.』<『삼국지』‘위지동이전 고구려’편>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는데, 현토에서 천 리쯤 떨어져 있다. 남쪽은 고구려와, 동쪽은 읍루와, 서쪽은 선비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국토의 면적은 사방 2천 리가 되며, 호수는 8만이다.』<『삼국지』‘위지동이전 부여’편>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해 산다. 그 지형은 동북간은 좁고, 서남간은 길어서 천리 정도나 된다. 북쪽은 읍루·부여와, 남쪽은 예맥과 접하여 있다. 호수는 5천호이다.』<『삼국지』‘위지동이전 동옥저’편>
『예는 남쪽으로는 진한과, 북쪽으로는 고구려·옥저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대해에 닿았으니, 오늘날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 호수는 2만이다.』<『삼국지』‘위지동이전 예’편>
『읍루는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천 여리 밖에 있는데, 큰 바다에 닿아 있으며, 남쪽은 북옥저와 접하였고, 북쪽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지역은 산이 많고 험준하다. 사람들의 생김새는 부여 사람과 흡사하지만, 언어는 부여나 고구려와 같지 않다.』<『삼국지』‘위지동이전 읍루’편>
위 『삼국지』‘위지동이전’의 기록을 통하여 당시의 고구려 강역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고구려는 사방이 2천리이고, 동쪽은 옥저, 서쪽은 요동, 남쪽은 조선·예맥, 북쪽은 부여와 경계를 접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고구려의 동‧서쪽 경계를 살펴보자. 동쪽은 개마대산을 경계로 동옥저와 접하고 있으므로 대략 개마고원 부근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서쪽 경계는 개마고원에서 서쪽으로 2천여 리 떨어진 곳이다. 대략 산해관이 있는 칠로도산까지가 된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서쪽 경계는 난하 또는 칠로도산이다. 다음으로 고구려의 남‧북쪽 경계를 살펴보자. 남쪽은 조선과 접하고 있는데, 조선은 마조선의 수도 평양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북쪽 경계는 한반도 평양 또는 요동반도의 끝인 대련으로부터 북쪽으로 2천여 리 떨어진 곳이다. 대략 서요하 일대가 된다. 그러므로 고구려 강역은 동서로 개마고원에서 난하 또는 칠로도산까지 2천여 리이고 남북으로 요동반도 대련에서 서요하 일대까지 2천여 리에 약간 못 미치는 지역이 된다. 그리고 고구려의 수도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으므로 하북성 요동의 끝인 칠로도산으로부터 동쪽으로 1천여 리 떨어진 요령성 요양 부근이 된다. 또 부여는 고구려의 북쪽에서 사방 2천리의 강역이므로 대흥안령산맥과 소흥안령으로 둘러싸인 만주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를 지도상에 표시하면 위의 지도에서 <『삼국지』로 본 실제 고구려 강역>과 같다.
그런데 현재 강단사학계가 주장하는 ‘발기의 난’ 이후 고구려 강역은 어떤가? 위의 지도에서 중국이 주장하는 <『중국역사지도집』‘위魏 유주’편의 고구려 강역>의 고구려 강역과 동일하다. 『삼국지』에서는 분명히 이 시기의 고구려의 강역이 사방 2천리라 하였는데, 고구려 강역이 겨우 사방 1천여 리에 불과하다. 고구려 시대의 요동이 오늘날의 요동반도라면 고구려 강역 2천리의 절반은 동해바다 속에서 찾아야 한다. 고구려의 동쪽에 위치한 옥저도 마찬가지로 동해바다 속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고구려의 수도는 요동의 동쪽 천리인 동해바닷가에서 찾아야 한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고구려 시대의 하북성 요동이 갈석산의 이동과 더불어 요나라 이후 요령성 요동으로 1천여 리 동쪽으로 지명이동된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삼국지』에 나오는 고구려 강역 사방 2천여 리는 ‘발기의 난’으로 고구려의 국력이 가장 쇠약했을 때의 기록이다. 고구려가 가장 쇠약했을 때에도 고구려 서쪽은 난하 또는 칠로도산을 경계로 하였다. 이 시기는 고구려가 한민족 상고사의 요람인 하북성 요동을 상실하고 슬픔에 잠겨 절치부심하던 때였다. 그런데 오늘날 그 후손들은 최소한으로 줄어든 그 고구려 강역마저도 반의 반토막으로 만들고 있으니 지하에 잠든 선조들의 심정은 어떠할까? 하루빨리 올바른 고구려 역사를 찾아야 한다.
오늘날의 요동반도를 고구려 시대의 요동으로 굳게 믿고 있는 주류사학계에 다시 한 번 묻는다. ‘발기의 난’ 으로 요동을 상실한 후의 고구려 강역 사방 2천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역사의 푸른 물결을 헤치며 뱃머리를 공손씨의 멸망시기로 향한다. 요동, 현토, 낙랑, 대방 등의 위치가 한결 뚜렷해질 것이다. 바야흐로 대륙에는 조조‧유비‧손권‧공손연 등의 효웅들이 대륙의 일각을 차지하고 자웅을 겨루고 있었고, 고구려를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치열한 외교전을 펼치고 있었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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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동쪽은 개마대산을 경계로 동옥저와 접하고 있으므로 대략 개마고원 부근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서쪽 경계는 개마고원에서 서쪽으로 2천여 리 떨어진 곳이다. 대략 산해관이 있는 칠로도산까지가 된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서쪽 경계는 난하 또는 칠로도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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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에 2000리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라고 봅니다.
그리고 개마대산이 개마고원 근처라는 증거가 어디 있는 것일까요?
(배용준=욘사마)
실제 지명이라든가 등....뭔가 다른 것으로 고증해야만 할 문제라고 봅니다.
단지 2000리라는 말에만 의지해서 비정하는 것은
결코 [학문적] 방법론으로 보이지 않네요.
위와 같은 문제들은....학문적 문제이므로
그야말로 치밀한 학문적 논리전개가 필요하지요.
대충 비정하거나, 대충 추정해서는....그건 그냥
야화 정도에 불과한 일이겠지요.
재야사학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잘못들 중에 하나가
바로 그 문제로서....그래서 그들의 주장들을 거의 신뢰할 수
없는 것이지요.
예컨데, 부여의 인구가 8만호라고 했다고 해서
정말로 정확히 8만호의 인구가 있었다고 추정한다면....
그건 그야말로 넌센스일 것 같네요.
8만호라는 말은 그저....고구려 등 보다는 인구가
훨씬 많았다(대충 2~3배?)는 의미에 불과하고, 그러나 중국 한족 쪽 보다는
인구가 훨씬 적었다는 의미 정도가 아닐까요?
인녕하세요. 타당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개마대산 주석을 붙입니다.
개마대산 : 당唐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의 주注에는 개마蓋馬는 현토군玄菟郡의 현명으로 그 산은 지금의 평양성의 서쪽에 있다고 되어 있다. 유형원은『반계수록磻溪隨錄』에서 오늘날의 평안남도와 함경남도 사이를 가로지르는 병풍산 일대로 비정하였으나, 정약용은『강역고』에서 개마를 해마니奚摩尼(=白頭)로 풀이하였다.
고구려의 서방경계는 정확히 요동의 경계점인 난하 유역의 갈석산입니다. 이 갈석산을 기점으로 동쪽 2000여리를 가면 유형원이 말한 병풍산 일대가 되며, 본인이 지도에서 비정한 곳과 같습니다. 그런데 난하 하류의 갈석산은 국가간 경계가 되기에는 규모가 너무 적지요. 그래서 본인은 서방경계를 갈석산의 좌 우에 있는 난하 또는 칠로도산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리 문제와 관련하여 2천여리면 그 비슷한 수준은 되어야지요. 현 강단사학계가 주장하는 고구려의 동서간 거리는 1천리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이런 해석이 타당성이 있습니까?
현 강단사학계가 주장하는 고구려의 동서간 거리는 1천리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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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단사학계의 주장이 1천리가 되었든, 5백리가 되었든
또는 1만리가 되었든..솔직히 저는 그런거에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저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대중들의 절대다수가 상식적 수준에서 수긍할 수 있는 논리
좀더 치밀한 논리전개, 즉, 학문적 방법론을 적용해서 나온
추론들인가 아닌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강단사학계의 주장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많은 재야사학자들이 등장한 이유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치밀한 논리전개가 생략된 그 어떤 주장들도
나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저 밑에 올린 글에서, 누군가 제기한 의문점이지만.....
우리는 어쩌면 수백년 뒤에, 또는 1천년 또는 2천년 후에
한국인 [배용준]이 일본의 [욘사마]가 동일인물임을 입증해야 할 필요성에
부딪힐런지도 모릅니다.
[배용준]과 [욘사마]는....우선 그 발음부터 너무나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을 하는 자들이라면 그것을
치밀한 논리전개에 의해 입증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저 막연히 배용준의 [용]과 [욘사마]의 욘이
발음상 비슷하니 아마도 동일인물로 추정된다는 식의
허접한 논리비약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현재 일본 고서에 나오는 인물들과 한국 고서에 나오는 인물들
그리고 중국 사서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들이 발음상 매우 다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자들은 그들이 동일인물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또는 지명에 대해서도 어쩌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또는 민족이나 부족 명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똑같은 민족, 부족, 또는 나라를 두고서도....한국과 중국은
서로 다른 명칭으로 불러왔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실은 동일한 대상임을 입증할 책임은 바로
학자들에게 있지요. 당연히 거기엔 매우 치밀한 학문적 논리전개 과정이
필요하겠지요. 누가 보아도 수긍할만큼 철저하고 치밀한 논리전개....
우리 카페 글들이 비록 [학문적 논문]들은 아니지만....
그러나 어느 정도 수준의 치밀한 논리전개를 요구하지요.
즉, 너무 과도한 논리비약에 의한 글들은 별로 신뢰하지 않기도 하지만....
대개 그런 글들은 궤변들인 경우가 많음도 사실이지요.
하여튼, [개마대산]이 갑자기 [개마고원]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봅니다.
그런 주장은 마치....배용준과 욘사마는 그 발음이 너무 다르니
절대로 동일인물일리가 없다고 어거지로 우기며
강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우리 카페에서.....예정웅님 글들이나 단군박공님 글들, 또는 소위 [무뇌노빠]들의 주장들이
수용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들이나
논리적 전개과정이.....너무나 허술하기 때문이지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믿으라는 것인지?
또는 턱없는 논리비약으로 엉뚱한 결론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그런 글들을 우리 카페에서 수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왜냐면 철저하고 치밀한 논리전개를 요구하고, 좋아하는 곳이 바로
우리 카페이기 때문입니다.
제 논리는 지극히 간단합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고구려 강역 사방 2천리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현 강단사학계에서 비정하는 고구려 강역은 사방 1천리도 안됩니다. 왜 그런가? 요동의 비정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 시대에 요동은 하북성인데 요령성을 요동으로 비정하니 1천리가 부족한 것입니다. 그것을 제1회 , 2회에서 갈석산의 이동으로 논증한 것입니다. 지금 개마대산이 개마고원이냐 병풍산이냐 백두산이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껏해야 200~300리 차이가 나는 것으로 제 논지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략 개마고원 근처라고 한 것입니다.
잘 봤습니다
감사하게 잘 보고 있습니다 ... 한가지 염두에 두시고 고려해 보셔할 것이 있어 말씀 드립니다 ... 다큐멘터리에서 본 것인데 ... 약 2000년 전까지는 지금의 황해가 육지였다고 합니다.
그 것을 보면서 떠올랐던 생각이 ... 그렇다면 일제가 말살시킬 수 없었던 ... 그리고 중화인들이 왜곡할 수 없는 우리의 고대사에 대한 유물들이 황해바다 밑바닥에 남아 있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 언젠가는 발굴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요.
사방이 2천리면 동서로 4천리이고 남북으로 4천리가 아닌가요 ?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