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너더리통신 77/180320]내 눈물의 역사
‘눈물의 역사’라니 뜬금없이 무슨 말인가? 주말드라마 등을 보면서 질질 짜는 버릇이 있다보니,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눈물이 많았나를 생각해보다 ‘역사’까지 거슬러올라가 본 것이다. 지지난 일요일 저녁 8시 ‘황금빛 내 인생’ 50회 최종회가 막 시작되는데, 하필이면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린다. 고등학교때 같은 반 친구다. 짜증을 참으며 들어보니 “글쟁이 친구가 남북 소통을 희구하는 칼럼을 써 신문 등에 발표 좀 하라”는 것. 참 내, 별의별 일이 다 있다. “TV에서 중요한 것을 봐야 한다”고 해도 막무가내, 수다를 떤다. 이실직고를 하니 혀까지 끌끌 찬다. 숫제 ‘뭐, 이런 또라니가 다 있나’다. 이 나이에 아내도 쳐다보지 않는 주말드라마를 보며 눈물바람을 하는 나는 정녕 ‘또라이’인가? 언제부터였을까? 진짜로 남자가 50을 넘으면 남성호르몬이 마르고 여성호르몬이 넘쳐 이러는 걸까? 예전에 술 마시느라 쳐다보지도 않은 드라마를, 아예 시간까지 외워 챙겨본다. 어쩌다 그 시간을 놓치면 드라마 전용채널에서 꼭 보고야 만다. 솔직히 재미있지 않은가?
사무실에 36년생 어르신이 계신다(올해 83세). 최근에 사외보에 사연을 싣고자 인터뷰를 했다. 당신의 부친과 선생님을 말하시다 말이 끊겨 쳐다보니 울고 계셨다. ‘야, 저 연세에도 부친과 스승을 생각하면 우시는구나’ 경이로웠다. 최근에는 당신의 95세 큰누님이 돌아갔는데, 상가에서 요즘 세상에 듣기 어려운 ‘곡(哭)’을 하셨다한다. 그집 사위가 “외숙의 곡으로 진정한 슬픔이 무엇인지 알았고, 정말 좋은 구경했다”며 고마워 하더란다. 한번은 아버지 구순을 기념한 문집 <총생들아, 잘 살그라>를 한 권 드렸는데, 어느새 휴지뭉치를 옆에 놓고 눈물을 연신 닦아내고 계셨다. ‘감정이 풍부해 눈물이 많으신 분이구나’ 싶다가 ‘나도 그렇지’라는 생각에 슬그머니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눈물은 그렇게 주변인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한다.
나의 눈물역사는 언제부터였을까? 물론 태어날 때 누구라도 목청껏 울었으리라. 고고지성(呱呱之聲). 시골 여자남자 합해 40명 안팎의 한 반(班)뿐인 국민핵교를 다니다 5학년 2학기 40여km 떨어진 전주(全州)로 유학을 왔다. 둔재인데도 나의 기재(棋才)를 과대평가한 아버지의 ‘용단’이었다. 모든 게 낯설고 전혀 적응할 수가 없었다. 토요일만 되면 여지없이 고향행 기차를 탔다. 일요일 오후 올라올 때 마을 앞을 지나기만 하면 한번도 빠짐없이 줄줄줄 울어댔다. 울보가 따로 없었다. 중고교 때도 거의 마찬가지. 하여간, 참 많이 울었던 기억만 남아 있다. 고생하는 부모와 떨어져 사는 현실이 싫고 힘들었다. 같이 살고 싶기만 했다. 그런 내가 대학을 서울로 왔다. 지금도 왜 그런 ‘바보같은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없다. 방학만 되면 곧바로 시골에 처박혀 꼼짝하지 않았다. 그때 울었던 기억은 별로 없지만, 나의 마음은 늘 고향이 붙박이였다. 남의 집 음식도 거의 먹지 못했다. 주변에서 ‘알로 까진 놈’이라고 놀렸다. 그만큼 내성적인 내가 조금씩 ‘눈물병’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군대를 가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했다. 첫사랑과 찢어졌을 때도 그렇게 울지 않았다. 그렇게 근 사십여 년, 크게 울어본 기억이 없다. 그런데 요즘 어릴 적 그 버릇이 재발됐다. 어찌된 까닭인가? 여성호르몬 과다분비 때문인가? 늙어 주책바가지인가? 아니면 의지박약인가?
한 달에 거의 한번꼴 고향을 가는 셈이다. 몇 년 전부터 누워만 계시는 어머니에게 작별을 하고 나올 때마다 ‘속울음’을 운다. 아버지의 굽은 허리의 뒷모습을 봐도 외면하고 싶다. 노년에 형님들의 아등바등 사시는 모습을 떠올려도 가슴이 저린다. 아프다. 아픈 것은 슬픈 것이다. 두 아들 뒷바라지에 지금도 허덕거리는 아내의 일상을 생각해도 속이 상한다. 속상한 것은 우는 것이다. 나를 생각하며 가슴을 아파하거나 울어본 적은 별로 없었던 것같다. 주말드라마 문제가 아니다. 속울음 울 일은 살다보니 처처에 널려 있다. 물론 ‘그럴 일이 아니다’고 자주 되뇌지만, 그것이, 그것 참, 잘 안된다. 숙모는 “야는 마음이 따뜻해서”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유식한 말로 내가 ‘휴머니스트’라는 말일까? 휴머니스트는 눈물을 달고 다니는 사람인가? 놀라운 일은 2008년 <나는 휴머니스트다>라는 제목의 수필집을 펴내고 버젓이 출판기념회까지 한 적이 있긴 있었다.
“인간적으로…”이라고 말은 입버릇처럼 하는데, 실제론 휴머니스트하고 거리가 먼 타입이다. 그런데도 몇 년 전부터 시도때도없이 가슴이 아픈 것을 넘어 울기까지 한다. 조간신문을 읽다가도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하거나 울컥했던 기억이 많다. 어느 젊은 외국인노동자가 우리나라에서 사고로 죽어가며 장기(臟器)를 네 명에겐가 기증했다는 최근 기사를 보면서, 그 친구가 너무 불쌍해 눈물이 핑 돌았다. ‘상상암’에 걸릴 정도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자식들 생각에 최선을 다하는 지안이아빠(천호진)는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나온다.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아내는 주말마다 연신 ‘울려면 뭐하러 보느냐’며 나를 놀려댄다. 그녀는 <윤식당> 같은 프로그램을 보며 깔깔깔 웃어댄다. 우리집은 아무래도 역할이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다.
4년 전, 세월호 유족들 생각에 참 많이 울었다. 일요일 저녁 <도전, 골든 벨>을 한동안 볼 수가 없었다. 졸지에 다시는 올 수 없는 세계로 간 아이들이 어른거려 그 프로를 볼 수 없었다. 최근에는 더욱 울 일이 많이 생겼다. #미투(Me Too), 폭로하기가 어디 쉬운 일이랴. ‘2차 가해’가 예상되는데도 악착같이 용기를 낸 친구들이 무엇을 잘못했더란 말인가. 바람 불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같은 연약한 몸으로, 떠듬떠듬 털어놓은 ‘가진 자’들의 위선(僞善). 아, 그 피해자들의 마음을 어떻게, 그 누가 달랠 수 있을까? ‘마음의 상처’처럼 오래 가는 것은 없다. 차라리 칼에 찔리고, 다리가 부러지는 등 외상(外傷)이라면 세월이 약(藥)이겠거늘.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성어도 모르는가? 입장 바꿔 생각을 해보라! 온갖 천인공노할 댓글 공격으로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는 그대들은 누구인가? 제발, 제발 그러지 말자. 우리, 수많은 피해자들을 ‘인간적으로’ 보듬어 주고 달래어 주는 지혜를 찾자. 그 아수라장에도 저 살겠다고 ‘합의에 의한 성관계’라고 몽니를 부리는 저 정치인은 누구인가? ‘몇 명인지는 모르지만 미안하다’고 말하며 씩 웃는 저 노회한 연출가는 또 누구인가? 최소한 사람의 탈을 쓴 사람이라면 ‘럴수, 럴수, 이럴 수는 없는 일’이거늘. 분노보다 연민이 앞선다. 연민도 아픈 것이다. 이러지 말자. 우리 제발, 인간적으로 이성(理性)을 찾자. 유행가 가사의 ‘눈물없는 세상’은 누가 만드는 것일까? 왜 이렇게 세상은 살수록 우리 가슴을 헛헛하고 먹먹하게 만드는가? 슬프고 아프게 만드는가? 처절하게 망가지게 하는가?
그나저나, 만약에(아니 100% 틀림없이) 우리 부모 돌아가시면 나는 어떻게 할까? 그 생각만 해도 이렇게 가슴이 먹먹한데, 살아가며 생각날 때마다 울 일이 참 걱정이구나. 하기야, ‘큰일’을 치른 후 6개월이 지나도 계속 ‘울보’라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듣긴 들었다. 세월이 약이라는데 진정이 되고 슬픔이 잦아들고 잊혀지기도 하겠지. 그러니까 다들 살겠지. 이십년 쯤 됐을까? 어느 일간지 1면톱 기사(작가가 꿈인 초등 6년생이 죽어가면서도 병상일기를 바탕으로 책을 펴냈다)를 읽은 후 ‘밤새 읽으며 허벌나게 울어야지’ 다짐하며 교보문고에서 ‘그 책’을 샀던 기억이 새롭다. 독후감을 블로그에 올려놓았는데, 그 아이 엄마가 ‘고맙다’는 댓글을 남길 줄이야. 울음도 카타르시스(마음의 정화)가 되는 지 그때 알았다. 나는 그래서 지금도 잘 울지 않는 사람을 보면 ‘준 것없이’ 괜히, 조금씩, 미웁다. 하여간 못말리는 체질이다. 연암 박지원도 <열하일기>에서 얘기했다. 중국땅 어느 곳를 바라보고는 ‘이곳은 사나이 대장부가 한바탕 울만한 곳’이라고. 그런 장소, 그런 드라마, 그런 문학, 그런 예술, 그런 사람, 어디 없는가?
첫댓글 우천의 눈물은 따스하고 착한눈물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