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길, 영광의 길 / 요한복음 12:20-33
오늘은 종려주일 입니다. 종려주일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함을 말합니다. 종려 주일을 맞아 예배에 참석하신 성도 분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군중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공관복음서에는 나오지 않고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아주 특별한 내용입니다.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입성하신 주님은 특별한 면담요청을 받습니다. 안드레와 빌립이 전해주는 내용은 특이하게도 헬라인들이 주님을 만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신 주님은 다짜고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궁금한 것이 헬라인들의 면담요청이 무슨 의미가 있기에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헬라인들은 그리스사람들을 말합니다. 당시 유월절과 같은 명절에는 세계 곳곳에 흩어져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많이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꼭 유대인들만 온 것은 아니고 유대교로 개종했거나 유대인들을 흠모했던 이방인들이 함께 올라왔습니다. 그렇게 보면, 헬라인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온 것은 사실 그렇게 특별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자고 한 것은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이방인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셨지만 그들의 관심사항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고 다른 일정도 다 잡혀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자고 한 것은 정말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이 세상의 영광을 쟁취하라는 요청을 하였습니다. 종려주일에 많은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환영을 하고 자기 옷을 길에 펴기도 하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호산나 외쳤던 것이 바로 그런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력으로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고 왕이 되는 세상의 영광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럴만한 능력이 충분히 있으셨지만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영광을 뒤로 하고 로마군인들에 잡혀 고난과 수치를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군중들의 환호는 조롱과 비웃음으로 바뀌었지만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 다음의 부활을 믿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실 영광을 생각하심으로 끝까지 고통과 수치를 참으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믿고 섬긴다고 하는 것은 주님을 본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받으신 영광을 기대하며 바라보며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 영광을 어떻게 받았는지를 생각하며 주님이 가신 그 길을 우리도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이 비록 힘들고 어려운 십자가의 길이라고 할지라도 끝까지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성도들의 자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고난 속에 동참하고 주님이 받으신 영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헬라인들의 면담요청을 받으시고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런 의미가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 37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로 오는 사람은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는 모든 사람들, 그들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찾아온 이방인들을 보면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할 때가 가까이 왔음을 깨달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면담요청을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구체화되는 하나의 사인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하시면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24절)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라야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25절) 이러한 말씀은 영광을 얻는 것하고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영광을 얻는 것은 죽지 않는 것이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요 남을 이기거나 지배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기독교의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고난을 통하여 영광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영광은 놀랍게도 십자가와 고난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주님께서 받으신 영광을 빌립보서의 내용을 통하여 앞부분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런 영광을 어떻게 받으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본래적인 신분을 하나님의 본체시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같은 분, 곧 하나님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분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 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빌2:7-8절) 그렇게 자신을 낮추시고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을 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시인하는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고난과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자신을 낮추시고 복종하시고 희생하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비결이셨고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인줄 믿습니다. 그 길이 어렵고 힘들지만 끝까지 붙잡고 나아갈 때 영광이 주어지게 됩니다. 세 번째는,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6절에서 주님은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섬긴다는 말은 주님을 따른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나도 걸어간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주님을 따르지 않고 주님을 본받지 않으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면 그 길이 비록 십자가의 길이고 고난의 길이고 험한 길이라고 하더라도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원하고 좋아하는 길은 따라가는데 내가 원하지 않고 바라지 않는 길은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나의 주님이요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면 주님이 가신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남미 에콰도르의 아오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다가 목숨을 잃은 짐 엘리엇이 학창 시절 큐티를 하며 묵상한 내용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것도 있다. 세상엔 끝까지 붙들 수 없는 것을 위해 평생을 바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오히려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을 끝까지 붙들고 있어야 한다. 젊음도 지나가고, 명성과 쾌락도 지나가고, 아무리 많은 물질도 결국은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다. 이런 헛된 것을 버리고 포기하는 사람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주님,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제 삶이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저를 불태워 주옵소서.” @~~~~하나님을 위한 고난과 십자가의 삶은 괴롭고 힘들어도 그 끝에는 우리 주님이 계시는 영광의 길입니다. 이 신앙의 길, 이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영원하고 우리에게 영광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기쁨으로 감당하는 우리 사랑하는 샘물교회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