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이 아니라 매 / 박선애
집에 가자고 조르는 어머님이 너무 딱해서 방학만이라도 모셔 오고 싶었다.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처녀 적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때로 돌아가 하루종일 노래를 부르며 편안해하셨다. 개학했으나 보낼 수가 없어서 하는 데까지 해 보자고 같이 살았다. 어느 날 윗동네 사시는 면 노인회장님이 찾아오셨다. 효부상 추천을 하겠다고 이름과 소속을 알려 달라고 했다. 깜짝 놀라서 싫다고 딱 잘라서 거절했다. 효부라니 얼토당토않았다. 그분이 보기에 어머니를 돌보려고 시골에 와서 사는 것이 기특해 보였을지 모르겠다.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인정만 많아서 모시고 왔지만 잘하지는 못했다. 할 줄 아는 몇 가지 요리로 차린 밥상은 부실했다. 치매라 그런 줄 알면서도 같은 말을 계속하면 짜증스러워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못 들은 척했다. 기저귀를 갈거나 목욕을 시킬 때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고 나면 죄책감이 들었다. 반성하고 잘하리라 마음먹어도 상황이 닥치면 뜻대로 안 되어 괴로웠다. 노인회장님은 남편을 통해서 몇 번 더 말씀하시더니 내 뜻이 완강한 것을 알고 없던 일로 해 주셨다.
어머님을 혼자 둘 수 없으니 친정 부모님께는 추석에야 갈 수 있었다. “니가 어떻게 그 일을 하냐?”라고 안타까워하는 어머니 말에 아버지가 “부모가 아프지 않으면 어떻게 효자가 나오겠냐? 너 효자 만들려고 시어머니가 고생하신다고 생각해라.”라고 하셨다. 위로가 되었다. 또 이어서 “계실 때 잘해 드려라. 금방 지나간다. 그래야 나중에 후회 안 한다.” 라는 말도 덧붙이셨다. 남편이 “이 사람 잘하고 있어요. 우리 면 노인회장이 효부상 추천한다고 했는데 안 받는다고 했대요.”라고 대꾸했다. 아버지는 “잘했다. 그것은 상이 아니라 매다, 그것도 아주 큰 매다.”라고 하셨다. 아, 아버지도 힘드셨구나.
아버지는 왼손 약지 한 마디가 없었다. 어린 우리에게 할머니는 그 내력을 자랑스럽게 알려 주셨다. 마흔아홉 젊은 할아버지가 병을 고치지 못하고 돌아가시려 할 때 손가락을 끊어 피를 마시게 한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그런다고 낫겠어? 어차피 살리지도 못하는데 왜 아프게 그랬을까?’ 하는 의문만 들었지 그게 효도라고 와닿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손가락이 증거인데도 꽤 합리적인 아버지가 진짜 그랬을까 의심스럽기도 했다. 아버지가 스스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께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나중에 형부가 효자상이라는 것을 찾아내어 표구해다 걸었다. 가는 붓으로, 조사만 빼고 모두 한자로 세로쓰기한 종잇장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상장이라면 금박 두른 두꺼운 종이에 그래도 ㅇㅇ상이라는 제목은 있어야 할 텐데 그것도 없었다. 오른쪽에 글이 있고 왼편에는 면장, 이장, 유림 등의 직책과 이름을 쓰고 그 아래 직인처럼 네모난 도장이 박혀 있었다.
이런 증서가 아니더라도 아버지는 어린 내가 보기에도 효자였다. 모든 것이 할머니 중심이었다. 밖에서 들어올 때는 항상 문간에서부터 큰 소리로 “어머니.” 하고 불렀다. 늦어도 큰방으로 들어와 할머니께 그날 있었던 일을 보고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버지 방으로 가셨다. 집안 일을 할머니와 의논하고 할머니의 결정을 따랐다. 돈도 할머니께 맡겼다. 할머니는 여든네 살에 쓰러져 3일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왼편이 마비되고 눈도 못 떴다. 말도 잘 못하셨다. 어머니에게 온 힘을 다 짜서 “쇠때 저기 있다.”고 하며 반닫이 열쇠를 감춰 놓은 곳을 가리키셨다.
어머니는 “느그 아부지 같은 아들만 있으면 혼자 돼도 괜찮다.”고 부러움인지 푸념인지 모를 말을 했다. 작은아버지들 학교 보내고 결혼시켜 분가하도록 돌보았다. 고모들 결혼할 때는 “아버지 없이 시집보내면서 어머니 눈에 눈물 나게 하면 안 된다.”고 목포에 가서 혼수품, 잔치에 쓸 물품이나 음식 재료, 심지어는 이불 꿰맬 실바늘까지 사 올 만큼 세세하게 챙겼다는 말을 근거로 내세웠다.
아버지가 늦은 나이에 군대에 간 사이에 작은아버지가 혈기를 못 이겨 동네 사람 *승 씨에게 주먹을 휘두른 일이 있었다. *승 씨 부모님이 고소했다. 너 마지기 논을 두 마지기와 바꾸고 그 차액을 합의금으로 썼다. 할머니는 남자 어른 없는 집에서 험한 일을 겪느라고 고생도 했지만 큰아들에게 면목이 없었다. 돌아와서 이런 사정을 들은 아버지는 얼마나 애쓰셨냐고, 논은 다시 사 드리겠다고 오히려 할머니를 위로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이웃사촌이면서 먼 친척인 고모가 들려주셨다.
아버지 쉰다섯 살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슬픔을 이기질 못하셨다. 우리도 어머니보다 더 좋아하던 할머니를 잃고 서러웠지만 아버지와 비교가 안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할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애통해해서 우리가 주책스럽다고 할 정도였다. 올케언니가 시집와서 처음 맞은 할머니 제사에 아버지가 슬피 우셔서 할머니가 최근에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십몇 년이 지났다고 해서 놀랐다는 말을 지금도 가끔 한다.
아버지가 효자였다는 것은 동네 사람들, 친척, 가족 모두 인정한다. 그런 아버지도 효자상이라는 무게를 힘겨워했나 보다. 그때 적당히 어물거리다 효부상을 받았더라면 두고두고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탈탈 털길 참 잘했다.
첫댓글 효부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네요. 아버지도 그랬으니 내림인가 봅니다.
반갑습니다. 한동안 박 선생님 글을 볼 수 없어서 걱정했습니다.
맞아요. 효부상 받을 자격 충분합니다. 반성하고 있어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네요. 고생 많이 했겠지만 효부상 안 받은 건 잘한 일 같습니다. 효부에 걸맞은 행동을 하려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효부! 맞습니다. 아버지도, 박선애 선생님도요. 잘 읽었습니다.
착한 선생님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효부상 대상자로 오를 정도였군요.
글로 간결하게 정리되지만 얼마나 많은 마음, 몸 고생이 따랐을까요?
대단합니다.
효부상 받아도 되는데요.
아버님을 본받은 선생님의 성품이 보입니다.
아버님이 대단하시네요. 부녀가 인품이 훌륭하시고요. '그것은 상이 아니라 매다'라고 하신 아버지의 말이 실천을 하신 분의 말이라서 큰 울림을 줍니다.
책에서 보던 효자, 효부가 선생님 글에 다 있어 놀랐습니다. 정말 대단하세요.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글 읽으면서 저도 친정아버지 생각을 많이 했답니다. 정말 효자셨거든요. 할아버지, 할머니를 삼년상을 지켜셨어요.. 그런데 저는. 닮지 않았나 봅니다. 그래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답니다.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이 글이 정말 반가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