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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중의 사상
1. 일본 제국주의의 유물, 광주민중항쟁
지난주에 우리 민족 사상의 가장 근본이 풍류라고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그 풍류 위에서 우리 민족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하겠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세계 종교사의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가 꼭 알아두어야 할 인류 사상사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이 살아온 모습을 쭉 보면, 1, 2회 때 광주민중항쟁의 문제를 이야기했지만, 광주민중항쟁은 단순히 광주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30년 전쟁이라고 하는, 그 거대한 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동아시아 30년 전쟁의 핵심이 바로 한국전쟁이었으며, 한국전쟁으로 인해서 20세기 세계 역사에서 가장 중요했던 미소냉전 질서가 성립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우리 민족은 20세기 세계사의 가장 주역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 민족 때문에 벌어진 역사가 세계사의 주류라는 말이다.
우리민족의 사상사는 세계사상사의 총체적 문제이기도 하고, 우리 민중의 20세기 역사적 체험은 세계사의 주류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너무도 어리석게 당해온 것이다. 만약에 6.25라는 게 일어나지 않았으면, 이승만이 더 빨리 망했을 거 같은가? 아니면 더 오래 갔을 거 같은가? 당연히 빨리 망했다!
6.25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이승만은 오히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우익적이고, 친미적이고, 그렇게 아부만 하고, 그렇게 민족 기반이 없는 지도자는 이 땅에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6.25가 났기 때문에 그런 놈들이 이 땅에서 버틸 수가 있었고, 그런 냉전 체재에 기생해서 먹고 살 수가 있었던 것이다.
6.25 한국전쟁은 미소냉전체제를 구축시켰고, 친미보수우파정권을 지속시켰으며, 모든 민족세력을 제거하는 구실을 부여했다. 그 구조 속에서 5.18민중학살도 자행된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양심 세력들을 좌파라고 부르면서, 모든 세력들을 다 제거해 버리고, 오늘날까지도 그런 끔찍한 사고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민족의 대립적 사고가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루바삐 그런 데서 벗어나야 한다. 나는 좌우익을 가리자는 것이 아니다. 좌우익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섞어 빠진 이야기다. 그런데 아직도 우파, 좌파 하면서, 서로 때려잡는 그런 낡은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다. 미소 냉전 체제라고 하는 유물들은 사실 일제 식민지의 유물이다. 그 유물의 유물이 저지른 가장 큰 죄악이 바로 광주민중항쟁이다.
2. 멸집, 무명
한국 민중의 사상 기층에서 제일 밑바닥에 풍류라고 하는 것이 있다. 오늘까지도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바람의 세계가 있다. 그 바람이라는 것은 우리 민족의 너무도 위대한 사상이었는데, 여기에 불교가 들어오는 것이다.
불교는 ‘이 세상이 일체개고(一切皆苦)’라는 말로 시작한다. 우리가 사는 게 고통스럽다. 괴롭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다 괴롭다. 모든 게 고통스럽다. 고통스러울 때는 나무를 봐도, 나무가 고통스럽게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무가 탄소동화작용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참으로 고통스럽게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세계가 모두 고통스럽게 보이니깐, 고통스러운데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이 생긴다.
쇼펜하우어는 이 세계를 의지(Will)의 표상으로 보았다. 불교는 이 세계의 본체를 고(苦)로 파악한다. 쇼펜하우어의 비극적 세계관은 불교의 서구적 표현이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그 고통의 원인을 탐구하고, 여러 가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 고통의 근원으로 삼는 것이 바로 욕(欲)이다.
인간은 욕망이 있다. 무언가를 갖고 싶어 한다. 이런 것을 집(執)이라고 한다. 그래서 흔히 말하길, 어떻게 집(執)을 없앨 것인가 하는 멸집(滅執)이 불교의 가장 큰 문제이다.
@ 멸집(滅執)
집을 멸한다는 뜻인데, 이 때 멸(滅)의 인도말 원어가 열반(涅槃)이다.
불교는 기독교와 스타일이 다르다. 기독교는 하느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불교는 이런 게 아니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내재되어 있는 문제는 인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불교는 심리학이다.
Buddhism is psychology.
인간은 욕망의 존재이고, 욕망 때문에 뭔가에 항상 집착하고, 집착을 하다보면, 구분이 생기고, 구분에 따라 이 여자에 집착하면, 저 여자가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러다 보면 고통스럽다. 이렇게 인간 만사가 얽히니깐 고통스러워진다. 그래서 어떡하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싯다르타도 여러 가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럼 욕망의 주체가 무엇일까? 인간의 욕망이라는 게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몸이 있기 때문에 욕망이 있는 것이다. 내가 강의를 하려면 배가 비어야 한다. 한 숟가락 적게 먹으면 아무 탈이 없는데, 구내식당 아줌마가 너무 맛있게 만드셔서 그걸 꼭 더 먹게 된다.
인간이라는 것은 이렇게 하찮은 문제에서도 욕망의 절제가 안 되는데, 하물며, 살면서 욕망의 절제가 쉽지 않다.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불교의 과제 상황이 생겨난다. 그래서 먼저 싯다르타는 몸을 학대를 해보자고 생각한다. 그것을 고행이라고 한다.
@ 고행(苦行)
몸을 학대하여 영혼을 정화시킨다는 인도인들의 매우 일반적 생각이며 관습.
몸이라는 것을 극도로 괴롭혀서, 몸을 아무리 괴롭혀도 문제가 안 되는 경지까지 가보자고 해서 고행을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못이 꽂혀 있는 침대에서 잔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싯다르타는 깨닫게 된다. 자신이 이렇게 몸을 학대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해탈을 얻을 수 없고,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깨닫게 된다.
그래서 보드가야라는 곳에서 어떤 나무를 골랐다. 그리고 그 나무 밑으로 가서 좌선을 한다.
인도에 가면 워낙 더워서 가만히 앉아 있게 된다. 선정이라는 게 인도에 가면 모두 좌선을 하게 된다. 사실 우리나라 같은 금수강산에서 좌선을 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인도에서 할 만한 짓이지만 우리나라는 그게 다 미친 짓이다.
하여튼 싯다르타는 거기서 가부좌 틀고 앉아서 생각을 했다. 왜 자신이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고통의 원인이 있었고, 그 원인은 그 원인의 원인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이런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한다.
@ 연기설(緣起說)
인간의 고통의 원인을 추구해간 싯달타의 사유. 연기란 A를 연(緣)하여 B가 기(起)한다. 즉 A가 있기 때문에 B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그 원인은 무엇 때문에 원인이 있는지, 그리고 그 원인은 또 무엇인지 생각한다. 이렇게 계속 원인의 원인을 찾아 생각한다. 이런 것을 연기설이라고 한다.
그래서 결국 싯다르타라는 청년이 생각을 하다하다, 제일 마지막을 낸 결론이 ‘아! 인간은 무지해서 그렇게 되었구나!’였다. 최후가 무명(無明)이었다. 인간이 무지하고 밝지 못해서 고통스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명(無明, avijja) : 인간의 무지
결국 인간의 모든 고통이 무명에서 나온다고 깨달았다. 그래서 무명을 없애고, 무명의 원인을 없애고, 그 원인의 원인을 없애고, 그렇게 없애다 보면, 결국 생노병사도 다 없어지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을 깨닫고, ‘아! 나는 득도했다!’고 외치며 깨달음의 환희를 가지고 미쳐 날뛰는 것이었다.
깨달은 자가 바로 각자(覺者)이며, 그래서 붓다라고 한다.
붓다는 “깨닫는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매우 평범한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
3. 무아(無我)
결국 불교는 무아(無我)라는 말 하나만 이해하면 끝난다.
@ 무아(無我, anatman)
아트만이 없다. 즉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불교 이론을 한 마디로 말하면, ‘모든 것이 무아’라는 이야기로 대개 끝난다.
예를 들어 내가 여기서 걸어가고 있다고 하면, 여기 있는 ‘나’가 있다. 또 다시 걸어가면 다른 공간 속에 ‘나’가 있다. 도올 김용옥이 걸어간다고 하면, 이 말은 도올 김용옥이라는 존재가 있고, 그 존재가 걸어간다는 말이다. 즉 김용옥이라는 존재, 아(我)가 있다고 하는 것이 전제된다.
내가 있고, 그 있는 내가 걸어간다는 것과, 걸어가는 행위 중에 내가 느껴진다는 것은 다른 명제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걸어간다고 할 때, 여기 있을 때 ‘나’하고, 걸어서 저쪽에 가 있을 때의 ‘나’가 모두 같은 ‘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집 앞에 잔디밭이 있다고 하자. 그럼, 저기에 잔디밭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잔디밭을 1달만 가꾸지 않고 두면, 그걸 잔디밭이라고 할 수 있나? 잡초 밭이 된다. 잔디밭을 유지하려면 계속 풀을 뽑고, 계속 깎아 주어야 한다. 똑같은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엄청난 고생을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는 존재도 지금 ‘나’라는 게 그대로 있는 거 같지만, 사실은 순간순간 시시각각 변하는 어떠한 요소들의 집합체이다.
잔디밭이 문제가 되는 건 거기에 풀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요소들이 제각각 있기 때문이다. 곤충도 있고 별래별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 그런 것이 그렇게 같은 형태를 유지한다는 것은 기적적인 것이다.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도 ‘나’라는 존재가 있는 게 아니라, 어떠한 연기(緣起)로 이루어진 ‘오온의 가합’이라고 말한다.
@오온(五蘊)의 가합(假合)
나의 존재는 색(色), 수(受), 상(想), 생(生), 식(識)이라는 다섯가지 요소들의 가상적 집합태이다.
인간은 항상 변하는 어떠한 것이 그냥 구름처럼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연기(煙氣)와 같은 것이다. 도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 같은 것이 걸어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같은 형태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인간을 포함한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존재로서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이렇게 끊임없이 변하는 가합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가합(假合)의 상태다.’라는 말이 곧 무아(無我)의 의미이다.
무아, 즉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인간은 지혜를 얻을 수 있고, 해탈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보조 지눌, 정혜쌍수
우리나라 불교의 가장 정통 이론으로 삼고 있는 설(說)은 순천의 송광사(松廣寺)라는 곳에서 나온다. 조선 불교의 가장 위대한 흐름이 바로 이 호남 지역에서 나온다. 그 호남 지역에 누가 있었냐 하면, 지눌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보조(普照) 지눌(知訥, 1158~1210)
순천 송광사를 중심으로 혁신적 불교운동을 펼쳤던 고려무신정권 시기의 대 사상가
이 사람은 사실 전라도 사람은 아니고, 황해도 사람이다. 보조 지눌이 있었던 시대에는 송광사가 아니고, 송광산 길상사라고 했다.
고려 무신정권이 들어오고, 교종과 선종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모든 종교라는 것이 그렇지만, 돈 벌고, 커지고, 신도가 많아지면 타락한다. 불교도 마찬가지였다.
@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
당시는 곡성 태안사(泰安寺)의 말사였던 작은 암자였다.
그때 지눌이라는 사람이 그 유명한 ‘정혜쌍수’라는 것을 외친다.
@정혜쌍수(定慧雙修)
정(定, samadhi)과 혜(慧, prajna)를 반드시 동시에 같이 닦아야 한다.
이것은 호남 지역에서 태어난 아주 혁명적 결사(結社)운동이다. 결사가 그 당시에는 혁명조직이었다. 종교혁명이었다. 이 사(社)라는 것이 단체를 뜻한다. 단체를 만들어서 종교개혁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결사(結社)
단체(社)를 조직(結)한다는 뜻으로 혁명적 단체운동을 말함.
송광사의 지눌 스님은 여러분이 아는 마르틴 루터 킹의 종교개혁보다 더 대단한 종교개혁 이론을 만들어서 이 세계를 뒤엎으려고 했다. 그러나 고려왕조는 지눌의 구상을 실현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유교로 넘어가게 된다.
5. 정(定), 혜(慧)
정(定)이라고 하는 게 바로 선정(禪定)이다. 정(定)이라는 것은 삼매다. 집중한다는 말이다.
@선정(禪定)
정신집중의 의미. 선(禪)은 다나(dyana)의 음역인데 고요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삼매라고 하는 것은 samadhi의 음역이다. 앉아서 뭔가에 집중하는 것이다.
정(定) = 삼매(三昧, samadhi)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하면 선생한테 받은 말을 가지고 집중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부처의 초기 수련법은 몸을 학대하는 것이었다. 선정 사상에는 암암리에 금욕주의가 있고, 금욕주의에는 암암리에 인도유러피안적인 사고방식에 있는 영욕의 분리가 담겨있다.
인간의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서 고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육체라는 감옥을 부셔버리면, 영혼이 해방될 수 있다고 하는 굉장히 서구적인 사유가 깔려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게 불교에서는 굉장히 복잡한 문제이다.
불교는 인도유러피안 언어인 산스크리트어의 소산이며, 따라서 원래 서양사상이지 동양사상이 아니다. 그래서 불교에는 영육이원론과 초월주의가 있다.
선정주의자들은 고행을 하면서 육체적으로 들어간다. 이 사람들은 프라이드가 세다. 범인(凡人)들을 하기 힘든 용맹정진을 하고, 앉으면 대단한 집중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싯다르타의 경우도 선정(禪定)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이것만으로 해탈로 가기는 어렵다.
그래서 혜(慧)가 나온다. 인간은 반야의 지혜를 가지고, 뭔가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혜를 통해, 이 세계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혜(慧)의 인도말 원어가 반야(般若)이다. 반야는 쁘라즈냐(prajna) 즉 지혜의 음역이다.
선정주의에는 굉장히 소승적인 생각이 깔려있다. 자기 혼자 앉아서 단련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반야의 혜(慧) 사상에 가면, 반야사상이기 때문에 대승적인 요소가 있다.
정(定) : 소승적 요소가 강하다
혜(慧) : 대승적 요소가 강하다
6. 탑, 불상
원래 탑(塔)이라는 말은 중국말이 아니라, 가차(假借)로 만들어진 말이다. 원래 스투파라는 인도말을 번역하면서 생겨난 말이다.
탑(塔)
스투파(stupa)의 음역으로 생겨난 말. 스투파는 무덤의 뜻.
스투파는 원래 무덤이라는 의미이다. 부처님이 죽고 화장을 하였다. 그 화장한 것을 조그만 단지에 담고, 벽돌로 거대한 봉분을 만든다. 이 봉분을 스투파라고 한다. 즉 탑은 벽돌로 된 거대한 무덤이다. 인도에 가면, 이런 것이 많이 있다. 벽돌로 우리나라 무덤처럼 만든 것이 탑이다.
싯다르타가 죽고 나서, 후에 전륜성왕이라고 불리는 아쇼카 왕이 나타난다. 이 왕은 싯다르타를 굉장히 지원했다. 그래서 아쇼카 왕은 불교를 퍼트리기 위해서 싯다르타를 묻었던 무덤을 파헤쳐서, 부처님의 재를 수천 개로 나누어서 사방에다 탑을 세운다.
그렇게 하니깐 부처님을 그리워해서 이 거대한 탑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리고 복을 얻으려고, 유명한 탑 주위를 빙빙 돌았다. 미신적인 것이 많은 인도 사람들은 유약을 바르고, 꽃잎을 뿌리면서 빙빙 돌고 그러는 것을 잘한다.
수백 명, 수천 명이 모여서 탑 주변으로 탑돌이를 하니깐, 거기에서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주는 이야기꾼들이 생겨났다. ‘부처님이 누군지 아십니까? 그 분은 카필라성의 왕자로 태어나서...’와 같은 부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구라꾼들이 생겨났다. 그러다가 이 이야기꾼들이 종교적인 리더십을 갖게 되고, 그러면서 승가라는 조직이 생겨난다.
탑돌이를 하는 신도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꾼을 보살(Bodhisattva)이라고 불렀고, 이 보살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평신도의 승가가 생겨났다. 이것이 대승운동의 출발이다.
원래 그 당시의 불교는 탑 중심의 종교였다. 그래서 가람의 배치도 반드시 탑이 가운데 있고, 불당이 주변에 있었다. 황룡사나, 분황사의 배치를 보면, 가람 가운데 탑이 있는 형태이다.
원래 초기불교에서는 부처님에 대한 불상을 일체 만들면 안 되었다. 지금도 이슬람 종교를 보시면 알지만, 이슬람은 신의 형상을 만들면 무조건 이단(異端)이다. 마찬가지로 불교도 형상을 만들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붓다는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난 사람인데, 그 사람을 또다시 형상으로 만들어 놓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인간적인 형상을 만들면 그건 붓다에 대한 죄다. 그래서 초기 소승불교에서는 붓다에 대한 모습을 그릴 수가 없었다. 불전도에도 부처의 발자국을 표시하거나 부처가 지나간 길만 표시했다. 붓다의 형상을 그리는 건 이단이었다.
불전도(佛傳圖)
원시불교 시기의 불타의 생애를 말해주는 그림들. 이 그림들에는 일체 불타의 형상이 없다.
그러다가 알렉산더가 인도 북부로 침범해 들어온다. 그리고 거기다가 나라를 만들어 놓고 갔는데, 침범해 온 희랍인들은 조각을 굉장히 잘 했다. 희랍인들이 간다라 쪽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갑자기 무식한 희랍 놈들이 왕자라고 하니깐, 제우스 비슷한 모양의 불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불상이 급격하게 번지면서 새로운 불교의 양상이 태어난다.
7. 소승, 대승
탑 중심의 불교와 불상 중심의 불교는 매우 다르다.
불상의 탄생은 이단적인 것이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대중적 불교의 탄생을 의미했다.
원래 원시 소승 불교는 탑 중심의 불교였다. 그런데 후대에 불상을 만들면서 대승운동이 생겨나고, 여기서 반야사상, 혜의 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탑중심불교 : 소승불교운동
불상중심불교 : 대승불교운동
이 반야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그렇게 치열한 몸의 고행이나, 몸의 훈련이나, 몸의 단련만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써서 깨닫기만 하면, 모든 사람이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불상의 출현은 대중들이 불교를 쉽게 이해하게 만들었고, 그만큼 사람들은 불상에 다시 집착했다. 그래서 그 상에 대한 집착을 깨는 반야운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하니깐 굉장히 급속도로 이 반야 사상은 퍼져간다.
반야사상으로 범인이 쉽게 성불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당신의 본성에 이미 붓다가 들어있고, 그걸 깨닫기만 하면 당신이 바로 붓다다!’라고 하는, 이런 혁명적인 생각은 불상 운동과 함께 전개된다. 이것을 우리가 대승불교라고 부르는 것이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를 이야기할 때, 소승은 작은 것이고, 대승이 더 좋은 것이고, 대승이 더 많은 중생을 구제하고, 이런 것은 아니다. 아주 근원적인 형태가 다르다.
내가 보기엔 대승과 소승의 구분 속에 정과 혜의 구분이 있다.
결국은 당시 지눌선사는 정과 혜는 반드시 같이 닦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어느 한편으로 뚫고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혜쌍수라는 것을 가지고, 선종과 교종을 합하려고 했다. 이것은 굉장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호남 쪽의 결사운동을 통해 나타난 정혜쌍수는 우리 불교의 이론이다.
정(定)에 빠져있는 자는 혜를 경박하다 하고
혜(慧)에 빠져있는 자는 정을 아둔하다 한다.
8. 돈오점수
그리고 여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정혜쌍수와 관련된 돈오점수의 문제이다.
불교에서 돈오(頓悟)라는 말이 있다. 인간이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뭔가를 깨닫는다고 하는 것이다. 지혜를 통해서 순간적으로 깨닫는다고 하는 것이다.
“아! 나는 내가 여기 있었던 것으로 알았는데, 나는 오온의 가합체요, 나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무아다. 나는 연기같이 그냥 사라질 수 있는 존재구나!”라고 일순간에 깨달을 수 있다.
내가 ‘나’로서 항상 있고, ‘나’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살면, 인간은 끊임없는 욕망에 시달리게 된다. 그런데 ‘나’라는 존재가 근원적으로 없다고 생각하면, 욕심을 가질 필요가 없어진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을 가지면, 과연 인간 존재가 완성될 것인가? 지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돈오와 함께 점수(漸修)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돈오(頓悟) : 철저한 깨달음. 혜(慧)의 측면
점수(漸修) : 꾸준한 수련. 정(定)의 측면
인간이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어떤 존재라고 할지라도 깨닫는 순간에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지눌의 말인데, 여기 얼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 얼음은 결국 물이다. 얼음이 순간적으로 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아! 얼음이 아니고 물이었구나!’라고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얼음이 물로 바뀌는 데는 반드시 시간이 걸린다.
우리가 일시적으로 철저하게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이치 상 자신이 깨달은 존재라고 할지라도, ‘나’라는 존재는 어차피 번민에 시달리는 육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깨달음과 동시에 해탈한 부처이지만, 사실상은(de facto) 아직도 번민하는 탐욕스러운 중생일 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보조 지눌선사가 하는 말이, ‘인간은 깨달을 때는 철저히 깨달아야 하지만, 그 깨달음으로 인간 존재의 해탈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끊임없는 수양을 통해서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를 깨달을 수 없는 존재라고 비하시켜도 안 되고, 자신이 깨달았다고 해도 자만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깨달을 수 없다고 비하하지 말고
깨달았다고 자만하지도 말자!
인간은 끊임없이 깨닫는 것은 깨달아야 하지만, 끊임없이 닦아야 된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철저해야만, 제대로 닦을 수 있는 것이다. 깨달음이 불철저하면, 닦는 것도 제대로 닦아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닦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점수(漸修)의 사상으로 가면, 닦는다고 하는 것은 결국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 자비의 서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점수(漸修)는 자비(慈悲)의 서원(誓願)이다.
깨달은 자의 평등적 시각을 버리고, 중생의 차별적 시각으로 그들의 번뇌와 고통을 함께 느끼고 동참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깨달은 자의 평등적 시각을 버리고, 중생의 차별적 시각으로 그들의 번뇌와 고통을 함께 느끼고 동참해야 한다.
지눌선사는 이러한 위대한 실천 사상이 있었다. 돈오점수의 사상은 이러한 실천론으로 이어진다.
성철스님만 해도, 그 양반이 돈오돈수를 말씀하면서 철저한 어떠한 사회적인 메시지가 있었다면, 존경할만하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성철스님 이하, 한국불교가 문제가 되는 건, 스님이라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대해서 어떠한 사회적 가치관(정치적 발언)을 말할 때 꼴통 같은 이야기만 한다.
우리나라 불교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정말 제대로 우리 민족의 역사적 시각에 대해서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없다.
오늘날까지도 우리나라 불교는 지눌이 말하고 있는 이 돈오점수의 사상을 불철저하게 실천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불교는 지눌을 정통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지눌 사상의 사회적 의미를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9. 유교
제일 밑바닥에는 아까 말한 풍류가 있었고, 그 풍류 위에 불교라고 하는 문제가 들어와서, 인간에게 해탈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서 유교가 들어오게 된다.
정도전이라는 사람이 고려말에 이 나주지역 다시면으로 귀양을 온다.
정도전은 고려말 반원친명의 발언으로 재상 이인임의 노여움을 사서 나주로 귀양 왔다.나주 다시면 소재동에서 민중과 같이 살면서 혁명사상을 완성했다.
내가 다시면에 정도전의 팻말을 세워주기도 했지만, 다시면에 귀양을 와서 호남 민중들과 살면서 서민의 삶을 보게 된다.
나주(羅州) 다시면(多侍面) 소재동(消災洞)에서 민중과 같이 살면서 혁명사상을 완성했다.
그 당시 소작인들은 엄청나게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한 땅에 대해서 주인이 열 명씩 있었다. 왜냐하면 서류상으로 어떤 놈이 공신으로 땅을 받았다가 퇴임을 하면, 또 다른 놈이 공신으로 와서 같은 땅을 받았다. 농사짓는 사람은 한 땅에 한 사람인데, 그 땅에 붙어서 쳐먹는 새끼들은 열 놈이 되는 거였다. 10분 1씩 떼어서 쳐먹으니깐 소작인들은 먹을 게 없었다. 그런데 그놈들이 다 어마어마한 놈들이니까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려 말 호남지역의 농민들은 전부 그렇게 열 마지기를 지으면, 아홉 마지기를 수탈당했다.
정도전은 여기로 귀양 와서, 농민들의 비참한 현실 속에서 눈을 뜨게 된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불교 같은 것으론 희망이 없다. 인간이 해탈해서 뭐하냐? 인간의 삶이 고통스럽지만, 그냥 주체적으로 살면서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자! 해탈이고 종교적 구원이고 뭐고 다 잊어버려라! 다 잊어버리고 우리끼리 질서를 지키고 잘 살아보자!’
이게 유교다.
유교(Confucianism)는 사회 윤리(social ethics)를 통해 인간의 구원을 지향한다.
유교는 종교적 해탈이고, 하늘나라고, 지랄이고 다 필요 없다고 한다.
공자한테 제자가 죽어서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그러자 ‘내가 사는 것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냐?’고 한다.
未知生, 焉知死? [논어] [선진]
귀신에 대해서도 묻고, 하느님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러자 ‘그게 뭐 있다고 그러냐? 멀리하고 그냥 공경해주면 되는 거지. 뭐 그 따위 것을 믿냐?’고 한다. 이게 공자라는 위대한 사상가의 생각이다.
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 [논어] [옹야]
‘이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새로운 이념이 될 수 있다! 왜 이렇게 종교적 구원에 시달려야 되냐? 내가 왜 이렇게 구원을 받아야 되느냐?’는 생각에 공자의 유교를 정도전을 비롯한 혁명적 사상가들이 들여온다.
유교에는 아주 철저한 합리성이 있다. 초월적인 것을 빙자한 사기를 믿지 말라고 한다. 이것이 유교의 메시지다.
유교는 모든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를 거부하고 합리적 인간관, 우주관을 주장한다.
나는 오늘날 봐도, 유교는 굉장히 포스트 모던한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유교는 전근대적 사상이 아니라 포스트 모던(post-modern)한 사상이다.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다양한 종교가 들어왔는데도 모든 종교가 화평하게 잘 사는 나라가 드물다. 세계에 없다. 이게 왜 가능할까? 우리 민족에게 유교적 합리성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다양한 종교가 광신적 형태를 과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종교분쟁이나 종교전쟁에 시달리지 않는 것은 유교적 합리성의 기반이 있기 때문이다.
유교적 합리성이 깔려있기 때문에, 시아버지는 교회 나가고, 시어머니는 불당 나가고, 며느리는 또 다른 곳에 나가도, 나갔다 집에 들어오면 그냥 오냐오냐하면서 겸상하면서 인사 잘하고, 잘 먹고 잘 산다. 유교가 우리 민족에게 무서운 합리성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유교를 기반으로 토지개혁을 하고 정치개혁을 하면서 조선왕조를 만든다. 잘 만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유교는 세계 종교 사상, 유교 이상의 합리주의는 없다고 생각한다.
유교가 젊은 사람들에게 어른들을 공경하라고 한다. 그것은 서로 손해 보는 게 없는 것이다. 아이들은 인사를 잘하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귀여워해 주는 게 뭐가 나쁜가? 서로 예의를 지키는 관계에서도 얼마든지 상대를 비판할 수 있다. 유교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말 못할 것이 없다.
예의를 지킨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기본 질서, 사회 질서를 우리끼리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최소한의 기본 질서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유교를 통해서 500년 동안 이런 생각을 훈련받았다는 것은 대단한 힘이다. 이 힘을 우리가 깔보면 안 된다.
최근까지도 서양은 미신적인 신이 인간을 억압하는 세계였다. 우리는 밖에 나가서 신은 죽었다고 외칠 사상가가 나올 필요가 없었다.
니체(1844~1900)는 “신은 죽었다”는 외침으로 서양의 20세기를 열었다. 그러나 그러한 외침은 우리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않는다. 서양의 정신사적 빈곤만을 나타낼 뿐이다.
우리는 벌써 500년 동안 니체 이상으로 다 건강하게 살았다. 이미 신은 정도전이전에 죽여 버렸다. 이게 대단한 것이다. 우리에게 니체는 필요 없다. 난 니체를 쳐다보면, 우스워 죽겠다.
10. 유교의 문제
그래서 유교 500년을 살았는데, 이 유교에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뭐냐 하면 종법주의다. 유교는 사실 모든 종교를 거부했지만, 거기에 굉장히 종교적 요소가 하나 있다. 조상숭배다. 제사로 대표되는 조상숭배를 한다.
@ 조상숭배(ancestor worship)
스펜서는 모든 종교는 조상숭배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했다. 유교는 조상숭배를 제사로서 종교의식화 시켰다.
제사를 중심으로, 제사를 통해서 엄청난 종법주의가 있다. 종법 사상이 있다. 그것은 가족주의를 빙자한 아주 치열한 종교적 구속력이 있다. 제사를 안 지내면 큰일 난다. 여자들은 이 종법의 며느리노릇 때문에 이가 갈린다.
그리고 유교는 굉장히 대단한 상식주의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평등론을 완벽하게, 제도적으로 구현하지 못했다.
사상적으로는 갖고 있다. 유교는 인간의 민본주의, 인간 평등론을 갖고 있지만, 양반, 상놈을 정당화시켰다. 왕에 대한 복종, 남편에 대한 복종, 선생에 대한 복종, 이런 것을 지지하면서 유교도 정도전이 구상했던 혁명적 유교의 성격을 떠나서 점점 경직화되어 갔다.
11. 기독교
조선 말기에 남인들은 퇴계 사상과 관련이 있는 주리론적 사상을 갖고 있었다. 리기(理氣)에서 리(理)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리의 사상을 갖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정권으로부터 소외된 남인들에 의하여 수용되었다. 그들은 기독교를, 유교를 보완하는 사상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이들은 상제이론으로 리(理)를 하느님으로 대체하기 시작한다. 정약용도 기독교에 약간 연루가 되어 있다. 천주교 신자인 정약전은 정약용의 형이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이라는 사람은 정약용 누나의 남편이다. 정약용의 누나가 이 씨한테 시집 갔다.
이승훈(李承薰, 1756~1801)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자. 북경에서 자발적으로 세례 받음. 여러 번 배교. 그러나 신유박해때 처형됨.
이승훈은 북경에 갔다가, 거기서 최초의 세례를 받고 온다.
모든 지구상의 기독교는 서양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가져다가 먹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기독교의 특징은 이와 다르다.
조선 말기에 유교 지식인들은 주체적으로 자기들의 이론 구조에 의해서, 우리 사회에 어떠한 새로운 물줄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중국에 몸소 가서 거기서 세례를 받고 가져온 것이다.
우리나라 기독교는 세계 기독교 사에서 굉장히 특이한 역사를 갖고 있다. 우리 민족은 기독교도 결코 비주체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주체적으로 수용했다. 남인들이 그걸 수용한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서양인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주입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자내의 사상사적 필연성에 의하여 주체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12. 동학
기독교에는 철저한 인간 평등관이 있었다. 그러니깐 우리 민족도 이러한 기독교적인 평등관에 맞대응하는 학문을 제시한다. 유교를 까고 나오지만, 내가 보기엔 유교 전통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학문이었다. 아주 색다른 것이 나온다.
서학에 대해서 동학이 나온다. 그러니깐 동학이라고 하는 것은 서학에 대응하여 철저한 인간 평등론을 가지고 나온다.
동학(東學)
창시자 최수운은 서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체험이 있었다. 그리고 서학을 극복하는 새로운 사상을 창안했다. 동학은 유교전통 상식주의의 궁극적 결말이다.
서학은 인간의 평등관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 위에 상제가 수직적으로 군림한다. 이러한 것은 또다시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최수운이라는 사람은 이 수직적인 구조를 없애고, 이 상제라는 것은 또 하나의 옥황상제에 불과한 미신이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
서학 : 상제(上帝)의 수직적 인간지배
동학 : 상제없는 인간의 시천주(侍天主)적 평등
인간은 시천주의 존재이고, 인간 모두가 하늘님이라고 하는 사상으로 간다.
인간 개개인 모두가 하늘님(天主)이다. -최수운-
13. 또 하나의 풍류, 기독교
풍류로부터 불교가 들어오고, 유교가 들어오고, 이후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우리 민족은 기독교라는 것도 사실 기독교로 받아들인 게 아니라, 또 하나의 풍류로 받아들였다.
기독교의 특징은 찬송가 종교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모이면 노래를 부른다. 어떤 종교도 기독교에 대항하지 못하는 것이 찬송가이다. 그 수준이 너무 말이 안 되게 높다. 서양은 근세를 거치면서 엄청나게 음악이 발달했기 때문에 찬송가의 수준이 높다. 그리고 같은 천막에 들어가서 남녀노소 구분 없이 같이 한 자리에서 노래를 부른다. 구한말 유교사회에서 이것은 감격이었다.
그래서 기독교가 우리 민족에게 급격하게 퍼져 들어간 것이다. 절대 교리 때문이 아니었다. 교리로 말하면 기독교는 사실 미신이다. 인류사상 이렇게 유치한 미신이 없다.
그런데 이 미신이 세상을 2,000년 동안 지배할 수 있었던 힘은, 여기에 박애가 있고, 인간 평등에 대한 가르침이 있고, 그리고 위대한 예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론 때문이 아니었다.
재림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의 미륵사상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미륵사상은 신화적으로 있었다. 실제로 어느 미륵이 다시 태어난다고 믿은 사람은 없었다.
예수의 재림 사상은 이미 불교의 미륵사상에 내재해 있었다.
화순에 가면 누워 있는 미륵불이 땅에서 벌떡 일어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 재림 사상은 옛날부터 다 있던 것이다. 우리한테 기독교 이론은 새로운 게 아니다. 원래 있었던 민간 신앙 수준이었다. 그것이 위압적으로 우리 민족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 기독교는 풍류(風流)의 재현이었고 교회는 서낭당의 근대적 변용이었다. -도올 김용옥-
14. 한국인의 모습
그리고 지금 불교, 유교, 기독교, 동학까지 합쳐서 모든 것이 우리 한국인의 모습 속에 내재되어 있다. 한국인은 절대로 불교쟁이, 예수쟁이, 무당쟁이, 굿하는 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은 무당을 데려다가 굿하는 놈이나, 교회 가서 굿하는 놈이나 똑같은 것이다.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 민족의 의식 구조를 파고 들어가서, 고고학적 발굴을 해 들어가면 수없는 층대가 있다. 이것이 모두 우리 삶의 기초이다. 그리고 사실 우리에게는 앞서 이야기한 모든 가치관들이 부분적으로 다 들어 있다.
우리 삶 속에서, 이럴 때는 불교적으로 걸어가고, 저럴 때는 기독교적으로 걸어가고, 또 이럴 때는 풍류적으로 걸어가는 게 우리들이다. 이게 한국인의 모습이다.
그러기 때문에 한국인은 모든 인류의 사상을 종합하고 있는 사람들이고, 간단한 사람들이 아니다. 중동에서 그저 알라만 외치고 있는 사람들하고 질이 다르다. 내가 한국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참으로 대단하다. 이해력이 대단하고, 그 깊이가 대단하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정신적 자산을 가지고, 앞으로 이 세계를 이끌어 간다면, 우리 민족은 정말 위대한 민족이 될 수 있고, 세계 정신사를 리드할 수 있다. 이것은 내가 절대 국수주의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너무도 진실한 말이다.
15. 폭력의 시대, 20세기
20세기는 정말 무서운 폭력의 시대였다. 여러분은 20세기가 인간에게 가장 개명한 시대였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원시시대부터 생각해 보면, 20세기처럼 우리가 잘 살게 된 시대가 없었다. 우리 어려서 수도를 틀면 뜨거운 물이 나오는 건, 꿈도 못 꿨다. 지금의 아이들은 그런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개명한 시대에 살았지만, 20세기처럼 인간이 처참하게 대규모 살육을 한 유래가 없다. 20세기는 과학이 발전하고, 가장 민주주의가 발전한 세기처럼 보이지만, 인류에게 가장 처참한 대규모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한 세기였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 가운데서 이렇게 자기 종족끼리 처참하게 죽이는 동물은 인간 밖에 없었다.
20세기는 인류의 가장 개명한 세기였지만, 가장 대규모의 살육, 도륙을 감행한 전쟁과 폭력의 세기였다.
그것이 20세기를 살아왔던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러한 처참한 모습 속에서 가장 심하게 당한 민족이 우리다. 그러기 때문에 20세기는 폭력의 세기였다는 것이다. 민주, 자유, 평등을 외치기 전에 폭력의 세기였다.
그러나 21세기에는 폭력의 시대는 간다. 제가 보기엔 상당수 완화될 수밖에 없고, 이제는 합리적 소통의 시대가 왔다. 이러한 합리적 소통의 시대에 있어서 이제는 정말 바른 생각을 할 줄 알아야 되고, 바른 말을 할 줄 알아야 되고, 정말 실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된다.
그런 방향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기나긴 민족적 정신적 자산들을 잘 살려서. 우리의 후손들을 교육하면, 우리 민족에게는 밝은 미래가 열릴 것이라고 확신한다.
(2006년 2월 24일 강의)
●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
불교는 왕건이 고려의 개국과 함께 국교로 지정되고, 적극적인 후원과 기대로 귀족화 되었으며, 스님들은 정치와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다. 불교계 모두가 시대에 편승하여 안위를 택했지만 지눌은 모든 것을 버리고 정혜결사(定慧結社)운동을 하여 지금의 조계산 송광사에 정혜사(후에 수선사)를 정한 후, 민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철저한 수행과 수도로서 포교에 힘쓰면서 정치·권력·안락을 과감히 버렸다.
보조국사는 스승을 정하지 않고 홀로 수행을 하며 도를 찾았으며, 자유롭게 경론(經論)과 선어록(禪語錄)에 깊이 빠져 독자적인 선 사상의 체계를 세웠으며, 귀족과 민중의 차별을 버리고 평등포교를 강조하여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보조국사는 3번 크게 깨우침을 얻었는데, 첫째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고 한 가지 상에 매달리지 말고 항상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 둘째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의 <화엄경(華嚴經)> [여래출현품]에 선과 교가 다르지 않음에 감격하여 수행법의 체계를 세우고, 불교계의 모순을 지적할 수 있었으며, 셋째 <대혜어록>을 보고 자아의 본질도 일체의 경계와 작용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항상 걸림m 없이 자재(自在)한 대해탈의 경계를 체득하였다.
보조국사의 선사상의 핵심은 ① 심성론, ② 돈오점수론, ③ 간화론으로 꼽고 있으며, 심성론(心性論)은 선에서 심(心)과 성(性)을 내세워 불교의 기본 정신을 일깨웠다. 저서 <진심직설(眞心直說)>을 저술하고 선이 추구하는 실제 세계인 진심(眞心)과 망심(妄心), 진심의 묘용(妙用)에 대해 정확히 결론을 내었으며, 진정 선은 교가 바탕이 됨을 당부하고 선(禪)과 교(敎)가 다름없음을 간절히 당부하였다.
돈오점수론(頓悟漸修論)은 참 자아와 참 마음을 홀연히 발견하는(돈오) 것을 의미한다는 것과, 처음에는(태어남) 모르지만 세월이 지나 성인이 되어서 차츰 발견하는 것(점수)을 분리하고 않고, 점수가 바탕이 되어 돈오가 눈을 뜬다면 그것이 바른 수행이라고 하였다. 간화론(看話論)에 대해서도 모든 분별심, 즉 사량(思量)없는 마음으로 한 생각 탁― 끊고 살아간다면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없는 참 진리를 얻게 된다고 하였다.
※ 頓悟(돈오): 철저한 깨달음으로 慧(혜)의 측면을 강조
漸修(점수): 꾸준한 수련으로 定(정)의 측면을 강조
한국인의 근기에 맞는 독자적인 사상과 풍격(風格)을 갖추신 보조국사 지눌은 그만의 독특한 선교융통을 이루어내었고, 진정한 한국의 선 사상을 이루었으며, 기울어 가는 고려불교를 바로 세우고 부처님과 역대 조사의 참뜻을 근본으로 돌이켜 수행과 이생(利生)에 전념할 혁신적 이념체계를 창안하여 새로운 기치를 세움으로써 한국 불교를 조계종(曹溪宗)이라는 큰 강으로 합류시켰다.
● 대각국사 의천(1055~1101) : 천태종
-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현묘지도의 風流를 바탕으로 석가의 가르침을 한국인 근기에 맞는 독자적인 사상과 품격으로 승화하였으며, 유교적 합리성을 토대로 기독교의 인간평등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였다.
- 예수의 재림사상은 이미 불교의 미륵사사에 내재해 있었으며, 우리 민족에게 기독교는 풍류의 재현이었고, 교회는 서낭당의 근대적 변용이었다.
● 동학사상 : 수운 최제우 (1824.12.18.~1864.3.10.)
수운의 사상을 바로 알려면 동경대전의 두 번째 글인 <논학문:論學文>
<중략>與洋道無異者乎(여양도무이자호): “서양의 도하고 다른 것이 있습니까?”
曰(왈): 洋學如斯而有異(양학여사이유이), 如呪而無實( 여주이무실), 然也運則一也(연야운즉일야), 道則同也(도즉동야), 理則非也(이즉비야): “서양의 천주학은 우리 것과 비슷하기는 하나 다른 점이 있고, 주문이 있는 것도 비슷하나 알맹이가 없다. 그러나 대자연이 움직이는 운(運)으로 보면 하나고, 도(道)로 보면 똑 같으나, 그 내용인 이치로 보면 서도(西道)는 틀렸다.”
曰(왈); 何爲其然也(하위기연야): “왜 서양 것은 틀리고 당신 것은 맞습니까?”
曰(왈): 吾道無爲而化矣(오도무위이화의): “같은 천도라도 내가 말하는 도는 함이 없이 모든 것을 한다. (서양의 하나님은 자기가 인격적으로 앉아서 지배하면서 조작하고, 자기를 싫어하면 벌하고, 야단치고, 이러는 무언가 하는 하나님이지만) 내 도는 무위이화(無爲而化)이다.” ※無爲而化: 함이 없이 이 세상을 변화하게 하다
曰(왈): 同道言之(동도언지), 則名其而學也(칙명기이학야): “도로 말하면 같다고 하면 당신 것도 서학이라 하면 되지 않느냐?”
曰(왈): 不然(불연), 吾亦生於東(오역생어동), 受於東(수어동), 道謂天道(도위천도), 學則東學(학즉동학): “그렇지 않다. 내 도는 서학이라 말할 수 없다. 나는 서양에서 난 것이 아니라 동쪽에서 났으며, 이 조선반도에서 이 도를 받았고, 도로 말하면 천도이지만, 학으로 말하면 곧 동학이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동학(東學)이라는 말이 쓰였다. 당시 수운의 때만 해도 무극대도(無極大道: 극이 없는 대도)라는 말과 ‘하늘님’이라는 말만 썼다. 도를 말하면 천도이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방법과 내용에 있어서 무극대도와 서학과는 다르다. 영남의 유림들이 그를 서학도로 몰아 죽이려 했을 때 그는 단순히 변명을 하지 아니하고 “도를 말하면 동학이고 천도라고 말하지만 학으로 말하면 내 것은 동학(東學)이다.” 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