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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26일 사순 제5주일>
주어진 삶, 수동적 존재의 부활
대답하기가 아리송한 질문이 더러 있지만, 그 중 “왜 사느냐?”라고 질문을 받으면 이 또한 대답하기가 난처해진다. 별생각 없이 살았던 사람도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그래! 내가 어쩌다 살게 되었고 산다는 것이 뭐지?’
한편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질문을 던지면 갑자기 멈추어 서서 생각한다. ‘그래, 산다는 것이 뭐지? 무엇이기에 나는 이렇게 열심히 사는 걸까?’
산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과 동의(同意), 이어(異語) 같다. 산다는 것은 죽음을 전재하고 있기에 죽음, 곧 존재의 소멸과도 연결되는 주제이다. 이 주제는 인류의 문명 속에 고스란히 그 자취를 남기고 있는데 특히 종교적 주제로서 인류 역사와 함께 해왔다. 다양한 문명 속에 자연 발생적인 토템 사상은 생명과 죽음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해석으로 그 시대의 민중들에게 나름대로 삶의 길을 제시하면서 죽음에 대하여 가르쳤다.
2020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젊은이가 나타나 새로운 가르침을 준다.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친구로 알려진 라자로가 죽었다. 그의 동생 마르타가 그를 원망한다. 그러나 그는 마치 그렇게 의도라도 한 것처럼 태연하게 늦장 부리며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요한 11,17) 지난 라자로의 무덤으로 가서 죽었던 라자로를 불러낸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온다?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요, 그 어떤 것도 남겨놓지 않고 끝장내는 무서운 파괴자처럼 여겼는데 이런 죽음에서 살아나온다? 이것은 매우 놀라우면서도 새로운 가르침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에서의 부활은 죽음의 다리를 건너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간다는 단순한 도식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부활은 ‘나는 이렇게 살겠다.’(나는 이렇게 존재하겠다.)라는 것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라 생각한다.
그리스도교적 시각으로 보면, 하느님께서는 생명의 하느님이요, 그 생명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시고 이 세상에서 ‘살도록 명령(?)’, 존재케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고자 열심히 ‘길’을 찾는다. 참된 길, 진리의 길이 어디인가? 잘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등의 질문을 던지며 ‘살도록 명령’ 받은 바 그렇게 살고자 애쓴다.
어떤 이는 ‘율법주의’에 빠지고, 어떤 이는 ‘완벽주의’에 빠지고, 어떤 이는 ‘자기 합리화’에 빠지는 등 애쓰는 사람일수록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아예 게을러터진 사람도 있고, 본능적 쾌에 빠져 사는 사람도 있고, 거짓인 줄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자신을 포기한 사람도 있다. 이 사람들이 처음부터 이런 삶을 선택했을까? 아니다. 이들도 본능적으로 ‘산다는 것은 뭘까?’라는 물음을 안고 태어났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이 물음에 답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들이 우리와 특별히 다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처한 현실과 상황이 우리보다 열악했던 것일 뿐 다른 점은 없었을 것이다.
열심히 살려고 했던 사람들이 ‘완벽주의’나 ‘율법주의’에 빠지든 또는 아예 포기하고 게을러터지든 쾌락에 빠지든 이들은 ‘길을 잘못 들어섰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라자로가 병이 들어 죽을 위험에 있음을 전해 듣고서 서둘러 길을 나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늦장을 부려 라자로가 죽어 무덤에 묻힌 지 사흘이나 지난 뒤에야 가신다. ‘사흘’이라는 시간은 생명과 죽음이 분명하게 갈리는 시간으로 ‘사흘’ 후에는 어떤 것도 다시 생명으로 되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인간에게는 마치 기울어진 운명과 같은 시간이다. 다시 말해서 오직 생명의 주관자이신 분 이외는 어떤 이도 라자로의 죽음에 권능을 떨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다시 ‘삶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지, 내가 살아가야 할 길은 무엇인지에 대해 대답하고자 매우 열심히 살아간다. 그런데 그런 삶, 생명이 나의 것이 아니라 그 주관자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언어유희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생명, 즉 삶은 ‘주어진 것’이지 내 ‘소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내 삶이라고 여기면 삶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인 데 반해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은 최대한 잘 살면 된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것이 올바른 해석일 수 있는 것이 삶을 내가 선택해서 시작된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 속에 던져진 수동적 존재다.
주어진 생명, 수동적인 삶이기에 죽음에서의 부활은 단순한 생명의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가 선택한 ‘삶의 길’을 기꺼이 수용하시면서 ‘완성해주시는 것?’, 또는 하느님의 ‘살도록 명령’에 자유로운 의지로 응답한 ‘나의 삶’을 ‘당신의 것으로 받아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지나친 억지일까?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면서도 ‘완벽’하지 않아도 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겠노라고 다짐하면서도 ‘율법’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고, ‘잘살고 싶은데’ 잘 안되어서 하다 하다 지쳐서 ‘게을러 터져버린’ 인생까지 가지 않아도 되는, 그냥 하느님 앞에 ‘주님! 저는 인간입니다.’하고 고백하면 되지 않은가? 어차피 ‘주어진 생명’ 언젠가 다시 ‘돌려드릴 것’이고, 나의 의지와 별도로 시작된 삶인데 내가 할 만큼 하면 됐지 뭘 얼마나 더 하겠다고 스스로 책망하고 다그쳐서 ‘자기다움’마저 상처 입고 훼손해가며 결국에는 자신을 절망케 하는가?
앞에서 부활은 ‘나는 이렇게 살겠습니다.’(나는 이렇게 존재하겠다.)라는 것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라 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나의 의지가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비록 ‘주어진 삶이요’, ‘수동적인 존재’지만 나에게 주어진 삶을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나는 이렇게 살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완벽’하지 않아도 되고 ‘율법’의 규정 하나하나까지 다 지키지 못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부활은 그렇게 완전하지 못해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살아온 우리의 삶을 완성해주시고 죽음이 소멸시키지 못하도록 지켜주신다는 것이다.
인간인 우리가 스스로 ‘완벽’해지려고 한다면, 스스로 ‘율법’을 이겨내려고 한다면 우리는 ‘자기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어쩌면 우리가 겸허한 마음으로 ‘주님! 저는 이 길을 가겠습니다.’, ‘주님! 저는 이렇게 살겠습니다.’라는 자세야말로 ‘육(肉)에 속한 자들’이 아닌 ‘하느님의 영’(로마 8,8-9, 참조)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
인간에게 죽음은 두려운 존재지만, 신앙은 죽음을 통제하는 하느님의 권능 하심으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에제키엘 37,13, 참조) 어쩌면 우리에게 삶은 ‘완벽’하게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의 길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중요할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최선’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의 땀을 다 쏟아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즐겁고 행복하게’라는 의미에서 ‘최선’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삶은 선물이다. 잘 살면 즐겁고 행복한 것이고 잘못 살면 괴롭고 힘들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삶에 대해 다르게 질문해야 한다. ‘잘 사는 것은 어떤 것인가?’보다 ‘어떤 삶이 행복한가?’라고 물어야 한다.
첫댓글
나의 생명의 주관자 하느님을 향해
자유의지로 선택한 삶의 길은 하느님의 소중한 선물~
최선을 다해 즐겁게 행복하게 살아보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