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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기사에서
경북 대구 집값 하락폭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불가하다
대구달성공원 주위엔
나 서부국민학교시절 달성공원쪽으로 걸어 등하교 했는데
달성공원 뒤쪽주위엔 가정집 기와집이 즐비하게 병풍같이
둘러처저있었다
고풍스럽게
그 시절 학급반 친구가
자기집에 가자해서 몆번 가 본적이 있는데
지금같이 대구인심이 뭐에 홀린것처럼
자기의견을 내는데 주저하지도 않았던것 같고
나 역시 당당하고 누구눈치를 본다거나
내 속 마음을 있는그대로 표현하는
그런시절이 있었다
대구인심이 나 주위를 둘러싼
사납기로서니
그게 대구인심 다 가아니다
그래도 그래도 타 지역 인심보단
엘리베이타를 지하철 타다보면
타인을 배려하는 정 을가진 대구시민이 많다는걸 알게된다
인교동인가 위치한 목욕탕을 간적이있는데
그때부터 목욕탕에 가는게 좋아진것인지 모르겠다
충남여자 땜에 화원목욕탕도
두곳다 갈수없게 됐지만
록천목욕탕관리인이라던 무식한여자
구석진 벽을마주한 사람들을피한 장소에서 내가 자리하고있을때
언제나 목욕갔을땐 사람없는곳을찾아 앉는데도 옆에붙기가 일쑤여서
아예 저 구석진 자리를택해 앉았는데 그럴때면 샤워기에서 물이 틈새로삐처나오기도하고
탕에 들어갔다나오면 앉았던 의자가 없어지기도하고
의자를 다시 가저와 비누로 씻는과정이 번거롭고 가뜩이나 힘이딸린데
꼼꼼히 다시 씻을라치면 화가치밀었다
새벽5시가 되지않을 시간에 집을나서 택시를타고 월배시장 가 주세요 하곤 타면
택시타는 과정도 목욕탕갈때면 내겐 스트레스로 점철된 시간이 많았고
똑같은거리 같은 시간대인데도 요금이 제각각
3300원 나올때도 있었고 4700원 나올때도 있었고 기사마다 요금이 달랐고
도착하면 샤터문이 잠겨있어 밖에서 샤터문 열릴때까지 기다릴때가 더 많았던것같고
5시에 샤터문이 열리는데
들어가선 탕에들어갈 준비과정을 거치고 탕에 들어갈라치면
벌써 다 탕에 사람들이 들어가있다
아예 물 내려가는 벽을마주한 사람보이지않는 곳에 자리해 탕에들어갔다 돌아오면
의자도 없어지고 샤워기옆으로 물이삐처나오고 탕에들어가기전 멀쩡했던 샤워기가
집에돌아와 그 이튿날 샤워할라치면 샤워기에서 록천탕 내가 벽을 마주한자리에 앉았던
의자까지 없어졌던 샤워기에서 틈새로물이 삐처나왔던 똑 같은위치에 물이삐처나온다
지금도 틈새로 물이 삐처나온다
벌써 몆번짼지 샤워기를 아들이 교체해준것만해도
형광등도 아들왔을때 긴형광등으로 두군데 십육만원인가 주고선 교체했는데
컴퓨터있는방것은 언제떼어갔는지 떼어가고 기존에있던크기로 사각으로 바꿔치기돼있다
노원구있던시절 똑같은 긴 형광등을 주방에 교체했는데
계속 형광등의 불이꺼저
십오만든다해서 십오만주고선 교체했는데
여기 대구와 똑 같은 크기도 똑 같은 긴 형광등을
그곳에선 하나같이 내게서 덤터기를쒸워 헛돈이 지출됐다는걸 이제사 알게된다
여기 대구로 이사왔을즈음에도 군데군데서 부당하게 내게만
큰돈은 아니었을지라도
요즘은 많이 개선된것같다
사장이 면담요청한다고 그곳까지 와서 거듣 또다시 고향을물어봐도 묵묵부답
고향을 떳떳이 밝히지못할만큼 고향이 그렇게 부끄러우냐
온갖 자극적인말로 고향을 알아내려했지만
주위에 목욕하던여자들 다 듣고있었고
결국 알아내지못했는데
옷입으면서
하긴 경상도사람이 내게
심하게한적도 많긴하다만 라고 말했을때
주위에 누군가 대전이 라한다
옆에서 그여자 듣는데
기세등등하던여자 끌먹은 벙어리같이 말문을닫는다
내 아들 과기대 카이스트 다닐적 몆번이나 내려갔었는데
대전에 악감정없는데
라고 말해주었다
모함하고 이간질하고 악행하는것들빼곤
대전사람들게 악감정없노라고 말하고 나왔던것같다
내가 계단을 내려오니 사장이 기다리고있었는지
사장이란 사람에게
구차하게 설명하고싶지않다고 말했다
범죄인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스스로들 저지른범죄를아니
마음편한 안주를못하고
끝끝내 내 주위를 벗어나지못하고 서성이며
끈질기게도 물고늘어지는군
많은 수십년동안 갈취하고 적반하장격으로 역으로 뒤집어쒸워
이간질에 능수인 능수능란 모함질에 도가 턴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대전이 충남이라는걸 알게된것도 몆년되지않았다
그만큼 지리적으로 서툴다
아들학교있을적 몆번다녀도 그냥 대전이라고만 생각했지
대전이 충남에 속한다는걸 몰랐다
내게 그런 악행을 가한 지역인지 내가 어찌생각이나 할수있었겠냐
나 결혼식때 얼굴이부어 내 얼굴같지않았고 그기에다 머리칼을 뒤로잡아당겨 꽁꽁묶어
불편해서 집안거창아제도 들리셨다 나를 알아보지못하시고
그때는 내 얼굴이 왜 그리 두부같이 핏기없고 펑퍼짐하게 몰랐지만
이젠 알게됐다
아무리 곧이곧대로 믿는 수십년걸렸지만 진실은결국 밝혀진다는것
경북작천본가집에도 들렸을때 충남사람이 세들어있다는걸 알게되었고
시동생처도 충남금산이 고향이라고
누군가 신부화장하는사람이
오늘은 못난신부만 모였더라고 친척들에게 소문냈던
시일이 많이 지난후에야 알게됐다
당연히 남편귀에도 들어가게 되었고
돌아돌아 내 귀에도 들어오게됬었다
남편가시고 친정집 일층에서 수예점할때도 약국옆에서 생맥주뭐라부르나 생각나지않지만
약간 멋스럽게생겼던 마담여자가 나를만나게해달라고 손님이 예기한다고
만나볼의향은 없냐고
어느날은 선생이라하기도하고
모르는남자의 전화에 불쾌하기도 했던
결혼전엔 3대가 약국을 경영했다던 우리집에서 만나게돼 집으로 찾아와
그 약사와 단들이있을때
그약사의 손이작아 친구경희에게 내당동그 약국에들어가
그 약 사손을봐달라고 손이적지않더냐고 손이작더라고 경희도 그렇게말해
결국 손이작아 싫다했고
성영식 메디칼센타군무원이라던 처음2층에서 만났을때 조금늦게와선 그냥 앉는다
내가 늦은데 대해 정식으로 일어나서 사과하라고 했더니
다시 일어나서 정식으로 사과한다고 말하곤 앉는다
예기하고있을때 거지가 돈을달라고 손을내미니 그 남자기 돌려보내고
돈주면 습관이 생겨 일할노력을 하지않는다고 했던것같다
큰오빠도 만나 술함게 드셨다고 나와 4살차이던
승마가 취미고 앞으로 정계로 나가고싶다했던가
아버지게선 4살차이가 궁합이;좋다고 4살차이만 원하셨던것같다
해서 선볼때마다 4살차이로만 선을 보게된것같다
자기형이 창녕군청에 공무원이라고 다음일요일날 인사하러가자고 했고
대원지하다방으로 내려갈려니 행색이 남루한여자가 바나나를 팔아달라고
지갑을 열었던것같기도하다
빨간장지갑이었던
성영식 그 남자를 만났을때 일어나려하니 뭔가 툭 떨어지는것같기도 했는데
그냥 나갈려하니
그남자기 뭔가줏어서 주는데 보니
내 주민증 이름이적힌
갑자기 아무런생각도 챙피함 뒤범벅된 그냥 뛰처나욌다
친구들도 내 이름이 난희인줄알고있지
주민증이름은 모른다
이름이 항상 마음에들지않았고 챙피했고
내이름이 난희라고 주위친구들도 그렇게불렸고 그렇게 알고들있다
선 볼때마다 당연히 난희라고 예기했고
지금은 누가 이름을물어도 당당하게 박정각심 라고답한다
현재의 내 이름이 마음에들고 죽을때도 박정각심 이름으로 죽는다는게 참좋다
늦게나마 내 이름을 찾았다는 마음이들어 무척기쁘다
큰스님과의 과거전생에 인연의끈이 틀림없이 있었을꺼다
정신없이 뛰처나오다보니 버스정류장앞이었다
그 남자가 따라왔는지 옆에서있다
그때 버스가 왔길레 번호도보지않고 뛰처올라갔다
며칠후 소개해준사람이 팔당물에서 수영하다 익사했다고
신문에도나고
그남자를 소개해준 그시절 아버지게서 산통을하셨는데
산통을 들었던부부가 가끔씩 왔었는데
그 남자가 소개했다고 나에겐 첫 선이었고
선이들어와도 아예 관심없었고 큰이모게서 큰이모집에 놀로갔을때
큰이모친구분인가 그때 이모집에서 뜨게질를 하고있었는데
큰이모가 선예기를했을때 그런말하실려면 우리집에 오지말라고 화낸적도있었고
우리집 뒷집에서 세브란스인턴인데 홀엄마에 외동아들이라고 선이들어왔다고
올케언니가 말해주었다
골목나가는저 편에 살던남자도 시내서 만나면 내 뒤를 서성이던
키가 큰 꼭 그남자인지는 확신할순없다만
그 남자아버지가 혼담을 예기하더라고 아버지와 같은부동산하던사람아들인데
아버지도 탐탁치않아하셨고
경북고령중학교 체육선생 아버지친구분 아들인데
경북고등학교 경북사범대나왔고 만났을때 낭만스러웠다
키도크고 헨섬했고 순수했던것같고
어느날 수줍게 말을꺼냈을때
내가 말했다
난 사랑받는것보단 내가 좋아하는 감정일때가 좋다고
그건 지금도 꼭 남녀간의 사랑을떠나서 내가좋아하는
감정일때가 행복한마음이된다
양쪽친척들 다 만났을때 우리집식구들 작은오빼와 동생들빼곤 거의 다 자리했고
단둘이 밖에 나왔을때 왠지 그남자 다리가 벌려저걷는게 마음에걸려
저리로갔다 다시 와보라고 지금생각해봐도 내 주문이 그러하다
결국 아버지와 큰오빼가 크게 싸우셨고
큰오빠가 결혼해서 못살겠다고 돌아오면 아버지가 책임지실거냐고
아버지게선 멎번이나 내방으로 오셔서 이런자리 싫다하면 후회할거라고
결국 내가 싫다고 강하게 말씀드렸다
솔직히 결혼한다는게 두렵고 결혼생각이 없었는지
친척아지매의 소개로 경찰을만났을때 상주가고향이라던
첫 만남은 경찰복입은채로 만났었고
큰오빠와 마침집으로 놀러온 경희친구와 같이 시내 다방에서 만났는데
집까지 바래다준다면서 거리를걸으며
주위에 아무도없다면 꼭 안아주고싶다고
기겁을해서 놀래서 헤어지곤 싫다고했다
친착아지매가 몆번이나 들락거렸던같고
카메라대리점한다던 남자가 뒤쪽아와 버스탈려니 같이탈려해 발로밀처내기도 했던것같다
친구들과 모였을때 손금봐준다고 미팔군 통역사라던 친구들은 다 손을내밀었지만
왠지 남자에게 손을맡긴다는게 아닌것같아 거절하기도했다
남편을 만나기전 남자에게 손한번 잡히지않고 결혼했다
내 정신아닌채로 뭐가뭔지 험난한 눈물도 사치스럽다할
지금도 출산하는 편안한자세로 출산하는 티비서 보게되면 악몽이떠올라 운다 속으로
독일그자체도 끔찍한기억으로\
나보다 먼저 내 임신을 알아채고 유산시킬러 호미질을 강요했던
그 결과로 임신인걸알았고
출산일 며칠전에 남편을 유격훈련대로 차출시켰고
그것들의 농간에 걸려들어 일신병원으로 독일인이 설립했다는 가게되었고
혼자 죽음과도같은 아품에 경험해보지못했던 아품에
나를 꽁꽁 일인용간이막에 아무도없는 창고같은곳에 실려가선
내팔내발 양손양발에 쇠사슬로 침대간이막에 내군데 묶어
꼼짝달싹도 못하게
아침에갔다 그 다음새벽까지 묶여저 아무도없이 혼자 깜깜한곳에 묶여저
간혹 그악마간호사년만 들여다보곤
그 자세론 도저히 예기가 나올수없는 자세라는걸
이젠 죽는구나 생각했을때 쭉 찟더니 예기를 꺼집어내니 예기가 울지도않는다
얘기를 꺼꿀로들고 한참후에야 울음소리가 들렸다
악마년 그년 뒤저도 곱게죽는다면 세상에 선은 없다
그 악마년손기운으로 꺼집어냈으니 내가 내가 딸에게 미안하고 뭐라고 내 아둔함을 탓할까
얼마나 답답하고 숨도쉬지못한채로
어렸을때 노래를시키면 뒤에누가쫒아오는것처럼 노래를급하게하던 경기를일으키기도하고
내가 딸에게 할말이없다 미안함에
다른환경에서 딸이태어났더람 딸 인생이 다르게 펼쳐질수있었지않았을까 란생각도
수없이 하게한다
나역시 출산후에 고통스러움에 병원마다 다니고 아무런이상이없다하는데
고통스러움에 잠도자지못하고 친정엄마와 시어머님이 날보고 다 그렇게 얘기놓는거라고
그런줄알았다
남편이 한약을지어오면 친정엄마가 달여서주시면 머으면
젖이 푸른색으로 나물즙같은색으로 나와 한약을먹지못하고
6개월도 넘게 고통속에 시달리다
그때부터 소변도 수십번 들락날락 외출도 못할지경이었고
수십군데 병원을 다닌결과 오줌통이 내려않았다고 했다
지금생각해도 그냥 아품만 고통스러워했지 팔묶인채로 깜깜한 의사도아닌
그예기를 남편에게도 친정엄마게또 시어머님게도 일체예기하지않았다는게
다 그런가보다 라고만 생각한 내 무지
딸 군부대유치원에 다닐때 군차량으로 연극배역으로 간호사를 시킨다
이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어느지역악마년이지 모른다
딸에게 남편도나도 온갖정성으로 난 바깥을모르고 오직 딸에게
다행히 잘커주었고 반에서 항상월등했고 선행상을 도맡아받아왔고
고등학교부터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같은졸업생 반친구를 과외하기도한
주산실력도 암산도 전국적으로 1등상을 트로피를 받아왔고
자랑스런딸이었다
대학교다닐적도 연예인이름하나 모르고 학구심이 강하고
로션조차 바르지않고 도덕심이강했고
나역시 결혼식때 정식으로 화장한게 처음이라 항상맨얼굴로 다녔기땜에
생각해보니 어쩌다 가끔 화장한기억도 있다
딸에게 그런쪽으로 사준적도 없다는게
지금생각함 미안하다
아들출산할때 의사가 물었었다
병원에서 출산한게 아니지요 라고
일신병원에서 출산했다하니 아무런말을하지않았다
그만큼 정상적이지못한 상태일것이다
충남이 내게 그렇게도 긴시간동안 공들여 갈취하고 악질적인 위해를 가했다는게
직설적이고 두리뭉실적이지못하고 뒤에서모함하는자들관 거리가 멀어도 한참거리가 먼
도대체 합일점이라곤 찾아볼수없는 공통점이라곤 없는데 왜 나를엮이지 않는다고
악행을 가하는가
쬐끔의 지역적으로라도 인연이있담 나에게 그런 위해를 가하겠는가
노원동 아파트도 그 것들이 1209호 차지한것같다
6명있는자리에서 아들포함한
오늘아후로 세금나오는거 내지않을거라고했을때 쬐끄만 푹내려앉은 의자에 대리인이라하던
아파트산사람은 나타나지않고 대리인이라고 한 여자가 고지서오면 찢어버리라고
두번 연그퍼 아예 고지서 오지않게 하라고 했더니 그래도모르니 고지서가면 찢어버리라고 했었다
내가 그런경험이 있어
서울과 인접한곳에 살고있을때 대구에있던 친구가 찾아와
그 친구에게 개나리아파트를 팔게됐는데 산가격보다 내려간가격으로
몆달있다 세금고지서가 나와 그냥 내가 냈었다
우정보단 돈을 우선시하는 친구의성격을알아
세금고지서가 핑크색봉투로 미납자 박정각심이라고 적힌
계속배달된다
처음엔 몆번 찢어버렸지만
공적인 내가 생각하기엔 내가 공적이라고 법의태두리를 벗어난적없다고 자부한다
그누구에게도 금전적인 피해준적없고 모함한적없고 위해를가하거나 신체적으로 상처준적없다
어느날도 못견더 월요일이던가 오전11시쯤이던가 그때쯤이면 전화해도있을꺼란생각에
시간대는 확실하진 않지만
거듣거듣 전화해도 받지않는다 몆번이나 또 있다 또 있다 전화해도 받지않는다
내 경험상 부끄러운짓을 부당한짓을 바꿔치기했을때 아예
전화를받지않던
지금도 여전히 배달된다 핑크봉투에 세금미납자 박정각심 라고적힌
뜯어본적도없지만 그냥 찢어버리지만
사물함에 있으면 또 축구시합이있군 라고생각하고 찢어발로밣아뭉개며
이거 내가 뭐하는짓인가 라는 자괴감에 슬퍼지기도한다
나답게 살고싶은데
그린색이라하기도 또는 초록색이라고도 불리고
나는 한여름의 나뭇잎색이라고 생각하는그런류의 색깔을좋아해
아들 과기대 시험도치지않고 상위급에속하는 시험도치지않고 들어갔던
아들에겐 항상 고맙고 고맙고 그 또래의 나이에 풍족하게 해준게 생각나지않고
과학고등학교 들어갔을때도 그 당시엔 경북전체에서 60명뽑는데
전체 학생수가 120명이었고
경북 통털어 과학고등학교가 경북 한곳밖에 없던 시절이었고
학교전체에서 한명아니면 2명들어갔던시절
과학고등학교에서 1등도 했고
시험도 치지않고 중 2학년시절에 과기대 들어갔던 아들
내게 있어 아들이란 존재는 내 생명 그 자체일거다
어느 부모던 거의 같은 심정일태지만
수예점으로 출근했을때 아침에 수예점으로 전화가 와 밭으니 담임선생님이라고
아들이 우수한성적으로 과학고등학교에 들어갔다고 전화를밭곤 고맙다 인사하곤
학교로 찾아가니 교문정문위에 아들이름이 크게 플래카드에 적혀있었다
교무실로 찾아가 다른선생님을 통해 담임선생님 주소를 알아내
역시 그린색 요이불 셋트로 초록색이라고도 하는
택시를타고 찾아가 택시를 내리니 골목이어서 그 솜이불셋트 무거운걸 머리에 이고
갖다드린기억도 있다
아들 과기데 들어갔을때도
그 당시도 그린색 침규류 일체 내가 만들어 솜도 목화솜으로 베게도 그린색 일체 다 그린색
나뭇잎색으로 만들어주었었다 초록색이라고도 불리는
베게는 메밀베게로
아들카이스트 졸업식에도 후리지아꽂을가득사서 아들에게 주었었다
사진으로도 남아있는
어쩜 고향경북성주 참외색깔과 동일한 색깔을 어렸을적부터 좋아했던게
우연이 아닌 필연적으로 닿았던것이련지 생각해본적도있다
남편을만난계기또한 군인이라면 군복을떠올리게되는 같은계열의색깔군복
10년동안 군복을세탁하고 다림질하는동안 흠씬 정들었던 색이기도하다
자녀들 어렸을적 사진을봐도 거의 참외색깔을 닮은 나뭇잎색깔의 옷을 입혔던것같다
나무를 좋아해 나뭇잎색깔을 좋아해 산을 찾게되는 이유기도할것이다
꿈에서도 항상 산을배경으로하는 산길 꿈을많이 꾼다
바다를 좋아하는사람 도대체가 이헤가되지를않는다
바다를 배경으로하는 티비를 오랫동안 시청할라치면 현깃증이나는것처럼 춥다
그린색 나뭇잎색 또는 초록색 유니폼을입고 축구시합하는 대전팀을 유니폼이 내 마음을끌었는지
응원했었다
대전팀이 승리했고
그 생각이 떠올라 대전을 응원한적도 있는데 라고 말한내가
록천목욕탕 옷입으면서 그 여자 고향이 대전이라는것에 놀랐고
경악했고 생각지도 못했던
내 무지에 무슨말을해야할지 생각이 떠오르지않았고
대전을 응원한적도 있는데 라고 말한 내가
내가 생각해도 내가 한심스럽다
충청도에 대구살적에 친정엄마와 충청도에 놀러간적이 있는데
3박4일인가 아제집에 머물면서 속리산 법주사도 가보며 사진도 수없이 찍었는데
그때 나뭇잎색깔 한여름의푸른 잎새색깔의 치마를입고 갈색티를 입고찍은사진도 많았고'
빨간모자를쓰고 찍은사진도
고상한색깔의 한복을입으신 엄마와 찍은 사진도 가득했고 한복을입은 엄마는 참 예쁘시고
한복이 잘 어울리는 단정한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지금의 내 생활패턴을 보면 엄마의 모습을 꼭 닮은 고기를 좋아하지않고
조기는 즐겨하시던
술도 드시지못하시던 나역시 술이라면 아예 한잔도 먹지아니하는 먹게되지않는
언제나 한결같이 치마를입으시던
엄마가 바지를입으신모습 본적이없다 치마외엔 그것도 기지치마를 입으신다
얼굴에 로션조차 바르지않으셨다
나 역시 20년넘게 얼굴에도 손에도 로션조차 바르지않는다
아예 없다
고함을치거나 화내는모습도 본적이 없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감정을 안으로 삭이셨던것같다
나와는 다름모습이라면 그게 다르다
티비서 엄마노래라던가 엄마란 단어를 보게됨
엄마모습이 떠올라 나를 슬프게해 채널을 돌린적도 있다
옷입는 물건보는 쎈스가 뛰어나서 덧보선하나를사더라도 예쁜걸사신다
대신동 서문시장에 갔을적도 건어물 양쪽 가득있는 길 중앙에
흰천막으로 길게 의자가득있는 국수파는곳을 지나칠때 내가 눈길을주니
엄마게서 여자는 저런곳에서 먹는게 아니라고 하셨던것같다
그게 뇌리에 남아선지 아직까지 천막친 음식점에 들어가 먹었던 기억이 없다
솜씨가 뛰어나선지 속바지도 나에게 한쪽을 잡아달라해서 슥슥가위로잘라 단번에 바느질로 완성시키신다
달성공원에 큰오빠와 엄마와 조카와 놀러가서 찍은사진도 없어진거같다
엄마와 큰아제와 찍은사진도 꽤 있었고 작은아제가 사진찍고
문장대까지 올라가보기도했고 엄마손을잡고 끌어주기도했고
그 사진들 몆장이나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해서 충청도라면 좋은감정들만 있었는데 내게 그런 흉칙한짓을 나를 가만놔두지못하고
모함하고 이간질시키고 갈취하고 신체적으로도 적기조차
철저히 나를 주위로부터 따돌림당하게 모함하고 이간질시키고
또는 정신병적으로 몰아가며 경찰까지
곳곳어디에서나
그만큼 내게 못할짓을 했다는 증거일꺼다 자기들 저질은짓이 들통날까봐
역으로 모함하고
세상사 언젠간 20년전에도 어느까폐에 불교까펜가 글 올린적도있지만
진실은 꼭 밝혀진다고
세세히 누누히 글 올린적도 있지만
진실은 꼭 밝혀지기마련이다
지금 다는 아니지만 밝혀지고있지않는가
내 손도 온갖흉악질에 온도차도 크기도 다르다
오른손목이 일을많이해 수예점할때부터 가위질로 힘을많이 써
오른손목이 굵었는데
지금은 오른손목이가늘어지고 왼쪽손목이 굵어졌다
밖에있다 집으로들어오면 오른손은 얼음같이차다 왼손과 온도차가 심할뿐더러 새끼손가락은 감각이 둔하고
뻬가 가늘고 힘도없고따로 논다
추운데있다 들어오면 한참시간이 지난후에 오른손도 찬기가 덜하지만 더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