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대략 1학년이나 2학년 정도로 정말 아
무것도 모르던 때.. 시골 동네에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저수지 바로 옆에서 놀다 그만 발을
헛디?고 그 저수지에 풍덩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깨달았던 사실은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며 몸이 가라앉자 (너무도 당연하게) 숨을 쉴 수가 없더군요.
순간.. 아무것도 모르는 아주 어린나이의 저였지만 그때 저도 모르게 떠오른 것은 바로 '죽
음'에 대한 극심한 공포였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물속이라 비명
도 못 지른 채) 있는 힘을 다해 팔과 다리를 움직였지만 수영을 하지 못했던 관계로 차츰 가
라앉았으며 정말 죽는 줄 알았는데.. 너무도 다행하게 그 저수지 옆을 지나가시던 동네 아저
씨 한 분이 이 광경을 보신 후 바로 저수지에 뛰어들어 저를 구해주셨으며 그 아저씨가 아니
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때 느꼈던 죽음에 대한 공포는 몇 십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속에 남아있고
바로 엊그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오늘 '다음'에서 이런 기사 하나를 봤습니다.
경향신문 구명조끼 끈 서로 묶은 채.. 함께 떠난 두 아이
침몰한 여객선 세월호 선체 내부에서 구명조끼 끈으로 서로를 묶은 남녀 고교생 시신 2구가
발견됐다. 이들은 발견 당시 뒤집힌 세월호 우현 통로 계단을 올려다보는 형태로 잠겨 있었
다. 위, 아래로 각각 1개씩 달린 구명조끼 끈 가운데 위쪽 끈은 각자 허리에 묶었지만 아래쪽
끈은 서로 연결돼 있었다.
지난 22일 이들을 물속에서 처음 발견한 ㄱ씨(58)는 "어린 학생들이 (죽음의 공포 앞에서)
얼마나 무섭고 힘들고 괴로웠겠느냐"며 "나름대로 함께 공포에 맞서려고, 살려고 서로의 몸
을 끈으로 묶지 않았겠느냐"고 추정했다.
잠수경력 35년째인 ㄱ씨는 이날 5번이나 잠수했다. 수심 37m 바다에 동북 방향으로 비스듬
히 뒤집혀 누워 있는 세월호에 갇힌 실종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3번째 잠수 때였다. "생존자
한 명이라도 찾아야겠다"며 거센 급물살에 빨랫줄처럼 날리는 몸을 가누며 5분여 만에 구명
용 로프(라이프 라인) 끝부분에 어렵사리 멈췄다. 그 지점에서 그는 갖고 들어간 25m 로프를
잇는 작업을 하면서 수색 범위를 넓혀갔다.
ㄱ씨는 새 줄을 잡고 선체 오른쪽을 찾기 시작했다. '서치라이트'를 켰지만 시계는 30~40㎝
에 불과했다. 눈앞에 손바닥을 펼쳐도 잘 안 보일 정도였다. 더듬더듬 선체를 훑으며 30여분
쯤 돌아다니다 선체 안으로 몸이 슬쩍 휩쓸려 들어갔다. 물 흐름이 잦아든 공간이 나왔다. 살
펴보니 승객들이 다니는 통로였다. 위쪽에는 거꾸로 선 계단이 보였다.
잠시 숨을 고른 후 몸을 안쪽으로 돌리던 그때, 신발 두 짝이 눈에 들어왔다. 부유물을 모두
밀쳐내니 남학생 주검이 드러났다. 청바지 차림에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다. 이번 구조작업에
서 만난 첫 시신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고인에 대한 예의를 표한 후, 시신 수습 관행대로 남학생을 밀
어 배 밖으로 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길이 1m가량 되는 구명조끼 아
래쪽 끈에 뭔가가 연결돼 있었다. 끈을 당기자 맨발 상태의 여학생 주검이 나타났다.
ㄱ씨는 잠수 시간이 10여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두 사람을 한꺼번에 끌고 나가기에는
너무 무거워 연결된 끈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남학생을 먼저 배 밖으로 밀어낸 후 여학생을
데리고 나왔다.
ㄱ씨는 "그 순간 일생에서 가장 놀랍고, 가슴 뭉클한 순간을 물속에서 맞이했다"고 전했다.
웬일인지 남학생 시신이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보통 시신은 물속에서 떠
오르게 마련"이라며 "'이 아이들이 떨어지기 싫어서 그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그는 "너무 가슴이 아팠고, 머리가 멍했다"며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져 두 사람을 물속에 놓
고 다시 수면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후배 잠수부들을 불렀다. 그들이 두 사
람을 수습하는 사이에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는 "물속에서 본 장면을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
려웠다. 딸에게 전화를 걸어 '딸 잘 있지. 가슴이 아프다'고 하면서 물속에서 만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줬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팽목항으로 옮겨진 두 사람의 주검은 가족들에 의해 제각각 안산으로 이송됐다.
ㄱ씨는 "두 사람이 평안한 마음으로 떠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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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께서는 상상이 되십니까? 그 아이들이 느꼈을 죽음에 대한 극심한 공포에 대해서 말
입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 자체도 공포스럽고 수 백번을 망설이게 되는 게 사실일 텐
데 원치 않는 죽음 앞에서 비명을 지르고, 떨고, 울었을 당시 그 아이들은 어떠했겠습니까..
너무 어린나이였던 그때의 저도 저수지에 빠졌을 때 오직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고 있
는 힘 없는 힘을 다해 살고 싶다 본능적인 몸부림을 쳤는데.. 그 아이들은 살기 위해 어떤 처
참한 비명을 저질렀고 살기 위해 어떤 처절한 몸부림을 쳤을 것인지..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
한 것 같습니다.
배가 기울며 여기저기 밀려떨어지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온갖 물건들이 그들을 덮치며 고통
을 호소할 때.. 설상가상 물까지 차 오르는 다급한 상황도 모자라 출구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너무도 깜깜한 상황에서 그들이 느꼈을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는 극심한 공포.. 여러분께서
는 상상이 되십니까? 당시 그 아이들의 비명과 눈물을 짐작이나 하실 수 있을까요?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얼마나 '살려주세요' 목이 터져라 외쳤을까요?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
었을까요? 얼마나 아빠가 보고 싶었을까요?
그 표현조차 하기 힘든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구명조끼 끈을 서로 묶고 그 짧은 순간이나마
함께 했을 그 아이들을 생각하니.. 그 마지막 순간까지 오직 살기 위해 몸부림쳤을 그 아이들
을 생각하니.. 흐르는 눈물을 참을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전 정몽준 의원 아들의 미개한 국민이라는 표현에 결코 동의할 수 없으며 미개한 건
국민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다, 초동대처만 잘했어도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었는데 그
렇지 못한 대한민국 정부가 미개하고 무능하고 한심하다 강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댓글 지인이 민간잠수산데 시신80여구 인양하는데 참여하고 직접 7~8구의 시신도 인양했답니다
해경과 해군 그리고 허가받은 잠수업체의 실적 경쟁에 밀려 민간잠수사를 배제하는데 열받아 어제새벽2시에 집에 왔답니다 이 친구의 눈으로 해군이나 해경 이사람들 작업하는걸 보니 엉망진창이고, 실적경쟁이 우선이고 민간 잠수사 철수후 조금물때 13시간동안 시신수습 1구도 없다가 유족들 항의에 다시 투입한다고 한다 이시끼들 애 타는 유족이나 국민들은 뒷전이고 실적경쟁에 지회체계혼선에......가장 가슴아펐던 순간은 여학생 2명이 주먹을 꼭 쥐고 팔장끼고 죽었답니다. 대부분의 시신은 물을 먹어 배가 불룩했는데 팔짱을 푸는데 잘 안풀
"애야! 이 추운데 있지 말고 아저씨따라가자" 하면서 팔짱을 풀었답니다.....이 이야기에 주위사람 눈물 바다가 되고.....지인이 마지막으로 하는말" 작업환경이 어려워 성과가 안 날때는 민간잠수사 입수허가를 하고 조금 물때가 되어 작업이 좀더 쉬워지니까 민간잠수사 입수허가를 안하고 지들끼리 성과 낼려고 지롤을해서 철수했다" 하더군요...
이런 이야기는 언론에 한줄도 안나오고 호도하기만 바쁘니 기존 언론만 보고 듣는사람들 은 정부가 아직도 최선을 다해 구조하는줄로만 알고있네요...답답합니다..
어느 댓글에 그 아이들이 쌍둥이라고 .....그러던게 생각나네요.....끈을 물속에서 묶으면서......아니면 아직 물이 차지 않은 컴컴한 복도에서 묶으면서 살아볼라고.....남자애가 울고있는 여자애를 달래면서 살아 나가자고 살아보자고 .....그랬을 상상을 하니 .........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