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교리문답 참회
참회의 독소 조항(고해성사: 신자는 사제 앞에서 개인적으로 죄를 고백해야 하며, 그때 모든 죄목이 각각 고백되어야한다. 참회의 표시는 성찰, 통회, 정개, 고백, 고해신부의 사죄, 보속으로 구성된다. 참회자는 먼저 양심적으로 성찰을 하여 지은 죄를 생각해 내고, 그 죄를 깊이 뉘우치는 통회를 하며, 다시는 이 같은 죄에 빠지지 않기를 정개하고 나서, 고해신부 앞에 나아가 죄의 고백을 한다. 그러면 고해신부는 사죄를 하고 보속을 정해준다. 참회자는 보속을 실천함으로써 고해성사가 끝난다)이 종교개혁을 통해 제거되었으나, 자발적인 죄의 고백(참회)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참회가 자발적이어야 한다고 항상 가르쳐 왔습니다. 강제 조항에서 벗어낫고, 부과되었던 모든 짐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참회 조항을 준행하지 않으면, 대죄로 여겨 왔던 것을 우리 모두는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억지는 여태껏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참회 조항을 준행하면 할수록 짐은 더욱 무거워졌고, 죄목을 일일이 열거해야 하는 고해 때문에 양심만 더욱 고문 받았습니다. 이런 식의 참회로는 누구도 순전해지거나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게다가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참회가 무엇이며 어떤 유익과 위로가 있는지에 대해서 아무도 가르치지도 알지도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대신 모든 이들에게 강제 조항이 되어 버린 참회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공포를 몰고 와서, 결국 지옥 같은 고문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세 가지 사항이 제거된 상태의 참회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첫째, 더 이상 두려움 가운데 떨며 억지로 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둘째, 죄목을 일일이 나열해야 하는 고문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참회에 대한 무지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리하여 참회를 복되게 사용하여 위로받고 양심을 강건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더 이상 참회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지만
그것은 복음의 자유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안타깝게도 ‘자유’라는 미명 아래 자기 맘대로 행동하고, “이제 더 이상 참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구원파)까지 생겨났습니다. 그러고는 복음은 포근하고 부드러운 것이라면서, 그 편에 모든 것을 갈무리해 버립니다.
그러나 제가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런 돼지 같은 놈들은 복음의 편에 서 있지도 않고, 복음의 자리에서 한구석도 차지할 가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믿지도, 그에 합당한 삶을 살려고 하지도 않는 자, 그리스도인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자라면, 그 유익을 누릴 자격도 없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지도 않고, 복음에 상응하는 대가도 치르지 않으면서, 그의 유익만 누리려고 합니까? 그런 사람에게라면 아무것도 설교하지 않으렵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를 함께 나누고 싶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그런 천박한 근성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이 부리는 악마나 사형집행관인 같은 이들의 종이나 매한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사람에게라면, 이 고귀하고 위로하는 복음의 보화를 그냥 지나치지 않도록 우리는 계속 설교하고, 자극하고, 붙들 것입니다. 우리가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게 참회를 가르치고 권면하는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마음의 참회는 자신의 과오를
오직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는 행위다
우선 이것부터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참회에 두 가지를 덧붙여야겠습니다. 용서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 또는 이웃에게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이 둘은 통상 우리가 ‘죄의 고백’으로 칭하는 것보다 훨씬 큰 개념입니다. 이것은 이미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네 분명히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전체 내용은 바로 이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기도는 ①내가 소유하지 못한 것, ②죄를 지으며 행해야 할 바를 하지 못한 것을 고백하며, ③은총과 자유롭고 기쁜 양심을 구한다는 측면에서, 하나님께 참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참회는 우리가 살아 있는 한 항상 새롭게 갱신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안에 기독교적 삶의 진수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스스로 죄인임을 인식하고, 은총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기도: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교회 공동체 앞에 하는 공적 참회와 더불어
동료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을 수도 있다
동시에 논해야 할 것은, 자기 이웃에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 언급되었듯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용서를 받기 전에 우리는 서로 죄를 자백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 빚진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공적인 자리에서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누구도 이 일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사람이 경건하면 모두가 경건하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이 말은 한 사람이 죄인이면 모두가 죄인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 하나님과 이웃에게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온전히 행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죄의 공적 고백 이외에도 특별한 죄의 고백이 아직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타인에게 분노를 자아냈을 때 그의 용서를 구할 필요가 있는 경우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 안에 포함된 두 종류의 사죄 선언에서 찾을 수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는 것, 그리고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죄 지은 것을 용서받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용서를 베풀고 화해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개인의 참회는 사제 앞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제자매 간에 하는 고백이다
매일 공개적으로 드러내 놓고 해야 할 일 일반적인 참회 외에 지금부터는 사적으로 행하는 은밀한 참회에 대해서 언급해야겠습니다. 이것은 피차간 말 못할 일이 있거나, 아니면 양심에 거리끼는 문제가 있을 때, 다시 말해 공개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고 해결할 만한 충분한 믿음이 없어 괴로울 때 하는 방법입니다. 바로 그 때, 또는 언제라도 좋으니 기회가 닿는 대로 한 명의 형제를 찾아가 마음의 짐을 털어놓고 권면과 위로와 새 힘을 얻으십시오.
이 방법은 앞서 언급한 두 종류의 방법처럼 특정한 계명에 명시적으로 포함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필요할 때, 또는 누구라도 요청하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너희의 죄를 서로 용서하라’고 직접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마음으로 죄를 깨닫고, 위로받고 싶다면, 바로 여기서 피난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형제를 통해 당신의 죄 짐을 풀게 하고 그에 대한 용서를 선포합니다.
참회는 죄의 고백이자 사죄 선언이다
참회의 특징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참회는 ‘우리의 일’이라는 점입니다. 나는 내 죄를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내 영혼은 위로받고 새 힘 얻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속한 일입니다.
참회의 두 번째 속성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점입니다.
사람의 입에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으로 우리가 죄에서 풀려났다는 것을 선포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참회를 최상의 가치로 영화롭게 만듭니다.
이제껏 사람들은 ‘우리의 일’에만 방점을 두었고, 그 이상은 생각도 안했습니다. 그저 우리가 죄를 고백하는 것만 참회의 모든 것인 줄 알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두 번째 부분은 무시했고, 거기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도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일인데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죄를 계산하기만 하면 훌륭한 참회가 되는 줄 착각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자면, 죄의 목록을 조목조목 고하지 못하면 불완전한 참회가 되고, 거기서 주어지는 사죄 선언도 유효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런 식으로는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결론이 됩니다.
다음 주에 살피겠지만 완벽한 참회는 하나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회에서 결정적인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 곧 은총’에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