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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맞습니까? 11
2091년 8월 3일 - (2)
순간 프로그래밍 된 사이버 섹스가 다시 삶을 시작한 첫 섹스란 게 왠지 좀 찝찝해진다.
그런 생각이 미치자 욕구가 확 사라져 고글을 벗으니 혜민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자 혜민이 다가와 슈트를 벗겨주면서 말을 한다.
"성욕을 느낀다는 건 건강한 사람이라면 당연한 거죠"
"어떻게 알았죠?"
"3차원 고글과 글러브도 별로 사용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서재에서 시뮬레이션 슈트까지 입은 걸 보면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홀로그램이 아웃풋 되어 있었어요."
뜨악...
홀로그램에는 내가 고른 신형 안드로이드가 옷을 벗고 신음을 흘리고 있고, 벙찐 채 서있는 나도 있다.
슈트를 완전히 벗자 홀로그램에서 난 사라지고 안드로이드만이 혼자 야하게 누워 있다.
멍하니 그 홀로그램과 혜민을 번갈아 쳐다보자 혜민이 홀로그램을 꺼버린다.
의사라서 그런지 참 무덤덤하군.
"진영씨, 글러브도 빼요"
"아...예"
혜민이 뭐라 설명하기 힘든 표정으로 날 보더니 내 얼굴에 손을 뻗는다.
내 얼굴을 만지며 그녀가 입을 연다.
"진영씨, 난 당신 주치의고, 당신은 내 담당 환자에요.
치료도중에 환자에게 감정전이를 일으키는 게 서로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는지 많이 봐 왔어요.
솔직히 내 관점에서는 바보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난 지금까지 한번도 그런 식의 끌림을 경험해 보지 못했어요 - 최소한 당신을 맡기 전에는..."
그녀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멍청한 내 표정을 보던 그녀가 눈을 감고 자신의 입술을 내게 맞춘다.
그녀의 입맞춤에 세영과의 키스가 떠오른다.
사그러들었던 색욕이 미친 듯이 되살아난다.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부드러운 그녀의 혀와 입술을 받아들인다.
역시 살아있는 인간의 몸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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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이 아닌 샴푸내음과 긴 머리카락에 눈이 떠진다.
혜민이 내게 키스하며 묻는다.
"당신 주치의가 되면서 2년간 항상 잠들어 있는 당신을 매일 봤죠. 언제부턴가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무언가 허전했어요.
그게 시작이었던 거 같아요. 아마도 이런 감정이 사랑이겠죠?"
"...글쎄요"
"진영씨한테 지금 당장 날 사랑하라고 하지 않아요. 내가 먼저 시작한 감정이니까... 하지만 언젠가 당신이 날 보게 만들 거예요"
2091년 8월 7일
그 날 이후로 혜민과 나는 같은 침대를 사용한다.
그녀 정도면 나쁘지 않다.
아니 솔직히 매우 괜찮다.
하지만 혜민을 안으면 안을수록 세영이 생각이 난다.
그 둘은 묘하게도 닮아있다.
우선 세영을 만나야 한다.
그 전까지는 혜민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다.
그녀가 맞습니까? 12
2091년 8월 9일
윤서를 찾아갔다.
일단 그에게 초고밀도 탄소계의 물질에 대해 물어보았다.
"실험은 거의 마무리 되었어"
"실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거야?"
"시간여행에 말이야?"
"응"
"다들 그 쪽을 생각하는데 너도 그러냐?
휴... 현제 실험 수치상으로는 속도를 어느 정도 견디긴 하겠지만 100% 장담은 할 수 없어. 다른 문제들도 있고..."
"모친살해의 패러독스, 평행우주의 문제 같은 것들?"
"맞아"
"시간여행은 실험예정이긴 한 거야?"
"우리 연구진끼리도 그 부분에 대해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어"
"실패의 확률 때문에? 윤리적 문제 때문에?"
"실패 없는 성공은 없어. 하지만 역사의 균형문제를 비롯해 윤리적인 문제도 큰 이유지"
"그렇군..."
"무슨 생각하는 건지 물어봐도 돼?"
"뭐... 어느 정도 엉뚱한 생각도 하는 건 사실이야"
"진영아"
"왜?"
"너희 부모님도 네가 다시 깨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실 거다... 우리도 널 다시 봐서 정말 기뻐. 힘들겠지만 적응하고 살자. 나랑 선림이도 최선을 다해서 도울게"
"윤서야... 너 세영이 소식 아는 거 있어?"
"...세영씨 너 그렇게 되고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대... 마치 일 중독에 걸린 사람처럼 연구실에서만 산다고 하더라구. 그 이후로 나랑 선림이는 유학을 가서 초기에는 뜨문뜨문 메일로는 연락을 주고받았지. 그렇게 서서히 연락이 끊겨버렸어. 우리 입장에서는 세영씨한테 섣불리 연락하기도 힘들고... 우리가 돌아왔을 때 세영씨는 CM의 클론분야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되었더군. 초고속으로 승진하고 있더라구. 그게 아는 전부야. 나머지는 세상에 알려진 그 정도 밖에는 몰라"
"그래, 고맙다"
"우리 집에도 한번 들려라"
"그래, 간다"
"몸조심해라"
"걱정마라! 할아버지~"
일단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보인다.
세영이 돌아오려면 아직 이주정도를 더 기다려야 한다.
2091년 8월 13일
혜민의 권유에 따라 다시 대학에 들어가기로 했다.
무위도식하면서 놀게 아니면 무언가 할 일도 필요한 차에 잘 되었다 싶기도 하다.
과거의 논문들을 다듬어서 내고 인터뷰를 하고 입학허가를 받았다.
70년 전 내가 박사과정에서 공부했던 것들이 이제는 대부분 대학1~2 학년 때 배우는 것들이다.
하긴 당시에는 새로운 발상의 전환이라는 평가를 받던 내 연구 주제들이 실용화되고 있는 마당이니...
9월 새 학기부터 3학년으로 들어가게 된다.
새로운 것들을 알아가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그녀가 맞습니까? 13
2091년 8월 18일
세영의 비서라는 Mr. 장이라는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당분간 직접 만나기는 힘들다면서 화상통신을 하라고 한다.
세영이 병원에서 검진을 마치고 퇴원하면 연락을 준다고 한다.
어디가 안 좋은 거지...
이제야 겨우 보게 되었는데
또다시 그녀를 보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닌지 두렵다.
2091년 8월 27일
드디어 세영을 봤다.
비록 화상이긴 했지만
많이 늙은 그녀... 그래도 여전히 아름답다.
날 보는 그녀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고인다.
"아직도 나한테 눈물이 남아있네. 네가 그렇게 된 후 더는 나올지 의심스러울 만큼 울었는데..."
"세영아...미안해"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앞으로는 내가 미안해 해야 할 일들 투성이일텐데...
진영아.. 70년의 세월은 결코 짧지 않았어. 정말 많은 것들이 변했지. 난 네가 이제 새롭게 시작하기를 바래"
그게 전부였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어버렸다.
연락을 해도 비서가 하는 말은 늘 같다.
'건강상의 이유로 연락을 받으시기 힘듭니다'라는 한 마디뿐
2091년 9월 4일
세영의 비서에게 연락이 왔다.
"어제 날짜로 유 박사님이 냉동수면기기에 들어가셨습니다. 신경마비증이 손 쓸 수 없을 만큼 심각해지신 게 원인입니다.
본인의 의사로 영원히 깨어나시지 않을 겁니다. 박사님은 당신을 보기 위해서 지금까지 버티셨습니다.
그리고 한진영씨께는 마지막으로 새 삶을 즐기시라고, 행복하시라고, 당신을 다시 봐서 행복했다고... 그렇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비서의 건조한 목소리가 나를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내가 수면에 들어갔을 때 그녀의 감정도 이랬겠지...
내 안에서 무언가가 한없이 무너져 내린다.
무슨 정신으로 집에 왔는지 모르겠다.
마루 바닥에 술병이 몇 개 뒹굴기 시작하자 밖이 어두워진다.
자동센서로 된 실내조명이 켜진다.
이럴 땐 발달한 과학이 인간을 더 불편하게 한다.
"Turn off the Light"
소리를 버럭 지르니 음성인식에 의해 실내조명이 나가고 집안은 정적으로 감싸인다.
아무리 마셔도 정신은 점점 또렷해지기만 한다.
새벽 근무를 끝낸 혜민이 들어와 나를 보더니 가방을 내려놓고 술병을 치우기 시작한다.
이러면 안 된다는 나의 이성과 상관없이 나의 손은 그녀를 거칠게 일으켜 세운다.
그녀가 맞습니까? 14
2091년 9월 5일
그녀의 옷을 찢듯이 벗기고 나 혼자만의 섹스를 시작하려한다.
내 분노를, 슬픔을 그녀를 유린하면서 풀려고 한다.
혜민은 아무 저항도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오히려 나를 감싸 안는다.
그녀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다.
혜민의 눈물을 보자 아무 개연성 없는 세영의 눈물이 떠오른다.
이제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다.
혜민을 부둥켜 안고 난 오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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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리니 혜민이 내 옆을 지키고 있다.
어제 일들이 기억 난다.
내게 물을 건네며 입을 연다.
"유세영 박사님이 냉면(冷眠)에 들어가셨다는 말 들었어요. 진영씨가 서재에서 보던 유박사님의 홀로그램 나도 봤어요. 그 분 때문에 아픈 거 아는데... 제발...자신의 건강도 생각해요"
물컵을 들고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이제는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질문을 던진다.
"나... 당신을 보면 자꾸 세영이가 떠 올라. 당신과 그녀가 다른 사람이라는 거 아는데... 그래도... 이런 나라도 혜민씨 괜찮겠어?"
혜민이 아무 말 없이 날 안아준다.
마치 모든 걸 다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듯이...
내가 68년간의 잠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그녀는 마치 날 위해 준비된 사람 같았다.
2092년 1월 16일
이제 모든 사실을 그런대로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혜민과의 생활에도, 70년만의 세상에도 그런대로 적응이 되었다.
냉면(冷眠)에서 깨어난 환자에게 전담직원이 붙는 이유가 이제 쉽사리 이해가 간다.
50년 이상 냉면한 사람들은 사회 적응력이 현저하게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모든 것이 달라진 상황 - 사랑하던 사람도, 가족도 사라진 - 에 적응한다는 게 상당한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또 그런 것들을 극복해도 사회에 적응하는 시간이 꽤 소요되고, 거기서 많은 사람들이 자살의 욕구를 강하게 느낀다고 한다.
나 같은 경우도 극한으로 몰리면서
혜민과 윤서, 선림이가 없었으면 미쳤거나 자살해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가 맞습니까? 15
2092년 2월 27일
다시 깨어나 처음으로 맞는 생일이다.
윤서와 선림이가 초대를 해 가보니 두개의 케이크가 준비되어 있다.
25개의 초를 꽂은 것과 93개의 초를 꽂은 케이크
아마도 윤서의 감각인 거 같은데
웃음으로 어물쩡 넘기려는 윤서를 보니 한 대 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이제는 늙어서 때려줄 수도 없다. - 늙은 할배와 친구하는 내 팔자 탓이나 해야할 거 같다.
식사를 하고 영상필름을 봤다.
어린 시절 우리 셋이 놀던 영상 필름들과 학창시절의 반짝(?)이던 10대였던 우리들의 모습
젊은 시절의 모습들 중 세영과 함께 있는 내 모습이 나오자 선림이는 황급히 화면을 돌린다.
이제 세영의 영상을 봐도 괜찮다고 말하자 그제서야 선림이의 표정이 풀린다.
소심한 할머니라니..... -0-
둘이 결혼하고 찍은 모습들, 둘의 아이들, 그 아이들의 아이들...
내가 자고 있던 동안 보지 못했던 둘의 모습을 보니 세영은 혼자서 어떤 삶을 보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싸하다.
혜민
항상 말없이 내 옆에 있어주는 사람...
그녀를 보는 내 감정이 조금씩 조금씩 변해간다.
결국 사람의 감정이란게 이렇게 간사한거였나
깨어나서 한 달여만에 다른 사람을 안은 난 문제가 있는 건가
하는 생각들도 들지만
세영도 내가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했으니
이래도 괜찮다고... 괜찮은거라고
자기합리화를 하며 옆에 있는 혜민의 손을 힘을 주어 잡아본다.
2092년 3월 18일
슬슬 논문준비에 들어가야 한다.
여전히 내 관심은 안드로이드와 클론의 절충점에 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휴머노이드라고 해야하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대상자의 유전자를 이용해 완전한 인간체에 가까운 안드로이드(즉, 휴머노이드)를 만들어 이 휴머노이드의 AI칩에 공유할 기억을 심어주는 방법을 생각해보는데 - 퍼지와 카오스를 조금 응용하면 본체에 가까운 사고방식을 심어줄 수도 있을 거 같다.
윤리적인 문제가 좀 생길 것 같다.
지금의 기술력으로 전혀 불가능한건 아니지만 비용적인 문제가 크고, 쉽게 가격대비성능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의 냄새보다는 실리콘 피부의 안드로이드의 냄새가 강하게 난다.
내가 생각하는 휴머노이드의 기술까지는 아직 발전되어 있지 않다.
내 생각으로는 死者의 클론을 부득불 만들어 내는 것보다 윤리적인 것 같지만...
클론의 윤리적 문제란 대부분 의뢰자들이 품질(?)에 실망한 클론을 폐기하고 싶어하는 데서 생긴다.
대상자가 사망 후 클론을 제작하게 되면 대부분 그 클론을 사망하기 전 상태로 만들고 싶어하는데 - 아주 어린아이가 아닌 경우에는 많은 부작용이 생긴다. 일단 유기적 생명체이기에 기억을 이식하는데 한계성이 존재하고, 아무리 속성으로 키워도 성장환경이 도너(대상자,본체)와 다르기 때문에 성격이나 인격이 다르게 형성된다. 대부분 의뢰인들의 경우 이런 부분을 생각하지 않고 죽은 자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의뢰를 하고 실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문제들이 반복되자 정부는 법적으로 주요인사가 아닌 경우 15세 미만의 사망자의 클론을 제작하는 걸 엄격한 허가제를 시행함으로 제한하고 있다.
한 때 세영과 언제쯤 되야 가능할가 하면서 했던 이야기들이 지금 현실이 되어 있듯이
난 좀 더 새로운 것들을 꿈꿔본다. - 어느 미래엔가 실제가 될 그런 꿈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