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역사인물 시리즈 5
한국 영화의 개척자
나 운 규
조희문 글
152×200mm | 176쪽 | 값 10,000원 | 998.6-KDC5
ISBN 978-89-7478-385-3 44990
2013년 12월 10일 발행 | 다섯수레
도서출판 다섯수레의 ‘살아 있는 역사 인물’ 시리즈는
우리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다양한 분야의 인물을 통해
그들이 남긴 의미를 새롭게 조명해 보는 역사 인물 평전입니다.
1. 기획 의도
요즘은 영화관에서 외국 영화보다 한국 영화를 상영하는 횟수가 많아지고 있고, 한국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외국 영화에 비해 한국 영화의 흥행 수치가 월등히 높아진 것을 보아도 한국 영화에 대한 높아진 관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한국 영화가 외국 영화들과의 경쟁에서도 뒤쳐지지 않고 수준도 높았던 것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한국 영화는 영화 한 편을 만들고 상영하기 위한 시나리오, 연기, 촬영, 편집, 제작비, 영화관 등의 여건들이 없거나 모자란 때가 많았습니다. 나운규는 바로 우리 영화가 처음 시작될 무렵에 영화발전을 위해 힘을 기울인 사람입니다.
<한국영화의 개척자 나운규>는 영화계에 입문해서 활동한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긴 나운규가 직접 각본, 감독, 주연을 맡아 활약하는 모습을 통해 ‘한국 영화의 영웅’ 나운규의 영화에 대한 열정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나운규’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 영화의 뿌리와 바탕을 찾아가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2. 줄거리
나운규는 1902년 10월 27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호기심이 왕성했던 나운규는 흥미를 가진 일을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씩씩한 성격이었습니다. 나운규는 어쩌다가 회령에 오는 순회 극단의 공연을 보고 연극의 여러 장면을 흉내 내며 언젠가 자신도 저런 일을 해보겠다는 기대를 조금씩 키워갑니다.
나운규는 회령에서도 가까운 북간도의 명동학교로 진학했는데 이곳에서 나운규는 친구 윤봉춘과 함께 비밀스럽게 독립운동에 참여합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 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 회령에서도 일어납니다. 나운규는 윤봉춘, 김용국과 만세 운동에 앞장선 것이 드러나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습니다. 만세 운동 참가자에 대한 검거가 계속되자 나운규는 김용국과 함께 국경을 넘어 러시아 땅으로 들어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서울로 유학을 떠나 중동학교에 입학한 나운규는 서울에서 영화를 보며 언젠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중동학교 생활을 1년을 넘기지 못한 채 나운규는 간도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일이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됩니다.
2년 동안의 감옥 생활을 마친 뒤 고향 회령으로 돌아온 나운규는 아버지와 형들을 대신해 가족들을 보살피고 자신의 앞날도 계획해야 하는 처지가 됩니다. 그러던 중 회령에 공연을 온 신파극단 예림회의 단장 안종화를 만나 예림회 단원들과 간도 일대를 다니며 공연 여행을 합니다. 나운규는 예림회와 공연을 다니면서 배우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재정 형편으로 극단들의 사정이 어려워지자 일본사업가들이 세운 영화사의 제안에 안종화를 비롯한 단원 모두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들어가게 됩니다.
나운규도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연구생으로 들어가 <운영전>에 처음 출연하게 됩니다. 그러나 흥행의 실패로 나운규는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 석 달 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오게 됩니다. 그 후 나운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 배우로 들어가게 되고 영화 <농중조>에서 주연을 맡게 되었는데, 이 영화가 흥행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나운규는 영화계에서 주목받는 배우가 됩니다.
시나리오를 직접 쓴 영화 <아리랑>에서는 주연을 맡게 됩니다.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첫 상영을 시작한 <아리랑>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그 시대를 대표하는 영화로 크게 성공하면서 나운규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배우로 떠오릅니다.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은 뒤이어 <풍운아>, <야서>, <금붕어> 등을 제작하게 되나 어느 작품도 아리랑을 능가하지는 못합니다. 흥행 실패와 단원들 간 내부 갈등이라는 문제가 겹치자 나운규는 직접 나운규프로덕션을 만들게 됩니다. 나운규프로덕션은 <잘 있거라>, <옥녀>, <사랑을 찾아서>, <사나이>, <벙어리 삼룡>을 제작했지만 잇달아 실패하면서 함께 일하던 동료들도 나운규의 곁을 떠납니다. 나운규는 성공과 명성을 얻었지만 이를 관리하고 나누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입니다.
영화를 다시 만들고 싶던 나운규는 원방각이라는 영화사로 부터 <아리랑> 속편 제작 제안을 받게 됩니다. <아리랑 후편>으로 나운규의 명성도 다시 살아나는 듯 했지만 카프 영화인들의 비난에 허탈하게 무너져 버립니다. 힘겨운 시간을 견디던 나운규는 유신키네마라는 영화사의 제안으로 <개화당 이문>을 만들게 되나 조선총독부 검열로 인해 온전히 완성되지 못하여 흥행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사이 새롭게 두각을 나타낸 감독 이규환의 부탁으로 나운규는 <임자 없는 나룻배>의 주인공을 맡게 됩니다. 나운규는 신인 감독의 작품을 준비하면서 주인공의 역할에 맞추어 머리를 깎는 열의를 보입니다. 이렇게 해서 만든 <임자 없는 나룻배>는 <아리랑>에 버금가는 평가를 받으며 무성영화 시대를 빛낸 작품이 됩니다.
이 후 일본의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고 나운규 또한 결핵으로 몸이 쇠약해져 가면서도 하루하루 비장하게 영화 만드는 일에 모든 노력을 집중했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영화 <오몽녀>는 만족스러운 평가로 이어졌습니다.
나운규는 1937년 8월 9일, <황무지>를 유작으로 서른여섯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화인들은 나운규에 대한 찬사이자 존경의 표시로 '영화인장(葬)'으로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한국 영화의 한 시대를 열정으로, 때로는 방황으로 떠돌던 나운규는 평생을 영화에 몸 바친 '한국 영화의 아버지'입니다.
3. 차례
우리 영화의 뿌리를 찾아 4
<아리랑>과 나운규 9
새 바람을 일으킨 <아리랑> 13
회령의 한약방 집 셋째 아들 26
명동학교 시절과 독립운동 31
감옥 생활을 하다 38
극단 예림회와 순회공연 42
부산에서 시작한 영화배우 47
영화계의 신인 시절 54
영화의 등장: 정지된 사진에서 움직이는 영상으로 63
버튼 홈스, 영화를 소개하다 70
우리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다 77
<아리랑>, 세상을 놀라게 하다 79
친구 윤봉춘을 영화계로 84
초창기 한국 영화계 사정 89
한국 영화의 새벽 93
성공에 이은 고난 103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하다 116
<사랑을 찾아서>와 검열 파문 127
다시 만든 <아리랑> 145
대본만 보고 머리를 깎다 155
영화에 대한 마지막 열정 165
나운규의 삶 172
나운규 영화 목록 176
4. 지은이 소개
조희문
이 책을 쓴 조희문 선생님은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영화에 관련된 광고, 사진, 책들을 모으며 영화에 흥미를 가져왔습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영화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경인일보사에서 기자로 일하다가 상명대학교 영화과 교수가 되었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한국영화학회 회장 등을 맡기도 했으며, 지금은 인하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로 있습니다.
■ 살아있는 역사인물 시리즈는《우장춘》, 《박지원》, 《이중섭》, 《허준》, 《나운규》에 이어 《정약용》, 《김구》, 《한용운》, 《윤이상》이 나올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