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3.29.주님 수난 성금요일
이사52,13-53,12 히브4,14-16;5,7-9 요한18,1-19,42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예수님처럼
-주님의 섬김의 종답게, 순종의 대사제답게, 진리의 왕답게-
오늘 수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평생 삶이 보입니다. 적나라하게 폭로되는 인간 만물상 같습니다. 여러분 얼굴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수난과정과 죽음을 통해 저절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자문하게 됩니다. 오늘 요한의 수난복음은 물론 두 독서를 보면 초대교회가 예수님을 어떻게 보고 믿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답은 저절로 나옵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처럼 “주님의 섬김의 종답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종으로서 한결같이 섬김의 삶에 충실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의 전생애와 수난과 죽음을 통해 그대로 이사야 예언서의 “주님의 종”의 실현임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는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입니다.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 실현된 모습입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예수님의 수난의 의미가 환히 드러납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때문이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온전히 “우리를 위해서”라는 주님의 종, 예수님의 삶입니다. 죄로 이지러진 우리의 실상을 거울처럼 보여주는, 우리를 한없이 부끄럽게 하는 주님의 종의 모습입니다. 바로 오늘 수난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깊이 감지되는 무죄하면서도 참된 사람으로서 주님의 종의 모습이 우리를 회개에로 이끕니다. 주님의 종처럼, 섬김의 종으로서 이웃을 위해 주님의 종답게 살도록 우리를 분발케 합니다.
둘째, 예수님처럼 “순종의 대사제답게” 사는 것입니다.
대사제답게 산다는 것은 순종하는 제자로 산다는 것입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모두 주님의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수난과 부활을 통해 대사제 예수님을 발견했고 그들의 고백은 옳았습니다. 히브리서의 고백은 우리에게도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우리의 곤궁한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대사제 예수님은 철저히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하느님에게서 멜키체덱과 같은 대사제로 임명되셨습니다. 새삼 우리 인생은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가는 순종의 학교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전생애를 요약한다면 섬김과 순종일 것입니다. 주님의 섬김의 종으로서 일관하셨고, 순종의 대사제로 일관된 삶이셨습니다. 말그대로 모든 고난을 순종의 계기로 삼으셨으며 순종하는 모든 이의 구원의 되셨습니다.
오늘 수난복음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묵묵히 순종하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삶은 순종이자 순종의 여정입니다. 일상의 고난중에 크고 작은 순종의 여정에 충실할 때 대사제 예수님처럼 마지막 순종의 죽음도 잘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처럼 진리의 왕답게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 수난기에서도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답게, 진리의 왕답게 존엄한 품위를 지니고 자신의 고통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십시다. 진리가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가 되어갈수록 자유로운 왕다운 삶입니다. 진리의 왕이신 주님을 닮아 진리의 연인으로 불리기를 원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요 진리의 협력자로 불리기를 원한 베네딕도 16세 교황입니다.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가 우리에게는 깊은 깨우침을 줍니다.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진리가 무엇이오?”
새삼 화두처럼 주어지는 빌라도의 “진리는 무엇이오?” 라는 물음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진리가 무엇이냐 묻는 빌라도는 바로 무지를 반영합니다. 진리이신 주님을 사랑하고 알아갈수록 예수님처럼 진리의 왕다운 삶이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주님의 섬김의 종답게”, “순종의 대사제답게”, “진리의 왕답게” 참사람이 되어 살아갈 제자리는 어디일 까요? 바로 수난복음 후반부에 나오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성모님과 함께 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머물 자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성모님을 모시고 평생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유언같은 당부 말씀입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자매님들은 “어머니의 딸입니다.”로 바꿔읽어도 무방하겠습니다. 이어지는 당부는 믿는 모든 이들에 해당됩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어머니 성모님을 모신 애제자가 상징하는바 우리 믿는 모든이들입니다. 바로 우리가 예수님처럼 주님의 종답게, 대사제답게, 왕답게 참사람이 되어 살아가야할 영원한 삶의 자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성모님과 함께 뿐임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는 대로 죽습니다. 죽음은 삶의 요약입니다. 잘 살아야 잘 떠나는 선종의 죽음입니다. 오늘 수난 복음중 예수님의 마지막 임종어가 예수님의 아름답고 거룩한 삶을 요약합니다. 참사람이 되어 잘 살다 잘 죽고 싶습니까? 미리 묘비명이 될 임종어를 정해놓고 좌우명 삼아 사시길 추천합니다. 제 경우는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자작 좌우명 고백시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임종어가 그대로 예수님의 평생 삶을 요약하면서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과 죽음이 되게 합니다. 평생 진리에 목말라했던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진리이신 하느님을 목말라했습니다.
“목마르다”
그리고 진인사대천명, 최선을 다한 삶이요 온전히 하느님 아버지께 맡기는 삶입니다.
“다 이루어졌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