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력전을 선언하기 어려웠던 이유
1943년 2월 18일, 베를린(Berlin)에서 열린 대중 집회(對中集會)에서 나찌의 선전상[宣傳相, 독일의 나치 체제하(體制下)에서 언론(言論)과 문화(文火)를 통제(統制)하고 대중의 선동(煽動) 역할을 맡아보던 관직]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 1897년 10월 29일~1945년 5월 1일)는 이제부터 독일은 총력전(總力戰)에 돌입(突入)할 것이라고 연설(演說)했습니다.
놀랍게도 독일은 전세계를 상대로 전쟁, 그것도 대규모 전면전(大規模全面戰)을 벌이는 와중(渦中)이었음에도 그때까지 총동원령(總動員令)을 내리지 않은 상태(狀態)였습니다.
1939년 제2차 대전이 발발(勃勃)한 이래 독일에게 가장 우선시(優先時)되던 것은 전쟁(戰爭)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일상(一相)이었습니다.
↑1943년 2월 18일 열린 대중 집회에서 총력전을 선언하는 괴벨스
특히 300만의 대군(大軍)을 동원해 속전속결(速戰速決)로 끝내려던 독소전쟁(獨蘇戰爭)이 장기전(長期戰)으로 바뀌면서 하염없이 국력(國力)이 소모(消耗)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독일은 이미 총력전을 치르는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괴벨스의 연설(演說) 이전까지 히틀러와 나찌는 국민이 전쟁 때문에 일상이 바뀌었다고 느끼지 않도록 총력전이라는 단어(單語)를 극도(極度)로 삼가고 있었고,
전쟁 이전 같이 사회(事會)가 유지(有志)되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습니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독일의 소모가 많아졌습니다
종종 독일까지 연합군 폭격기(聯合軍爆擊機)가 날아와 폭탄(爆彈)을 던지는 경우가 있기는 해도 아직까지 전투는 베를린에서 수천km 떨어진 영토(領土) 밖에서만 벌어지던 상태였고 선전 매체(宣戰買滯)도 연일 독일군의 승리(勝利)만 보도(報道)하고 있었기에 후방(後方)은 크게 동요(動搖)하지 않았습니다.
물품 공급(物品供給)도 부족(不足)하지 않아 보통 시민(市民)이 일상을 누리는데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예술(藝術)이나 공연 활동(共演活動)도 평소처럼 이루어졌습니다.
↑전쟁을 잊은 듯한 1942년 베를린 중심가의 일상
스탈린그라드(Stalingrad) 전투 당시인 1942년 9월에 베를린에서 열린 독일과 스웨덴(Sweden)국가대표(國家代表)팀 간 축구 경기(蹴球競技)에 9만의 관중(觀衆)이 모여 열광(熱狂)했을 정도였습니다.
유서(遺書) 깊은 국내 리그도 변함없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규모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도 그러기 위해 점령지(占領地)에서 엄청난 수탈(收奪)이 자행(自行)되었고 포로(捕虜), 유태인(猶太人)에 대한 극심(極甚)한 노동력 착취(勞動力搾取)가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독일인 이외는 궁핍(窮乏)한 삶을 살았습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혈전 중에 베를린에서는 국가대항전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쏟아붓다시피 하며 벌인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敗)하자 더 이상 예전처럼 속이기는 곤란(困難)했습니다.
이를 기회(幾回)로 총력전 체제(總力戰體制)로 전환(轉換)하면서 독일이 일방적(一方的)으로 밀리던 1944년이 되었을 때 군수물자 생산량(軍需物資生産量)이 최고조(最高潮)에 이르렀습니다.
대신 청소년(靑少年)과 노인(老人)은 징집 대상(徵集對象)이 되었고 여성(女性)들은 공장(工場)으로 달려가 생산(生産)을 담당(擔當)해야 했습니다.
또한 필연적(必然的)으로 내핍(耐乏)이 강요(强要)되었습니다.
↑이런 상태라면 종전을 고민해야 했으나 나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상식적(常識的)으로 전쟁이 벌어지면 평시(平時)처럼 일상(日常)을 영위(領位)하기는 어렵습니다.
국력(國力)이 압도적(壓倒的)이었던 미국마저 참전(參戰)과 동시에 전시체제(戰時體制)로 전환(轉換)했을 정도였습니다.
미국은 침략(侵略)을 당했기에 당연했다 치더라도 한창 중국을 침략 중이던 일본도 1938년에 국가총동원법(國家總動員法)을 제정(制定)하고 총력전(總力戰)을 벌이는 중이었습니다.
그런 점을 고려(考慮)하면 총력전 선언(宣言)을 주저(躊躇)한 독일의 행태(行態)는 쉽게 이해(理解)가 가지 않는 부분(部分)입니다.
↑총력전 선언에 따라 조선소에서 일하는 미국 여성들
이는 지난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經驗)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독일은 전쟁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남의 땅에서만 싸웠습니다.
단순히 종전(終戰) 당시 전선(戰線)만 놓고 본다면 독일이 우세(優勢)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봉쇄(封鎖)된 상태에서 장기간(長期間)의 총력전을 벌이다 보니 국민들이 더 이상 배고픔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반란(反亂)까지 일어날 정도로 후방(後方)이 혼란스러워지면서 결국 독일은 항복(降伏)해야 했습니다.
↑제1차 대전 당시 굶주린 베를린 시민들에게 음식을 배급 중인 모습, 당시의 혹독한 기억 때문에 나찌는 총력전 선언을 주저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베르사유(Versailles) 조약(1919년 제1차 세계 대전(第一次世界大戰) 파리 강화 회의(Paris 講和會議)에 따른 제재(制裁)가 워낙 가혹(苛酷)하다 보니 그에 대한 반동(反動)으로 내부(內部)의 적(敵) 때문에 무너졌다는 음모론(陰毛論)이 독일 사회에 퍼졌습니다.
이를 이용해 정권 획득(政權獲得)에 성공(成公)한 나찌는 새로운 전쟁을 시작하면서 후방 안정(後方安定)에 최대한 공(最大限公)을 들였습니다.
그래서 총력전 언급(言及)을 회피(回避)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총력전 선언은 그만큼 어려운 상황을 자인(自認)한 것이었습니다.
독일 패전(敗戰)의 예고편(豫告篇)이었습니다.
전쟁으로 재미 보았던 독재자의 오판
지난 9월 21일, 푸틴(Vladimir Putin, Vladimir Vladimirovich Putin, 1952년 10월 7일),
소련은 생중계(生中繼)된 대국민 연설(對國民演說)을 통해 동원령(動員令)을 선언(宣言)했습니다.
이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새로운 국면(局面)에 진입(進入)했다는 신호탄(信號彈)이었습니다.
그동안 '특별군사작전(特別軍事作戰)'이라는 그럴듯한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둘러대었어도 동원령을 발동(發動)했다는 자체(自體)가 총력전을 의미(意味)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재 러시아의 전반적(全般的)인 상황(狀況)이 총력전 체제로 보기는 어렵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단정(端正)할 수 없습니다.
↑동원령을 선언하는 푸틴
명분(名分)이야 어떠하든 일단 동원령이 내려진 이상 이보다 더 나쁜 상황으로 빠져들 가능성(可能性)은 충분히 있습니다.
전쟁은 이길 자신이 있을 때만 시작하므로 침공을 단행하는 쪽은 총력전까지 고려하지 않습니다.
설령 실질적(實質的)으로는 총력전이어도 위편에서 언급한 나찌의 사례처럼 대내외(對內外)에 국가 기능(國家技能)이 원활히 작동(作動)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부인(否認)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