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오일장에 대한 역사는 아주 길다고 한다.
어떤이는 삼국시대 부터 존재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이야길 들어보면 본격적인 모습은 이미 고려시대 때 자리 잡았고
조선시대 중엽 부터 일제강점기 까지는 전성기였다고 한다.
일제시대 때 상설시장들이 생겨나고 백화점이 들어오면서 오일장은 쇠퇴기에 들어갔다고 한다.
장돌뱅이 혹은 보부상
조선시대 대표적인 경제활동 주체들의 주인공이시다.
이들이 주로 걸으면서 전국순회하며 상품을 판매하고 새로운 상품을 구입해서
다른 지방에 판매하는 등 상품을 이동시켰고 시장가격을 형성했다고 보여진다. 옛날엔 사람이 새벽 부터 일어나 걸어서 왕복할 수 있는 거리를 부녀자들인 경우 하루 최고 60 리
남자 성인일 경우 최고 120 리로 보는데, 부녀자인 경우 환산하면 5리가 2km 이니 한번 가는데
12 km 즉 일보고 다시 걸어오는데 또 12 km 하루 토탈 24 km ( 60 리 )로 본다.
즉 서울 목동에서 인천항 까지 걸어 가는 거리로 보면 된다.
남자는 배가 되니 하루 50 Km 정도 걸을 수 있는 거리인데 아마도 서울에서 수원까지의 거리 같다.
이런 행동반경 안에 오일장이 서는 것이다.
일본이 강점하기 전에는 무려 전국에 천군데 이상의 오일장이 있었다고 한다.
일요일도 토요일도 의미없던 시절 암튼 일주일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에
동네 오일장이 서는 장날이 바로 그 지방의 휴일이었던 것이다.
이런 장날은 반드시 물건을 사고 파는 유통의 장소 뿐만 아니라
이웃동네의 총각 처녀 혼담에 마을축제에 마을놀이에 흥겨운 가무가 어우러지면서
3.1 운동 같은 대중집회도 열렸던,상업성을 떠나서 순수한 전통 문화의 공간이라고 보여진다.
조상들의 영혼이 숨쉬었던 공동체적인 삶의 집합체였고 민족의 정취가 뿌리내렸던
우리들의 장터는 수많은 애환을 가지고 점점 사라지거나 축소되고 있다.
외국자본과 재벌들의 거대한 공룡같은 마트가 시골까지 침투해 가는 오늘
누가 우리의 오일장 장터를 지킬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가격 정찰제로 카트에 자기 살 물건만 잽싸게 계산하고 사라지는 삭막한 오늘날,
아직도 옆에 손님들과 공동으로 투합하여 가격을 흥정하고 덤을 달라고 우기는
우리의 전통 재래식 장터는 신선한 서민들의 생활이 그대로 적셔있다. 조상의 얼이 숨어있는 순박한 서민들의 장터가 점점 문을 닫기 전 야채 하나라도 구입해야
좀 더 우리가 우리것을 보존하지 않을까 ?
사고 안사고가 중요한게 아니고,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장터의 역사에 대해 한번쯤 돌이켜 보는
것도 조상들에 대한 조그만 예의가 아닌가 싶다.
'여름 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허 생원은 말뚝에서넓은 휘장을 걷고 벌여놓았던 물건을 거두기 시작하였다…
내일은 진부와 대화에 장이 선다’.
작가 이효석(李孝石·1907∼42)이 ‘메밀꽃 필 무렵’
도입부에 그린 강원도 봉평 ‘5일장’의 풍경이다. 5일장은 장돌뱅이와 서민들이 빚어내는 공간이다.
수수한 옷차림의 떠돌이장수들이 골목길에 빼곡히 좌판을 깔아놓고 옷과 생선 등을 판다.
방금 시골에서 올라온 듯 한 할머니는 각종 봄나물과 메주를 길거리에 풀어 놓고 팔고,풀빵장수는
‘풀빵 사세요’를 외치며 지나가는 손님을 잡아끈다.
5일장에는 없는 것이 없다.콩,깨,조,수수 등의 곡식과 사과,배 과일에서부터 이불 등 공산품까지 즐비하다.
6·25 이후 50년간 칼을 갈아 왔다는 할머니는 “예전에는 손님이 많았는데 요즘엔 돈이 흔해서인지
이빨 빠진 칼을 다듬어 다시 쓰는 이들이 별로 없다”면서도 넉넉한 웃음을 지었다.
시골에도 자동차가 늘어나고 주변에 백화점이 들어서면서 5일장이 하나둘씩 사라져 간다.
30여년 전만 해도 나무를 파는 시골 사람들이 5일장에서자주 눈에 띄었다.나무를 한 짐 지고
장터로 나가 팔아 명태를 한 꾸러미 사가지고 해질녘에 돌아오고는 했다.
대장간에는 칼이나 쟁기를 만들려는 이들로 붐볐다. 또 국밥 집에선 구수한 김이 인정처럼 모락모락
피어 올랐고 서민들이 모여 세상과 이웃들의 얘기로 꽃을 피웠다.정보망이 없던 그 시대의 5일장은
시골의 유일한 ‘열린광장’이었다.
장이 끝나면 객줏집에서는 술판과 투전판이 벌어지고 작부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의 5일장은아빠,엄마가 고무신과 꼬까옷을 사줄 수 있는 날이어서 꼬마들도 손꼽아 기다리며
덩달아 신바람이 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