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요한 묵시록 22, 1-7
루카 21, 34-36
<그 도성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어린양은 없고 어좌만 있는 이유
인터넷 뉴스를 뒤지다보니 나이지리아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단체인 보코하람에 납치됐다가 극적으로 탈출했다는 ‘18세 소녀의 고백’이란 기사가 올라와 있었습니다.
보코하람이 갑자가 학교에 들이닥쳐 276명의 아이들을 납치해 숲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중에
목숨을 걸고 트럭에서 뛰어내려 극적으로 탈출한 몇 명의 아이들 중 하나입니다.
이슬람교도들이 다 그렇게 나쁜 사람들은 아닙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화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그렇게 테러를 자행하는 것입니다.
테러는 자신의 힘으로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이들입니다.
그것이 종교라면 그들이 믿는 신의 모습이라면 그 신에게 누가 가고 싶겠습니까?
나를 이용하고 폭력을 행사하여 노예로 만드는 그런 무서운 곳이 아니겠습니까?
자신들이 아무리 천국이라고 하더라도 그 곳은 지옥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드록바가 신으로 불리는 이유’란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드록바는 코트디부아르 축구선수로서 2008년 첼시에서 뛸 때 축구선수로서의 가장 큰 영예인 발롱도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축구를 잘 하기 때문에 신으로 불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한 사람으로서 남북 간의 종교전쟁을 종식시킨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2005년 월드컵 예선전에서 코트디부아르가 본선 진출을 확정지은 승리를 거둔 후 드록바는 “1주일만 전쟁을 멈추자”는 이야기를 무릎 꿇고 TV 생중계에서 합니다.
이때 2002년부터 남부 가톨릭과 북부 이슬람간의 전쟁이 치열했던 코트디부아르는 실제로 드록바의 이 발언을 계기로 잠시 전쟁을 멈췄다가 재개합니다.
이후 드록바는 2008년 발롱도르를 수상하자 그 상을 들고 코트디부아르로 갑니다.
이때 남부(베트) 지역 대통령이 축하만찬을 열어주며 생중계를 하는데 이때 드록바가 폭탄발언을 합니다.
“이 상은 코트디부아르 전체의 영광이니 이 상을 북부 이슬람에 전달하기 위해 대통령이 나와 같이 가줬으면 좋겠다.”
한 마디로 이건 6.25 전쟁 시절에 이승만에게
“나와 같이 김일성을 만나러 가자”고 한 것과 다름없는 수준의 발언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이면 잘못하면 즉결 총살당할 수도 있는 그런 분위기였지만, 당시 드록바는 코트디부아르의 스타가 아니라 그야말로 세계의 스타였고, 또 생중계 중이었으니 대통령도 못하겠다고 할 수가 없어서 결국 진짜로 북부 반군 거점 도시에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북부(부아케) 이슬람 도시도 그야말로 난리가 납니다.
이 계기로 남북 단일팀이 만들어졌고 또 그렇게 내전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더욱 놀라운 점은 드록바가 코트디부아르에 산 것은 겨우 5살 때까지고 그 이후엔 쭉 프랑스에서 살았던, 사실상의 프랑스인입니다.
그런데도 가난하고 전쟁으로 고통 받던 조국을 위해 분연히 일어선 것이죠.
이후에 어떤 기자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행동하셨습니까?”라고 묻자 “그저 옳다고 믿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축구에 대해 문외한이던 자신의 조국을 2006년부터 3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올려놓은 것도 드록바이고, 내전을 멈추게 영향력을 행사한 것도 사실이며, 이후 조국 국민들의 교육/의료 및 복지 개선에 자신이 번 돈을 많이 기부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축구를 좋아하는데 드록바가 경기장에 입장할 때 땅에 손을 대고 성호를 긋고 들어가는
장면을 보며 저런 위대한 선수가 가톨릭신자라는 것에 큰 감사를 느끼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내가 누군가를 이용해 자신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죽이고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있는 신이라면 하늘나라에서조차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기보다는 우리를 위해 내어주시는 모습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랑 자체이신 분의 모습이라야 우리가 안심하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오늘 독서에서 보면 하늘나라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다고 나옵니다.
어린양의 어좌에서는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와 온 도성을 풍요롭게 합니다.
그 생명수의 강 옆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번 열매를 맺습니다.
그 나뭇잎은 민족을 치료하는데 쓰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상징을 이해해야합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희생을 해야만 합니다.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어린양은 목이 잘려 피가 나오고 있는 모습입니다.
즉 어린양은 죽은 것입니다.
그 죽어서 흘러내리는 피가 곧 생명수입니다.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온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 생명수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 생명수가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 혹은 성체와 성혈, 혹은 그냥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가 구원받았는데, 천상 예루살렘에서는 그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천상에서도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희생은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참 신랑으로서 신부인 교회에 당신 생명을 계속 나누어주시는 분이 하늘나라에서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편안한 마음으로 그분께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린양이 어좌에 앉아 군림하지 않고 그 백성을 위해 죽임을 당하고 있는 그런 곳이라면 안심하고 가도 되지 않겠습니까?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루카 21,34-36
<한해의 끝자락에서>
저희 한국 살레시오회 출신 몽골 선교사인 이호열 시몬 신부님께서 얼마 전 한국국제협력단(KOICA·코이카)이 주관한 개발원조의 날 기념행사 때 영예로운 해외봉사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올 여름 잠시 몽골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신부님은 마치 몽골 아이들의 자상한 친 아버지 같았습니다.
신부님의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몽골 아이들을 기쁘게 해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몽골 아이들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런 신부님이기에 아이들은 하루 온 종일 신부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역사상 유례없이 짧은 기간에 원조를 받던 국가에서 원조를 하는 국가로 탈바꿈한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경제적인 원조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원조가 인적 자원의 원조입니다.
하루하루 생사마저 보장되지 않는 위험한 분쟁 지역에서,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혹독한 가난과 그로 인한 고통뿐인 세상의 끝에서 자신의 삶 전체를 바쳐 헌신하고 있는 수상자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정말이지 큰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대표로 두 분의 소감을 듣게 되었습니다.
말씀 한 말씀 한 말씀이 무뎌질 데로 무뎌진 제 마음을 크게 건드렸습니다.
“나이 마흔이 되었을 때 인생을 좀 더 보람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고민하던 끝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큰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지만 여기 오기를 정말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이 오지의 전쟁터로 보내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람을 세우는 일이 세상을 세우는 일이며 사람을 구하는 일이 세상을 구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은 생애도 그곳 형제들을 세우고 구하는 일에 전념하겠습니다.
해외봉사 시작할 때 내가 뭔가 그들에게 준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큰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은 그들이 제 큰 사랑과 소중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들 사이에서 다정한 친구가 되어 그들 사이에서 머물고 싶습니다.”
교회 전례력으로 우리는 한해의 끝자락에 서있습니다.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은총의 선물인 ‘새해’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고민할 때입니다.
세상의 끝으로 나아가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젊음을 바치고 있는 분들과 견주어 보니 그저 내 발밑만을 바라보며 나만을 위해 허덕이며 살아온 지난 삶이 정말 부끄럽습니다.
마지막 날에 저희에게 건네시는 주님의 메시지도 오늘따라 가슴을 치게 만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장 34절)
바오로 사도는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서 설명합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로마서 13장 12~13절)
우리가 전혀 준비하고 있지 않은 순간에 마치 섬광처럼 다가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몸과 마음으로 준비해야겠습니다.
지나온 한 해 동안의 내 삶을 진지하게 한번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진흙탕처럼 흐려진 영혼의 상태를 진정시켜야겠습니다.
아직도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이나 사건이 있다면 하느님의 크신 자비에 맡겨드려야겠습니다.
좀 더 영적이고 좀 더 단정하고 품위 있는 하루를 살아가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좀 더 자주 성체 앞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스스로>
2022. 11. 26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루카 21,34-36 (깨어 있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스스로>
주님을 믿기에
불신의 세상 깊숙이
들어갑니다 스스로
주님을 바라기에
절망의 세상 깊숙이
들어갑니다 스스로
주님을 사랑하기에
미움의 세상 깊숙이
들어갑니다 스스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