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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25. 묵상글 (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 무엇이 중헌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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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25.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8.25 03:55
- 무엇이 중헌디!
전에 눈여겨보지 않았던 말씀이 오늘 처음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두 번이나 이 말씀을 하십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이 말씀은 한때 유행하던 말을 떠오르게 하지요?
‘뭣이 중헌디!’
영화에 나온 대사라고 들었는데 그 영화를 보지 않아서
어떤 상황 또는 어떤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놓치고 사소한 것에 대해 집착하는 것에 대한 일갈일 것입니다.
사실 사는 동안 작은 것에 집착하여 일을 그르치는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참 많았기에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라는 말도 옛날부터 있지 않았습니까?
예를 들어 돈은 아주 작은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돈이 있어도 작은 겁니다.
필요한 것일 뿐 중요한 것이 아니기에
가치의 크고 작음을 따지면 작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야 마땅한데 실제로 살다 보면
돈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여 건강까지 잃고 맙니다.
그리고 그런 뒤에야 ‘뭣이 중헌디!’하고 자신에게 말하곤 합니다.
한 인간도 이러면 건강을 망치고 인생을 망치는데
국가나 종교 지도자가 그러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오도하여 인생을 망치겠습니까?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왕왕 있는 일이었고,
주님 당시의 지도자들도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도 그들이 어리석은데다
눈까지 먼 불행한 인도자들이라고 하시며 무엇이 더 중요하냐고 질문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질책입니다.
그리고 꾸짖기만 하시는 질책(叱責)이 아니라 바로잡으라는 질책(質責)입니다.
우선 자신부터 중심을 바로잡으라는 질책입니다.
중심을 바로잡는 것은 중요한 것이 자기 안에 자리 잡게 하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갖가지 욕심이 자기 안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위선을 낳는 인정 욕구,
눈멀게 하는 재물 욕심,
안주케 하는 안정 욕구,
이런 욕구와 욕심들이 내 안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하는 것이요,
진실과 진리와 사랑이 내 안에 중심 잡게 하는 것이며,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 내 중심에 계시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주님께 질책받기 전에 나부터
무엇이 중한지 스스로 질문하는 우리가 되고,
진실과 진리와 사랑의 주님을 우리 중심에 모시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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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25.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복음적 삶
“회개와 개혁; 원천의 순수에로 돌아가기”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성도들의 모임에 그 찬송 울리어라.”(시편149,1)
한밤중 잠도 자지 않고 줄기차게 하느님을 찬미하는 매미들 노래 소리가 지금도 한창입니다. 지금까지 구약의 제1독서는 끝나고 연중 제21주간 부터는 신약 27권중에서 가장 먼저 51년경 쓰여진 바오로 사도의 1테살로니카 서간이 시작됩니다. 복음서보다 20년전쯤 쓰여졌고 초대교회의 순수한 복음적 삶을 보여줍니다.
사실 제1독서 바오로 서간의 교회와 “불행하여라”로 시작되는 부패하고 타락한 마태복음 교회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상징하는 바, 시공을 초월하여 반복되는 위선적 무지로 눈먼 어리석은 교회지도자들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저절로 순수는 사라지고 타락과 부패가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이래서 원천의 순수에로 돌아가려는 회개와 개혁의 운동이 일어납니다. 수도회의 개혁도 늘 <부유함에서 복음적 가난으로>, <세속화에서 사막의 고독으로>의 회귀라는 철저한 회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28년전 원천의 순수를 희구하며 쓴 <푸른 삶>과 <옹달샘>이란 두 편의 짧은 시가 생각납니다. 1997년 4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쓴 시입니다.
“푸른 산
맑은 물
푸른 삶 맑은 영성
산에
가까울수록
흐르는 물은 맑고
하느님께
가까울수록
흐르는 영성 또한 맑다”<1997.4. >
“누가 뭐래도
하늘이 무너져도
나 불암산의 옹달샘으로 머물으리라
확장도 개발도 홍보도
그 무슨 인위의 장식도 없이
자연 그대로의 옹달샘으로 나 머물으리라
주님 안에 숨어 사는
옹달샘으로 나 머물으리라
목마른 이들에게 샘솟는 물이 되리라”<1997.4. >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순수를 유지하려는 결의를 다짐하며 쓴 글입니다. 답은 하나입니다. 하루하루 부단한 회개와 개혁으로 단순한 원천에의 회귀가 아니라, 안팎이 다른 위선적 삶이 아니라 안팎이 같은,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워지는”(ever old, ever new) 삶이겠습니다.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언급도 생각납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내면과 외면은 서로 어긋나지 않는 한 몸이니, 겉을 보면 속을 짐작할 수 있고 속을 보면 겉을 이해할 수 있다.”<다산>
“바탕이 겉모습을 넘어서면 거칠어지고, 겉모습이 바탕을 넘어서면 겉치레가 된다. 겉모습과 바탕이 잘 어울린 후에야 군자답다.”<논어>
늘 회개와 개혁으로,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 안팎이 같은 진실과 겸손의 사람이 군자요 참 신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의 대표적 인물이 어제 소개한 얼마전 선종한 유경촌 주교와 현임의 레오14세 교황입니다. 두분 다 자발적 기쁨으로 시류에 맞서 고군분투의 복음적 삶을 사셨던 분들입니다.
“말로만 아니라 삶으로 실천된 증인이었습니다. 교회의 얼굴로 사회와 마주하시되 언제나 그 중심에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연민과 존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직을 온전히 살아 낸 한 사제의 흔적을 보게 됩니다.”<유경촌 주교 장례미사중 정순택 대주교의강론>
“가난한 이들의 환경, 평화등에 깊은 관심, 프란치스코 교황 사목 방침 계승하며 자신만의 정체성 드러난 행보 선보여. 아우구스티노 성인 영성 자주 언급, 예수 그리스도 중심 신앙 회복 강조. 사랑과 일치로 이끄는 리더십, 위대한 교부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 안에서 보편교회 나아갈 길 찾음, 세계 지도자 중 호감도 제1위”<가톨릭신문, 레온 14세 교황에 관한 박지순 기자의 글>
결국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두분처럼 주님의 얼굴을 반사할 때 비로소 사람은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원천의 순수에서 많이 벗어난 교회 지도자의 부패하고 타락한 보편적 경향을 보여줍니다. 초대교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역사상 반복되는 부정적 현상입니다.
산상설교나 시편들에서 많이 강조되는 “행복하여라”와 정 반대로 “불행하여라” 불행선언으로 시작되는 오늘 복음입니다. 바로 본말전도, 주객전도의 무지한 위선적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대한 가차없는 질책입니다. 이런 지도자들은 예나 이제나 교회에 있기 마련인 보편적 부정적 현상이기도 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눈먼 자들아!”
이는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깊은 아픔, 심판예고로 이어지는 분노를 드러내면서 결정적 회개의 촉구입니다. 참으로 회개의 일상화, 회개의 생활화, 회개의 습관화로 늘 복음적 가난과 겸손의 순수한 삶을 살아냄이 얼마나 결정적 중요성을 지니는지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바오로 서간의 세속화로 오염되지 않은 아름다운 복음적 교회의 무공해 신자들입니다. 바오로의 아낌없는 감사와 찬사로 가득한 내용을 일부 소개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 모두 기억하며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의 인내를 기억합니다.
여러분은 큰 환난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오로와 그 일행을 닮아 삼위일체 하느님 중심에 신망애 충만한 삶이요,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와 참 하느님을 섬기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삶에 충실한 테살로니카 신도들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복음적 삶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복음적 순수의 신망애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여 높이신다.”(시편1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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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25.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초기에 “산상설교”를 통하여 여덟 가지의 “행복선언”(마태 5,3-12)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후기에 이르러 일곱 가지의 “불행선언”(마태 23,13-36)을 들려줍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세 번째까지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마태 23,17-19)
우리는 살아가면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우선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깜박 놓쳐버리곤 합니다. 물론 더러는 방법상에서 최선이 아닌 차선을 택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또는 한 발짝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 발짝을 뒤로 물러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체 무엇이 체(몸)이고, 무엇이 용(활용)인지는 알아야 합니다. 자칫 그렇지 못하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위선자요 눈 먼 인도자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누가 옳으냐?’ ‘누가 잘하느냐?’ 하고, 서로를 따지고 계산하고 심판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나서,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는가?’ ‘받아들이고 있는가?’ 라는 인격적인 관계로의 회귀입니다. 그것은 일이나 능력 중심에서 벗어나서, 하느님과 사랑 중심으로의 회귀요, 본질의 삶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대체,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묻게 합니다.
“금인가?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인가?”
“예물인가?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인가?”
“하느님이 계신 곳인가? 아니면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인가?”
“일을 잘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일을 사랑으로 하는 것인가?”
“나의 뜻을 완수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것인가?”
“나 자신인가? 아니면 나의 주인이신 하느님인가?”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여기에는, 먼저 앞세워야 할 일을 선택할 수 있는, 맑고 명료한 분별과 그를 따를 수 있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사도 바오로처럼,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1코린 2,2)라고 하는 본질을 위한 투신을 요청합니다.
하오니 주님!
진리가 제 자신을 이끌게 하되, 마치 저 자신을 진리인 양 앞세우지 말게 하소서!
참으로 우리의 삶이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 되게 하시고,
진정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사랑을 아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마태 23,17)
주님!
저는 참으로 어리석고, 눈 먼 자입니다.
함께 계시는 당신을 망각하고 무시하고 있으니, 진정 눈 먼 자입니다.
저의 무지를 받아들이기보다 저의 주장을 앞세우니, 진정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오니, 주님!
진리가 제 자신을 이끌게 하되, 저 자신을 진리인 양 앞세우지 말게 하소서!
참으로 나의 삶이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시고,
진정 나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사랑을 아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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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25.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해 강하게 꾸짖는 장면을 만납니다. 그들의 위선적인 종교 행위, 겉으로는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명예와 이익을 앞세우는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라는 단호한 말로 지적하십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단지 당대의 바리사이파를 향한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를 향한 물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더 소중히 여기며 살고 있는가? 무엇에 눈을 두고, 무엇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가?
‘산 넘어서 또 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슬픔이 쓰나미처럼 밀려온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자리를 잡으려는데 가족의 건강에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아버지는 암 투병으로 기력이 쇠해졌습니다. 아들은 오랜 시간 신장 투석을 하는 몸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허리통증이 심해서 병원에 갔더니 암으로 판정되었습니다. 가족력으로 당뇨가 심한 자매님이 있습니다. 혈압이 높아서 뇌졸중이 왔고,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일주일에 3번 투석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발에 작은 상처가 났는데 아물지 않고 염증이 심해져서 한쪽 발을 절단해야 한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병자성사를 드리면서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저는 종종 고통과 질병, 상실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교우들을 만납니다. “산 넘어서 또 산”이라는 표현처럼, 한고비를 넘으면 또 다른 시련이 밀려오는 삶의 굽이굽이에서, 저는 하느님의 얼굴을 찾는 이들의 눈동자에서 깊은 성찰의 울림을 느낍니다. 당뇨, 암, 투석, 절단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파도 앞에 서 있을 때, 우리는 종종 묻습니다. “주님, 왜 저입니까?”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신자들은 기도를 멈추지 않고, 미사에 참여하고, 눈물을 삼키며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이들의 삶은 단순한 ‘신체의 고통’을 넘어 ‘존재의 무게’를 견뎌내는 위대한 믿음의 길입니다. 여기서 ‘존재의 심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고백을 듣게 됩니다.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신을 찾고, 진리를 향해 나아갑니다. 고통은 인간의 가장 깊은 질문을 끌어내는 신앙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토론한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 문제점은 ‘대형화’였습니다. 대형화된 교회는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습니다. 필요한 건물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형화된 교회는 신자들의 아픔과 고통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큰 비용이 들기 때문에 신자들은 더 많은 헌금을 내야 됩니다. 두 번째 문제점은 ‘중산층화’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 병자들, 장애인들과 늘 함께하였습니다. 중산층화된 교회는 풍요와 축복을 이야기하기 마련입니다.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에게 교회의 문턱이 점차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문제점은 ‘제도화’였습니다. 제도화된 교회에서는 성령께서 함께하시기 어렵습니다. 제도화된 교회에서는 사랑과 관용, 이해와 용서가 자리 잡기 어렵습니다. 법과 규정으로 신자들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데,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돈’이 있습니다. 자본이 가져다주는 화려함과 풍요에 중독된 우리들의 일그러진 양심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이라는 곳간에 더 많은 재물을 쌓으려는 욕심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예전에 신학교 교수 신부님께서 말씀해 주셨던 사제의 덕목이 떠오릅니다. 기도하는 사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시대를 읽고, 공부하는 사제는 교회의 지혜로 진리를 전하며, 성실한 강론을 준비하는 사제는 지친 영혼을 위로합니다.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제는 늘 깨어있는 영적 감수성을 지니고, 건강을 지키는 사제는 하느님의 도구로 살아갈 체력을 유지합니다. 이 다섯 가지는 단지 사제만의 덕목이 아니라, 우리가 기억해야 할 ‘신앙인의 삶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십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눈에 보이는 것, 사람의 영광, 세상의 기준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하느님의 뜻, 사랑, 자비, 공감, 용서, 믿음,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이 더 중요한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세상의 금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성전을 따라갔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똑같은 길을 갔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어떤 길을 따라가야 할까요? “주님! 크신 자비로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저희에게 주소서. 주님! 금이 아닌,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을 더 사랑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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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25.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열린 마음의 그리스도교~~~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8월 24일 일요일- 서른다섯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종교간의 우애와 연대
성령은 바람처럼 불고 싶은 대로 붑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무언가가 진리라면, 그것을 누가 말했든지 간에, 그것은 언제나 성령에게서 오는 것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 진리에 대하여(De Veritate)
리처드 로어 신부는 그리스도께 대한 자신의 헌신과 성령의 영감이 어떻게 해서 다른 종교 전통에서 하느님을 인식하는 데 지속적으로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제 삶을 되돌아 볼 때, 저는 저의 태중 신앙인 그리스도교의 신앙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서 다른 종교에서도 같은 성령과 사랑을 볼 수 있었습니다. 미국 캔자스의 가톨릭교회의 토양에서 자랐기에 개신교 신자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던 저에게는 이것이 꽤나 긴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열네 살 되던 해에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의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그곳에서 공부하면서 폭넓은 신학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았했던 것 과목 중 하나는 히브리 성서학(구약학)이었는데, 이 공부를 통해 유대교에 대해 크나큰 사랑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언자들을 그렇게나 많이 강조하는가 봅니다. 왜냐하면 저는 예언자들이 오늘 우리가 말하는 보복의 정의(retributive justice)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회복하는 정의(restorative justice)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메시지를 곰곰이 숙고하게 되면 그들의 예언서들 끝에 가서는 한결같이 사랑을 가리키는 놀라운 문구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는 어떻든 너희를 사랑할 것이다. 나는 나의 완전한 사랑으로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 나는 온전함 그 자체로 너희를 사랑할 것이다."(이사, 29,13-24; 호세 6,1-6 참조).
1969년에 저는 부제품을 받고 뉴멕시코의 아코마 푸에블로 부족에 파견되었는데, 그 당시 저는 그들의 토착 종교에 대해 약간의 기본적인 지식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푸에블로 부족 어머니들이 고요하게 아침 햇살을 향해 손을 흔들어 자기 자녀들의 얼굴에 그 아침 햇살을 부어주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모습이 마치 많은 그리스도인이 십자성호를 그으며 자기들을 축복하는 법을 배우는 것과도 같아 보였습니다. 저는 우리 프란치스칸들보다 훨씬 오래 전에 이미 이들 토착민들이 관상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관상의 심오함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저는 불교도들과 수피교도들에게도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 그들의 가르침들과 수행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불교는 저에게 지각의 현상학, 즉 우리 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모든 세계 종교는 성숙한 단계에 이르러 우리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중독적인 마음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몇 가지 수행법을 찾아냅니다. 1960년대에서부터 시작해서 전반적으로 동양의 종교들, 특히 불교에 대한 관심이 우리 서구 세계에서 증가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저에게는 우리 그리스도교 고유의 고대 관상 전통을 인식하고 되찾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수피교는 신비주의에 대한 사랑이 참 깊습니다. 특별히 루미(Rumi)와 하피즈(Hafiz)와 같은 시인들에게서 발견되는 신비주의는 종종 제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을 정도로 저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알게 된 종교는 세계 종교 중 가장 오래된 종교라고 일컬어지는 힌두교입니다. 1980년대 초반에 저는 네팔에서 피정 지도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강의 중간중간에 짬이 날 때마다 저는 그곳의 오래 된 거리를 걷기도 하고, 성전들도 방문하기도 하면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고요하게 있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성전에서 만난 사랑스러운 여인들입니다. 그들은 사리를 입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들이 들고 있던 등불과 기름 외에는 아무것에도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경건하게 절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신비 그 자체이신 하느님 외에 다른 무엇에게 절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성령도 바람처럼 불고 싶은 대로 붑니다(요하 3,8).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신비주의란 무엇인가(What is Mysticism)”를 주제로 하는 매일 묵상에 무척 매력을 느꼈습니다. 모든 전통은 고대 신비주의자의 경험에 대한 가슴 깊은 지식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가 한 종교 전통의 교리를 넘어서서 보게 되면, 거기에는 신성함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제가 속해 있는 뉴햄프셔주 애머스트의 범종교 공동체가 지향하는 바는 모든 종교 전통의 진리에 담긴 영적 수행을 존중고 실행하는 가운데 성령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면서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이러한 진리를 일깨울 때 우리 모두 안에 잠재되어 있는 신성한 불꽃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궁극적으로 우리는 신비적인 일치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 일치 안에는 "타자"란 절대 존재하지 않습니다.
—Rev. Ahjan G.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Living School faculty conversation with CAC staff members, October 23, 2017. Unavailable.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shkan Forouzani, untitled (detail), 2020, photo, Iran,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한 가닥의 줄에 꿰어 있는 각각의 구슬은 여러 종교 전통을 대표할 수 있습니다. - 이 모든 것이 서로 조화를 이루게 되면 경쟁을 넘어 새롭고 더 크고 온전한 그 무언가로 나아가는 동시에 그 자체로 고유한 아름다움의 모습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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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25.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우리 내면의 바리사이들을 떨쳐내기 위하여~~~
오늘 우리가 듣는 마태오 복음 23장의 복음 말씀과 그 뒤에 이어지는 23장의 말씀은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이 극단적인 반-유대주의 부추기는 데 사용했던 구절들입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유대교 전체가 아니라, 예수님을 전적으로 반대했고 마침내는 그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바리사이들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마태오 사도 자신도 유대인이었고,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그분의 가족 전체가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리사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는 자기들의 종교적 관행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내적인 영이 그들에게 결핍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바리사이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참된 종교심을 지니고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적나라한 경고를 주는 상징이 아닐까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종교에든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아무도 지킬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엄격하게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자기 자신들마저 자기들이 해석한 율법의 규정들을 다 지킬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반 사람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삶을 선택했고, 또 그래서 자기들을 "분리된 자들"(바리사이들)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런 그들에게는 자기들의 삶을 내면화하는 참된 생명력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자기들(율법을 지키는 본인들)에게만 관심이 있었지, 하느님(사랑)에 대한 열정은 절대적으로 결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마 우리는 '바리사이들'에게 감사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교인들이 받는 끊임없는 유혹과 위험, 즉 우리 믿음의 대상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려는 유혹과 위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자주 미사성제나 다른 전례 기도 등을 통해 바리사이들을 만나는 이유는 과거의 바리사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비판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또 다른 이들 안에 있는 바리사이적인 요소들을 찾아내어 그들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바리사이들을 떨쳐내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하느님(사랑과 내적인 가치)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이 종교(제도와 외면, '나'를 드러냄)에만 관심을 갖고 신앙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근본적인 더 큰 문제는 바리사이들이 하느님께 대한 열정을 지닌 사람들이 되기 위해 이런 삶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외적인 규정들을 지키는 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의 표시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잘못된 믿음이 그들을 '위선자들'이 되게 한 것입니다.
한준상 교수는 자신의 저서 [행복]에서 '행복'은 목표 달성에 오는 결과가 아니라 그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내면을 살피고 진정한 가치를 내면화하는 작업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삶의 참된 의미를 찾아가며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게 된다는 점을 한교수는 강조합니다.
예전에도 한 번 언급해 드렸습니다만, 법정 스님 역시 비슷한 말을 합니다. 스님은 [산에는 꽃이 피네]에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채워가야 행복한 줄 아는데, 그것은 절대적인 착각이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이미 우리 안에 주어진 행복의 토대들을 보지 못하게 하는 우리의 그런 외적인 경향과 욕구를 버리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강조하여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야 합니다. "나는 정말로 행복하고 싶은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나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인 행복의 근거를 따르며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의 에고가 추구하는 '행복'의 길을 진정한 행복의 길이라고 여기면서, 즉 무의식적으로, 별 생각 없이 '나'를 드러내고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내면화하는 작업, 즉 마음의 수양을 하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또 다른 바리사이들이 우리 내면에 가득 차 있는 삶을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아니 더 심각한 것은 '내' 안에 바리사이들이 차 있는데도 이 현실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다른 사람들 안에서 비추어지는 '바리사이들'을 비판하면서 살아가는 것일 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바리사이적 요소들을 볼 수 있게 해 주시고, 그 길이 아닌 참된 사랑의 길, 참된 행복의 길로 이끌어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상의 하느님 사랑과 성체성사 안의 지극히 겸손하신 하느님 사랑의 현존에 우리 시선을 두기 위해 다시, 또다시 우리 정신과 마음과 의식을 깨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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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25.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마태 23,13)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학자들
“불행하여라”는 슬픈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당신의 진리가 주는 위로를 율법 안에 감추어 벼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언자들이 구원자의 오심을 예고한 사실을 잊어벼렸습니다. 그들은 거짓된 것을 가르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하늘 나라로 기는 것도 막습니다. 그들은 영원으로 가는 길을 아름답게 꾸미지 않습니다.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1
세가지 탄생
우리의 탄생, 하느님의 탄생, 하느님 자녀인 우리의 탄생
평화로운 침묵이 온 세상을 덮고 밤이 달려서 한고비에 다다랐을 때(지혜 18,14).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의 자녀다. “이 백성이야말로 하느님의 지손이다."
이것이야말로 엑카르트가 본 설교에서 전개하는 성서적인 주제다.
따라서 우리는 액카르트가 설교 18에서 염두에 두었던 것을 제대로 인식하게 된다. 설교 18에서 엑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잘라 말한다. “피조물 중에서 영혼만이 생식력이 있다." 영혼은 하느님의 아들을 낳는다. 낳음이라는 풍성한 개념이 품고 있는 의미들로 보건대, 우리가 경험하는 출산과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경험하는 출산이야말로 은총이다. 그리고 우리가 낳는 것은 새로운 빛을 몰고 오는 하느님의 형상이다. 그 빛은 마치 번개와도 같다. 어느 피조물도 그 빛에서 돌아설 수 없고. 그 빛을 무시할 수 없다. 낳음은 번개이자 돌파이며, 모든 복을 몰고 오는 복이다.
여러분 안에서 이루어지는 출산에만 집중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모든 선과 모든 위안과 모든 기쁨과 모든 존재와 모든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서 이루어지는 낳음을 무시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모든 선과 복을 무시하게 될 것입니다. 이 낳음 안에서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순수한 존재와 복을 가져오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낳음의 바깥에서 무언가를 찾거나 사랑한다면, 여러분이 무엇을 의도하든, 여러분이 어디에서 그렇게 하려고 하든 간에 그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453)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루카 9,51-62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예수님을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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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25.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빈센트 반 고흐는 천재일까요? 아니면 지극히 평범한 사람일까요? 꽤 오래전, 네덜란드에 갔다가 고흐 박물관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엄청나게 긴 줄이 있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솔직히 ‘그림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내가 이렇게 줄 서서 기다려 관람하는 것이 의미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언제 또 이 박물관에 올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미술에 문외한이라 할 수 있는 저였지만 큰 감동이었습니다. 자기 감정을 시각화했음을 볼 수 있었고, 그의 붓질은 격정과 생명의 리듬이었습니다. 잘 모르는 제가 봐도 그는 분명 천재였습니다. 그런데 이 천재성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가 이 위대한 작품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딱 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빈센트 반 고흐 자신이었습니다.
남이 인정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인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의심과 불행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자기를 스스로 인정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나를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했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없다고 해도, 하느님과 나의 관계를 통해 나를 긍정할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만드신 ‘나’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나’를 쓰고 계십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작품이 실패작일 수 있을까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허투루 사용하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늘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께서 나를 만드시고 사용하고 계심에 용기를 내며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세상의 기준만을 가지고 살아가면 하느님의 뜻에 맞춰서 살 수가 없게 됩니다.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는 불행 선언을 하십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하느님과의 관계를 두텁게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위선으로 사람들이 올바른 믿음을 갖지 못하게 했습니다. 형식적이고 자기 권위에만 매달리면서 하느님께 사람들이 가는 것을 막아버리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과의 관계를 잘 간직하면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도와야 합니다. 나의 이웃에게 참된 믿음의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의 명언: 삶은 언제나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그 불확실함과 아픔을 견디게 해주는 것은 결국 사람이고, 말이고, 마음이라는 것.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지만, 누군가가 그 무게를 나누어질 때 그 십자가는 더 이상 절망의 상징이 아니라 사랑의 증거가 된다(유정민, ‘앉지 못하는 아이, 곁에 앉아 준 마음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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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25.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 [big-llight]
■ 오직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만 매달리는 믿음을
어떤 이가 아주 상기된 얼굴로 불평불만을 거창하게 품어낸다.
이에 상대는 온화한 얼굴로 가로막으며
“당신은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를 과연 알고는 있기는 하요?
당신이 말하는 걸 어디 ’체‘로 걸러나 보았소?” 라며 되묻는다.
“체라니요?”
“그렇소, 체요.
겸손과 배려의 삶, 자신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인지를 골라주는 체요.
걸러지지 않는다면 그 말은 잊어버리시죠.
그렇게 마음고생을 하면서까지 불평불만만을 가질 필요까지는 없는 것 같네요.”
꼭 새길 말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 들어가려는 이들도 못 들어가게 막는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인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이 불행하다나.
그들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말과 행동만을 하기에.
과연 우리는 누구이며 어떤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렇다면 우리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과연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럼이 없단 말인가?
복음적이고 사랑의 소리여야만 한다.
또 해야 할 행동 역시나 복음적이며 사랑의 행동이라야 하리라.
이렇게 우리 신앙인은 저마다 고유한 행동반경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에 걸맞게 말과 행동에서 품위를 꼭 갖추어야만 할 게다.
예수님은 지도자들의 삶이 진실해야 한다고 강하게 꾸짖는다.
그렇지 못한 지도자들은 백성을 불행하게 하며 자신도 불행해진다면서.
그들은 눈먼 이들이라 백성을 그저 구렁텅이로 빠져들게도 한단다.
그렇지만 우리는 주님을 향한 곧은 목소리를 내는 삶을 늘 할게다.
그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자나 깨나 살펴보면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그 못된 행실을 아주 심하게 꾸짖는다.
사실 알고 보면 그들도 대단한 신앙심을 가진 이들일 게다.
나름대로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았다.
성경 지식도 해박하고 그 많은 율법마저 하나도 빠짐없이 지키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그들은 왜 그토록 예수님으로부터 늘 비난을 받았을까?
그것은 그들이 너무나도 율법에만 늘 집착하였기 때문일 게다.
율법은 단지 하느님 뜻을 잘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하나의 매체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너무나 율법만을 강조하다 보니 그만 하느님 뜻을 정확히 파악하고 실천하기보다는,
그저 그들 눈에만 보이는 율법 지키는 일에만 얽매인 것이리라.
우리 역시 이런 경향에 빠지기 쉬울게다.
자신보다는 이웃이 계명을 지키는지만 따지니까.
그러기에 자신의 삶의 목적을 정녕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렇게 이웃을 중히 여기는 삶을 살자.
자신의 권위나 위신만을 중시하는 위선적이고 교만한 자세는 이제는 벗어 버리자.
하느님과 이웃에 사랑을 관심두지 않는 삶을 과감히 청산하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보다 사람을 아끼고 이웃이 주님의 구원에 맛들이도록
‘배려하는 사랑’의 그 마음을 갖기를 바라신다.
믿음은 매일의 삶을 살아가는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힘일 게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믿음과 사랑은 함께 나아가야만 하리라.
그리스도인에게 믿음과 삶의 분리, 믿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분리,
생각과 말과 행위의 분리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거다.
이를 위해 애쓰며 기쁘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자세야말로
하늘 나라에 초대받은 이의 모습일 게다.
이웃에게 ‘하늘 나라의 문’을 막아서는 이가
혹시 우리가 아닌지를 스스로 되돌아보아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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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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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25.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슬로우 묵상]외침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 불행하여라. ” (마태 23. 13)
껍데기와 본질 사이에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단호히 외치십니다.
"불행하여라!"
그들이 하느님께 가는 문,
곧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문을 닫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막는 자리가 가장 큰 불행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성전보다 금을, 제단보다 예물을 더 귀히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즉, 본질보다 표징을, 관계보다 외형을, 하느님의 현존보다 껍데기를 추구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2천 년 전 율법학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도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입니다.
오늘의 금과 예물
오늘날 우리는 어떤 '금과 예물'에 매달리고 있을까요?
교회 안에서: 화려한 성당 건물이나 값비싼 전례 용품에 집착하면서, 정작 가난한 이웃에게는 인색한 모습을 보이지 않나요? 미사 중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것에 더 신경 쓰면서, 정작 말씀에는 집중하지 못하지 않나요?
신앙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는지, 얼마나 많은 헌금을 냈는지만 중요하게 여기면서, 실제 삶에서는 이웃사랑을 실천하지 않지 않나요? 성인 성명이나 교회 직책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데만 집중하면서, 겸손한 봉사는 뒤로 미루지 않나요?
일상에서: 자녀들의 신앙교육보다 성적과 진학에만 매달리면서,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삶"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고 있지 않나요?
눈먼 인도자와 투명한 창
예수님은 그들을 '눈먼 인도자'라고 부르십니다.
눈이 멀면 본질을 보지 못하고, 외적인 가치에 매달릴 뿐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자신이 눈이 먼 줄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길입니다. 교회와 신앙인은 자신을 드러내는 무대 배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빛을 투과시키는 투명한 창이어야 합니다.
드러내지 않고 선을 행하고, 판단하기 보다 이해하고, 나의 약함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할 때, 우리는 하늘나라의 문을 닫는 자리가 아니라. 열어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랑의 외침
예수님의 "불행하여라!"는 단순한 분노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흔들어 깨우는 사랑의 외침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자녀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보는 부모의 마음처럼,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시려는 그분의 열정,
본질로 우리를 돌려세우려는 사랑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사막에서 눈을 뜬 인도자 이야기
그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한 율법학자의 마음을 상상해 봅니다.
어느 날, 한 율법학자가 성전에서 예수라는 젊은이의 외침을 들었다.
“불행하여라, 위선자들아!”
그 말은 불처럼 그의 가슴을 태웠다.
분노했지만, 그 말은 거울처럼 그의 민낯을 비추었다.
그는 도망치듯 성전을 나와, 사막으로 몸을 숨겼다.
사막은 잔인했다.
모래바람이 그의 눈을 가리고, 그는 길을 잃었다.
어둠 속에서 그는 자신이 얼마나 작고, 얼마나 텅 빈 존재인지 깨달았다.
그때, 거룩한 한 분이 다가와 그를 안아 주었다.
“너는 나의 모상이다.
그 누구도 너를 해칠 수 없다.
너 스스로조차 너를 함부로 하지 말아라.”
그 말에 그의 눈물이 모래 위에 떨어졌다.
마치 메마른 땅에 샘물이 솟듯, 그의 영혼 깊은 곳에 생명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그가 더 이상 옛 율법의 무게로 사람들을 짓누르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는 사랑으로 인도했고, 자비로 가르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사막에서 눈을 뜬 인도자.”
주님,
저를 눈먼 인도자가 아니라
빛을 따라 걷는 인도자로 세워 주소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숨결을 보게 하시고,
닫힌 문이 아니라 열린 문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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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25.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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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25.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23,13-22 “무엇이 더 중요하냐?“
십계명의 제2계명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입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매우 불경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알려주신 당신 이름 ‘야훼’를 ‘아도나이’, 즉 ‘주님’이라는 말로 바꾸어서 부를 정도였지요. 그랬기에 다른 사람 앞에서 약속의 맹세를 할 일이 있으면 차마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지는 못하고, 대신 하느님께서 머무르신다고 생각하는 성전이나 제단, 혹은 하늘을 두고 맹세했습니다. 하느님이라는 이름을 명시적으로 부르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상 하느님을 두고 맹세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율법에 대해 잘 안다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오늘날 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 그 법의 맹점을 이용하여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것처럼, 율법의 맹점을 이용하여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맹세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며 맹세한 것이 아니니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한 것이지요. 하느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원하는 것을 얻어놓고, 그에 따르는 책임은 회피하려고 드는 비겁한 모습입니다. 그러면서도 성전에 바친 금이나,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성전이나 제단이 하느님께 속한 거룩한 물건이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댔지만, 속 마음엔 상대방이 맹세를 지키지 않은 것을 핑계로 삼아 그가 하느님께 바친 재물을 가로채려는 탐욕이 가득했던 겁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검은 속내가 뻔히 보이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행태를 ‘위선’이라고 지적하시며 강도 높게 비난하십니다. 그들에게 ‘무엇이 더 중요하냐’고 물으시지만 사실 그 답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정해져있지요. 성전에 바친 금보다는 하느님을 위해 그 금을 ‘성별’하여 보관하는 성전이 중요합니다. 제단 위에 놓인 예물보다는 그 예물을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 예식을 거행함으로써 예물을 바친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어주는 제단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성전이나 제단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머무르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시지요. 그러니 탐욕과 집착에 눈이 멀어 부수적인 것들만 신경쓸 게 아니라 우리 구원에 직결되는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귀기울여 들으며 그분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리고 따라야 합니다. 그 기본조차 지키지 않으면서 자기 겉모습을 거룩하게 보이려고 이런저런 노력들을 해봐야,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는 다 부질없는 ‘위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겉으로만 거룩한 척, 선한 척 하지 말고, 하느님의 뜻에 철저히 순명하는 행동과 삶으로 속부터 거룩하게 만들어야겠습니다. 그렇게 참된 행복을 누리기 위한 내실을 잘 다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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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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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4326
8월25일 [연중 제 21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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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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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예수회 김연수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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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깊이 있고 감미로운 기도 생활을 맛보았다면!>
이 주간 계속 봉독하게 될 마태오 복음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를 향한 예수님의 강력한 경고 말씀인데, 천천히 듣고 묵상해보니, 너무나 강경하고 날 선 말씀이라, 당시 말씀을 듣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엄청 화가 났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정곡을 찌르는 데다, 당시 그들이 실제적으로 저지르던 악행을 너무나 정확하게 지적하시니,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입장에서 속이 부글부글거리며 어떻게 하면 제대로 복수할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을 것입니다.
지도자들이나 절대 권력이 저지르는 불의와 악행 앞에 절대 침묵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 우리 가톨릭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이 수시로 직면하는 거대한 악과 불의 앞에 취해야 할 노선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나라 전체가, 교회 전체가, 공동체 전체가 최고 책임자와 그 주변 인물들의 그릇된 처신과 선택 앞에서, 그러려니 하고 침묵한다? 그들의 회개를 위해 조용히 기도만 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정치는 정치인들에게 맡긴다? 성직자들은 교회 울타리 안에서 조신하게 신앙의 진리만 선포한다?
예수님께서 보시면 크게 분노하실 처신이리라 확신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영적 생활만 잘 하면 그만인 사람들이 결코 아닙니다.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영적 생활과 실제 생활이 잘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깊이 있고 감미로운 기도 생활을 맛보았다면, 그 결과물이 있어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과 더 조화롭게 지내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성장과 쇄신을 위해 더 노력하고, 복음 정신에 따라 공동선을 실천하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동료 인간들을 위해 헌신해야 마땅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날 선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불에 달군 화살 같은 예수님 말씀의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 사목자들, 성직자, 수도자, 지도자들을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가끔 만나게 되는 증거가 안되는 사목자, 지도자들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봅니다. 세상이 바뀐지 오래 지났는데도, 아직도 구 시대적, 제왕적, 독단적, 가부장적인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과도하고 분별없는 언행으로 인해 공동체 전체가 고통을 받습니다. 양들은 목자로부터 사랑받고 위로받기는커녕 협박받고 공격당합니다.
그들은 존재 자체로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 증거자로 전락합니다. 어떻게든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해도 부족한데, 하느님 나라의 문을 잠가버립니다. 결국 그들도 못 들어가게 하고 본인도 들어가지 못하는 참혹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나이를 조금 먹어가다보니 과거 젊은 사목자 시절 미성숙과 부족함으로 인해 양들에게 저질렀던 과오와 흑역사가 떠오릅니다. 떠오를 때마다 큰 부끄러움과 송구함에 크게 이불킥을 합니다. 더 이상 부끄러운 위선자나 눈먼 인도자로 살지 않도록 간절히 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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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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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이 중한지를 분별하는 질문: “그러면 누가 좋은 건데?”>
내년이면 우리 조원동 주교좌성당이 설립된 지 50주년이 되는 매우 뜻깊은 해입니다. 50주년을 맞아 저는 오랫동안 한 가지를 두고 갈등하고 있습니다. 바로 본당의 ‘장궤틀’을 교체하는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장궤틀은 30년이 넘어 낡았습니다. 여전히 쓸 수는 있지만, 솔직히 주교좌성당의 위상에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듭니다.
50주년이라는 역사적인 시점에, 성전의 모습을 일신하고 신자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기도하도록
하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한 마음으로는, 제가 주임으로 있는 동안 무언가 기념비적인 일을 해냈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저 장궤틀은 전삼용 신부 때 바꾼 거야.’ 이런 말을 듣고 싶은 욕심이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아직 쓸 수 있는 것을 굳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바꾸는 것이 과연 주님의 뜻일까?’, ‘이것이 정말 신자들을 위한 일일까, 아니면 나의 만족과 명예를 위한 일일까?’ 뭣이 중한지를 분별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런 갈림길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기준으로 선택을 해야 할까요? 바로 이 질문이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해야 할 강론의 주제입니다.
‘뭣이 중한지’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라고 강하게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멀어,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왜였을까요? 그들은 세속-육신-마귀, 즉 ‘자아의 욕망’에 사로잡혀 오로지 ‘자기 좋은 것’만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개종자 하나를 얻기 위해 세상 끝까지 갈 정도로 열심했지만, 그 동기는 하느님의 영광이 아니라 ‘우리 편을 하나 더 만들었다’는 자신들의 세력 과시였습니다.그들은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어겨도 되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거룩한 성전보다, 자신들의 배를 불릴 수 있는 금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하느님과 이웃의 마음은 보이지 않고, 오직 자신의 지위와 이익, 명예만이 보였습니다.
영화 ‘설국열차’의 주인공 커티스가 바로 이들의 모습입니다. 그는 기차 안에서 살아남아 앞 칸으로 가겠다는 생존 욕구에 눈이 멀어, 창밖 세상의 눈이 녹고 있다는 ‘새로운 생명의 신호’를 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남궁민수는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존보다 딸의 미래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사랑하는 딸에게 진짜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는 ‘사랑의 욕구’가 있었기에, 그의 눈은 기차 밖을 향할 수 있었고, 마침내 ‘뭣이 중한지’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커티스처럼 욕망의 기차를 폭주하는 우리가 어떻게 멈춰 설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신호등’이 필요합니다. 내가 지금 빨간불을 무시하고 달리고 있는지, 파란불에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알려주는 외부의 신호 말입니다.
2012년 침몰한 ‘코스타 콩코르디아’호의 스케티노 선장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는 4천 명이 넘는 승객들을 배에 남겨두고 자신 먼저 구명보트에 올랐습니다. 자신의 생존 욕구에 눈이 멀어 선장으로서 ‘뭣이 중한지’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입니다. 바로 그때, 이탈리아 해안 경비대장이 무전을 통해 불호령을 내립니다. “Vada a bordo, cazzo!”(배로 다시 돌아가, 이 자식아!) 이 세상의 분노 섞인 외침이 바로 그에게는 ‘신호등’이었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는, 나 자신이 아니라 고통받는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 평가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오랜 전통 안에서 “백성의 목소리는 하느님의 목소리(Vox populi, vox Dei)”라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처음에 던졌던 장궤틀 문제의 답을 여기서 찾으려 합니다. 이것이 저의 욕심인지, 아니면 공동체 전체의 선익을 위한 일인지를 분별하기 위해, 저는 이 문제를 본당의 모든 신자들에게 묻고 그 결정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 본당 신자 대다수가 기쁜 마음으로 이 일에 동참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은총의 신호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많은 분들이 시기상조라고 여기거나 마음의 부담을 느끼신다면, 그것은 아직 때가 아니라는 주님의 뜻일 것입니다. 저의 욕심은, 여러분이라는 ‘하느님의 목소리’ 앞에서 멈춰 서야 합니다.
영화 ‘곡성’에서 평범한 경찰인 주인공은, 정체불명의 사건에 딸이 얽혀 들어가자 이성을 잃고 헤매기 시작합니다. 그는 경찰로서 사건을 해결하려는 ‘일’과, 딸을 살리려는 ‘사랑’ 사이에서 혼란에 빠집니다. 그런 그를 향해 한 인물이 절규하듯 외칩니다. 대한민국 모두가 아는 그 대사입니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뭣이 중헌디’. 이것이 우리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자아의 생존 욕구에 눈이 멀어 성전의 ‘금’을 좇을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바쳐 성전의 ‘주인’을 사랑할 것인가. 개신교는 성체의 중요성을 잃어버리면서, ‘뭣이 중헌지’에 대한 가장 확실한 답을 놓쳤습니다. 신앙에서 ‘사랑을 증가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지식도, 우리의 열심도, 우리의 봉사도, 그것이 사랑을 증가시키는 데 봉사하지 않는다면 모두 성전의 금을 좇는 행위일 뿐입니다. 성체성사는 바로 이 사랑을 우리 안에 채워주는 유일한 신적 통로입니다. 이 진실을 깨닫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가 보아야 할 ‘뭣이 중헌지’의 최종 결론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1코린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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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해 강하게 꾸짖는 장면을 만납니다. 그들의 위선적인 종교 행위, 겉으로는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명예와 이익을 앞세우는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라는 단호한 말로 지적하십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단지 당대의 바리사이파를 향한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를 향한 물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더 소중히 여기며 살고 있는가? 무엇에 눈을 두고, 무엇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가?
‘산 넘어서 또 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슬픔이 쓰나미처럼 밀려온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자리를 잡으려는데 가족의 건강에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아버지는 암 투병으로 기력이 쇠해졌습니다. 아들은 오랜 시간 신장 투석을 하는 몸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허리통증이 심해서 병원에 갔더니 암으로 판정되었습니다. 가족력으로 당뇨가 심한 자매님이 있습니다. 혈압이 높아서 뇌졸중이 왔고,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일주일에 3번 투석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발에 작은 상처가 났는데 아물지 않고 염증이 심해져서 한쪽 발을 절단해야 한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병자성사를 드리면서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저는 종종 고통과 질병, 상실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교우들을 만납니다. “산 넘어서 또 산”이라는 표현처럼, 한고비를 넘으면 또 다른 시련이 밀려오는 삶의 굽이굽이에서, 저는 하느님의 얼굴을 찾는 이들의 눈동자에서 깊은 성찰의 울림을 느낍니다. 당뇨, 암, 투석, 절단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파도 앞에 서 있을 때, 우리는 종종 묻습니다. “주님, 왜 저입니까?”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신자들은 기도를 멈추지 않고, 미사에 참여하고, 눈물을 삼키며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이들의 삶은 단순한 ‘신체의 고통’을 넘어 ‘존재의 무게’를 견뎌내는 위대한 믿음의 길입니다. 여기서 ‘존재의 심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고백을 듣게 됩니다.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신을 찾고, 진리를 향해 나아갑니다. 고통은 인간의 가장 깊은 질문을 끌어내는 신앙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토론한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 문제점은 ‘대형화’였습니다. 대형화된 교회는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습니다. 필요한 건물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형화된 교회는 신자들의 아픔과 고통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큰 비용이 들기 때문에 신자들은 더 많은 헌금을 내야 됩니다. 두 번째 문제점은 ‘중산층화’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 병자들, 장애인들과 늘 함께하였습니다. 중산층화된 교회는 풍요와 축복을 이야기하기 마련입니다.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에게 교회의 문턱이 점차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문제점은 ‘제도화’였습니다. 제도화된 교회에서는 성령께서 함께하시기 어렵습니다. 제도화된 교회에서는 사랑과 관용, 이해와 용서가 자리 잡기 어렵습니다. 법과 규정으로 신자들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데,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돈’이 있습니다. 자본이 가져다주는 화려함과 풍요에 중독된 우리들의 일그러진 양심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이라는 곳간에 더 많은 재물을 쌓으려는 욕심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예전에 신학교 교수 신부님께서 말씀해 주셨던 사제의 덕목이 떠오릅니다. 기도하는 사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시대를 읽고, 공부하는 사제는 교회의 지혜로 진리를 전하며, 성실한 강론을 준비하는 사제는 지친 영혼을 위로합니다.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제는 늘 깨어있는 영적 감수성을 지니고, 건강을 지키는 사제는 하느님의 도구로 살아갈 체력을 유지합니다. 이 다섯 가지는 단지 사제만의 덕목이 아니라, 우리가 기억해야 할 ‘신앙인의 삶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십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눈에 보이는 것, 사람의 영광, 세상의 기준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하느님의 뜻, 사랑, 자비, 공감, 용서, 믿음,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이 더 중요한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세상의 금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성전을 따라갔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똑같은 길을 갔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어떤 길을 따라가야 할까요? “주님! 크신 자비로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저희에게 주소서. 주님! 금이 아닌,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을 더 사랑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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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부터 다음 주 화요일까지 평일 미사 독서로 테살로니카 1서를 읽습니다. 신약 성경 가운데 가장 먼저 쓰이고 그리스도교 최초의 문헌인 이 서간은 기원후 51년 무렵 집필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속주인 마케도니아의 주도 테살로니카에 바오로 사도가 처음 도착한 것은 제2차 선교 여행을 하던 50년 무렵입니다. 이 도시는 그가 방문한 유럽 대륙의 첫 대도시입니다.
테살로니카에 살던 유다인들이 그의 활동에 어깃장을 놓았기에,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한밤중에 그 일행을 베로이아로 보냅니다. 그곳까지 쫓아온 유다인들은 바오로 사도의 선교를 방해합니다. 새로 생겨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두고 떠나야 하였던 바오로 사도의 마음은 갓난아기를 집에 남겨 둔 채 떠나야 하는 부모의 마음과 같지 않았을까요?
제1독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1테살 1,1)라는 인사는 바오로 서간의 전형적 특징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신자들에게 빌어 주는 은총과 평화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께 속합니다.
둘째,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모두 기억”(1,2)한다는 내용은 서간의 발신인과 수신인들의 유대를 다시 확인해 줍니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더라도 기도로 이어져 있다는 뜻이지요.
셋째,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와 …… 희망의 인내”(1,3)라는 표현도 인상적입니다. 신망애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로 풀이됩니다.
넷째,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게 되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1,10)라는 이 구절은 주님께서 다시 오심이 가까이 왔다는 생각에 불안해하였을 신자들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반영합니다. 테살로니카 1서를 읽으면서 바오로 사도가 품었을 부모의 마음을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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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3,13-22: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13.15절) 위선자라는 말은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내면의 상상과 감정은 겉과 다른 것이다. 그들은 율법을 준수하지만, 마음속으로 이웃을 이해하거나 동정하거나 사랑하거나 해서 하지 않고, 교만함과 자기만족이 가득 차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불행한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하늘나라의 문을 자기 자신의 못된 행위로 닫아 놓고는 자신도 못 들어가고 들어가려는 다른 사람들까지도 가로막는 데에 있었다. 하늘나라의 시민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다. 그 뜻이란 사랑의 실천이다.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소홀히 한 그것이 바로 자신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닫아버리는 행위라고 예수님은 책망하신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떤가? 예수께서 당시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그토록 불행하여라! 라고 진노하셨다면 예수님의 그 진노를 받을 만한 허물이 과연 나에게는 없는가? 특히 하느님 앞에 다른 형제들보다 먼저 불림을 받고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안다고 하면서, 실생활은 예수님 시대의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처럼, 오늘날의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이 되어 다른 이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까지도 내 악한 표양으로 막고 있지는 않은가? 언제나 우리 자신을 성찰하며 참된 하느님 자녀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 말씀 앞에 진정 하느님의 뜻을 따름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경외하며 겸손하게 행하도록 해야겠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진정으로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뜻 그리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면서 우리가 체험하면서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임을 생각하며 진정으로 하느님 앞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께 축복을 받는 삶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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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의 바램>
마태오 23,13-2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사실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고,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길의 바램>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마태 23,16ㄱ)
길
따라
걸으니
어느덧
길
되어
따르는
길
하나둘
이어져
앞선
길에는
뒤선
길이요
뒤선
길에는
앞선
길일지니
앞선
길
뒤선
길
잇는
길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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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거짓 맹세와 헛된 맹세는 말로 짓는 큰 죄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사실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고,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마태 23,13-22)
1)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잘못된 길을 가르쳐서, 배우는 사람이 ‘구원의 길’이 아닌 ‘멸망의 길’로 가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린 것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멸망하게 만드는 것은, 그 자신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게 되는 큰 죄입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는 것과 같습니다.>
‘말과 행실이 다른’(마태 23,3) 위선자들이 가르치는 위치에 있다면, 그리고 배우는 사람이 그 위선을 알아보지 못하고 속는다면, 그렇게 사는 것이 신앙생활인 줄 알게 될 것이고, 그래서 똑같은 위선자가 될 것이고, 하늘나라에서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의 ‘말’과 ‘행실’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자기 혼자 죄 짓고 자기 혼자 지옥에 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냉담자들의 냉담 원인에 대한 설문 조사에서, ‘본당 신부와 수도자 때문에’ 라는 답변이 가장 높은 순위에 있습니다.>
2) 우리는 선교활동에 대해서도 많은 반성을 해야 합니다. 선교활동 때문에 냉담자만 늘어나는 것은 아닌가? 또는 이단자만 늘어나는 것은 아닌가? 양적인 결과에만 집착하고, 중시하고, 시상식을 하고... 그래서 충분한 교리교육 없이 너무 쉽게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성사를 주고, 그것이 무슨 대단한 업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랑하고... 그런 일들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닙니다.
3) ‘맹세’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산상설교에서 단순하고 명확하게 가르치셨습니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3-37)
거짓 맹세의 대표적인 예는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일입니다. “그때에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였다. 그러자 곧 닭이 울었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마태 26,74-74)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라는 말은, 거짓 맹세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의식하면서도, 그것을 감추려고 거짓 맹세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의 죄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하면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끊은 죄와 거짓 맹세를 하면서 하느님을 모독한 죄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느끼고 절박한 심정으로,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맹세를 했을 것이고, 그것이 효과가 있긴 했습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 자신의 양심이 그를 크게 괴롭혔고, 평생 고통을 겪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그 전에, 최후의 만찬 때 베드로 사도가 했던 말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마태 26,35) ‘죽는 한이 있더라도’ 라는 말도 ‘맹세’입니다. 그 말을 할 때에는 정말로 예수님과 함께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거짓 맹세가 되어버렸습니다.
4) 바오로 사도는 ‘말’에 관해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에페 4,29) <거짓 맹세나 지키지 못할 맹세는 모두 ‘나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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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신앙이 주는 위로>
코로나19로 인해 잘 볼 수 없으나‘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띠를 두르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확성기를 틀어놓고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을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을 갑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열성을 가지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아름답다고 할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올바로 믿고, 전하는 방법도 예수님께서 하신 방법으로 하여 꼭 구원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겸손한 삶의 모범이 필요합니다.
이사야는 예언자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있고 나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은 사람들에게서 배운 계명일 뿐이니 나는 이 백성에게 놀라운 일을, 놀랍고 기이한 일을 계속 보이리라.”(이사 29,13-14) 우리는 이런 책망을 듣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마태23,16)라고 하시는 말씀은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달으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덜 중요한 것을 더 중요한 것보다 더 중시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내신 주님 안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 된 지를 분별해야 하고 그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마태 5,33-37)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취미생활이나 여가 생활의 연장이 아닙니다.
주님께 대한 열정을 긍정적으로 보면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나쁘기로 말하면 좋은 것보다 훨씬 더 나쁘기도 합니다. 열심이 지나쳐서 고약한 광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하느님을 등에 업고 자기를 내세우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짐만 지우게 됩니다. 그릇된 신심에 빠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마태 23,4)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율법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 사랑하고 희망합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준수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본말이 바뀌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내세워야 합니다. 죄와 벌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지옥의 공포로 몰아가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위선자로 지목되어 야단을 맞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람에게 희망을 주어야지 절망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과 자비가 없는 종교는 무의미합니다. 자비를 입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이 신앙이 주는 위로요, 희망입니다. "신앙은 '자장가'가 아니라 행동하기 위해 지핀 불입니다."(프란치스코교황)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것은 좋으나 진심 어린 삶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우리 역시 그 화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기에 앞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눈떠야 하겠습니다. 온갖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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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불행하여라.”라는 낱말은 단죄나 위협보다는 안타까움과 아픔을 표현하는 것으로, 사랑으로 훈육하는 탄식입니다. 이 표현이 오늘 복음과 이틀 뒤 복음에 잇달아 나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통하여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오늘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와 우리 가정, 교회와 사회를 비추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는 사람들에 대하여 탄식하십니다.(13절 참조) 그들이 소개하는 하느님께서는 무섭고 엄한 심판관으로 좀처럼 자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성경 본문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종교를 이용하여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이들에 대하여 탄식하십니다(14절 각주 참조). 예수님께서는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하는 자들을 꾸짖으시면서 이들은 더 엄한 벌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하고, 살면서 일정한 수고의 대가를 받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루카 10,7; 1코린 9,13-14 참조)
그러나 기도를 비롯한 종교적 의례와 행위를 자신을 부유하게 하는 수단으로 삼는 것은 위선으로 가득 찬 행동입니다. 그것은 종교를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으로 전락시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상인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이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11,15-19 참조)
사도행전에는 성령의 은사를 돈으로 매수하려 한 시몬이라는 자가 베드로 사도에게 엄중한 질책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8,18-24 참조) 오늘 복음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의 탄식들에 대하여 하나씩 묵상하며 우리가 끊어 내고 걷어 내야 할 것들을 성찰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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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몇 년 전, 한 형제님이 찾아와 기도를 배우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기도하는 방법을 설명해 드리면서, 기도 중에 혹시 과거의 상처가 떠오르면 그때의 상황을 하느님께 자세히 말씀드리되, 있는 그대로, 끝까지 말씀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끝까지 말하면 침묵 가운데 떠오르는 말씀이 있을 것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형제님이 찾아왔습니다.
“신부님, 답을 찾았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네가 잘되면 우리 집안이 망한다.’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살아오면서 얼마나 아팠는지요. 기도 중에 이 상처가 떠올랐어요. 제가 어릴 때 탁발승이 시주를 받은 뒤 어머니에게 그 아픈 말을 남겼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를 비롯한 집안 어른들은 집안이 망한다는 말을 자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스님을 원망하며 하느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스님 때문에 집안 어른들까지 저만 보면 그 이야기를 해서 제가 평생 얼마나 아팠는지 몰라요.’
하느님께 매달리면서 방 안을 떼굴떼굴 구르며 울다 보니, 어느 순간 불타는 가시덤불 앞에 선 모세가 보였습니다. 그 가시나무가 불에 타 없어지지 않으면서 불꽃이 일듯, 제 아픔도 가시나무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픔은 불꽃으로 저를 힘들게 하였지만, 모세가 하느님을 만난 것처럼 저 또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 아픈 가시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조심하고, 또 얼마나 하느님을 찾으며 살았는지요!”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자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하느님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인도하는 너희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하느님이 아닌 세상 것을 중심에 두는 눈먼 자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이 말씀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지도자와 단체장 등 나름 ‘열심히 활동하는 신자’인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닐는지요. 날마다 성찰하며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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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무엇이 더 중요한가?>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초기에 '산상 설교'를 통하여 여덟 가지의 '행복 선언'(마태 5,3-12)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후기에 이르러 일곱 가지의 '불행 선언'(마태 23,13-36)을 들려줍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세 번째 까지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마태 23,17-19) 우리는 살아가면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우선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깜박 놓쳐버리곤 합니다.
물론 더러는 방법상에서 최선이 아닌 차선을 택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또는 한 발짝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 발짝을 뒤로 물러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체 무엇이 체(몸)이고, 무엇이 용(활용)인지는 알아야 합니다. 자칫 그렇지 못하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위선자요 눈 먼 인도자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누가 옳으냐?’ ‘누가 잘하느냐?’ 하고, 서로를 따지고 계산하고 심판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나서,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는가?’ ‘받아들이고 있는가?’ 라는 인격적인 관계로의 회귀입니다.
그것은 일이나 능력 중심에서 벗어나서, 하느님과 사랑 중심으로의 회귀요, 본질의 삶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대체,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묻게 합니다.
“금인가?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인가?”
“예물인가?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인가?”
“하느님이 계신 곳인가? 아니면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인가?”
“일을 잘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일을 사랑으로 하는 것인가?”
“나의 뜻을 완수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것인가?”
“나 자신인가? 아니면 나의 주인이신 하느님인가?”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여기에는, 먼저 앞세워야 할 일을 선택할 수 있는, 맑고 명료한 분별과 그를 따를 수 있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사도 바오로처럼,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1코린 2,2)라고 하는 본질을 위한 투신을 요청합니다.
하오니 주님!
진리가 제 자신을 이끌게 하되, 마치 저 자신을 진리인 양 앞세우지 말게 하소서!
참으로 우리의 삶이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 되게 하시고, 진정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사랑을 아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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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마태 23,17)
주님!
저는 참으로 어리석고, 눈 먼 자입니다.
함께 계시는 당신을 망각하고 무시하고 있으니, 진정 눈 먼 자입니다.
저의 무지를 받아들이기보다 저의 주장을 앞세우니, 진정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오니, 주님!
진리가 제 자신을 이끌게 하되, 저 자신을 진리인 양 앞세우지 말게 하소서!
참으로 나의 삶이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시고,
진정 나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사랑을 아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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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복음적 삶>
- “회개와 개혁; 원천의 순수에로 돌아가기”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성도들의 모임에 그 찬송 울리어라.”(시편149,1)
한밤중 잠도 자지 않고 줄기차게 하느님을 찬미하는 매미들 노래 소리가 지금도 한창입니다. 지금까지 구약의 제1독서는 끝나고 연중 제21주간 부터는 신약 27권중에서 가장 먼저 51년경 쓰여진 바오로 사도의 1테살로니카 서간이 시작됩니다. 복음서보다 20년전쯤 쓰여졌고 초대교회의 순수한 복음적 삶을 보여줍니다.
사실 제1독서 바오로 서간의 교회와 “불행하여라”로 시작되는 일부 부패하고 타락한 마태복음 교회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상징하는 바, 시공을 초월하여 반복되는 위선적 무지로 눈먼 어리석은 교회지도자들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저절로 순수는 사라지고 타락과 부패가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이래서 원천의 순수에로 돌아가려는 회개와 개혁의 운동이 일어납니다. 수도회의 개혁도 늘 <부유함에서 복음적 가난으로>, <세속화에서 사막의 고독으로>의 회귀라는 철저한 회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28년전 원천의 순수를 희구하며 쓴 <푸른 삶>과 <옹달샘>이란 두 편의 짧은 시가 생각납니다. 1997년 4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쓴 시입니다.
“푸른 산
맑은 물
푸른 삶 맑은 영성
산에
가까울수록
흐르는 물은 맑고
하느님께
가까울수록
흐르는 영성 또한 맑다”<1997.4. >
“누가 뭐래도
하늘이 무너져도
나 불암산의 옹달샘으로 머물으리라
확장도 개발도 홍보도
그 무슨 인위의 장식도 없이
자연 그대로의 옹달샘으로 나 머물으리라
주님 안에 숨어 사는
옹달샘으로 나 머물으리라
목마른 이들에게 샘솟는 물이 되리라”<1997.4. >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순수를 유지하려는 결의를 다짐하며 쓴 글입니다. 답은 하나입니다. 하루하루 부단한 회개와 개혁으로 단순한 원천에의 회귀가 아니라, 안팎이 다른 위선적 삶이 아니라 안팎이 같은,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워지는”(ever old, ever new) 삶이겠습니다.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언급도 생각납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내면과 외면은 서로 어긋나지 않는 한 몸이니, 겉을 보면 속을 짐작할 수 있고 속을 보면 겉을 이해할 수 있다.”<다산>
“바탕이 겉모습을 넘어서면 거칠어지고, 겉모습이 바탕을 넘어서면 겉치레가 된다. 겉모습과 바탕이 잘 어울린 후에야 군자답다.”<논어>
늘 회개와 개혁으로,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 안팎이 같은 진실과 겸손의 사람이 군자요 참 신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의 대표적 인물이 어제 소개한 얼마전 선종한 유경촌 주교와 현임의 레오14세 교황입니다. 두분 다 자발적 기쁨으로 시류에 맞서 고군분투의 복음적 삶을 사셨던 분들입니다.
“말로만 아니라 삶으로 실천된 증인이었습니다. 교회의 얼굴로 사회와 마주하시되 언제나 그 중심에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연민과 존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직을 온전히 살아 낸 한 사제의 흔적을 보게 됩니다.”<유경촌 주교 장례미사중 정순택 대주교의강론>
“가난한 이들의 환경, 평화등에 깊은 관심, 프란치스코 교황 사목 방침 계승하며 자신만의 정체성 드러난 행보 선보여. 아우구스티노 성인 영성 자주 언급, 예수 그리스도 중심 신앙 회복 강조. 사랑과 일치로 이끄는 리더십, 위대한 교부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 안에서 보편교회 나아갈 길 찾음, 세계 지도자 중 호감도 제1위”<가톨릭신문, 레온 14세 교황에 관한 박지순 기자의 글>
결국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두분처럼 주님의 얼굴을 반사할 때 비로소 사람은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원천의 순수에서 많이 벗어난 교회 지도자의 부패하고 타락한 보편적 경향을 보여줍니다. 초대교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역사상 반복되는 부정적 현상입니다.
산상설교나 시편들에서 많이 강조되는 “행복하여라”와 정 반대로 “불행하여라” 불행선언으로 시작되는 오늘 복음입니다. 바로 본말전도, 주객전도의 무지한 위선적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대한 가차없는 질책입니다. 이런 지도자들은 예나 이제나 교회에 있기 마련인 보편적 부정적 현상이기도 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눈먼 자들아!”
이는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깊은 아픔, 심판예고로 이어지는 분노를 드러내면서 결정적 회개의 촉구입니다. 참으로 회개의 일상화, 회개의 생활화, 회개의 습관화로 늘 복음적 가난과 겸손의 순수한 삶을 살아냄이 얼마나 결정적 중요성을 지니는지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바오로 서간의 세속화로 오염되지 않은 아름다운 복음적 교회의 무공해 신자들입니다. 바오로의 아낌없는 감사와 찬사로 가득한 내용을 일부 소개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 모두 기억하며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의 인내를 기억합니다.
여러분은 큰 환난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오로와 그 일행을 닮아 삼위일체 하느님 중심에 신망애 충만한 삶이요,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와 참 하느님을 섬기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삶에 충실한 테살로니카 신도들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복음적 삶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복음적 순수의 신망애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여 높이신다.”(시편 1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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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무엇이 중헌디!>
전에 눈여겨보지 않았던 말씀이 오늘 처음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두 번이나 이 말씀을 하십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이 말씀은 한때 유행하던 말을 떠오르게 하지요?
‘뭣이 중헌디!’
영화에 나온 대사라고 들었는데 그 영화를 보지 않아서 어떤 상황 또는 어떤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놓치고 사소한 것에 대해 집착하는 것에 대한 일갈일 것입니다.
사실 사는 동안 작은 것에 집착하여 일을 그르치는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참 많았기에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라는 말도 옛날부터 있지 않았습니까?
예를 들어 돈은 아주 작은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돈이 있어도 작은 겁니다.
필요한 것일 뿐 중요한 것이 아니기에 가치의 크고 작음을 따지면 작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야 마땅한데 실제로 살다 보면 돈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여 건강까지 잃고 맙니다. 그리고 그런 뒤에야 ‘뭣이 중헌디!’하고 자신에게 말하곤 합니다.
한 인간도 이러면 건강을 망치고 인생을 망치는데 국가나 종교 지도자가 그러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오도하여 인생을 망치겠습니까?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왕왕 있는 일이었고, 주님 당시의 지도자들도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도 그들이 어리석은데다 눈까지 먼 불행한 인도자들이라고 하시며 무엇이 더 중요하냐고 질문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질책입니다. 그리고 꾸짖기만 하시는 질책(叱責)이 아니라 바로잡으라는 질책(質責)입니다.
우선 자신부터 중심을 바로잡으라는 질책입니다. 중심을 바로잡는 것은 중요한 것이 자기 안에 자리 잡게 하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갖가지 욕심이 자기 안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위선을 낳는 인정 욕구, 눈 멀게 하는 재물 욕심, 안주케 하는 안정 욕구, 이런 욕구와 욕심들이 내 안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하는 것이요, 진실과 진리와 사랑이 내 안에 중심 잡게 하는 것이며,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 내 중심에 계시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주님께 질책받기 전에 나부터 무엇이 중한지 스스로 질문하는 우리가 되고, 진실과 진리와 사랑의 주님을 우리 중심에 모시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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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마태오 복음 23장 13절)
유다교에서 율법은 철저하게 지켜져야 할 하나의 규범, 계명이었습니다. 삶을 이해하는 길로써의 지침 또는 표지판이었습니다.
이러한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던 사람들이 바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호되게 질책을 받습니다. 율법은 잘 지켰지만, 율법의 본질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그런 위선을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기도에 대한 고민을 말했습니다. "신부님, 기도하는 것이 너무 힘들고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 우리가 '기도의 본질'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이 바치던 기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는 '기도의 본질'이 '기억과 머뭄'이라고 말하는 사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 기도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사제입니다. 때문에, 기도는 쉽게 바칠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쉽게 바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처럼 교회가 만들어 놓은 '율법과도 같은 기도'를 바치는 것에만 급급하고, 그것이 기도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도 위선자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불러야 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하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복음 13장 34절)는 새 계명을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불행한 위선자들이 되지 말고, 행복한 신자들, 행복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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