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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卯胡亂(정묘호란) 💢1篇(1편)💢
천명제[天命帝, 明(명) 가정(嘉靖) 35年(년) 1月(월) 15日(일) (1559年(년) 2月(월) 21日(일) ~ 천명(天命)11年(년) 8月(월) 11日(일) (1626年(년) 9月(월) 30日(일)는 建州女眞(건주여진) 出身(출신)으로 女眞(여진) 宗族(종족)들間(간)의 霸權(패권)鬪爭(투쟁)에서 勝利(승리)하여 1616年(년) 自身(자신)을 한[칸(몽골어 : ᠬᠠᠨ Qan , 터키어 : khān ) 또는 한 (만주어 : ᡥᠠᠨ Han , 페르시아어 : خان Khān , 汗)은 蒙古族(몽골족)과 투르크족, 滿洲族(만주족), 티베트족에서 왕(王)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稱號(칭호)다.] 으로 宣布(선포)하고 以後(이후) 後金(후금)을 建國(건국)했다. 諱(휘)는 아이신 교로 누르가치 (만주어 : ᠠᡳ᠌ᠰᡳᠨ ᡤᡳᡠ᠋ᡵᠣ ᠨᡠᡵᡤᠠᠴᡳ Aisin Gioro Nurgaci), 廟號(묘호)는 태조(太祖, 만주어 : ᡨᠠᡳᡯᡠ Taidzu)이고, 年號(연호)는 천명(天命, 만주어 : ᠠᠪᡴᠠᡳ ᡶᡠᠯᡳᠩᡤᠠ Abkai Fulingga, 蒙古語(몽골어) : ᠲᠡᠭᠷᠢ ᠶᠢᠨ ᠪᠣᠰᠣᠭᠲᠣ Tengri-yin Bošugtu)이라고 부른다. 첫번째 諡號(시호)는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립극인효무황제 (太祖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武皇帝)으로, 줄여서 타이주 호롱오 한 (太祖武皇帝, 만주어 : ᡨᠠᡳᡯᡠ ᡥᠣᡵᠣᠩᡤᠣ ᡥᠠᠨ Taidzu Horonggo Han), 네번째 諡號(시호)는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으로, 줄여서 고황제(太祖高皇帝, 만주어 : ᡩᡝᡵᡤᡳ ᡥᡡᠸᠠᠩᡩᡳ Taidzu Dergi Hūwangdi )이다. 別號(별호)로는 태조한조종(太祖汗祖宗, 만주어 : ᡨᠠᡳᡯᡠ ᡥᠠᠨ ᠮᠠᡶᠠ Taidzu Han Mafa )이 있다.生前(생전) 圖章(도장)에 새겨진 稱號(칭호)는 압카이 푸링가 아이신 구룬 한]만주어 : 아이신기오로 아민 아이신기오로 지르갈랑[아이신 교로 지르가랑(만주어 :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ᠵᡳᡵᡤᠠᠯᠠᠩ Aisin Gioro Jirgalang, 한국 한자: 愛新覺羅濟爾哈朗(애신각라 제이합랑), 1599年(년)11月(월)19日(일) ~ 1655年(년) 6月(월) 11日(일)은 淸(청) 帝國(제국)의 皇族(황족)이자 政治家(정치가)로 누르가치의 同生(동생) 슈르가치의 6男(남)이며 太宗(태종) 崇德帝(숭덕제)의 四寸(사촌) 同生(동생)이다. 어릴 때 아버지 슈르가치가 누르가치와의 軋轢(알력)으로 拘禁(구금)되다 獄死(옥사)하자 딱하게 여긴 伯父(백부) 누르가치가 自身(자신)의 집에서 길렀고 丁卯胡亂(정묘호란)에선 自身(자신)의 둘째 兄(형) 아민의 例下(예하)에서 功(공)을 세웠다. 1630年(년)(천총 4年(년) 아민이 明(명)나라와의 一戰(일전)에서 敗(패)한 後(후) 爵位(작위)를 剝奪當(박탈당)하자 代身(대신) 버이러에 올라 양람기를 管掌(관장)하였다. 1636年(년)(천총 10年(년))에 崇德帝(숭덕제)가 淸(청) 帝國(제국)을 建國(건국)하자 화석정친왕(和碩鄭親王, 만주어 : ᡥᠣᡧᠣᡳ ᡠᠵᡝᠨ ᠴᡳᠨ ᠸᠠᠩ Hošoi Ujen Cin Wang)에 封(봉)해졌으며 明(명)나라와의 여러 戰鬪(전투)를 指揮(지휘)하였다. 1643年(년)(崇德(숭덕) 8年(년) 崇德帝(숭덕제)가 急死(급사)한 後(후) 議政王大臣會議(의정왕대신회의)에서 누르가치의 14男(남) 도르곤과 함께 攝政王(섭정왕)으로 推戴(추대)되어 順治帝(순치제)를 輔弼(보필)하게 되었으나 얼마 안가 事實上(사실상) 國事(국사)를 도르곤에게 모두 專擔(전담)케 하였다. 淸軍(청군)이 中原(중원)을 차지한 以後(이후) 도르곤이 漸漸(점점) 權限(권한)을 强化(강화)하자 지르가랑은 漸漸(점점) 政治的(정치적) 立志(입지)를 잃어갔으며 1647年(년)(順治(순치) 4年(년) 도르곤은 급기야 지르가랑을 逮捕(체포), 그의 爵位(작위)를 親王(친왕)에서 君王(군왕)으로 떨어뜨렸으며 南(남)쪽으로 보내 南明(남명)의 殘黨(잔당)들을 討伐(토벌)케 하였다. 지르갈앙은 도르곤이 죽은 1650年(년)(順治(순치) 7年(년)에야 中央(중앙)으로 復歸(복귀)하였고 다시 親王(친왕)의 爵位(작위)를 回復(회복)하였다. 以後(이후) 도르곤의 親兄(친형) 아지거가 스스로 攝政王(섭정왕)이 되려 하자 지르할앙은 大臣(대신)들과 함께 아지거에게 罪(죄)주기를 請(청)하였고 順治帝(순치제)는 그 말을 받아들여 아지거에게 自決(자결)을 命(명)하였다. 지르갈앙은 도르곤 死後(사후) 莫强(막강)한 影響力(영향력)을 行事(행사)하였으나 1655年(년)(順治(순치) 12年(년) 57勢(세)를 一期(일기)로 病死(병사)하였다. 諡號(시호)는 정헌친왕(鄭獻親王)이며 1778年(년)(乾隆(건륭) 43年(년) 乾隆帝(건륭제)는 그의 開國(개국) 當時(당시)의 功(공)을 認定(인정)하여 그의 王家(왕가)를 鐵帽子王(철모자왕)으로 封(봉)하여 그 爵位(작위)를 代代(대대)로 傳(전)하게 하였다. 以後(이후) 太廟(태묘)에 配享(배향)되었다. 參照(참조)項目(항목). 野八(Noorhachi:누루하치). 弘太极(Hong Taiji:홍타이지). 多尔衮(Dorgon:도르곤). 爱新觉罗岱山Aisin Gioro Daishan(아이신기오로다이샨). 順治帝(순치제). 틀:淸(청) 太宗(태종) 崇德帝(숭덕제)의 代理聽政(대리청정) 틀:順治帝(순치제)의 攝政(섭정). 아이신기오로 아지거 |
인조[仁祖, 1595年(년) 12月(월) 7日(일)(陰曆(음력) 11月(월) 7日(일) ~ 1649年(년) 6月(월) 17日(일)(陰曆(음력) 5月(월) 8日(일)는 朝鮮(조선)의 第(제)16代(대) 임금(在位(재위): 1623年(년) ~ 1649年(년)이다. 諱(휘)는 종(倧), 本貫(본관)은 全州(전주), 字(자)는 천윤(天胤), 화백(和伯), 號(호)는 송창(松窓)이다.
諡號(시호)는 인조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仁祖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이며 以後(이후) 尊號(존호)를 더하여 正式(정식)諡號(시호)는 인조개천조운정기선덕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仁祖開天肇運正紀宣德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이다. 1649年(년)(孝宗(효종) 元年(원년) 6月(월) 24日(일)(陰曆(음력) 5月(월) 15日(일)에 열조(烈祖)의 廟號(묘호)를 받았으나, 8日(일) 뒤 인조(仁祖)로 改正(개정)되었다.淸(청)나라로부터 장목(莊穆)이라는 諡號(시호)를 받았으나 淸(청)나라와의 外交文書(외교문서) 以外(이외)에는 使用(사용)하지 않았다.
아버지 定遠大院君(정원대원군)
仁祖(인조)는 1595年(년) 12月(월) 7日(일)(陰曆(음력) 11月(월) 7日(일) 壬辰倭亂(임진왜란) 中(중)에 宣祖(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定遠君(정원군)과 議政府(의정부) 左贊成(좌찬성)을 지낸 구사맹(具思孟)의 딸 郡夫人(군부인) 具氏(구씨)(仁獻王后(인헌왕후) 사이에서 長男(장남)으로 朝鮮(조선) 黃海道(황해도) 해주부(海州府) 館舍(관사)에서 태어났다. 그가 海州(해주)에서 태어나게 된 理由(이유)는 當時(당시)는 壬辰倭亂(임진왜란) 亂中(난중)으로 戰亂(전란)이 繼續(계속)되어 왕자제궁(王子諸宮)이 모두 海州(해주)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仁祖實錄(인조실록) 卽位日(즉위일) 記錄(기록)에 依(의)하면 그가 誕降(탄강)할 때 붉은 光彩(광채)가 빛나고 이상한 香(향)내가 振動(진동)하였으며, 그 外貌(외모)가 非凡(비범)하고 오른쪽 넓적다리에 검은 점이 무수히 많았다고 한다. 첫 이름은 천윤(天胤)으로 定(정)해졌다. 黃海道(황해도) 海州府(해주부) 蒙塵(몽진) 館舍(관사)에서 出生(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黃海道(황해도) 開城(개성)에서 잠시 幼兒期(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기도 하였으며 그 後(후) 漢城府(한성부) 定遠君(정원군) 私邸(사저)에서 成長(성장)한 그의 이름은 이종(李倧)이고 本貫(본관)은 전주(全州)이며 字(자)는 천윤(天胤), 화백(和伯)이라 하였으며 號(호)는 송창(松窓)이었다. 그의 자(字, 본이름 代身(대신) 부르던 이름) 中(중) 천윤(天胤)이라는 字(자)는 當時(당시) 國王(국왕)이었던 그의 할아버지 宣祖(선조)가 종(倧)이라는 이름과 함께 親(친)히 直接(직접) 지어준 것이다. 나중에 光海君(광해군)이 누군가에게 이 말을 듣고, “어찌 이름지을 만한 뜻이 없어서 반드시 이것으로 이름지어야 하겠는가.”라고 하면서 언짢아했다 한다. 할아버지 宣祖(선조)에게는 여러 아들들이 있었으나 그 中(중) 定遠君(정원군)이 일찍 結婚(결혼)하여 얻은 첫 孫子(손자)였다. 宣祖(선조)는 그 自身(자신)이 傍系(방계)出身(출신)에 庶出(서출)인 탓에 첫 孫子(손자)인 그가 庶孫(서손)(庶子(서자) 定遠君(정원군)의 아들)이었음에도 特別(특별)히 불러다 王宮(왕궁)에서 기르며 寵愛(총애)하였다.綾陽君(능양군)은 태어나면서 모습이 凡常(범상)하지 않고 오른쪽 넓적다리에 사마귀가 많이 있었는데, 이듬해 봄에 할아버지 宣祖(선조)가 이를 보고 奇異(기이)하게 여기며, '이것은 한 고조(漢高祖)와 같은 상(相)이니 漏泄(누설)하지 말라.'고 했다 한다. 그러나 宣祖(선조)의 이와 같은 말은 곧 漏泄(누설)되었고, 定遠君(정원군)의 집에 王氣(왕기)가 盛(성)하다, 仁嬪(인빈)의 墓(묘)자리가 좋다는 等(등)의 所聞(소문)과 함께 퍼지면서 훗날 그의 親同生(친동생) 綾昌君(능창군) 倧(종)이 死刑當(사형당)하는 빌미를 提供(제공)한다.
幼年期(유년기)
2, 3歲(세)가 지나서는 私邸(사저)에서 자라지 않고 할아버지 宣祖(선조)의 配慮(배려)로 곧 宮中(궁중)에서 자랐는데, 懿仁王后(의인왕후)는 그를 特別(특별)히 귀여워하였다. 그는 장난을 좋아하지 않고 우스갯말이 적어 이 때문에 사랑이 날로 隆盛(융성)해져 다른 王子(왕자)들이 比較(비교)되지 못하였고, 特(특)히 할머니뻘인 懿仁王后(의인왕후)는 더욱 사랑하고 貴重(귀중)히 여겼다고 한다. 5, 6歲(세)가 되어서는 宣祖(선조)가 直接(직접) 그를 품안에 두고 가르치며 번거롭게 여기지 않았는데, 일찍부터 글자를 解讀(해독)하고 말귀를 알아듣자 宣祖(선조)가 더욱 奇特(기특)하게 여겼다. 宣祖(선조)는 그의 外三寸(외삼촌)이기도 한 능해군 구성(綾海君 具宬)을 王孫(왕손)師父(사부)로 삼아 어린 綾陽君(능양군)의 敎育(교육)을 擔當(담당)하게 하였다. 어느정도 자란 뒤에도 그는 스스로 글읽기를 힘쓰고, 王孫(왕손)이라는 地位(지위)를 내세우지 않았으며 內外戚(내외척) 사이에서 貴(귀)한 체한 적이 없었다. 1601年(년)(宣祖(선조) 34年(년) 능양수(綾陽守)에 첫 冊封(책봉)되었으며 1604年(년)(宣祖(선조) 37年(년) 壬辰倭亂(임진왜란) 當時(당시) 官僚(관료)와 義兵將(의병장), 將帥(장수)들을 褒賞(포상)할 때 그를 特別(특별)히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넣어 策錄(책록)되었고, 1608年(년)(光海君(광해군) 卽位(즉위) 柳永慶(유영경)의 獄死(옥사) 直後(직후) 정운 원종공신 1등(定運功臣一等)에 策錄(책록)되었다. 李夢鶴(이몽학)의 亂(난) 鎭壓(진압)에 參與(참여)한 官員(관원)들을 청난공신(淸難功臣)에 錄勳(녹훈)할 때는 청난원종공신 1등(淸難原從功臣一等)에 各各(각각) 錄勳(녹훈)되었다. 該當(해당) 原從功臣錄(원종공신록)은 仁祖(인조)가 卽位(즉위)하면서 銷却(소각)되었지만 누군가 該當(해당) 勳爵(훈작)을 보고 作成(작성)한 어휘원종공신첩(御諱原從功臣帖)이 現代(현대)까지 傳(전)해져 韓國學中央硏究院(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所藏(소장)하고 있다. 1607年(년)(宣祖(선조) 40年(년) 능양도정(綾陽都正)에 封(봉)해졌다가 이어 綾陽君(능양군)에 封(봉)해졌다. 할아버지 宣祖(선조)가 別世(별세)하면서 定遠君(정원군) 一家(일가)는 慶熙宮(경희궁)으로 나와 살았고, 父母(부모)를 따라 慶熙宮(경희궁)으로 갔다.靑年期(청년기).申景禧(신경희)의 獄死(옥사).1610年(년)(光海君(광해군) 2年(년)에 領敦寧府事(영돈녕부사) 西平府院君(서평부원군)으로 死後(사후) 議政府(의정부) 領議政(영의정)에 追贈(추증)된 淸州韓氏(청주한씨) 韓浚謙(한준겸)의 딸과 嘉禮(가례)를 올렸다. 仁祖(인조)보다 1年(년) 年上(연상)인 韓氏(한씨)(인렬왕후:仁烈王后 韓氏, 1594年(년) 8月(월) 16日(일)(陰曆(음력) 7月(월) 1日(일)는 1594年(년)(宣祖(선조) 27年(년)7月(월) 1日(일) 原州(원주) 邑內(읍내) 舍帝(사제)에서 태어났다. 嘉禮(가례)를 行(행)하고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에 封(봉)하여졌는데, 宣祖(선조)가 일찍이 王子(왕자) 婦人(부인)으로 뽑았다가 落榜(낙방)하였으나 觀相(관상)을 보고 貴(귀)하게 될 것을 안 宣祖(선조)가 그대로 다시 綾陽君(능양군)을 위하여 配匹(배필)로 揀擇(간택)하였다고 한다. 韓氏(한씨)와 嘉禮(가례)를 올린 뒤 慶幸坊(경행방) 鄕校洞(향교동) 私邸(사저)로 分家(분가)하고 1612年(년)(光海君(광해군) 4年(년)18歲(세) 때 長子(장자)인 昭顯世子(소현세자)를 낳았다.
1613年(년)(光海君(광해군) 5年(년)臨海君(임해군)의 獄死(옥사) 直後(직후) 翼社(익사) 原從功臣(원종공신) 1登(등)에 策錄(책록)되었다. 1615年(년)(光海君(광해군)7年(년) '申景禧(신경희)의 獄死(옥사)'가 일어나자 둘째 아우인 綾昌君(능창군)이 죽임을 當(당)하였다. 綾昌君(능창군)은 일찍이 仁嬪金氏(인빈김씨) 所生(소생) 王子(왕자)들 中(중) 宣祖(선조)의 寵愛(총애)를 받아 世子(세자) 物望(물망)에 올랐던 신성군[信城君 李珝, 1579年(년) 1月(월) 6日(일)(1578年(년) 陰曆(음력)12月(월) 10日(일) ~ 1592年(년) 12月(월) 8日(일)(陰曆(음력) 11月(월) 5日(일)는 朝鮮(조선)의 王族(왕족)으로, 宣祖(선조)의 넷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仁嬪金氏(인빈김씨)이다. 宣祖(선조)가 가장 寵愛(총애)하였으나 壬辰倭亂(임진왜란)때 平安道(평안도) 義州(의주)에서 病死(병사)하였다.)이 일찍 죽자 定遠君(정원군)에 依(의)해 그의 養子(양자)로 들어갔었는데, 當時(당시) 17살이던 綾昌君(능창군)은 遂安郡守(수안군수) 申景禧(신경희) 等(등)이 劃策(획책)하는 謀反(모반)에 推戴(추대)되었다 하여 流配(유배)되었다가 賜死(사사)되었다. 이 무렵 定遠君(정원군)의 집에 王氣(왕기)가 盛(성)하다, 仁嬪(인빈)의 墓(묘)자리가 좋다, 定遠君(정원군)의 집터가 좋다 等(등)의 所聞(소문)이 돌았고, 光海君(광해군)은 이를 申景禧(신경희)의 獄死(옥사) 直後(직후) 綾昌君(능창군)이 事前(사전)에 王位(왕위)에 뜻을 두었다는 것으로 解析(해석)되었다.
反正(반정)直前(직전).
綾昌君(능창군)이 賜死(사사)되자 아버지 定遠君(정원군)은 火病(화병)을 얻어 몸져누웠고, 술도 좋아했던 定遠君(정원군)은 1619年(년)(光海君(광해군) 11年(년) 結局(결국) 世上(세상)을 떠났다. 이때 綾陽君(능양군)은 殯所(빈소)에서 哭(곡)을 하며 復讎(복수)를 다짐했다고 한다. 집안의 風飛雹散(풍비박산)을 招來(초래)한 이 事件(사건)은 仁祖反正(인조반정)의 原因(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1620年(년)(光海君(광해군) 12年(년)武人(무인) 李曙(이서), 申景禛(신경진), 金瑬(김류)와 그의 外戚(외척)인 具宏(구굉), 具仁垕(구인후) 等(등)이 反正(반정)을 謀議(모의)하고 綾陽君(능양군)을 推戴(추대)할 計策(계책)을 決定(결정)하였다. 綾陽君(능양군)은 이들과 秘密裏(비밀리)에 만나며 政變(정변)을 謀議(모의)하였고 西人(서인)과 南人界(남인계) 人士(인사)들의 支持(지지)와 自問(자문)을 求(구)하였다. 反正(반정)을 敢行(감행)하기까지에는 迂餘曲折(우여곡절)이 있었다. 1622年(년) 가을 政變(정변)計劃(계획)이 漏泄(누설)되어, 平山府使(평산부사) 李貴(이귀)·申景禛(신경진) 等(등)이 擧事(거사)를 計劃(계획)한다 하여 臺諫(대간)이 李貴(이귀)를 잡아다 問招(문초)할 것을 請(청)하였다. 同年(동년) 겨울에는 李貴(이귀)·金自點(김자점) 等(등)이 幽閉(유폐)된 서궁(西宮, 仁穆王后(인목왕후)를 일컬음)을 庇護(비호)한다는 所聞(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1623年(년) 4月(월) 11日(일)(光海君(광해군) 15年(년) 陰曆(음력) 3月(월) 12日(일) 西人(서인)의 金瑬(김류)·李貴(이귀)·李适(이괄)·崔鳴吉(최명길) 等(등)이 일으킨 政變(정변)을 準備(준비)하고 그해 4月(월) 12日(일)(陰曆(음력) 3月(월) 13日(일)) 새벽 軍士(군사)를 이끌고 宮闕(궁궐)에 進入(진입), 反正軍(반정군)에 힙입어 王位(왕위)에 올랐다. 卽位(즉위) 直後(직후) 反正(반정)의 名分(명분)을 確立(확립)하여 正統性(정통성)을 다지는 同時(동시)에 西人界(서인계)를 中心(중심)으로 政府(정부)를 再構成(재구성)하고 王權(왕권)을 安定(안정)시키는 作業(작업)을 폈다. 反正(반정)의 名分(명분)은 光海君(광해군) 政權(정권)의 不道德性(부도덕성)과 失政(실정)에서 求(구)했다. 反正(반정)의 名分(명분)인 光海君(광해군)의 不道德性(부도덕성)과 失政(실정)의 根據(근거)資料(자료)가 仁祖(인조)時代(시대) 때 作成(작성)된 光海君(광해군) 實錄(실록)과 仁祖(인조)의 둘째 아들인 孝宗(효종) 時代(시대)에 作成(작성)한 仁祖實錄(인조실록)이 그 根據(근거)이므로 仁祖(인조)가 自身(자신)의 逆謀(역모)를 正當化(정당화)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光海君(광해군)의 不道德性(부도덕성)과 失政(실정)을 만들어냈을 可能性(가능성)이 濃厚(농후)할 수 있으나 光海君日記(광해군일기)는 正抄本(정초본)과 中抄本(중초본), 正抄本(정초본)은 歷史的(역사적) 史料(사료) 卽(즉) 史草(사초)이며 中抄本(중초본)은 史草(사초)를 엮어서 만든 完成本(완성본)이기 때문에 그들이 光海君(광해군)의 行跡(행적)을 歪曲(왜곡)했더라면 當然(당연)히 史草(사초)를 남기지 않고 없애야 마땅하므로 光海君日記(광해군일기)는 그만큼 信賴性(신뢰성)이 높다. 한편 仁祖反正(인조반정)의 主要(주요) 名分(명분) 中(중)의 하나는 光海君(광해군)의 仁穆王后(인목왕후) 廢母論(폐모론)이었다. 反正(반정) 後(후) 形式的(형식적)으로 仁穆王后(인목왕후)를 復歸(복귀)시킨 뒤 그女(녀)의 敎書(교서)를 받아 卽位(즉위)하는 形式(형식)을 取(취)하였으나 卽位(즉위) 以後(이후) 그女(녀)에 對(대)한 禮遇(예우)는 疏忽(소홀)하였다.
在位期間(재위기간) 中(중). 卽位(즉위) 初期(초기).
卽位(즉위) 直後(직후) 光海君(광해군)이 仁穆王后(인목왕후)를 幽閉(유폐)하고, 永昌大君(영창대군), 臨海君(임해군)을 죽인 것과 後金(후금)과 友好的(우호적)인 關係(관계)를 맺은 일을 問題(문제)삼아 反正(반정)을 合理化(합리화)시켰다. 또한 光海君(광해군)을 廢位(폐위)시켜 江華島(강화도)로 流配(유배)보내고, 光海君(광해군)代(대)의 政局(정국)을 主導(주도)했던 大北派(대북파)의 李爾瞻(이이첨)·鄭仁弘(정인홍) 等(등) 數十名(수십명)을 處刑(처형)했다. 朝鮮時代(조선시대) 高官大爵(고관대작)들을 數十名(수십명)을 處刑(처형)한 記錄(기록)은 燕山君(연산군) 때의 士禍(사화) 等(등)에서도 存在(존재)하지 않으며 朝鮮時代(조선시대)의 王(왕)이 卽位(즉위) 直後(직후)에 數十名(수십명)의 高官大爵(고관대작)들을 處刑(처형)한 記錄(기록)은 仁祖(인조)가 有一(유일)하다.
半面(반면) 反正(반정)에 功(공)을 세운 33名(명)은 3等級(등급)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에 封(봉)하고 官職(관직)을 내렸다. 이와 함께 光海君(광해군)代(대)의 政治(정치)를 批判(비판), 自進(자진)해서 물러났거나 大北界(대북계)로부터 逐出(축출)當(당)했던 西人(서인)·南人(남인)의 士林(사림)들을 中央(중앙) 政界(정계)로 불러들였다. 西人界(서인계)의 鄭曄(정엽)·吳允謙(오윤겸)·李定求(이정구)·金尙憲(김상헌) 等(등)과南人界(남인계)의 李元翼(이원익)·鄭經世(정경세)·李睟光(이수광) 等(등)이 그들이었다.
北人(북인) 肅淸(숙청)과 李适(이괄)의 亂(난).
卽位(즉위) 初期(초기)인 1623年(년) 7月(월) 奇自獻(기자헌)·柳夢寅(유몽인) 等(등) 北人界(북인계) 人士(인사)들을 逆謀(역모)로 몰아 肅淸(숙청), 下獄(하옥)하였으며, 同年(동년) 10月(월)에는 興安君(흥안군)을 王(왕)으로 推戴(추대)하고자 하는 黃炫(황현)·李有林(이유림) 等(등)의 逆謀(역모)가 있었다. 特(특)히 1624年(년)에는 反正功臣(반정공신)이던 李适(이괄)이 不滿(불만)을 품고 叛亂(반란)을 일으켜, 興安君(흥안군)을 推戴(추대), 그는 公州(공주)까지 避難(피난)할 정도의 危機(위기)에 處(처)하기도 했다(→ 李适(이괄)의 亂(난). 李适(이괄)은 反正(반정)에 對(대)한 論功行賞(논공행상)에서 都監大將(도감대장) 李守一(이수일)이 內應(내응)의 功(공)이 있다 하여 工曹判書(공조판서)로 重用(중용)된 데 比(비)해, 自身(자신)은 2登(등)으로 評價(평가)받고 都元帥(도원수) 張晩(장만) 麾下(휘하)의 副元帥(부원수) 兼(겸) 平安兵使(평안병사)로 任命(임명)된 것에 不滿(불만)을 품고 叛亂(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1624年(년) 李适(이괄)의 亂(난) 以後(이후) 避難(피난)가던 仁祖(인조)는 前(전) 領議政(영의정) 奇自獻(기자헌), 柳夢寅(유몽인) 等(등) 獄(옥)에 갇힌 北人界(북인계) 人士(인사) 40名(명)을 電擊(전격) 處刑(처형)했다. 仁祖(인조)는 이러한 反王權(반왕권) 움직임을 效果的(효과적)으로 制御(제어)함으로써 非正統的(비정통적)인 方法(방법)에 依(의)해 承繼(승계)한 王位(왕위)를 維持(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强力(강력)한 王權(왕권)을 세워 臣僚(신료)를 掌握(장악)하거나 獨自的(독자적)으로 政局(정국)을 運營(운영)하는 데는 많은 限界(한계)가 있었다. 特(특)히 西人(서인)勢力(세력)은 反正(반정) 以後(이후) 政局(정국)을 主導(주도)하고, 南人(남인)의 政界(정계) 進出(진출)을 牽制(견제)하여 仁祖(인조)의 王權(왕권)行事(행사)를 制約(제약)했다. 仁祖反正(인조반정) 功臣(공신) 勢力(세력)이 政局(정국)을 掌握(장악)하면서 功臣(공신)勢力(세력)의 過度(과도)한 勢力(세력) 强化(강화)에 威脅(위협)을 느낀 그는 功臣(공신)勢力(세력)을 牽制(견제)하기 위하여 愼獨齋(신독재) 金緝(김집)과 宋浚吉(송준길), 宋時烈(송시열)로 代表(대표)되는 산림 勢力(세력)을 重用(중용)한다.
西人(서인) 勢力(세력) 牽制(견제).
仁祖反正(인조반정)에 功(공)을 세운 西人(서인) 勢力(세력)은 隨時(수시)로 自身(자신)들이 功(공)을 세워서 仁祖(인조)가 卽位(즉위)할 수 있었음을 公席(공석)과 私席(사석)을 가리지 않고 發言(발언)하였다. 西人(서인) 功臣(공신) 勢力(세력)의 이같은 行爲(행위)에 忿怒(분노)하면서도 힘을 쓸 수 없었던 그는 金緝(김집), 宋浚吉(송준길), 宋時烈(송시열) 等(등)의 士林學者(사림학자)들과 金堉(김육) 等(등) 非功臣(비공신) 系列(계열) 西人(서인) 勢力(세력)을 起用(기용)하여 西人(서인) 功臣(공신) 勢力(세력)들을 牽制(견제)하기 始作(시작)한다. 또한 反正(반정) 初期(초기) 王族(왕족) 出身(출신) 南人界(남인계) 政丞(정승)인 李元翼(이원익)을 領議政(영의정)으로 起用(기용)한 것을 비롯, 南人(남인) 系列(계열)의 政治(정치)參與(참여)를 擴大(확대)시켜 이들을 通(통)해 西人(서인) 功臣(공신) 勢力(세력)을 牽制(견제)한다. 西人(서인)들은 李适(이괄)의 亂(난)이 鎭壓(진압)되면서부터 繼續(계속)하여 栗谷(율곡) 李珥(이이)와 牛溪(우계) 成渾(성혼)을 成均館(성균관) 文廟(문묘)에 從事(종사)할 것을 建議(건의)한다. 南人界(남인계) 成均館(성균관)儒生(유생)들은 李珥(이이)가 入山(입산)하여 佛敎(불교) 僧侶(승려)가 되었다는 것과 成渾(성혼)은 壬辰倭亂(임진왜란) 當時(당시) 宣祖(선조)의 가마를 보고도 護從(호종)하지 않았다며 非難(비난)하는 訴(소)를 올렸고, 西人(서인)의 理念(이념)이 國是(국시)가 되는 것을 못마땅히 여긴 仁祖(인조)는 李珥(이이)와 成渾(성혼)의 疑惑(의혹)들을 言及(언급)하며 文廟(문묘) 從事(종사)를 拒絶(거절)하였다. 以後(이후) 丙子胡亂(병자호란)과 丁卯胡亂(정묘호란)으로 李珥(이이)와 成渾(성혼)의 文廟(문묘) 從事(종사) 與論(여론)은 一時的(일시적)으로 中斷(중단)된다.
定遠君(정원군) 追崇(추숭) 與論(여론).
원종 推尊(추존)의 當爲性(당위성)을 主張(주장)한 李定求(이정구)의
書簡(서간) (1630年代(년대)
仁祖(인조)가 卽位(즉위)하면서 아버지 定遠君(정원군)은 大院君(대원군)으로 推尊(추존)하여 定遠大院君(정원대원군)이 되었다. 그러나 仁祖(인조)는 生父(생부) 定遠君(정원군)을 王(왕)으로 推尊(추존)하려 하였고, 政治的(정치적) 基盤(기반)이 不足(부족)한 仁祖反正(인조반정)의 反正功臣(반정공신)들 또한 宣祖(선조)-定遠君(정원군)-仁祖(인조)로 이어지는 家系圖(가계도)를 構成(구성)하여 자연스러운 繼承(계승) 順序(순서)와 仁祖(인조)의 正統性(정통성) 强化(강화)를 꾀하였다. 그러나 西人界(서인계) 性理學(성리학) 禮學者(예학자)인 金長生(김장생), 金緝(김집)과 宋時烈(송시열)과 南人界(남인계) 허목[ 許穆, 1596年(년) 1月(월) 10日(일) (陰曆(음력) 1595年(년) 12月(월) 11日(일) 朝鮮國(조선국) 漢城府(한성부) 彰善坊(창선방) 出生(출생) ~ 1682年(년) 6月(월) 2日(일) (陰曆(음력) 4月(월) 27日(일) 朝鮮國(조선국) 京畿道(경기도) 漣川郡(연천군) 旺澄面(왕징면) 강서리에서 別世(별세).)은 朝鮮時代(조선시대) 後期(후기)의 文臣(문신) 및 儒學者(유학자), 歷史家(역사가) 이자 敎育者(교육자) 兼(겸) 政治人(정치인)이며, 畫家(화가), 作家(작가), 書藝家(서예가), 思想家(사상가)이다. 本貫(본관)은 양천(陽川)으로, 자(字)는 문보(文甫)·문부(文父)·화보(和甫), 호(號)는 미수(眉叟), 태령노인(台領老人),대령노인(臺領老人), 석호장인(石戶丈人)이다. 別號(별호)는 미로(眉老), 희화(熙和), 공암지세(孔巖之世), 승명(承明)이고 別號(별호)로는 동교노인(東膠老人), 구주노인(九疇老人), 동서노인(東序老人), 이서포옹(二書圃翁), 諡號(시호)는 문정(文正)이다.]等(등)은 仁祖(인조)가 宣祖(선조)의 後嗣(후사)를 繼承(계승)하였으므로, 宣祖(선조)를 아버지라 하고 定遠君(정원군)은 皇叔父(황숙부)나 皇伯父(황백부)로 불러야 된다고 固執(고집)하였다. 仁祖(인조)는 反正功臣(반정공신)인 李貴(이귀), 李定求(이정구) 等(등)을 中心(중심)으로 定遠君(정원군)의 推尊(추존)作業(작업)을 推進(추진)하였고, 衆論(중론)을 듣는 것처럼 與論(여론)을 脚色(각색)한 後(후) 定遠君(정원군)을 王(왕)으로 推尊(추존)하여 원종[元宗, 1580年(년) 8月(월) 2日(일)(陰曆(음력) 6月(월) 22日(일) ~ 1620年(년) 2月(월) 2日(일)(1619年(년) 陰曆(음력) 12月(월) 29日(일)은 朝鮮中期(조선중기)의 王子(왕자)이자 推尊國王(추존국왕)으로, 宣祖(선조)의 다섯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仁嬪金氏(인빈김씨)이다. 生前(생전)의 爵位(작위)는 정원군(定遠君)으로, 아들 仁祖(인조)가 卽位(즉위)한 以後(이후) 大院君(대원군)을 거쳐 王(왕)으로 推尊(추존)되었다.]이라 하였다. 그러나 性理學者(성리학자)들의 反撥(반발)은 繼續(계속)되어 定遠君(정원군)의 推尊(추존)에 反對(반대)하여 金長生(김장생), 金緝(김집) 等(등)은 辭退(사퇴), 落鄕(낙향)하였고, 허목[許穆: 1596년 1月(월) 10日(일) (陰曆(음력) 1595年(년) 12月(월) 11日(일) 朝鮮國(조선국) 漢城府(한성부) 彰善坊(창선방) 出生(출생) ~ 1682年(년) 6月(월) 2日(일) (陰曆(음력) 4月(월) 27日(일) 朝鮮國(조선국) 京畿道(경기도) 漣川郡(연천군) 旺澄面(왕징면) 강서리에서 別世(별세)]은 朝鮮時代(조선시대) 後期(후기)의 文臣(문신) 및 儒學者(유학자), 歷史家(역사가)이자 敎育者(교육자) 兼(겸) 政治人(정치인)이며, 畫家(화가), 作家(작가), 書藝家(서예가), 思想家(사상가)이다. 本貫(본관)은 양천 (陽川)으로, 자(字)는 문보(文甫)·문부(文父)·화보(和甫), 호(號)는 미수(眉叟), 태령노인(台領老人),대령노인(臺領老人), 석호장인(石戶丈人)이다. 別號(별호)는 미로(眉老), 희화(熙和), 공암지세(孔巖之世), 승명(承明)이고 別號(별호)로는 동교노인(東膠老人), 구주노인(九疇老人), 동서노인(東序老人), 이서포옹(二書圃翁), 諡號(시호)는 문정(文正)이다.)은 이를 批判(비판)하다가 不利益(불이익)을 받고 官職(관직) 任用(임용)이 禁止(금지)當(당)하기도 했다.
丁卯胡亂(정묘호란).
仁祖(인조)政權(정권)은 光海君(광해군)의 中立外交(중립외교)와는 다르게 親明(친명)政策(정책)을 펼쳐 淸(청)의 반발을 샀다. 이러한 때에 1623年(년) 仁祖反正(인조반정)의 論功行賞(논공행상)에 不滿(불만)을 품은 李适(이괄)의 亂(난)이 일어났다. 結局(결국) 鎭壓(진압)은 되었지만, 李适(이괄)과 함께 亂(난)을 일으킨 한명윤의 아들, 한윤이 後金(후금)으로 逃亡(도망)가 丁卯胡亂(정묘호란)의 名分(명분)이 되기도 했다. 1626年(년) 寧遠城(영원성) 戰鬪(전투)에서 淸(청)나라가 敗北(패배)하고 누르하치가 死亡(사망)하자, 後方(후방) 安定(안정)의 必要性(필요성)을 强(강)하게 認識(인식)하게 된다. 이무렵 선양(瀋陽)으로 首都(수도)를 옮기고 太宗(태종)이 王位(왕위)를 繼承(계승)하는 等(등) 國勢(국세)가 날로 强大(강대)해지고 있었던 後金(후금)은 後方(후방) 安定(안정)을 꾀하고 惡化(악화)된 經濟(경제)를 살리기 위해, 1627年(년) 軍士(군사) 3萬名(만명)을 이끌고 侵掠(침략)했다. 李适(이괄)의 亂(난)이 鎭壓(진압)된 뒤 李适(이괄)의 殘黨(잔당) 中(중) 한명윤의 아들, 한윤과 한택은 後金(후금)으로 逃亡(도망)하여, 거기서 光海君(광해군)의 廢位(폐위)와 仁祖(인조) 卽位(즉위)의 不當性(부당성)을 呼訴(호소)하고, 또 朝鮮(조선)의 兵力(병력)이 弱(약)하며 毛文龍(모문룡)의 軍士(군사)가 오합(烏合)임을 말하여 속히 朝鮮(조선)을 칠 것을 慫慂(종용)하였다. 明(명)나라와의 交戰(교전)으로 因(인)한 경제단교(經濟斷交)로 甚(심)한 物資(물자) 不足(부족)에 處(처)하여 있던 後金(후금) 太宗(태종)에게, 李适(이괄) 殘黨(잔당)의 이러한 慫慂(종용)은 더욱 朝鮮(조선) 侵入(침입)의 決意(결의)를 促進(촉진)시켰다. 1627年(년) 1月(월) 14日(일) 仁祖(인조) 5年(년)에 後金(후금) 홍타이지는 버일러(beile, 貝勒 : 만주·몽골의 부족장) 아민(Amin, 阿敏)에게 軍士(군사) 3萬名(만명)을 주어 朝鮮(조선)을 侵入(침입)케 했다.
丁卯(정묘)和約(화약).
後金軍(후금군)의 一部(일부)는 椵島(가도)의 毛文龍(모문룡)을 치고, 主力部隊(주력부대) 3萬名(만명)은 1月(월) 16日(일) 義州(의주)를 돌파하고, 破竹之勢(파죽지세)로 南下(남하)하여 1月(월) 21日(일)에는 凌漢山城(능한산성)을 陷落(함락)시켰으며, 1月(월) 24日(일)에는 平壤(평양)을 陷落(함락)하였다. 仁祖(인조)는 부랴부랴 1月(월) 25日(일) 江華島(강화도)로 避身(피신)을 하였다. 安州城(안주성)에서 南以興(남이흥), 楊晉國(양진국), 張暾(장돈), 金彦壽(김언수), 咸應秀(함응수), 金俊(김준), 金良彦(김양언), 宋德榮(송덕영)을 戰死(전사)시키고 平壤(평양)을 거쳐 1月(월) 25日(일)에는 黃州(황주)에 이르렀다. 이에 昭顯世子(소현세자)는 全州(전주)로 避難(피난)가고, 仁祖(인조) 以下(이하) 朝廷(조정)의 臣下(신하)들은 江華島(강화도)로 避難(피난)하였다. 義州(의주)를 거쳐 平山(평산)까지 陷落(함락)되자 朝廷(조정)은 江華島(강화도)로 遷都(천도)했으며, 崔鳴吉(최명길)의 講和(강화)主張(주장)을 받아들여 兩國(양국)의 代表(대표)가 회맹(會盟), 兄弟(형제)의 義(의)를 約束(약속)하는 정묘화약(丁卯和約)을 맺었다. 1628年(년) 네덜란드船舶(선박)이 難破(난파)되어 濟州島(제주도)에 네덜란드 사람 얀 얀스 벨테브레이(Jan Jansz Weltevree)等(등)이 漂流(표류)하였다. 仁祖(인조)는 親(친)히 벨테브레이를 通(통)해 西洋(서양) 事情(사정)을 알게 되었고 그에게 박연[朴延, 朴燕 1595年(년) ~ ?) 또는 얀 얀스 벨테브레 (네덜란드어 : Jan Jansz Weltevree )는 朝鮮(조선) 後期(후기)의 武臣(무신)이다. 네덜란드 人(인)으로 仁祖(인조) 統治時(통치시) European(유럽人(인) 最初(최초)로 歸化(귀화)하였다. 1627年(년) 濟州島(제주도)에 漂着(표착)하였고 丙子胡亂(병자호란) 에도 參戰(참전)하였다. 韓半島(한반도)에 처음으로 Europe( 유럽)을 紹介(소개)했다고 傳(전)해진다. 알크마르의 마을인 드레이프 (네덜란드어판 )에서 태어났다. 1626年(년)(仁祖(인조) 4年(년) 홀란디아(네덜란드어 : Holandia) 湖(호)의 乘務員(승무원)으로 就業(취업)하여 네덜란드령 銅人圖(동인도)로 向(향)하였고, 1627年(년)(仁祖(인조) 5年(년)에 사략선 아우에르케르크(네덜란드어 : Ouwerkerck) 號(호)의 Hoofdman(Captain or 科長(과장)을 意味(의미)으로 赴任(부임)하여, 中國(중국) 商船(상선)을 拿捕(나포)하고 네덜란드 東印度(동인도)會社(회사) 本部(본부)가 있는 있는 바타비아(네덜란드어판)로 航海(항해)하던 途中(도중) 風浪(풍랑)을 만나 部下(부하) 두명과 함께 濟州島(제주도)에 漂着(표착)했다. 部下(부하) 디럭 헤이스버르츠(네덜란드어 : Direk Gijsbertz) 및 얀 피터르 페르바스트(네덜란드어 : Jan Pieter Verbaest)와 함께 땔감과 飮料水(음료수)를 求(구)하러 濟州島(제주도)에 上陸(상륙)했다가 官憲(관헌)에게 붙잡혀 漢陽(한양)에 護送(호송)되고 訓鍊都監(훈련도감)에서 勤務(근무)했다.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에는 이들이 南蠻(남만) 出身(출신)이라고 記錄(기록)되어 있다. 나중에서야 그들이 네덜란드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訓鍊大將(훈련대장) 具仁垕(구인후)의 指揮(지휘)를 받아 降伏(항복)해 온 日本人(일본인)과 捕虜(포로)가 된 淸(청)나라 軍人(군인)을 統率(통솔) 監視(감시)했고, 明(명)나라에서 輸入(수입)한 紅夷砲(홍이포)의 製作法(제작법)·祖宗法(조종법)을 指導(지도)했다. 丙子胡亂(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세 사람은 모두 出戰(출전)하여 박연(朴延, 朴燕)을 除外(제외)한 두 사람은 戰死(전사)하였다. 1648年(년)(仁祖(인조) 26年(년) 8月(월) 25日(일) 仁祖實錄(인조실록)의 記錄(기록)을 보면, “庭試(정시)를 設行(설행)하여 文科(문과)에 李定基(이정기) 等(등) 9人(인)을, 武科(무과)에 박연[朴延, 朴燕]等(등) 94人(인)을 뽑았다”라고 되어 있다.《增補文獻備考(증보문헌비고)》의 ‘本朝登科總目(본조등과총목)’에도 박연[朴延, 朴燕]이 壯元(장원)으로 及第(급제)했다는 記錄(기록)이 있는데, 박연[朴延, 朴燕]은 벨테브레이로 여겨진다. 朝鮮(조선) 女性(여성)과 結婚(결혼)하여 1男(남) 1女(녀)를 낳았다. 《하멜 표류기:헨드릭 하멜(네덜란드어 : Hendrik Hamel , 1630年(년) 8月(월) 20日(일) ~ 1692年(년) 2月(월) 12日(일)은 네덜란드 東印度(동인도) 會社(회사) (네덜란드어 : 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 VOC) 所屬(소속) 船員(선원)이자 書記(서기)이다. 故鄕(고향)은 네덜란드 호린험 이고 1653年(년)에서 1666年(년)까지 朝鮮(조선)에 抑留(억류)當(당)했다.》에 따르면, 1653年(년)(孝宗(효종) 4年(년) 헨드릭 하멜 一行(일행)이 濟州島(제주도)에 이르렀을 때 派遣(파견)되어 Hamel(하멜)等(등)을 서울漢陽(한양) 送(호송)하고 Hamel(하멜)이 도감군오(都監軍伍)에 互送(호송)되자 이를 監督(감독)하는 한편 韓國(한국)의 風俗(풍속)을 가르쳐 주고 通譯(통역)했다고 한다. 그는 겨울에 솜옷을 입지 않을 정도로 健康(건강)했으며, 東洋(동양) 各國(각국)의 風物(풍물)및 선악(善惡), 화복(禍福)에 對(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의 出身(출신)을 考慮(고려)할 때 改新敎(개신교)의 敎理(교리)를 朝鮮人(조선인)들에게 說破(설파)한 것이 아니냐는 推測(추측)이 있기도 하다. 公式的(공식적)으로 歸化人(귀화인)이 된 朴氏(박씨)다. 벨테브레는 네덜란드에 後孫(후손)들이 있었다. 벨테브레의 아버지도 네덜란드 사람이다. 박연[朴延, 朴燕]과 結婚(결혼)한 女性(여성)의 집안에 對(대)해서는 알려진바가 없다. 但只(단지) 박연[朴延, 朴燕]과 結婚(결혼)할 位置(위치)의 집안에 對(대)해서는 박연[朴延, 朴燕]이 朝鮮(조선)에 와서 살아온 行跡(행적)을 보면 推測(추측)을 할수있을뿐이다. 박연[朴延, 朴燕]의 집안과 박연[朴延, 朴燕]의 婦人(부인)의 家門(가문)에 대한 어떤 歷史的(역사적) 記錄(기록)이 詳細(상세)하게 具體的(구체적)으로 남겨져있지 않다. 그리고 박연과 결혼한 여자집안에 대한 추론도 결국 정확하지 못하다. 박연[朴延, 朴燕]이 원산 박씨의 始祖(시조)라고 하지만 그 系統(계통)이 後代(후대)로 連結(연결)되지 못하였는지 원산박씨에 對(대)한 記錄(기록)이 매우 적다.]이라는 이름을 내려 朝鮮(조선)에 定着(정착)시켰다. 벨테브레이[朴延, 朴燕: 1595년 ~ ?) 또는 얀 얀스 벨테브레 (네덜란드어 : Jan Jansz Weltevree )는 朝鮮(조선) 後期(후기)의 武臣(무신)이다. Netherlands(네덜란드) 人(인)으로 仁祖(인조) 통치시 유럽인 최초로 귀화하였다. 1627년 제주도에 표착하였고 병자호란 에도 참전하였다.[1] [2] 한반도 에 처음으로 유럽 을 소개했다고 전해진다.)]는 원산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벨테브레이의 조선 표류로 조선의 사대부, 지식인들은 고려시대 벽란도와 예성강을 오간 아랍 외에는 막연하던 서구 세계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인조는 그에게 들은 화포와 총기를 만들게 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재료와 기술이 부족하였고 그것이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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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승철~화 2021-06-22 오후 5:52 ~ 양선생님 참 귀한 자료 입니다. 칠천량 해전 자료 있으시면 보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