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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이 같이 행하라(1)
요 13:12-20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18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9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요 13:12-20 / 제자들의 발을 다 씻어 주신 예수께서는 겉옷을 다시 입고 식탁에 앉아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긴 뜻을 알겠느냐? 13) 너희는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옳은 말이다. 사실이 그렇다. 14) 그렇다면 주요,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남의 발을 씻어 주어야 옳지 않겠느냐? 15) 내가 너희에게 베푼 것같이 너희도 남에게 베풀도록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 16)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종이 주인보다 높지 못하며 보냄을 받은 사람은 보낸 사람보다 높지 않다. 17) 너희가 이것을 깨달아 이제 그대로 행하면 복을 받을 것이다. 18) 이것은 너희 모두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내가 택한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알고 있다. 그러나 ㄱ) `나와 한솥밥 먹던 친구들도 내게 등을 돌릴 것이다' 라고 한 성경의 말씀은 곧 이루어질 것이다. (ㄱ. 시 41:9) 19) 내가 지금 이 말을 하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너희가 믿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20)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내가 보내는 사람을 환영하는 것은 곧 나를 환영하는 것이며 나를 환영하는 것은 곧 나를 보내신 아버지를 환영하는 것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발을 씻김은 예수의 죽으심으로 제자들의 죄가 완전히 씻겼다는 상징입니다. 예수의 죽으심에 의한 씻김만이 진정한 섬김의 기초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섬김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성도가 받을 복입니다.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경험하고, 그것의 의미를 알며, 그 죽음에 의지할 때만 진정한 섬김을 할 수 있음이 강조됩니다.
본을 보였노라(12-17)최후의 만찬이 끝나면 제자들은 곧 예수를 버립니다. 그들은 형편없이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 그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고, 복음의 전파자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의 개척자요, 교회의 주요 지도자로 활동하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보여주신 발 씻김은 그들이 따라 행할 본입니다. ‘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신약성경에서 모범적 죽음을 뜻합니다. 그들은 예수의 본을 따라 죽어야 합니다. 겸손히 섬김을 행하는 것이 그들을 부르신 이의 뜻이며, 그들이 할 일입니다. 이런 섬김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성도가 받을 복입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18) 이 부분은 다윗이 자신의 가장 가까운 모사였던 아히도벨이 자신을 배반하여 죽이려 한 것을 탄식하며 지은 시(삼하 15:12; 시 41:9)의 인용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예수께서 힘이 없어 당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의 성취였습니다. 예수께서 자진하여 당한 일이었습니다. 인간의 구속을 위해 예수의 선택한 자발적인 희생이었습니다.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19-20) 문맥상 16절과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한 분이라는 사상이 강조되고 있습니다(요 10:30). 또 하나님과 예수, 제자의 관계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셨고, 예수께서는 제자를 보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보내진 존재이면서 보내는 존재입니다. 예수를 사이에 두고 하나님과 제자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연결 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복음전파의 권세를 받은 존재란 것을 말하시며 제자들을 격려하십니다.
적용: 당신은 예수의 본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성도로서 내가 받을 복임을 확신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물은 구름, 눈, 비, 바다와 강, 호수로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주장, 자신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담기는 그릇이나 모양에 따라 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자세는 자기를 버리고 주님의 섭리, 주님의 뜻에 순응하며 주님 모습을 닮아가겠다는 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물은 겸손한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르며 무엇이든 자기 위 즉 물위로 띄웁니다. 그러나 물이 되지 못하고 얼음이 되었을 때는 전혀 양상이 달라집니다. 딱딱하고 날카로우며 자신보다 더 큰 그릇에 담겨야 하고 상처가 나며 분명한 형체를 갖고 있습니다. 교만과 아집의 덩어리인 얼음을 녹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불입니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요 3:5).
< 설 교 >
좋은 스승, 좋은 제자
요 13:12-14 / 최성규 목사
5월 15일은 제 27회 스승의 날이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평생 살다가 한 명의 진정한 스승과 10명의 진정한 친구, 100권의 좋은 책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삶은 성공한 삶이다.” 존경하는 스승이 있습니까? 일생의 영원한 멘토가 될 스승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미래가 열린 사람입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면 인생의 목적이 생깁니다.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삶의 모범이 생깁니다. 생에 대한 의지와 열정이 넘칩니다. 모든 위대한 인물의 배후에는 좋은 스승이 있었습니다. 철학자 플라톤의 뒤에는 소크라테스가 있었습니다. 헬렌 켈러 뒤에는 설리반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허준 뒤에는 유의태라는 스승이 있었습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여호수아 뒤에는 모세가 있었습니다. 다윗 뒤에는 사무엘이 있었습니다. 엘리사 뒤에는 엘리야가 있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스승께 감사하는 우리가 됩시다. 공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셋이 걸어가면 그 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공자처럼 위대한 사람도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에 나의 스승이 있다고 했습니다. 학교 선생님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선생님이 많습니다. 교회학교 교사, 구역장, 오십부장, 교구장, 목사님도 선생님입니다. 영혼을 치료해 주는 선생님입니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좋은 스승과 좋은 제자입니다. 요즘 신세대는 지식이 넘치고, 학력도 높습니다. 안타깝게도, 삶의 기본은 부실합니다. 좋은 스승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좋은 스승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좋은 스승이 되려면 스승 된 자의 개인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따르는 제자들의 존경심도 필요합니다. 좋은 선생님들을 좋은 스승으로 존경해드립시다. 또한 우리 스스로가 좋은 스승이 되어서 좋은 제자를 많이 길러냅시다. 좋은 스승과 좋은 제자가 많은 사회는 희망이 있는 사회입니다. 살맛나는 사회입니다. 부흥하고 성장하는 나라입니다. 좋은 스승과 좋은 제자에 대해 알아봄으로 바른 정신과 바른 가르침이 있는 학교를 만들어 갑시다. 뿐만 아니라, 건강한 시민이 넘치는 사회와 나라를 만들어 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첫째, 영원한 스승,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스승이십니다(요 13:13). 예수님을 나의 스승으로, 영원한 멘토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 건강한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스승이십니까? 첫 번째로, 예수님은 제자의 이름을 부르는 스승이십니다(막 3:13). 예수님은 제자 삼을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시면서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사건입니다. 당시에는 제자가 스승을 찾아 다녔습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반대로,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셨습니다. 이름 부르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예수님은 갈대 같이 흔들리는 인간 시몬을 반석과 같은 믿음을 가진 베드로라고 불러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시몬이 흔들리지 않는 반석과 같은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고기 잡는 어부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먹고 사는데 집착했던 그들을 천국 리더로, 예수님의 제자로 불러 주셨습니다. 스승 된 예수님이 그렇게 부르시니 제자들은 그대로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희망을 말하면 희망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축복을 말하면 축복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찾아가서 그 제자들의 이름을 불렀더니 부름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빛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꽃이 되었음을 기억합시다. 예수님은 지금도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무능한 사람이 아니라 역사의 주인공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실패자가 아니라 성공자로 부르십니다. 뭇 영혼을 주께로 돌이키는 전도자로 부르십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영적 지도자로 부르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부르신 그대로 반드시 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삶을 주시는 스승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와서 부르시는 것에 그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여주시고 삶 자체를 주십니다. 세상에서도 지식을 주는 선생은 많습니다. 입시 성적을, 수능 성적을 올려주는 선생도 많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삶을 주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하셨고 제자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게 해주셨습니다. 몸소 행하심으로 모델이 되어 주셨습니다(요 13:14,15). 또한 예수님은 보여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삶이 우리에게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왜 이렇게 불안해합니까? 삶의 모범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말을 다 들으시고, 응답하시고, 성령으로 도우시고, 우리 인생길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받은 이 사랑을 나눠주어야 합니다. 우리도 스승이 되고,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작은 예수가 되어서 사람들의 발을 씻기는 자가 됩시다.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바른 길을 알려 줍시다.
둘째, 좋은 제자가 되자
모든 인생은 상호작용합니다. 서로 관계를 합니다. 나만 잘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스승을 원한다면, 나 스스로가 좋은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좋은 제자가 되려고 하지 않으면서 좋은 스승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좋은 제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 번째로, 스승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를 섬겼습니다(민 11:28). 엘리사도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들었습니다(왕상 19:21). 열두 제자는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 간에도 섬겼습니다. 누가와 디모데는 바울을 섬겼습니다. 마가는 베드로를 섬겼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절대 아첨이 아닙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서 했다면 그것은 아첨도 되고 아부도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했다면 그것은 섬김입니다. 이해관계 없이 남을 잘 섬기는 사람을 보았을 때 격려해주고 박수를 쳐주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지도자들은 모두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스승과 언제나 함께했습니다. 또한 스승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스승에 대한 섬김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스승에게서 지식만 배우려고 합니다. 스승의 삶보다는 스승의 학위나 학벌을 보고 판단하려고 합니다. 혹시 스승을 너무 가볍게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섬김이 없는 배움은 죽은 지식입니다. 아무리 자기가 잘 났어도, 명예와 권세와 권력을 다 얻었다고 하더라도 한번 제자는 영원한 제자입니다. 스승의 가르침이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스승 앞에서 겸손합시다. 하나님은 스승을 존경하고 섬기는 사람에게 복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요 13:16,17).
두 번째로, 좋은 제자는 스승을 닮는 자입니다. 부부 사이가 좋으면 닮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스승과 좋은 제자도 서로 닮아갑니다. 삶과 가르침의 전수는 서로를 닮게 하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 27권 중, 예수님 쓰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27권 모두가 다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삶을 증거 한 이야기, 사도행전은 예수님처럼 살다간 제자들의 이야기, 바울 서신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는 이야기입니다. 다 다른 배경, 다른 출신,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지만, 모두가 다 예수님을 본받아 살았기에 이 땅에서 살다간 모습 역시 비슷합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롬 6:5). 제자들은 나의 삶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 나의 삶은 어떻습니까? 내 삶 속에서 누구의 냄새가 납니까? 예수 향기가 나는지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좋은 제자가 됩시다. 좋은 제자가 되어 스승을 닮아 가고자 할 때 우리는 변화됩니다. 여호수아와 제자들처럼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좋은 스승이십니다. 예수님은 삶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은 삶으로 예수님을 닮아갔습니다. 삶이 삶으로 이어지는 교육이 참다운 교육입니다. 그곳에서 스승도 제자도 감동받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닮은 좋은 스승이 되어 사람들을 감동시킵시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닮아가는 좋은 제자가 되어 우리 자신이 감사, 감격, 감동합시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다
요 13:12-17 / 윤영택 목사
오늘 읽은 말씀은 예수께서 마지막 유월절을 앞둔 날 밤 제자들과 저녁 식사를 하시던 자리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마태와 마가, 누가복음서에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성찬식을 행하신 이야기가 나오는데 요한복음은 성찬식 내용 대신 식사 도중에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팔레스틴 지방은 건조한 날씨 때문에 거리에 먼지가 많았고 샌들을 신고 다니던 사람들은 집에 들어가면 더러워진 발을 씻어야만 했습니다. 일반 서민들은 자기 발을 닦지만 종을 부리는 집 주인은 외출하고 돌아오면 종들이 발을 씻겨줍니다. 잔치집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목욕하고 새 옷을 갈아입고 가는 것이 유대인의 예절인데 오는 도중에 더러워진 발은 잔치 집 주인이 종들을 시켜 발을 씻겨드리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발 씻을 물을 준비하여 손님들이 먼저 발을 씻고 식탁에 자리를 잡도록 배려하는 것이 기본 예의였습니다.
식사 도중에 일어나신 주님은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동이시더니 대야에 물을 담아 열 두 제자들의 발을 하나씩 씻겨주십니다. 다른 제자들의 말은 없는데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을 때 한 말씀 올립니다. ‘주여, 주께서 어찌 제 발을 씻기십니까?’ 그때 주님은 ‘지금은 네가 나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이 후에는 알게 되리라’하십니다.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물론 거기 있던 모든 제자들은 예수께서 지금 하시는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 민망하여 얼굴을 들 수 없고 그렇다고 안된다고 거부할 수 없는 분위기라 할 수 없이 발을 맡겨드렸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완강히 거부하며 ‘제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하자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 하십니다. 다른 건 몰라도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던 베드로는 겁이 덜컥 나서 태도를 완전히 바꿉니다. ‘그렇다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주세요’ 하고 과잉반응을 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미 목욕한 사람은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모두 다 깨끗하지는 않다’하시고 베드로의 발을 씻기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몸둘 바를 모르고 죄송해 하는 제자들의 발을 모두 닦으셨습니다. 처음에는 펄쩍 뛰며 거절하던 베드로의 발을 씻겨주셨고 그 밤에 스승을 팔아넘길 배신자 가룟 유다의 발도 씻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제자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대단히 당황스런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유대인의 선생이 제자의 발을 씻기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위대한 랍비들 중에 어떤 선생이 제자들의 발을 손수 닦아주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을 가르치시는 지도교수님이 발 닦아주겠다고 내밀어라 하면 당연한 듯 내밀 학생들 있습니까? 이건 스승에게나 학생에게나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종의 자리로 내려앉아 모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주님은 다시 스승의 자리에 앉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주와 선생이라 부르는데 너희 말처럼 참으로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였노라’
전에 경험하신 분도 있겠지만 주일학교와 청소년들을 지도할 때 수련회의 하이라이트로 세족식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행사의 깊은 의미를 잘 모르고 장난스럽게 참여하기도 하지만 어떤 아이들은 제법 숙연해지고 자기 발을 닦아주시는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선생님과 아이가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축복하는 감동적인 장면도 벌어집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장로 임직식 때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선배 장로님들이 임직 받는 후배 장로님들의 발을 닦아주는 의식을 가진다고 합니다. 어른이 어린 사람의 발을 씻겨주고 선배가 후배의 발을 씻기는 장면은 하나의 의식에 불과하지만 숙연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뭉클할 때가 있습니다. 남의 발을 닦는다는 행위가 이처럼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발이 아니라 서로의 손을 씻겨주라 하셨으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좀 더러운 것이 묻었더라도 손과 손이라는 동등한 입장에서 봉사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발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남의 발을 씻겨주는 일은 왠지 아무에게나 선뜻 베풀 수 있는 봉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건 옛날에 주인을 섬기는 하인들이 하던 궂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피곤한 날은 귀찮아서 발 닦는 일을 그냥 건너 뛰고 맙니다. 그런 날은 참 개운찮습니다.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부부간에도 남편이 냄새나는 발을 안 씻고 이불로 들어오면 죽는 소리를 하며 당장 나가 닦고 오라고 합니다. 불결하다는 것 아닙니까? 피곤하고 귀찮으면 자기 발도 닦기 싫은데 그런 더러운 발을 서로 닦아주는 것이 옳다 하심은 어찜일까요? 부정의 상징이며 귀찮음의 상징이고 혐오감을 주는 거리낌의 상징인 그런 발을 씻기는 행동은 그 사람의 허물과 불편함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섬김의 뜻입니다.
그 섬김의 일을 상대가 누구든 상관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죽기살기로 경쟁하는 라이벌이나 동료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발을 기꺼이 닦을 수 있습니까? 내가 저 사람보다 한 수 위에 있고 상급자고 어른인데 그 자리에서 내려와 그의 발을 씻길 수 있습니까? 보통 마음이 아니고는 어렵습니다. 그러면 나보다 상급자이고 선배이며 어른의 발은 자존심을 전혀 상하지 않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씻길 수 있습니까? 부모님이나 자녀와 부부사이라면 혹시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끼리는 어림도 없는 일이겠지만 …
예수께서 주님과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나를 낮추어 베푸는 섬김의 행위였습니다. 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남의 발을 닦아주는 행동은 먼저 자기를 낮추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또 실제로 몸을 낮추어야 발을 씻기는 자세가 제대로 나옵니다. 내가 남의 아래로 내려 앉아야 비로소 상대방의 발을 씻길 수 있습니다. 한 두번 어쩌다 이벤트로 하는 일이라면 보는 눈들이 있으니 연극배우처럼 연기할 수 있지만 그 일을 날마다 하라고 한다면 과연 늘 같은 마음으로 섬길 수 있을까요?
오늘은 남의 발을 닦아주고 뒤돌아서면 금방 마음이 변해 으르렁거리고 다툰다면 그런 세족식은 사람에게 보이기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의 행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명하신 일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왜 그런 명령을 하셨을까 생각해보는 것이 주님의 의도를 더 잘 깨닫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이 말씀이 수련회나 임직식에서 세족식을 하는 의식으로 끝나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이 교훈하시고자 하셨던 본 뜻을 이해하고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은 최후의 만찬을 드시던 자리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게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제자들을 두고 떠나가셔야 할 순간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에 흡족할 정도로 성숙한 사람들이 못되었습니다. 마지막 만찬을 나누던 그날도 제자들은 우리들 중에 누가 더 크냐 하는 문제로 다툼을 벌였습니다 (눅22:24).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실 때 예루살렘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대대적인 환영을 하였습니다. 열렬한 환영을 받고 성으로 들어가시는 주님을 가까이 모셨던 제자들은 기분이 우쭐하고 들떠있었습니다. 드디어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르실 날이 되었으니 가장 가까이 모시던 자기들은 당연히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들떴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들끼리 서로 높은 자리에 앉겠다는 욕심으로 누가 더 크냐 하는 문제로 다툼을 벌이기까지 했습니다.
내일이면 선생님이 빌라도 법정에 서게 되고 십자가 형틀에 달려 죽게 되는데 심각한 사태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서로 크다고 싸우고 있습니다. 주님이 함께 계시는 중에도 서로 다투는데 주님이 떠나시고 나면 얼마나 더 많이 싸우겠는가 상상이 갑니다. 이런 제자들을 두고 가시려는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극단적인 행동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돈시키십니다. 내가 너희의 주와 선생이지만 너희의 발을 씻겼다. 내가 너희에게 본을 보인 것처럼 너희도 서로의 발을 씻기는 섬김을 행하는 것이 옳다.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사람이 보낸 사람보다 크지 못하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식탁에 불러 마지막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며 성찬의 의미를 가르쳐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과 피라 하시고 너희가 이것을 먹음으로 나의 죽음을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자신의 몸을 찢어 피 흘리심으로 죽어가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희생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주님의 낮아지심과 섬김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제자의 삶 이것이 성찬식의 정신입니다.
베드로가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주세요’할 때 이미 목욕한 사람은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은 예수께 속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온 몸을 목욕한 것처럼 예수 안에서 깨끗해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먼지로 더러워진 발을 매일 씻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매일 범하는 일상의 죄는 날마다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신다고 거절할 때 ‘그러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하신 것처럼 내가 주님의 보혈로 날마다 깨끗이 씻음받기를 거부한다면 나는 주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날마다 순간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기억하며 내 의지로 범한 죄악과 부지중에 범한 모든 허물을 깨끗이 씻음받아야 합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은혜 없이 정결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이 나의 더러운 발을 씻겨주신 것처럼 형제자매의 허물을 용서하고 이해하며 그 사람보다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 허물을 씻겨주는 사랑, 서로의 발을 씻기는 섬김을 힘써 하시기 바랍니다. 서로 존중하며 용납하고 하나가 되어야 세상의 미혹과 방해와 핍박에 맞서 싸울 힘이 있습니다. 세상과 싸워야 할 제자들이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며 어떻게 주님이 맡겨주신 위대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심지어 배신자 유다의 발도 씻겨주심으로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한국교회가 이웃에 대한 섬김과 사랑을 정말 열심히 실천하고 있습니다. 정부와 공공기관이 하지 못하는 일들을 교회가 맡아 앞장 서 수고하고 있습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 많은 선교사와 자원봉사자들을 파송합니다. 무료급식이나 의료봉사와 청소년 공부방, 구제활동과 구호활동 등 모든 분야에서 주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섬김의 자세가 굳어있고 우쭐하고 거만한 모습이 자주 보입니다. 베푸는 입장에서 받는 사람들에게 거만한 얼굴을 하며 우월의식을 드러냅니다. 보란듯이 자랑하며 섬기는 모양도 있습니다.
‘1903년 원산에서 조선의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모임이 열렸습니다. 이 기도 모임의 강사로 초청된 로버트 하디 선교사는 토론토 의대를 졸업한 수재였습니다. 그가 강원도에서 선교하는데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실패만 계속했습니다. 그는 실패 원인이 미개한 조선 사람들 때문이라 생각했지 한 번도 자기 때문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그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로버트 하디 목사의 마음을 강하게 움직이시자 말씀을 전하던 로버트 하디 목사님이 기도 모임에서 통곡하며 회개합니다. ‘주님, 용서해주세요. 조선 사람들은 미개한 민족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당신을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 주님! 나의 자만심을 회개합니다. 로버트 하디 목사님이 회개하자 다른 선교사들도 하나 둘씩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우리도 그랬습니다’ 이렇게 회개할 때 죄가 무엇인지 회개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던 조선 사람들이 죄를 깨닫고 미워한 것을 회개하고 용서를 배우고 눈물로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 뜨거운 회개의 눈물이 1907년 평양 대부흥의 회개운동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용남 저, 복음에 미치다)
이런 겸손한 섬김과 죄에 대한 정직한 고백 그리고 죄사함의 기쁨이 아무 희망도 없어보이던 조선 땅에 복음의 빛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교회가 세계를 향해 복음의 빚을 갚고 그리스도의 빛을 전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 영광스런 복음을 나누는데 우리 옥스포드 한인교회 성도들도 기쁨으로 동참하기 바랍니다. 주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그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졌거나 교만해지려 할 때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나에게 베푸신 사랑에 대한 감사가 희미해지려 할 때마다 주께서 명하신 성찬을 행함으로 다시 한 번 주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주님이 내려가셨던 그 낮은 자리로 함께 내려가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과 선생이라 부르는 사람은 그분보다 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고 천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발을 씻기신 주님을 본받아 그분께 복종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겸손히 배우는 신실한 제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사셨나?
요 13:12-17 / 김삼환 목사
과학이 많이 발달돼서 옛날 원시인의 문화와 삶도 과학적으로 밝혀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600년전 숨진 학봉장군 부부의 미라를 얼마 전에 발견해서 고대 교수인 김한겸 교수가 연구를 했습니다. 미라 하나 가지고 모든 것을 찾아내는 겁니다. 그분은 1420년 출생했습니다. 키는 167.7cm로 밝혀졌고 턱수염과 콧수염이 많았다라고 밝혀내고 있습니다. 털 하나 없지만 다 찾아냈습니다. 그는 육류와 채소를 갖춘 음식을 골고루 먹었고 민물고기를 날로 먹었다 라는 것도 그 미라에서 찾아낸 겁니다. 그는 폐질환을 앓았고 각혈을 많이 했기 때문에 애기부들꽃가루를 자주 삶아서 먹여가지고 약이 몸 안에 있는 것도 찾아낸 겁니다. 그래서 남편은 42살에 돌아가시고 아내는 53세에 돌아가셨다라고 과학자들이 찾아냈습니다. 600년 전 시신이지만 시신 하나 가지고 다 찾아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사셨을까? 주님은 우리에게 시신을 남긴 것도 아닙니다. 그의 주거지를 우리에게 남겨주신 것도 아닙니다. 의복 한 벌 남겨주신 것도 아니지만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은 주님의 삶을 감추지 아니하시고 오픈하셔서 무엇을 먹고 어떻게 하셨는가에 대해서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도 배우지만 그의 삶도 본받기 위해서 성경 속에서 주님의 삶을 찾아야 하고 또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연구에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흥미를 가지고 예수님이 무엇을 잡수셨을까, 무슨 옷을 입으셨을까 연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삶도 우리는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나는 나대로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살라고 우리에게 삶의 본을 보여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의 삶은 일치합니다. 아시아에 있든 유럽에 있든 남미나 북미에 있든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고 나의 구주가 되고 주님은 나의 목자가 되고 스승이 되고 감독이 되시고 나의 지도자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옷을 입어라 구체적으로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주님은 이런 생활을 할 것을 가이드라인으로 정해 놓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라. 이 정도의 수준으로 이렇게 살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기 때문에 이 광야의 길을 우리가 걸어가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걸어가신 길로 가야 우리가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가치 있고 보람된 인간의 삶, 그리고 우리가 모두 찾는 행복은 예수 그리스의 삶을 본받는데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목적입니다. 죄에 빠진 인류를, 죄에 갇힌 인류를, 죄에 매인 인류를, 사탄에게 지배와 고통을 당하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구원할 자는 이 지상에서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태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방법도 없습니다. 지구의 불이 꺼져 있는 이 땅 위에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빛이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을 비추시고 어둠에 있는 인류를 주님이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건져내신 것입니다.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냐고 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메시아이신 것입니다. 우리를 모든 저주와 멸망과 죄악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는 이 땅에 태어 나셨지만 하늘에서 오신 분이시오, 창조주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또 하나의 주님의 삶의 목적은 우리 인간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본을 보여 주시는 모델이 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참인간다운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가 인간답게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가치 있게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영광스럽게 살아야 되는데 그런 삶을 우리에게 본으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가르쳐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어디에 있든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본입니다. 너도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너도 서로 집에서도 발을 씻겨주고 밖에서도 발을 씻겨주고 남을 향하여 섬기고 봉사하고 낮아지고 이런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발 씻겨주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하시니라.”
내 멍에, 내가 주는 짐을 져라. 이 짐은 가벼운 짐이라. 네가 (죽지 않고)사는 짐이야. 너의 행복이 이 짐을 지는 데 있다라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하나 한 일들을 유심히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들이 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교양도 없고 또 배운 것도 없는 분들이지만 예수님을 그대로 따라 가면서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인류역사에 예수님의 제자들 같이 귀한 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을 본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그대로 살았습니다.
우리나라 히딩크 감독이 와서 우리나라 국위도 올려놓고 우리나라 축구를 세계 위에 올려놓았지만 그중에 가장 큰 것은 히딩크 감독은 박지성과 이영표라는 선수를 길러낸 것입니다. 두 제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분은 우리나라를 얼마 전에도 방문하면서 지성이를 보고 싶어왔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제자가 있는 것입니다. 지성이는 히딩크 감독을 따라서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본받아 살면 예수 안에서 믿음의 지성이가 되고 예수 잘 믿으면 예수의 영표가 될 줄 믿습니다.
선생은 제자를 사랑하는 것이 선생의 가장 큰 기쁨인 것입니다. 좋은 제자를 만나서 제자가 잘되는 것이 스승의 기쁨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기쁨이 바로 우리에게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면 우리도 주님이 주신 영광과 축복으로 나라와 민족과 세계에서 우리는 멋진 슛을 살리고 골을 넣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생활하신 그 삶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입니다. 마가복음 1장 35절에 예수님은 새벽미명에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 먼저입니다. 하나님 중심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겁니다. 땅의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하늘의 것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우선했습니다. 하루하루를 그렇게 시작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짧은 생애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겁니다. 우리는 이틀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1년도 하루가
모여서 365일이 되고 10년도 하루가 모여서 3650일이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하루가 끝나면 우리는 영원한 하늘나라로 하루가 없는 나라, 영원한 하루인 하나님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땅에 사는 하루하루는 하나님을 섬기고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데서 하루를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왕이 27분입니다. 대원군과 광해군을 제외하면 25분이라고 합니다. 임금님의 일상생활은 많은 것이 다 감추어져 있지만 하루에 일과가 시작되는 것은 무슨 음식을 먹고 무슨 일과를 보내셨는가 하는 것은 다 밝혀져 있습니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납니다. 일어나서 첫 번째 하는 일이 대비마마에게 가서 문안 인사하는 것입니다. 임금님이 제일 높지만 임금님도 낳은 분에게 가서는 인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성공했다할지라도 여러분의 아버지이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게는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분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인간의 힘은 하나님께 있다 라는 겁니다. 우리의 축복은 하나님께 있다 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된다 라는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잘 사는 길이 하나님이 동행해 주셔야 된다라는 겁니다. 광야 같은 이 세상을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면 내가 너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인도하셔서 음침한 골짜기일지라도 우리는 피곤치 않고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 위로부터 주신 힘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고 성령을 주신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세상은 볼 수 없는 힘, 안의 힘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안의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기쁨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기독교의 힘은 안에 있습니다. 무기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총칼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군사력도 정치력도 돈의 힘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힘이 2천년 동안 내려온 것은 우리 안에 주님이 함께 하시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평안도 안에 있고 우리의 기쁨도 안에 있고 우리의 소망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겉에 보이는 것이 아무 소망이 없어도 내 안에 소망이 있고, 내 주변의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내 안에 기쁨이 있기 때문에 늘 기뻐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보이는 것 가지고 기뻐하니까 한 시간에도 좋았다가 울었다가 기뻤다가 슬펐다가 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반복하는 일이 없습니다. 항상 기쁨으로 살고 항상 평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내 안에 기쁨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 생수의 강의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의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내리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목마르지 않습니다. 광야 길을 걸어가도 피곤치 않고 목마르지 않은 것은 우리 안에 주님의 성령이 주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기도 하는 성도는 안이 부유합니다.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왜 저분이 행복하게 사느냐?
저 조건이 저런 데서 어떻게 찬송할 수 있느냐. 그것은 세상 사람은 전혀 모릅니다. 우리는 안에 축복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막을 통과하는 동물은 낙타밖에 없습니다. 낙타는 아라비아 광야, 사하라 사막 다 통과할 수 있습니다. 몇 달을 통과해도 갈 수 있는 것이 낙타입니다. 낙타는 다리도 든든합니다. 그리고 신비한 것은 낙타는 이틀을 물먹지 않아도 40도, 50도를 견디면서 사막을 통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동물이나 사람은 물을 먹지 아니하면 피가 진해가지고 그다음에 죽습니다. 피가 진하면 돌지 못합니다. 수분이 끊임없이 공급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식은 못 먹어도 살 수 있지만 물은 못 먹으면 죽습니다. 물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비하게도 낙타가 물을 먹지 않아도 통과할 수 있는 것은 낙타의 체질은 몸 안에 있는 모든 수분이 모자라면 전부다 공급을 한답니다. 낙타에게 물혹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과학자들이 물혹은 아닌데 지방이지만 그것도 역시 공급이 된다 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어려울 때는 전부다 공급이 돼서 무사히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든다 라는 것입니다. 낙타는 누구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 안에 물이 있기 때문에 목마름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동물은 목마를 때 신기루를 찾다가 다 죽는데 낙타는 신기루로 안 간다는 것입니다. 꼭 길을 따라 끝까지 간다는 것입니다. 저도 신기루를 처음 봤습니다. 세렝게티라는 곳에 가서 보니까 눈으로 볼 때 저쪽에 물결이 치는 겁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물결이 쳐서 그쪽으로 가니까 완전 사막인 겁니다. 그래서 광야를 걸어가다가 사람도 죽고 동물도 다 죽는 것은, 목마르니까 그렇습니다. 거기는 물이 일체 없는 곳인데도 물로 보여 가지고 가보면 물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는 겁니다. 낙타는 자기 안에 있는 물 때문에 목마르지 않기 때문에 통과하는 것입니다.
오늘 물이 아닌 물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에 목말라서 헛된 사랑을, 신기루의 사랑을 찾다가 모두 망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헛된 정욕에 목말라 가지고 세상 욕심에 목말라 가지고 세상으로 갔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걸어갈 때 목마르지 않습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가 내 안에서 강같이 흐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고 감사함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말씀합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 안에 양식이 있는 것입니다. 밖에 양식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안의 능력인 것입니다. 위로부터 능력은 안에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니. 내가 너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만 가지가 어려운 데도 항상 평안하고, 세상은 만 가지가 좋은데도 항상 불평하고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평안을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기쁨을 찾아 헤매지만 이 세상 신기루에서 무슨 기쁨이 있습니까?
우리의 기쁨은 안의 기쁨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쁨은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아무 조건이 없는데도 항상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피곤하지 않습니다. 광야를 걸어가도 주님이 지켜주심으로 항상 새 힘을 얻어서 살아가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너무 피곤하다고 합니다. 애들 때문에 피곤하고 남편 때문에 피곤하다고 합니다. 남편보고 밖에서 밥 먹고 들어오라고 그러고 밥해 주는 게 피곤하다 라는 겁니다. 제일 나쁜 남편이 삼식이라고 합니다.
세끼 다 먹는 남편이 제일 나쁘다는 겁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제일 좋은 남편이 무식입니다. 집에서 안 먹는 남편이 좋다는 말입니다. 남편 때문에 교육 때문에 피곤하고, 전부 피곤하다고 합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겁니다. 왜 이렇게 피곤합니까? 이렇게 좋은 세상 왜 피곤합니까? 우리는 항상 예수님과 함께 하면 늘 소망을 가지고 살고 기쁨을 가지고 살고 메마른 땅이지만 광야지만 주님이 주신 기쁨으로 살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나라가 지금 세계에서 최고로 잘 사는 데도 너무 짜증내고 불편해 하고 괴로워하는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오는 영적인 궁핍입니다. 영적인 핍절로 오는 병인데 이것을 육적으로 자꾸 해결하려고 하니까 더 피곤해지고 더 갈급해지고 더 목말라지는 겁니다. 오늘 대학이 다 피곤해하고 정치가 다 피곤해하고 기업이 다 피곤해합니다. 이 피곤이 어디서 왔냐, 무엇 때문에 피곤하냐 말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피곤합니다. 영적인 힘이 없으면 피곤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우리의 심령은 목마릅니다. 정욕에 목말라서 정욕을 쫓아 헤매니 정욕을 채워줄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늘 하나님중심의 삶을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내 심령, 내 영혼의 축복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누구나 있거나 없거나 높거나 낮거나 다 광야의 길을 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메마른 땅을 걸어가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 도움을 받고 하나님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 중심해서 살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마음에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워하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 사람은 그런 게 없다 라는 겁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라는 겁니다. 왜? 안에서 생수가 나오고 안에 기쁨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고 기쁨을 준다
그러니 결혼하고 일주일 만에 헤어지는 겁니다. 남편이 주는 게 아닙니다. 아내가 주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주신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광야 생활을 한평생 걸어가는 모든 성도들의 승리의 삶은 영적인 강건한 하나님 중심의 삶에 있다 라는 것입니다. 건강도 하나님 경외하면 건강해진다 라는 겁니다.
북한에 김정일 국방위원장 보세요. 산삼, 북한에 있는 거 혼자 다 먹어도 건강한 게 아닙니다. 그 사람만을 위해서 세계에서 좋다는 것 다 갖다 주고 묘향산, 차령산맥, 백두산에 나는 좋은 산삼 몇 백년 된 것, (여러분이 먹는 풍기인삼은 그런 거에 비하면 삼도 아닙니다) 몇 억짜리를 먹는데도 건강한 게 아닙니다. 왜? 사람은 꼭 고급 먹어야 건강한 게 아닙니다. 좋은 병원에 가야 건강한 게 절대로 아닙니다.
그렇게 다 지키고 경호해도 북경 갈 때 기차 타고 가고, 비행기가 겁나서 비행기 못 타고 기차 타고 가는 거 보세요. 불안한 겁니다. 다 지켜줘도 하나님이 안 지키면 불안한 겁니다. 기쁨조가 얼마나 있는 데도 기쁜 것 봤습니까? 날마다 기쁘게 하려고 기쁨조가, 부대가 있는데도 기뻐하는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무슨 근심이 그렇게 많나 싶고, 기쁨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예수 믿는 우리는 산삼 안 먹고 풍기삼 먹어도 얼마나 기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것은, 이 인간의 행복은 평범한 데 있습니다. 제일 좋은 약, 쑥뜸 해 보세요. 얼마나 좋습니까? 쑥 떠도 안 되면 그것은 문제가 많은 사람입
니다. 회개하고 쑥뜸 떠보세요. 쑥떡 먹고 쑥차 마셔봐요. 민들레차 먹어 보세요. 민들레 먹으면 다 좋아집니다. 질경이 국 끓여 먹어 보세요. 얼마나 몸에 좋은지 모릅니다. 그런 데서 다 병이 낫습니다. 현대의학, 약 채취하는 것도 다 그런 데서 나옵니다. 여러분이 맛있게 먹으면 약이 됩니다. 맛있게 먹고 맛있게 자고, 예수님 삶 보세요. 배 위에서도 자지 않습니까? 항상 만왕의 왕이시지만 어디서든지 누워 잘 수 있으면 그거 복 받은 사람입니다. 특별히 좋은 데 가서 자야 되는거는 병입니다. 좋은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잡수시는 것도 디베fi 바닷가에서 물고기 가져다가 구워 가지고 나무에다 구워 잡수셨습니다.
여러분 물고기를 재에다 구우면 완전히 잿덩어리입니다. 예수님은 잿덩어리 잡수셨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좀 낮추세요. 오늘 현대인의 병은 영적으로는 바닥까지 떨어져 있으면서 육적으로 자꾸 고급화하고 높여가지고 먹을 음식이 하나도 없고 입을 옷이 없어가지고 오는 병입니다. 여자분들 쇼핑할 때 보면 옷 한 벌 찾는데 종일 걸립니다. 아무거나 입으세요, 평범한 것 좀 입으세요.
제가 오늘 드리는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큰 교회라고 크게 살아도 안 되고, 돈 벌었다고 우리가 돈 가지고 사는 게 아닙니다. 믿음으로 사는 겁니다. 그러면 돈 없는 사람은 죽습니까? 돈 없어도 얼마든지 예수 안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라는 겁니다. 기쁨으로 살 수 있습니다. 평안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의 삶을 사실 때 육신을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먹을 것 필요 없다, 입을 것 필요 없다, 돈 필요 없다, 교육 필요 없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 아닙니다. 다 육신의 것을 취하고 사셨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최고로 고급화하고 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을 부인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을 사랑하시고 다 섬기시고 가까이 하시되 꼭 최고의 사람만 사귀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의 친구 한 명이 나오는데 나사로라는 친구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내 친구 나사로가 지금 아프다고 찾아가신 겁니다. 여러분이 꼭 최고의 높은 사람만 사귄다고 해서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평범한 사람을 사귀면서 만족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최고의 인물이어서 최고로 높이 올라가서 그것이 성공적인 삶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가지신 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든 남에게 줘서 도와주고 사랑해 주고 불쌍히 여기고 치료해 주고 은혜를 베풀려고 살아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부족하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분이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 은혜를 생각하면 내가 얼마나 받은 은혜가 많습니까?
제가 어제 어떤 책을 보니까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미국의 최고의 인기 있는 배우가 병이 들어서 혈압으로 걷는 것조차 잘못하는데 나이든 강아지가 문을 열어달라고 자꾸 긁으면서 자기를 향하여 도와달라고 해서 깨닫기를 나도 도와줘야 할 것이 있구나, 나도 참 축복받은 삶이구나. 저 강아지가 나보고 저렇게 도와달라고 하는 것을 보니 나도 행복하구나.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서 다시 일어나서 미국의 최고의 배우가 됐습니다.
보세요. 오늘 우리들이 만족하려고 하면 끝없이 올라가도 만족이 없지만 내가 이런 장애를 가지고 있어도 나보다 더 어려운 분 생각하면 거기에서 우리는 지혜가 나고 힘이 나고 용기가 난다는 것입니다.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욕심을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얼마 살지 않아서 잠깐 있다가 종착역이 오는데 잠깐 있으면 끝나는데 무슨 욕심을 그렇게 오래 갖고 살려고 하십니까? 60이 되셨습니까? 저도 다 됐지만 전부 갈 준비합니다. 내 목회는 전부 지금 가는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그 준비했습니다. 여기 영원히 살 곳입니까? 우리는 정말 가야 할 나라가 우리가 믿는 나라가 저 하나님 나라, 위에 있지 않습니까? 땅의 생활은 조심하며 살고 긴장하며 살고 아껴서 살고 절제하며 살고 근신하며 살고 좁은 길을 걸으며 살아야 이 광야 길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다 죽었으면서 병들었으면서 육적으로 흥청거리고 나잘났다 생각하고 돌아다니면 이것은 영육이 다 실패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분명한 삶이 있습니다. 너희들은 이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겸손으로 살고 이웃생각하며 살고 섬기며 살고 감사하며 살고 이렇게 살면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땅의 삶을 누리고 이 땅을 떠나서 영원한 하나님나라까지 다 함께 누리는 축복이 주어질 줄로 믿습니다.
섬김의 길
요한복음 13:12-17 / 이종윤 목사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도에 대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드리는 말씀은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렇다면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Ⅰ. 무릎을 꿇고 남을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세상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무릎 꿇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발을 씻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한없이 낮아져야 했습니다. 여기서 발을 씻는 다는 것은 죄씻기움을 받았다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바로 지금의 우리까지 죄의 용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예수님은 용서 받지 못한 가롯유다의 발까지도 씻어주셨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무릎을 꿇고 낮아져 어떠한 이웃이든 그들을 섬기며 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것을 알고 행할 때에 주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Ⅱ. 우리는 어떻게 남을 섬길 수 있을까?
1. 섬기는 사람들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전부 제 말만 하려고 하고 남의 말을 들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소리까지 듣지 않고 무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남을 섬기는 사람은 섬기는 방법 중에 하나가 형제의 말을 들어주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입니다. 죄를 서로 고백하고, 그 고백을 남에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1. 섬기는 사람들은 희생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 중 선한 사마리아인 얘기가 있습니다. 자신의 갈 길이 바쁘더라도 쓰러진 자를 한 번 더 되돌아보고 그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는 것, 그것이 희생의 대명사인 것입니다. 자기가 바쁘다는 핑계로 이것저것 다 빼버리면 그 희생은 다 거짓이 되어버립니다.
2. 섬기는 사람들은 남에게 주어야 한다.
성경에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소지한 모든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두 내어주었습니다. 마게도니아 교회 성도들은 주되 자기를 먼저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돈도 아니고, 시간도 아닌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것, 이것이 바로 섬기는 모습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3. 섬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짐을 대신 져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고 우리의 아픔을 다 지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의 짐을 지어줌으로써 사랑의 법인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상처를 위로해주고 내가 대신 아파해주는 것, 이것이 짐을 져주는 것이며 곧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4. 섬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진리의 말을 해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반드시 진리의 말도 해주어야 합니다. 모든 진리를 그에게 말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웃을 돕는 것입니다.
5. 섬기는 사람은 서로를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
나도 네가 지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드러내기 보다 온유한 심령으로 사랑을 담아 그 사람의 죄를 위해 같이 울어주고, 같이 기도해주고, 용서해주고, 사랑으로 덮어주는 것이 바로 주님의 도를 따르는 섬김의 제자가 된 사람인 것입니다.
결 론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은 남에게 대접 받고 남의 위에 서 있는 것을 흔히 말하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대접하는 것, 섬기는 자리에 바르게 서있는 것이 가장 성공에 으뜸가는 자리임을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섬기기 위해 오셨다는 말씀을 기억하며 그 말씀대로 행하여 복을 누리시는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알고 행하면
요 13:12-17 / 정성섭 목사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도에 대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드리는 말씀은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렇다면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Ⅰ. 무릎을 꿇고 남을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세상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무릎 꿇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발을 씻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한없이 낮아져야 했습니다. 여기서 발을 씻는 다는 것은 죄씻기움을 받았다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바로 지금의 우리까지 죄의 용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예수님은 용서 받지 못한 가롯유다의 발까지도 씻어주셨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무릎을 꿇고 낮아져 어떠한 이웃이든 그들을 섬기며 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것을 알고 행할 때에 주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Ⅱ. 우리는 어떻게 남을 섬길 수 있을까?
1. 섬기는 사람들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전부 제 말만 하려고 하고 남의 말을 들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소리까지 듣지 않고 무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남을 섬기는 사람은 섬기는 방법 중에 하나가 형제의 말을 들어주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입니다. 죄를 서로 고백하고, 그 고백을 남에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1. 섬기는 사람들은 희생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 중 선한 사마리아인 얘기가 있습니다. 자신의 갈 길이 바쁘더라도 쓰러진 자를 한 번 더 되돌아보고 그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는 것, 그것이 희생의 대명사인 것입니다. 자기가 바쁘다는 핑계로 이것저것 다 빼버리면 그 희생은 다 거짓이 되어버립니다.
2. 섬기는 사람들은 남에게 주어야 한다.
성경에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소지한 모든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두 내어주었습니다. 마게도니아 교회 성도들은 주되 자기를 먼저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돈도 아니고, 시간도 아닌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것, 이것이 바로 섬기는 모습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3. 섬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짐을 대신 져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고 우리의 아픔을 다 지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의 짐을 지어줌으로써 사랑의 법인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상처를 위로해주고 내가 대신 아파해주는 것, 이것이 짐을 져주는 것이며 곧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4. 섬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진리의 말을 해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반드시 진리의 말도 해주어야 합니다. 모든 진리를 그에게 말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웃을 돕는 것입니다.
5. 섬기는 사람은 서로를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
나도 네가 지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드러내기 보다 온유한 심령으로 사랑을 담아 그 사람의 죄를 위해 같이 울어주고, 같이 기도해주고, 용서해주고, 사랑으로 덮어주는 것이 바로 주님의 도를 따르는 섬김의 제자가 된 사람인 것입니다.
*결론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은 남에게 대접 받고 남의 위에 서 있는 것을 흔히 말하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대접하는 것, 섬기는 자리에 바르게 서있는 것이 가장 성공에 으뜸가는 자리임을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섬기기 위해 오셨다는 말씀을 기억하며 그 말씀대로 행하여 복을 누리시는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알고 행하면
요 13:12-17 / 정성섭 목사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자식을 위해 고생하시면서 은혜를 베푸신 부모님의 노고를 기억하고 그 은혜를 생각하며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날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을 생각할 때마다 세월의 덧없음을 생각합니다.
항상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것 같지만 오랜만에 부모님을 뵈면 많은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습니다. 희어진 머리. 굵게 패인 주름살, 구부러진 허리
모세는 노년에 자신을 생각하면서 시편 90:10에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지나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모세 같은 인생을 산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평범히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떻게 우리의 인생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생은 매우 빠름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실감하게 되는 것을 요즘 느낍니다.
어버이 주일을 지키는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우리들의 부모님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자식된 우리는 어떻게 부모님을 모셔야 합니까?
孝道는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기본적인 요건입니다.
기독교 복음이 처음 전파될 때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를 받았습니다.
효 문제가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면 종종 기독교는 불효하기에 못 믿겠다고 합니다. 조상에게 제사를 안 드리는 것으로 문제를 삼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제사는 5대까지만 드리니 그 윗대들 아득한 선조들은 너무 불쌍합니다. 참 효도는 살아 계실 때 하는 것입니다.
장례식장에 가보면 간혹 의아해 할 때가 있습니다. 살아 계실 때는 잘하지 않다가 돌아가시면 장례식도 잘하고 우는 모습도 그렇게 슬플 수가 없는 것을 종종 봅니다.
흔히 기독교를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불효의 종교 인양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기독교는 효도의 종교입니다. 돌아 가셔서 천국에 가신 부모님을 존경하고 추모하고 살아 계신 부모님을 잘 모시는 것이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살아 계신 부모님은 자식들이 책임을 져야 하고 돌아가신 부모님은 하나님이 책임을 지십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자식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여호와가 너에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하셨습니다.
오늘의 이 말씀대로 본다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나 그 명령은 결국 우리 자식들을 위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면 부모님들은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 땅에서 오래 사는 장수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린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의 말씀은 교회를 다니지 않은 사람이라도 알고 있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난 후에 그 의미를 설명하시면서 교훈을 주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그들의 선생으로. 구세주로서의 섬김과 끝까지 사랑하는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17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읍시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먼저 우리는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는 것이 복을 받는 출발점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천지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가 사는 이 땅위에 내려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합니다. 우리들을 사랑하신 그 하나님이 우리들을 끌어올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곁으로, 우리들과 같은 모습으로 내려오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의 출발입니다.
그 분이 우리들의 곁으로 내려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이 세상에 대하여 알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의하여 창조된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이 세상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이 세상은 교회를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셨기에 그 분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결국 이것은 그분이 우리들의 곁으로 오셔서 그분의 수준으로 우리들을 끌어올리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수준으로 우리들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그분은 모든 것을 다 하셔야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던 예루살렘으로 가는 노상에서, 만나는 수많은 병자들, 가난한 자들, 위선적인 종교인들을 향해서 그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대하여 알게 하시기 위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고통도 보여 주셨습니다.
그 분이 우리들을 그 분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수단은
먼저 우리들의 수준으로 낮추셨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들의 수준으로, 우리들의 모습으로 낮추셨기에 대화가 가능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희생이라고 말합니다. 헌신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그분의 희생과 헌신은 우리들을 그 분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방법이었습니다.
우리들의 부모님을 보십시오
우리가 어렸을 때 우리는 부모님의 보살핌과 양육을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부모님 의 도움과 사랑을 받으면서 자랄 때 우리는 우리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아이로 자랐습니다. 우리들을 먹이시기 위해 그 분들이 감수해야 했던 고통은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그 분들이 감수해야 했던 희생은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을 입하시기 위해 그 분들이 감수해야 했던 희생과 헌신에 우리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모님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지금까지 성장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우리들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들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나중에서야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우리는 아무런 깨달음도, 감사함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형식적으로 매년마다 찾아오는 어버이날에 카네이션 하나 달아드리는 것으로 우리들의 도리를 다 했다고 하는 마음으로 지내왔습니다.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이 땅에 우리들의 수준으로 내려오신 것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듯이 이제 우리의 부모님에 대하여 알아 가는 자식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고통과 죽으심이 우리들을 위한 놀라운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 듯이
우리들을 입히시고 먹이시고 가르치시기 위해 그 분들이 감수해야 했던 그 모든 것을 우리는 이제 알아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하여 반응을 할 정도로, 알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부모님들의 희생을 통해서 부모님들보다 더 많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부모님들의 사랑을 통해서 부모님들보다 더 많은 삶의 지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부모님들의 헌신을 통해서 부모님들이 살아오신 삶의 수준보다 더 높은 삶의 수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합니다.
우리들이 이만큼 아는 수준까지 이르기까지는 부모님들의 희생과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들은 우리들의 성장함을 바라보고 매우 기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성장하는 반면에 우리들의 부모님들은 그대로 계셨습니다.
아니 그대로 게신 것이 아닌 점점 더 후퇴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고 싶은 것 자식 때문에 하지 않았기에 후퇴하는 삶이었습니다.
잡숫고 싶은 것 자식 때문에 잡숫지 않았기에 후퇴하는 삶이었습니다.
입고 싶은 옷 자식 때문에 입지 않았기에 점점더 초라해지는 삶이었습니다.
1988년 유럽의 알베이니에 엄청난 지진이 일어난 적이 있는데 , 이 지진으로 인해서 어린 아기와 엄마가 무너진 건물 속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손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를 두고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기의 울음소리는 점점더 기운을 잃어갑니다. 결국 엄마는 손가락을 깨물어 아기에게 피를 빨아먹게 했습니다. 한 방울 한 방울 의 핏방울이 아기의 입속으로 떨어질 때마다 엄마의 기운은 차츰차츰 기력을 잃어갑니다. 그들이 6일만에 구조되었을 때 지나치게 흘린 피 때문에 아기는 살았지만 엄마는 끝내 숨지고 말았습니다. 영국의 런던 타임 지는 이 사건을 향해 현대판 예수라고 규정했습니다.
엄마의 피를 공급받고 아기가 살아남같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인해 우리도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 하나 알아야할 사실은 우리들의 부모님의 희생을 통해서 우리가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성장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결과로 지금의 우리와 부모님 사이에는 갭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수준차이. 생활의 차이.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부모님들의 수준을 우리들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처럼 부모님들이 생각하기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필요에 따라 부모님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결정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이전에 먼저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신 성육신이 있었습니다. 우리들을 하나님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이전에 우리와 같은 수준으로 내려오셨음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리고 철저히 낮아지는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 낮아짐의 극치가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위해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던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우리들을 위해 먹을 것을 참으셔야 했던 우리들의 어머님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위해 대야에 물을 담는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우리들을 위해 입을 것을 참으셔야 했던 우리들의 아버님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위해 옷을 벗어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신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우리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셔야 했던 부모님들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주님의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을 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들의 이웃을 위해 발을 씻기는 섬김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우리들의 이웃을 위해 발을 씻기기까지 낮아지는 헌신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들을 위해 한평생을 바치신 부모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효도입니다.
부모님들 앞에서 우리들의 수준은 이제 낮아져야 합니다. 그 분들의 생각으로 우리가 내려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졌던 모든 삶의 수준들은 부모님들 앞에서는 모두 낮아지는 섬김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복을 받아 오래 사는 비결입니다.
우리들의 생각에 그분들을 끌어올리려고 하는 것 그것이 불효입니다.
우리들의 생각으로 말하는 것이 그분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그분들이 살아오신 인생의 과정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불효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논하면서 말하기를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잊어버리지 않음같이 부모님도 결코 그 자식을 잊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도 말씀하십니다. 절대로 잊지 않기 위해서 손바닥에 새기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낳은 자식""이라고 하셨습니다. 배앓이를 하면서 열달동안 고생하며 낳은 자식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부모는 자식이 어떤 형편에 있던지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자식된 우리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어떤 여인이 젖먹이 아기를 품에 품고 앉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너무나 가련해 보여서 얼마를 동정하면서 아기를 한번 보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포대기에 쌓인 아기를 절대로 보여줄 수 없다고 합니다. 왜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느냐고 다그쳐 묻자 이 여인은 ""아기가 죽은 지 벌써 오래되었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자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이것이 자녀를 잊지 못하는 부모의 심정입니다. 자기의 고통과 고난 중에 낳은 자식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잊지 않는다는 것은 자식은 부모의 분신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으며 그 사랑은 무한의 사랑임을 보여줍니다.
오늘은 이 같은 부모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그 은혜와 은덕을 기리는 어버이 주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부모님의 사랑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섬김을 부모님 섬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섬기는 마음과 자세로 부모님께 효도하고 부모님을 섬겨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부모님이 우리들을 위해 행하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일을 행하라고 하는 말씀 앞에 서있습니다. 그리하면 복이 있으리라는 말씀이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복은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여러분의 것으로 소유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에 대하여 알도록 노력하십시오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에 대하여 알도록 노력하십시오
성령 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에 대하여 알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삶속에 그 말씀들이 살아 있음이 증거 되도록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복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 앞에서 점점더 연로해져가는 우리들의 부모님들에 대하여
그 분들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도록 노력하십시오.
그 분들이 기쁨이 무엇인지 알도록 노력하십시오.
그 분들의 슬픔이 무엇인지 알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그분들에게 우리가 있음으로 기쁨이 되도록 행하십시다.
그 분들의 기쁨이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복이 임하는 은혜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면서 그리스도인이 특별히 효도하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님은 절대로 자식을 잊지 않습니다. 세계 어느 곳에 있든지 심지어 이 세상을 떠난 자식이라도 부모는 자식을 잊지 않습니다.
발을 씻겨 주는 주님의 심정
이재철 목사
힌두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썬다싱의 일화가 있습니다.
겨울에 길을 가다가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그냥 갈 수 없어 그 사람을 업고 땀을 흘리며 갔습니다. 얼마 가다 보니 시체가 있었습니다. 그 시체는 길에 쓰러진 사람을 버려두고 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썬다싱은 추운 겨울 날 사람을 업고 가면서 땀을 흘리며 갔기 때문에 체온을 유지하여 살 수 있었고 업고 갔던 사람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한 짐이 있고 사람(부모, 자식, 형제 등)에 대한 짐이 있습니다.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메고 가는 것이 힘들지만, 결과적으로는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일입니다.
주님 사랑 때문에 목장 식구들을 섬깁니다.
섬기다 보면 섬기는 사람이 가장 많이 변해있습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느냐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내 이웃과의 관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가장 가까운 이웃은 배우자입니다. 배우자에게 따뜻하게 말하고, 싸움을 줄이고, 각방 쓰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신앙은 이처럼 구체적인 것입니다.
목장에는 병든 사람이 오는 곳입니다.
그러나 목장에도 얌체가 있습니다. 나만 이해해 달라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사람은 새 식구가 오면 섬기는 것이 아니라 경계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너무 집중하면 힘이 빠집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내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목장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저 사람만 사라져주면..’하는 마음이 있으면 나중에는 목자, 목녀만 남게 됩니다.
목장은 섬김의 연습장입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까? (14-15절)
본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씻기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다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누가 큰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서로 높아지려고 싸우는 제자들을 향해 진정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큰 자가 되기 위한 방법을 보여주기 위해 발을 씻겨 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큰 자는 내 밑에 얼마를 거느리느냐 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큰 자는 내가 얼마나 많은 자를 섬기느냐가 더 큰 자입니다.
◈ 주님의 심정을 가지고 섬기면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십니다.(17절) 어떠한 축복을 주실까요?
① 필요할 때마다 귀한 사람을 만나는 축복을 주십니다.
섬기려고 하면 사람을 얻지만, 이용하려 하면 사람들이 모두 떠납니다.
사람들은 보통 돈과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사람을 잘 만나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내게 준비해주신 사람을 만나게 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그 사람을 알아볼 줄 아는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그 준비는 섬김입니다. 그것을 보고 우리에게 소중한 만남을 주십니다.
② 하나님은 때가 되면 반드시 나를 높여주십니다.
예수님은 가장 처참한 죽음인 십자가형으로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혔습니다.
그 후에 부활하시고, 보좌위에 앉으시고, 모든 만물을 발 아래 두게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높여주셨을까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겼기 때문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이집트의 노예로 팔려가고, 억울하게 감옥에 가게 되었지만 감옥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그 후에 그는 이집트의 총리가 되고, 나라를 살리고, 형제를 살리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계속 그를 높여 주셨습니다.
목자, 목녀의 섬김도 때가 되면 높여주십니다.
먼저 목장 식구들의 마음속에서 높여주십니다. 또한 이 땅에서도 높여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큰 자가 됩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 스스로 높아지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처음에는 높아지는 것 같으나 나중에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사울왕이나 바벨탑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높여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 어떻게 하면 주님의 심정으로 섬길 수 있을까요?
㉠ 주님의 발을 씻겨드립시다.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자란 내가 도와줘도 갚을 길이 없는 사람입니다. 소자를 섬기면 감동을 받고 그들이 기도합니다. 그래서 상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 주의 받은 사랑을 전합시다.
고린도전서 11장 26절에 보면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심정이 없으면 주님의 사랑을 전하지 못합니다.
전하지 못할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내가 나누지 못할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너무 좋으면 나누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