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산 김원봉 선생님.
현상금 약 100만원 (현재 금액으로 약 320억)
일본제국에 의해서 역대 최고액의 현상금이 걸렸던 독립운동가.
이 기록은 반세기 이후 오사마 빈라덴에게 540억의 현상금이 걸리기 전까지 전세계 역사상 최고액이었다.
김원봉은 2시간 넘게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다고 한다. 즉, 잠도 제대로 이어서 못 잤다는 얘기다.
김원봉은 의열단을 창설하여 항일 무력투쟁을 전개했다.
의열단은 일제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나 그들에게 폭탄을 던지고 총구를 겨눌지 몰랐기 때문이다.
의열단원들은 모이면 항상 사진을 찍는것을 좋아했는데 이는 그들이 일제에 의해 언제 죽을지 모르기때문이다.
중국과 연줄이 있었기에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조선의용대를 편성, 대장으로 취임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후 임시정부에 합류, 한국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한다.
그러나 임시정부에선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는데, 이는 김구를 비롯한 보수 진영과 마찰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때 좌우익의 갈등은 독립운동사의 오점이었다.
해방후 귀국한뒤 좌우익의 대립이 심각해지자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민족주의민족전선에 합류했다.
친일경찰 노덕술 (좌측)
1947년 3월에 민주주의민족전선 산하단체에서 주도한 총파업에 연루되어 대표적인 친일파 경찰 노덕술에게 '빨갱이 두목'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체포되어 공개적으로 조롱당하고 뺨을 맞아 충격을 받는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군, 경찰에 당하지도 않은 수모를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 경찰한테 당한 치욕적인 수모였다.
의열단 동지의 회고에 따르면 풀려난뒤 김원봉은 술만 마시며 사흘을 연속해서 울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친일파와 우익들의 정치테러 표적이 되어 지속적인 테러를 당했다.
아이러니한건 김원봉을 고문하라고 지시내린 장택상은 독립운동가 출신. 그런데 좌우갈등때문에 같은 독립운동가들끼리도 죽이던 시대니, 별 무리는 아니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 때 김구, 김규식과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는데 그대로 잔류하여 월북인사가 된다. 그러나 김원봉은 이름높은 독립운동가였으나 김일성과 연줄이 없었기에 명목상의 고위직만 맡다가 숙청되었다.
'국민당 장개석의 간첩이자 종파주의자'라는 어처구니 없는 죄명목으로 형무소로 끌려가 거기서 울분을 참지못해 청산가리를 입에 털고 자살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게 김원봉은 한 많았던 자신의 생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