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1주간 월요일 강론>(2024. 11. 4. 월)(루카 14,12-14)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편 가르기와 차별대우는 ‘큰 죄’입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2ㄴ-14).”
1) 이 말씀은, 산상 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마태 5,46-47)”
참 사랑에는 울타리가 없습니다.
신앙인은 편 가르기를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도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편 가르기’ 라는 문제 때문에,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을 엄하게 꾸짖은 일이 있습니다.
“이제 내가 지시하려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러분을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모임이 이익이 아니라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우선, 여러분이 교회 모임을 가질
때에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이 있다는 말이 들리는데, 나는
그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에 분파도 있어야 참된 이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한데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1코린 11,17-22).”
부자들끼리만 어울려서 배불리 먹고, 가난한 이들은
배고픈 상태로 소외된다면, 그것은 공동체도 아니고
교회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2) 예수님 말씀에서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라는 말씀은, 그들‘만’ 부르지 말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보답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만
베풀지 마라. 보답을 받을 생각으로 베풀지 마라.”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는, 그들‘도’ 초대하라는 뜻입니다.
굳이 순서를 따진다면, “소외계층 사람들을 ‘먼저’
초대하여라.”, 또는 “함께 초대하여라.”입니다.
<‘나중에’는 결코 아닙니다.>
내가 부유한 이웃들과 가난한 이웃들을 ‘함께’ 초대해서,
나의 집에서 그들이 모두 함께 어울리고,
함께 기뻐하게 된다면?
그러면 ‘하느님 나라의 기쁨’이 나의 집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에는 부유한 사람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어떤 차별이나 소외 같은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3)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는, “그들은 너에게 보답할 수 없겠지만,
너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입니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소외계층 사람들을 초대한 일은 ‘의로운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 ‘의로운 일’을 실행한 사람들은 의인들이고,
의인들은 모두 하느님의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 일 하나만으로 의인이라고 인정받는 것은 아니고,
진짜 의인이라면 평소에 늘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할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참으로 성경에 따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지고한 법을
이행하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짓는 것으로, 여러분은 율법에 따라
범법자로 선고를 받습니다(야고 2,1-4.8-9).”
사랑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고 실천하기’입니다.
내가 차별을 당하고 소외당하는 입장에 있다면?
<오늘날의 우리 교회의 모습도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로 한 마음과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의 모습인가?
베푸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인가를
형식적으로 조금 하고 나서, 자기들은 사랑 실천을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하고 뿌듯해하면서
자아도취에 빠지는 모습을 볼 때가 많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출처]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