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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절대적인 지지를 원했다!
이승만과 자유민주주의는 상극관계!
이승만 양아들 이인수씨는 2011년 4월 18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된 인터뷰에서 '이승만은 3.15선거가 부정선거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이 대통령과 4.19혁명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정신에 있어서 같은 것"이라는 주장도
폈다.(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4/18/2011041800064.html)
필자는 앞에서 이승만이나 자유당 간부들, 국무위원들이 3.15 선거가 부정선거임을 몰랐다고 주장하는 것은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기만적인 주장이라고 강조했다. 그것은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는 짓이나 다름없고, 국민을 한없이 얕잡아 보는, 우민관에서 나온 억지
주장이다.
이승만을 '자유민주주의자'라거나 '자유민주주의를 지켰다'고 주장하는 것도-자유민주주의를 독재, 또는 파시즘 같은 것으로
해석한다면 몰라도..- 사실과 전혀 다른 기만적인 억지 주장이다. 이승만과 친일파를 비롯한 추종자들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형해화했고, 파괴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나아가 부패와 무능함으로 6.25 전쟁때, 북한에 의해 나라가 빼앗길 뻔했던 그 책임은 반드시
져야 한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는 4월 혁명으로 다시 소생할 수
있었다.
외국인들은 이승만 통치하의 한국을 종종 '경찰국가'로 불렀다.
제1공화국 시기의 조선일보는 전쟁전인 1950년 4월 1일자 사설에서 '언제 빨갱이 모략에 걸릴지 불안해서 안심하고 살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고
개탄했지만, 특히 전쟁의 폐허 위에서 맹렬히 위세를 떨친, 이승만이 특별 신임한 김창룡,원용덕,김종원-세 사람 다 친일파-으로 대표되는 극단적
반공주의는 대한민국의 위상과 자유민주주의를 질식상태에 몰아넣었다.
과거에는 제헌절만 되면 독재자에 의해 우리 헌법이 얼마나
유린되었는가를 개탄하는 기사로 메워졌다. 이승만은 제헌헌법으로 대통령 재선이 어렵다고 판단하자, 1952년 부산정치파동(발췌개헌)을 일으켜
헌법을 유린하고 발췌개헌을 강요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영구집권을 위해 '사사오입'이라는 전대미문의 억지 논리를 펴서 이미 부결된 개헌안이
역시 헌법을 유린하며 '통과'되었다.
이승만은 권력에 대한 촉수가 대단히 예민했다. 권모술수나 기만적인 속임수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에 살면서 선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선거에 대해서만큼은 항상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이승만은 집권
말기에만 선거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총기획자로서 역할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집권기에 치러진 선거에 대해서 각별히 관심을 가지고 얼마나
깊숙이 개입했는가를 부분적으로라도 살펴보는 것은 1960년 선거에 그가 얼마나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선거의 전개를 하나하나 면밀히 기획하고
점검했을까를 충분히 짐작하게 할 것이다. 그것은 또한 자유민주주의의 기반이자 보루인 보통선거가 이승만에 의해 어떻게 파손되었는가를 보여줄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1948년 5.10 선거에서 가장 큰 비난과 빈축의 표적이 된 지역구가 이승만이
입후보한 동대문 갑구였다. 안창호 계열로 일제 때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최능진이 훌륭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이승만을
떨어뜨려야 한다고 판단해 선거에 나섰는데, '이승만의 떨거지'들인 서북청년회 깡패들로부터 등록 서류를 날치기 당하는 등 후보등록 자체가
어려웠다. 그가 갖가지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등록하여 인기가 높아지고 이승만 후보가 위태롭게 되자, 이제는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지휘하에
후보등록 무효화 작업을 벌였다. 그리하여 최능진은 입후보 등록이 취소되었다. 그 뒤 다시 등록 수속을 마쳤으나 경찰의 방해로 또다시
무효화되었다.(출처-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2',역사비평사,'1996년,p171 참조)
1950년 5.30선거에는
김구,김규식과 노선을 같이한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입후보했다. 이들의 인기에 위협을 느낀 이승만은
'공산당이 국회에 침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005260032920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0-05-26&officeId=00032&pageNo=1&printNo=1171&publishType=00020)고
경고했고, 청주,대구 등지에서 공산당 동정자를 엄정 비판하라고 촉구한 뒤, 부산에 가서는 반정부 인사들에게 투표를 고려할 뿐더러 당선된 뒤에도
소환해야 한다고 위협했다. 부산정치파동에서 자주 나왔던 '소환'이라는 말이 5.30선거에서 벌써 나온 것이었는데, 이는 헌법을
무시한 발언이었다.
장건상 등 부산 지역의 입후보자들은 무수히 협박을 받다가 선거 1주일을 앞두고
구속되었고, 조소앙은 서울 성북구 입후보했을때 갖은 음해와 인신공격을 당했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조소앙이 전국 최다 득표를 하고, 장건상과
김칠성이 옥중 당선되는 등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압도적 표 차로 당선되었다. 반면 이승만 지지자나 민국당(한민당 후신) 간부들은 추풍에 낙엽
떨어지듯 우수수 떨어졌다. 민중은 애국자를 존경하고 있었다.
예상과 달리 한민당 후보나 이승만 지지자들이 저조한
성적을 보인 5.10선거나 중도파가 두각을 나타낸 5.30선거는 유엔이 감시했고, 아직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 노하우가 쌓이지 않아 비교적
공정히 선거가 치러졌다. 두 선거는 집권자가 영구집권을 기도해 부정선거를 저지르지 않는 한, 한국인은
자유민주주의 선거를 잘 치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발췌개헌으로 치러진 최초의 직선제 선거인 8.5
정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은 기상천외의 몰염치한 '사전선거운동'을 벌였다. 부산정치파동까지 벌여가며 발췌개헌을 하도록 한 사람이 출마를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자 한두달 전의 부산정치파동에서처럼 벌떼같이 '민의부대'가 동원되어 350만명에 달하는 '지지 추대 탄원서'가
제출되었다. 이승만은 제1착으로 후보등록을 했다. 이승만의 불출마 선언은 그의 우민관을 잘 드러낸 것으로 국민을 우롱한
행위였다.
다른 후보자들의 선거운동 기간이 열흘도 안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가 어떠한 품성을 지닌 사람이었던가를 더욱더 잘
알게 한다. 그는 또 자유당 부당수인 이범석이 자유당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는데도, 자기보다 더 연로한 함태영을 출마하게 했다. 여기에 경찰이
나섰고, 그리하여 국민은 그 이름조차 모르는 함태영이 압도적 표 차로 이범석을 누르고 당선되는 슬픈 희극이 연출되었다. 자신과 권력 성향이
비슷한 이범석 대신 순종적인 노인네를 택한 것이었지만, 그만큼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초기에 너무도 깊은 상처를
입었다.
1954년 5.20총선에서 이승만은 특이한 담화를 잇달아 발표했다. 총선 공고 하루 전날 '개헌 조건부로 입후보케 하라'는
담화가 발표되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404260020920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4-04-26&officeId=00020&pageNo=2&printNo=9558&publishType=00020)
이 선거에서 자유당 공천자들은 "민의원이 된 후에는 민의에 의한 당 결정의 개헌을 절대로 지지함"이라고 쓰여 있는 서약서에 도장을
찍고 공천증을 받았다. 최초의 정당공천제는 이렇게 악용되었던 것인데, 이 또한 서글픈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의 한 단면이었다. 개헌 담화에 이어
바로 이승만은 친일파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단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아무리 왜정시대에 악질적 해악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지금 잘하는 일이 있으면 애국자라는 주장이었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404090032920101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4-04-09&officeId=00032&pageNo=1&printNo=2481&publishType=00020)
이승만 '건국'대통령 동상을 광화문에 세우자는 일부 뉴라이트 '사기꾼'들과 어쩌면 그렇게 비슷한 사고를 하는지, 탄성이 절로 나올
뿐이다. 5.20총선에서 당선된 이재학,한희석,장경근 등 친일파들은 자유당 최고 간부로 발탁되어 사사오입개헌에서 3.15선거까지 '애국'을
앞장서서 할 터였다.
5.20 총선은 5.2 총선과 함께 대표적인 경찰선거로 꼽힌다. 조봉암은 인천,부산,서울의 세 군데를 지역구를
전전하며 후보등록을 하려고 했으나 서류를 날치기 당하는 등 끝내 등록을 하지 못했다. 1952년에 국무총리서리였던 허정은 부산에서 출마했는데,
도경국장 김종원이 진두지휘하여 선거운동을 방해하자 할 수 없이 포기했다.
1956년 5.15 선거에서 이승만은 또 다시 4년 전의
비열한 수법을 써먹었다. 사사오입개헌을 했는데도 1956년 3월 5일 자유당이 후보를 지명하자, 출마를 하지 않겠다는 유시를 내렸다. 즉각
민의가 동원되었던 바, 아부의 천재인 노총에서는 소와 말까지 이 박사 출마를 원한다는 이른바 '우의마의'(牛意馬意) 소동을 벌였다. 그러자
이승만은 민의란 글로 써서 해도 된다고 타일렀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603140020920101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6-03-14&officeId=00020&pageNo=1&printNo=10207&publishType=00020)
그리하여 내무부 지시로 5백만 명에 달했던 시위는 사라지고 3백만 명 이상이 날인한 탄원서와 혈서가 들어왔다. 이승만은 3월
23일에 할 수 없이 민의에 양보하기로 했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 선거에서 조봉암은 야당 표를 분산시킬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무사히 대통령
후보등록을 마칠 수 있었다. 3월 23일 이승만은 대통령 후보 한 사람이 백만 환 이상 쓰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밝혔는데, 정부는 4월
15일부터 5월 15일까지 아예 은행 대출을 중단시켰다. 한 신문은 각 정당의 선거운동에 대해 자유당은 비행기, 민주당은 버스, 진보당은 지게에
비유된다고 보도했는데, 정부의 그 같은 조치는 비열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이승만과 잔류파(=서울시민들), 피해대중
마지막으로 3.15부정선거의 진원지가 되는 1956년 5.15정부통령선거에서 왜 이승만,자유당이 서울에서 선거운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야유를
받았고, 조봉암이-특히 경상도(경북,대구)에서 그랬지만..- 인기가 높았는지 그 이유를 간략히 서술해본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서울시민 등 도시 사람들에게서 손가락질을 받은 것은 부정,비리,불의가 심하다는 점이 작용했다. 그러나 민생고를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하기 짝이없는
정권인데도 사사오입개헌이나 발췌개헌,부산정치파동이 말해주듯 장기집권욕에 사로잡혀 있고, 불법,무법,탈법이 판치는데다 경찰과 깡패 등쌀에 서민들이
살 수 없었다는 점도 작용했다.
그런데 서울 사람들이 이승만을 미워하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6.25 전쟁이 나자 이승만은 피신하는 것에만 급급해 국무위원들이나 국회의원들, 군 지휘관에게조차 아무런 통고 없이 1950년 6월 27일 오전
2시경 혼자서 대전으로 피신했다. 그러고는, 국군이 적을 물리치고 있으니 동요하지 말고 안심하라는 방송을 그날 밤 자정 무렵까지 내보냈다.
전쟁이 발발한 후 이승만이 한 최초의 방송이었다.(반면에, 수도 서울에 남아 정부기관의 공문서를 다 정리하고 뒤늦게 서울을 떠나 피난을 간
조봉암과 상당히 비교가 된다. 조봉암은 그 과정에서 아내 김조이를 잃는 비운을 겪기까지 했다.)
함석헌은 '사상계' 1958년
8월호에 발표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명문에서 "밤이 깊도록 서울을 절대 아니 버린다고 열 번 스무 번 공포하고 슬쩍 도망을 쳤으니,
국민이 믿으려 해도 믿을 수 없었다. 문서 한 장, 도장 하나 아니 가지고 도망한 것이 무슨 정부요 관청인가?"라고 썼는데, 실제로 정부는
그때까지 한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고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상부의 지시를 받은 공병감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다. 이날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왔는데, 서울 사람들은 피신할 방법이 없었다.(당시 서울 인구는 약 180만명이었다. 제대로 피난간 사람들은 많아봐야 5~60만명, 나머지
서울시민들은 '잔류파'가 된 셈이었다.) 남부지방(전라도,경상도,충청도 등)에 비해 보수적 성향이 짙었던 서울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잔류파'가 되어 인민군 치하 3개월 동안 노역에 시달리고 굶주림으로 고생했다. 이승만은 대전에서도 안심이 안되어 7월 1일 오전 3시경에
목포를 거쳐 부산으로 피신했다.
서울을 버리고 간 것은 크게 논란이 되어 국회에서는 이 대통령이 국민에게 사죄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사죄하기는 커녕 수복 후 서울에 들어와서 '부역자 엄단 방침'을
선포했다. 잔류자들은 '부역자 심사의 대상'이 되었다. 더구나 돈과 차가 있는 영악한 사람들이 눈치 빠르게 서울을
빠져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는-이들을 '도강파'라 한다,- '애국자' 행세를 하며 당국 못지않게 잔류파를 몰아치고 닦달했다. 도강파-잔류파 문제로
서울은 오랫동안 갈등에 시달렸고, 세태는 험악해졌다. 서울 사람들이 이승만과 자유당을 좋아할 리
없었다.
조봉암이 1956년 5.15 정부통령선거에서 역설한 '평화통일'과 피해대중을 위한 정치는 민중들에게
호소력이 컸다. 그는 수탈당하고 억압,학대 받는 민중을 '피해대중'으로 설정했는데, 피해대중은 '4.19 선언문'이 지적한 백색독재 곧
극우반공독재에 의해 생겨났다. 조봉암은 극우반공세력이 자행한 학살이 피해대중을 양산한 것에 주목했다. 그는 1956년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차기 대통령이 될 사람은 동족,동포를 사랑하고 아낄 줄 알아야 한다면서 "6.25 사변 이래로 얼만지도 모를 수 많은 동포가 가지각색의 죄목으로
살회되는 것을 목도하였는데... 평상시에도 음모와 모략으로 동포를 해하고 또 혹은 체포로써 유위한 인재를 살해"했다고
지적했다.
정부 수립 직후, 그리고 전쟁 발발 직후 중공군 개입 시기에 한국사 최대의 비극인 주민집단학살이 군,경에 의해
자행되었다. 제주 4.3사건은 미군정 시기에 발생했지만, 2만 5천명에서 3만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희생자의 대종을 이루는 주민집단학살은
1948년 11월에서 그 다음해 2,3월 사이에 일어났다. 전쟁 발발 직후 같은 시기에 발생한 '국민보도연맹원'등 예비검속자 집단학살로 희생된
사람은 최소 5만명 이상이고, 10만명 이상일수도 있다고 추측되나, 20만명 이상이라는 주장도 많다. 그리고 11사단에 의한
함평,고창,거창,산청 등지에서의 주민집단학살도 규모가 컸다.
군경에 의한 대규모 집단학살에는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이분법적 사고 및 인명경시 사상과 결합되어 있는 '발근색원'(拔根塞源)주의, 그리고 '엄벌주의'가 큰 영향을 미쳤다. 주민집단학살에
이승만이 직접 관련했다는 주장은 적지 않다. 조봉암이 특히 분개한 보도연맹원 학살과 관련해서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는 포항경비사령관이었던
남상휘 등 여러 사람이 이 학살의 명령권자가 이승만이었다고 증언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자 학살은 전국 각처에서
일어났다. 전국 각처에서 지휘 계통이 다른 여러 기관이 협력하여 일사불란하게 처리한 것은 최고 상층부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4월 혁명 후 유족회 활동이 말해주듯, 보도연맹원 집단학살에 대해 인민군이 들어오지 않은 경상도 지역에서 특히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발이 거셌다. 대규모 주민 집단 학살은 김창룡,원용덕,김종원으로 상징되는 극단적 반공주의와 함께 이승만 및 자유당에 대한 반발로
나타날 수 있었고, 그것은 반사적으로 조봉암 등 야당에 대한 지지로 귀결되었다.
필자는 보도연맹학살에 관해 여러가지 연구
많이해오면서 한국사에서 그러한 '끔찍하고 커다란 참사가 있었는가'를 살펴보았다. 찾을 수 없었다. 폭군은 연산군
정도가 떠오르는데, 연산군도 그러한 짓을 하지는 않았다. 구한말기 일본군이 자행한 의병학살, 일제강점기 치하에 일어난 경신년대학살, 관동 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등 일제에 의한 학살도 주민집단학살에 비해서는 규모가 작았다.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 전근대도 아닌 현대에 와서 이승만 정권 초기에
발생한 것이다.
이제는 진실에 눈 돌려야
3.15선거는
이승만, 자유당의 영구집권욕과 함께 절대적인 존재로 모셔지기를 바랐던 이승만과, 이승만, 자유당에 대해 몹시 부정적이었던 국민과의 괴리 사이에서
발생했다. 이승만은 국부로 모셔지기를 바랐지만, 전시체제가 아니어서 유권자 의식이 어느정도 표출될 수 있었던 1956년 5.15선거에서 그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목격했다. 이쯤 되면 이승만은 자신의 기대가 과대망상임을 인정하고, 권력유지를 현실에 맞춰 냉정히 조정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총기획자가 되어, 최인규와 자유당 간부들을 앞세워서 자신이 얼마나 국민의 존경을 받는 지엄한 존재인가를 국내외에 과시하고자
했다. 이러한 짓은 결국 3.15의 비극이 초래되었다.
이승만과 자유당이 3.15의 파국을 비켜갈 수 있는 방안을
모르지는 않았다. 내각책임제나 정부통령 러닝메이트제로의 개헌이 그것이었다. 자유당은 민주당이 가장 중요하게 내세운 내각책임제로 개헌하면
영구집권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다. 경찰을 앞장세워 5.2선거와 비슷한 폭력,부정선거를 저지르면 농촌과 중소도시에서 당선되어 다수당으로 계속
집권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절대권력에 조금이라도 흠집이 생기는 것을 추호도 용납할 수 없었던 이승만은 자유당의 대통령중심제를
약간 변형한 내각책임제조차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정부통령 러닝메이트제는 야당도 반대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발췌개헌이나 사사오입개헌에 그것이 포함되지 않은 것은 이승만의 허영심 때문이었다. 8.5 선거나 5.15선거에서 무소속 부통령후보들이
한결같이 이승만을 국부로 떠받들면서 자신에게 표를 던져 이승만을 모실 수 있게 해달라는 선거운동을 한 것이 이승만을 흐뭇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5.15 선거에서 민주당의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되자 이승만은 달라졌다. 러닝메이트제로의 개헌은 약간의 미끼만 던지면 장면,신파를
자유당보다 더 미워했던 민주당의 조병옥,구파가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1960년 1월까지 분위기를 띄우다가 3.15조기선거로 확정지으면서
사라졌다. 개헌보다는 이미 다질 만큼 다져놓은 부정선거가 손쉽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투표함 바꿔치기를 고발하고 경찰,공무원 선거대책 비밀
공문을 민주당에 넘겨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자유당원이든 관공리이든 경찰이든 부정선거에 익숙해졌고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미 부정선거
중독자가 되어버려서 어떠한 부정선거를 저지르든지 간에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가 대한민국에 얼마나 심대한 해악을
끼치는지를 생각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후기에만 잘못한 것이 아니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정부 수립 직후에 대규모
주민집단학살이 일어났는데, 극우반공정책도 정권 초기부터 강행했다. 초기 독립운동,해방이 가져온 정치적 자유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크게
위축되었고 최대정적들에 대한 위해도 이미 여순사건 때부터 발생했다. 뭐니뭐니 해도 친일파 청산을 무산시킨 것은 이승만의 중대
과오였다.(일부에서는 '친일파 없이는 나라 못돌아간다'는등 궤변을 늘어놓는데, 그런 논리는 1945년 해방직후 결성된 건준위 활약을 통해 근거가
없음이 밝혀졌다.) 악질 경찰 등 친일파들은 이승만 정권을 떠받친 지주였다. 그들은 일제강점기에 했던 것처럼 민중을 억압하고 부정선거에 압장서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반민법 파동이 1960년 3.15 부정선거를 잉태시켜 이승만 정권을 파멸로 이끈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
글을 쓴 목적은 필자가 우연히 공유사이트에서 다큐멘터리 찾던 도중, 공영방송 KBS가 제작한 '대한민국을 건국한 영웅들-이승만 편'을 보면서
역사교육학 전공자로서 하도 어이없어 신문자료를 찾아보면서 직접 작성하게 되었다.(사진은 KBS 공영방송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장면)
그리고, '보수'라고 자칭하면서 '보수의 탈을 쓴 사기꾼 집단'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이승만 살리기 운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그리고 이제라도 양심에 귀 기울이고 진실에 눈 돌려야 한다.
(끝)
첫댓글 돌아오시자마자 올 ㅋ
잘 봣네요 감사합니다
난 우리나라 애들이 서로 인정할꺼 인정하고 비난할꺼 비난하면 좋겟음. 이승만 좋은사람이엿다. 하지만 나쁜거도 많이햇다.
이걸 인정하는게 왜 힘든가...털어서 먼지안나오는 사람은 없다.
제가 최대한 인정하고 인정해서 박정희 前대통령이 1960년대 (1970년대로 넘어가면 유신체제 그 자체는 옹호 자체가 불가능이지만..) 정도는 인정할 부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 前대통령은 긍정적으로 볼려해도 도저히 볼 구석이 없는 인물이예요.
다른거 다 제쳐둡시다. 한국전쟁때, 약 20만명 가량 되는 민간인들을 학살하게 만든 '보도연맹 사건'에 대해 뭐라 설명하실거죠? (이승만 옹호론자들이 이 부분 거의 '금기'수준급으로 입 싹닫더군요?) 사람 죽이는거 함부로 말하는거 아닙니다. 그리고, 1950년대 경제정책면도 보면 이승만은 북괴 김일성보다도 나을거 하나도없고, 오히려 부패 그 자체였습니다.
오늘날, '이승만 살리기'운동을 주장하고 '국부론' 내세우는 한심한 사람들이 많은데요. 이러한 '운동'에 열심이었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조선일보 전·현직 기자들입니다. 이를테면, 이한우氏,이도형氏,인보길氏 등등... 죄다 인터넷 신문 뉴데일리 이런곳에 열심히 기고하고 그러고 있죠. 그러한 세력에 놀아다니는 사람들이 많다는게 참 ...
객관적 사료 내밀어서 파면 팔수록 이승만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진짜 '열혈 광신도'급이 아닌 이상 긍정적으로 평가내리기 매우 힘든 인물입니다.
멍... 내가 뭐라햇길래 이리 공격적으로 얘기하나여? 털어서 먼지안나오는 사람은 없다니까요.. 누가 이승만 좋은사람이라고 햇나요? 개인적으로 이승만 쓰레기라고 생각하지만 털어서 먼지안나오는 사람없다는건데 내가 20만 죽인것도 아니고 왜 저한테 화를 내세여?
제가 좀 '도 넘는' 흥분을 해서 먼저 죄송합니다. 왜 제가 이렇게 '발끈'하는 투로 썻느냐?
모든 표현의 자유가 인정되는 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체제를 부정하고 독재자를 재평가하자는등 그런투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요즘 곳곳에서 많이 날뛰고 있는 모습을 많이봐서 그거에 분해서 그렇습니다. 털어서 먼지 안나오는 사람 없다? 맞습니다. 누구에게나 '흑역사'라는건 다 가지고 있고, 완벽함이라는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해당 주제에 대해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찾으라고 한다면 저는 거의 전체에 2~30%정도만 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