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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상생광장의 웃음,님의 글 - 무묘앙에오
bora 추천 0 조회 79 13.01.11 17: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상생광장

 [전체](291)  칼럼(67)   시(42)   논평(4)   수필(27)   낙서(151)  

 작성자  웃음 2004-08-31 21:40:44  
 제  목 무묘앙에오(無明庵回小)

지난 5월엔가? 대략 그 쯤에 저를 참으로 아껴주는 지인에게서 책 한 권을 전해 받았습니다.
" 안 읽어도 상관없지만.....한 번 읽어볼래요."
전 아무말 없이 웃으며 그 책을 받아들었습니다.
'어둠의 타오이즘. 무묘앙에오'  
작가의 이름이 제 눈에 들어온 순간 마음엔 '아! 에오....."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많아야 일년에 겨우 서너번 만나는 사이지만 2년전부터 만날때마다 에오. 에오. 하길래 도대체 어떤 작잔가 했던지라.
집에와서 책을 펼쳐놓고 대충 ?어보다 그냥 덮어버렸습니다. 어쩌면 괜히 쓸데없이 속만 시끄러워 질지 모른겠다는 생각이 얼른 들어서.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이 말이 가슴에 얹혀있는게 좀 편치가 않았습니다.
" 안 읽어도 상관 없지만..."
매번 만나 헤어질 때 쯤이면 책 한 권씩을 쥐어줬어도 ' 이거 한 번 읽어 볼래요?' 라며 건네주던 책은 안 읽고 돌려 줬어도 하나도 부담스럽지 않았는데 '안 읽어도 상관 없지만...'은 참 느낌이 달랐습니다.
꼭 읽어 달라는 지인의 간절한 마음처럼 느껴졌습니다. 이건 그냥 돌려 줬다간 아주 미안한 마음이 들거같은 생각이 들어 어떻게든 읽고 돌려줘야겠다 생각하곤 책장에 꽂아 뒀는데
한달쯤 지나 그녀에게 전화가 왔는데 목소리엔 약간의 흥분된 마음이 담겨있었습니다.(나중에 하는 말이 책을 안 읽은 느낌이 든 순간 약간 화가 났다고 하더군요.)
기껏 권해준 책을 읽어보지 않는 무성의가 그녀의 간절한 마음을 져버린 처사처럼 느껴져 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전화를 끊은 뒤 다음번 전화가 오기전에 꼭 읽어봐야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전화 통화도 많아야 일년에 열번은 넘지 않으니 짧아도 다음 전화통화때까지는 한달의 시간은  넘게 남아있는 셈이니그 사이엔 읽어보겠지 하며.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좀 심심했던 때 책장을 들여다 보니 에오의 책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아, 에오랑 테이트를 해야겠다 싶었지요.
결코 시끄러워지고 싶진 않은데 혹 에오땜에 시끄러워지면 어떡하나 하는 약간의 염려를 갖고 책을 펼쳐보았습니다.
책꺼풀 안쪽 표지에 작자를 소개하는 글이 나와 있었습니다.

무묘앙에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 1994년 36세의 나이로 타계했고 1992년에 깨달음을 얻었으며
그 뒤 제자를 입문시키지 않고 아무런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으며 자유분방하게 살았고
자신의 아파트 방 하나를 무명암(無明庵)이라 이름 붙인 뒤 그를 찾아온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비밀스런 가르침을 베풀었다는.
'에오의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다. 만일 그의 체계가 전세계에 알려지면
이 혹성의 모든 종교, 철학, 신비학 등은 그 존립기반이 무너질 것이다.
그의 독자적인 체계는 에오이즘으로 불리고 있는데, 지구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우주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인간의 위선적 행위나 종교, 정신세계에 관여하는 인간의 사고가 어떻게 분열되는지를 철저하게 비판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선(禪), 타오(TAO), 원시불교를 소재로 하여 그의 깨달음의 경지를 자유자재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에오의 책을 읽을 수 있는 독자가 되는 일은 어렵고,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독자가 되는 일은 더욱 어려우며,
나아가 그의 행법을 직접 수행하는 이가 되는 일은 이 혹성에서 1억분의 1에 속하는 일이 될 것이다.'는.

이 무슨 구라..?^^
" 에오의 책을 읽을 수 읽는 독자가 되는 일은 어렵고~~~~더욱 어렵고 나아가 행법을 직접 수행하는 이가 되는 일은
이 혹성에서 1억분의 1에 속하는 일이 될 것이라" 니
설마....이런 책에 판매전략으로의 글 이라면... 너 '모색' 다신 상대안할거야. 그런데 이 말이 참이라면....한 번 읽어보자.
1억분의 1이 중요한게 아니라 이 혹성의 모든 종교, 철학, 신비학 등의 존립기반이 과연 무너지는지...
그것만 알아진대도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

"깨달음은
벗어날 수 없게 된 광기로부터 단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최후의 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올바른 도(道)도 아니고, 대단한 것도 아니고,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것으로 세계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당신, 단, 한 사람이 편해지면 된다. 그것은 단 한 사람의 개인을 위한 것이다."

첫 페이지를 읽는데 참 묘한 알 수 없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뭐야!
'아니고 아니고 아니고 아니다는 맞는거 같고 좋은데 단 한 사람이 편해지면 되고 단 한 사람의 개인을 위한 것이라니....?'

이건 또 뭐야!
'진정 당신이 살 집은, 완전한 <어둠>. 완전한 <무>. 완전한 <죽음>이다'는건.....?

갑자기 에오를 정면으로 대면해보고 싶은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시끄러워지면 어떡하나 했던 염려는 온데간데 없고, 시끄러워져도 괜찮을거 같은. 아니, 좋을거 같은 그런 마음이.

책 중간쯤을 읽다간 바로 버스를 타고 서점으로 달려가게 되었습니다.
에오가 직접 에센스만을 뽑아 단문 형식으로 구성했다는, <에오 전집>을 한 권으로 정리한,
말하자면 <에오 전집 핸드북>과도 같은 거 라는 이 '어둠의 타오이즘' 말고 에오 전집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총 10권인 책을 전부다 사려니 가격이 좀 부담스럽고 어차피 열권을 한꺼번엔 못 읽을거 같아서 일단 2권을 먼저 사 왔습니다.
그리고 단숨에 2권을 읽고는 나머지는 인터넷서점에 주문을 넣고 나를 에오의 품에 잠시 깃들게 해준 그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 고마워요 언니. 에오를 만나게 해 주셔서...."
" 아, 만났구나.......다 만나보고 난 다음에 전화하세요."라는 인사를 전해주는 언니의 목소리는 평소 그녀의 목소리처럼 낮고 평화롭게 들렸습니다..
누군가에게 책을 소개받고 이처럼 고마워해보기는 저에겐 처음있는 일이었습니다.


무묘앙에오..
'폐허의 붓다들' 의 보완용 잡담으로 씌어졌다는 'EO가 본 얼간이들'에 남겨 놓은
에오가 '어떤 탐구자에게 부치는 편지'는 저를 더욱 에오에게 다가가보고싶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결코 복잡한 것은 말하고 싶지 않다.
그냥 인류가,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만든 <엉클어짐>을 설명하려 한 결과
복잡하게 보이는 말로 되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복잡한 것은 무엇 하나 쓰지 않았다.

가끔 나를 통해 씌어진 것들을 흘깃 보고, 난해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페허의 붓다들'과 그 잡다한 이야기를 본서(本書)만큼 정중한,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종교서(宗敎書)는 존재하지 않았을 터이다.
왜냐하면, 난 항상 현실 속에서 우리들의 내면에 일어나는 심리적인 에고와 공포와 그 투영으로서의 행동 패턴을
그래서 모두 실례를 들어거며 설명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니었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귀가 따가울 정도로 말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부터 열가지, 현실적 차원을 다루고 있다.

시적 표현도 아니며 심령의 세계도 학문의 세계도 아니다.
그야말로 사회와 개인의 혼란스런 모순을 난 그냥 그대로 말했을 뿐이다.
그러한 내 지적에 대해 생각해낼 수 잇는 모든 반론을 난 전부 앞질러 그냥 뭉개나간다.
왜냐하면 사고가 어떻게 반론하는지는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문서에는 가끔 우회적 표현이 나온다.
<이렇게 말하면, 세상에서는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 .......>하는 식으로 말이다.
나는 추측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논리적인 것도 아니다.
그저, 싫증날 정도로 똑같은 반복을 인간이 되풀이하는 것을 봐왔기 때문에
승려나 산야신과 일반인이 무엇을 반론할지는 추측할 필요조차 없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결국, 일반인들에게 보지도 못할 광명(光明)에 대해 말하고,
못하는 것을 나무라는 사디스트일까?
어떤 의미에서 도사(구루)란 방편이 역사상 가장 많이 사용되어왔다.
나무라고 비난하며, 어디선가 전면적으로 버리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말이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그렇게 간단하게 관념을 버릴 수 없다.
특히 도시 같은 곳에서 소박함이란 생존 경쟁 속에서 평가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죄책감에 대해 잠깐 관찰해주기 바란다.
죄책감이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지.
"죄책감? 나한테는 그런 건 없어" 하고 말하는 사람은 붓다들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승려, 그것도 선(禪)을 하는 일견, 무분별한 사람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수행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인가 잘못되었어. 고치지 않으면 안 돼, 무심(無心)이지 않으면 안 돼,
그렇듯 죄책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세상에는 여러가지 죄책감이 있다고 보는가?
아주 작은 일상에서도 죄책감은 무수하게, 돌을 던지면 맞을 정도로 굴러다니고 있다.
'전철 안에서 노인이 앞에 서 있지만 그저 자는 척한다.' 따위의 싱거운 사회체제를 비롯해
섹스를 하다가 상대보다 먼저 가 버려 <미안>하게 생각하는 죄책감.
수다떨고 있는데 썰렁한 회제를 꺼내들었다가 <너무 썰렁해서>느끼는 죄책감.
한 가지 <극단적 논리>로 죄책감이 없는 범죄자들 역시
타인에 대한 죄책감은 없어도 자신이 범죄를 집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있어서, 죄책감을 갖고 있다.
그것은 굴절되어 있지만, 본인의 내부에서 두 개의 사고가 싸우는 죄책감이다.
죄책감은 열등감의 산물이다. 그것은 또한 우월감이다.
뉴욕에 있는 범죄자는 <그냥 신문에 실리고 싶었다>는 굴절된 우월감에서 범죄를 저지르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런 타입의 죄책감도 발생 원인은 아주 단순하다.
그것은, 불쾌감을 상대에게 주었다고 믿어버리는 경우와 불쾌감을 자기에게 주었다고 믿어버린 경우 두 가지다.

그러면 무엇이 그 불쾌감의 정의일까?
-중략-
즉, 불쾌감의 정의는 아주 간단하다. 복잡함 따위는 전혀 없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당신과 타입이 <편치 않은> 것이다.
그 외의 정의는 쓸모없다. 그냥 그뿐이다.



범죄자는 내면이 편치 못해 범죄를 향해 달리고, 평범한 사람 역시 내내 편안치 않다.
그 원인은 기본적으로 안정을 이루기만 하면 될 것을,
일부러 편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하찮은 모럴, 오락, 제품, 산업, 그리고 가치관이 범람하고, 또 거기에 끌려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왜 끌려다니는 것일까?
그것은 외부사회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허점을 이용당하는 당신들에게 원인이 있다.
근본적으로 무관심을 실현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협박이나 자극도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깨달음이라는 의미에서 완벽한 무관심의 안정된 기반을 이루는 것이 죽음에 대한 공포의 부재다.
난 육체의 <고통>에 대해서는, 처리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격심한 고통에 이르는 치통 따위는 고치는 게 좋다. 그러나 육체를 지나치게 보호하는 것은 안 좋다. 그리고 죽음 따위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말해도, 그 두려움이 우리들을 노동으로 몰아세우고 종교로 몰아세우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최소한의 생활을 가능하게 해주는 노동이라면 굳이 과도하게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무위(無爲)한 조용한 시간에는 신비학 서적 따위를 읽지 말고 그냥 충분히 안정을 취하는 게 명상의 본질이다.
선사(禪寺) 같은 곳을 가면 편안해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당신들의 좌선이나 포교활동, 테라피 또한 결국은
<이대로 있어서는, 내 내면생활은 안 된다>는 손님들의 죄책감을 미끼삼아 장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당신들에게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일까?
우선 당신들이 안정을 찾지 못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당신들의 가치관이 있다고 주장해댄다.
그 속에 화상(和尙)이 있고 선(禪)이 있고 세기말이 있고 사회가 있고, 이른바 세계의 모든 것이 당신을 편치 못하게끔 하고 있다.
평범하고 평균적인 인격자, 사회인에 적응하라는 최소한의 모럴조차도 사람을 미치광이로 만들로 만다.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들은 그 최소한의 사회인이 못 되기 때문에 그곳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최소한의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교육받은 미치광이가 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따지고 보면, 그 평균적인 사회인이라는 인격자 나부랭이가 다수결로 이 사회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은 합리적이긴 하지만 몇천 년 동안 인류의 내면에 있는 불행을 박멸시키는 데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 원인 또한 어이없는 것이다. 만약 근본적으로 불행의 원인을 제거한다면,
즉 이것은 나와 붓다들의 일이라고나 할까, 단순히 우리들의 취미이긴 하지만 말이다.
만약 그걸 한다면, 그것은 사회의 모든 이해관계를 무효로 만들고 말기 때문이다.
이 사회는 필경, 죽음의 공포를 먹이로 한 제품, 산업, 종교, 테라피로 만들어져 있으니까 그들은 무직(無職)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의 <부적응에의 공포>를 음식물로 삼는 정신병원과 테라피스트, 선사(禪寺)까지 그 전부를 파괴하는 일이다.
굳이 폭탄으로 파괴할 필요는 없다. 파괴하기 위해서는 수요(需要)를 정지시키면 된다.
마치 원자력발전소 만드는 일을 그만두게 하고 싶다면, 건설에 반대할게 아니라, 애초에 <전력수요>를 없애면 되는 것처럼.
즉, 기업과 가정용으로 된 무공해 발전기를 팔면 된다.
당신들은 라즈니쉬와 어딘가에서 도사라 일컬어지는 불성발전소(佛性發電所)에 의존하고 만다.
나는 당신들 혼자 불성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돕고 싶다.
그렇게 하면 중앙집권적인 도사에 의존할 필요 없이 그들은 도산한다.
나는 석가와 달마와 라즈니쉬도 도산시키고 싶다. 물론 나라는 존재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당신들을 하루빨리 붓다로 만들고자  한다.
붓다들과 상거래할 수잇는 상인은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그들로부터 무언가를 훔칠 도둑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지>이기 때문이다. 가장 깊숙한 내면에 있어서.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이 탐구자들에게 존재하는 죄책감을 경감시키고 싶었다.
그것은
"변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때닫지 않으면 안 된다.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는 죄책감들이다.

보통 사회에 적응하는 데 위와 같은 모토는 필요없다.
그러나 당신들은 그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젊은 시절부터 정신세계 따위에 발을 들여았을게 분명하다.
틀렸는가? 누가 반론할 수 있겠는가?
<충분하게 일반적인 생활을 즐겼으니까 다음엔 새로운 세계를 찾아 정신세계에 들어섰다> 고 나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나 또한 만족할 수 있는 사회적인 틀을 벗어나고 말았다>는 의미에 있어서, 그는 사회 부적응자인 것이다.
통상의 만족에 만족하지 못한 난 탐욕스러웠던 것이다.
어떤 경과이건 간에
상식사회의 최소한의 모럴에 적응하지 못했거나 또는 상식사회는 적응했더라도 그 사회가 불만스러웠다거나,
그 어느 쪽이든 간에 사람은 정신세계에 들어선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상식적인 사회인으로 지금도 거리에서 여자나 꼬시고 있을 테니 말이다.
또는 나이들어 친구를 사귀어 장기라도 두면서 놀든가, 할머니가 되어 손자와 놀고 있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러나 그러한 틀에 적응하지 못해서 절과 인도로 떠나는 것이다.
결국 그것도 안 돼 드디어 이름 없는 붓다 가운데 하나인 EO같은 사람과 교류를 갖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자신의 과정을 보고, 도사들의 과정을 보고 더 이상 전통적인 그 어떤 수단이나 형식도 효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미묘하고 쓸데없는 말들, 형식, 논리를 배제시키기 위해 이처럼 방대한 <쓸데없는 이야기>를 생각해냈다.
그것은 '폐허의 붓다들'과 'EO가 본 얼간이들' 이었다.

그 속에서 내가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이 다 쓸데없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이 붓다 탄생을 위해 쓸데없는 것인가 하는 설명의 산이다.
하지만 거기서 내가 제시한 새로운 우주론을 당신에게 기억시키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당신의 중심> 이외의 모든 우주도, 타인도, 사회도, 도(tao)와 선조차도,
당신 본인의 의식, 무, 존재성에 비한다면, 우주의 존재물 그 자체가 전혀 본질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만물 그 자체가 당신의 본성과는 인연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조합시킨 개념, 사회, 인간성 등은 아무런 본질도 아니다.

사실은 당신의 <단순한 존재상태> 그대로가 사마디이다.
그리고 그 사마디는 최종 단계에서는 그냥 무(無)다. 거기까지 무가 된다면, 그곳에서 존재로 귀환했을 때,
당신은 벌거숭이로 아무런 걸림없이 존재와 만난다. 그리하면, 만물 전부가 광명 그 자체였다는 것을 알 것이다.
완전하게 부정되고, 완전하게 무로 된다는 것은 당신의 영혼도 내던지고 공허가 되는 것이다.

공허 자체는 사실상 죽음이다. 그것은 우주적인 레벨의 완전한 죽음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그곳에서 귀환하는 자들이 있다.
바로 우리들이다.
거기서 귀환하면, 세계 그 자체를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역설적인 현상으로써 세계를 통째로 얻고 만다.
그러나 얻기 위해 심리적으로 죽어보자는 것으로는 당신은 아직 죽지 않았다.
이러한 <꿍꿍이속이 있는 에고 트릭>을 교묘하게 빠져나가기 위해 <사인선(死人禪)>이라는 메소드가 있다.
그저 오로지 무로 향하는 것. 이유도 목적도 없다. 성과도 확인하지 않고 편하게 있을 뿐이다.
명상에서 돌아오면 당신은 순수(無垢)하다. 처음에는 잘 안 되더라도 몇 개월이 지나면, 당신은 명상할때마다
무언가를 성숙하게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욱 텅 비게 된다.
그냥 무거운 짐이 덜어질 뿐이다. 그 가벼움이 드디어 자신의 안정을 이루는 데 있어 당연한 것이 된다.
그것은 언제라도, 어디에서도, 누구와 있어도, 또 홀로 있어도 항상
<전혀 아무것도 모르고, 알지도 못하고, 찾으려 하지>도 말 일이다.
침착하게, 그저 있을 것. 그러나 정말 그처럼 <존재>하기 위해서는 당신은 전혀 <없는> 즉 무의미와 무존재,
그저 존재한다라는 의식조차도 사라진 무로 사라지는 게 낫다.

<사는 것은 나중이다. 죽는 것이 먼저다>
이 도(tao)의 명백하고 근원적인 사실을 일별(一瞥)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현재의 나와 교류를 갖게 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나는 걸어다니는 한 채의 절(寺)이다. 그 입구는 대단히 좁다.

나는 일본의 대학방식을 채용한다.
미국처럼 들어가는 건 간단하고 졸업이 어려운 라즈니쉬식 산야신은 사양한다.

나는 일본인이고, 일본의 무술도장과 대학의 전통에 따라 좁은 문으로 한다.

그러나 그 출구는 세상에서 가장 클 것이다.

내 문서란 단순한 입시 참고서이다.

내 절에 들어서기 위해 당신이 배워야 할 것은 단 한가지다. 그것은
배운 것을 전부 잊어버리는 일이다.

물론, 내 원고 내용도 말이다."


나는 에오의 주문처럼 배운것을 전부 잊아버리는 일을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에오란 절에 들어서보고 싶은 마음 하나를 붙들고 성큼성큼 걸어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책 여섯권을 읽고나니
"하라, 하라, 하라, 하지마라, 하지마라, 하지마라"를 반복해 말하는 에오가 갑자기 좀 시끄러운 생각이 들어
'가만히 보자하니 당신도 참 시끄럽군요. 당신은 왜 그리 시끄럽지요?' 하는 불만스런 물음을 갖고 일곱번째 책 '속 폐허의 붓다' 를 펼치니 첫 페이지에 이런 글이 적혀 있더군요.

"그런데 이 책은 무슨 이유로 이토록 소란스러운 책이 된 것일까?
그것은
아마 인류가 너무나도 소란스러웠기 때문임이 틀림없다." 는 글이 적혀 있었지요.
전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내 불만을 어찌 알았을까 싶은것이..
그런데 사실은 그 놀람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처음으로 내가 소란스러운 존재, 소란스럽게 존재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사실이었지요.

아, 그랬구나....우리가, 우리들이, 바로 내가 소란스러웠던 탓이었구나.....에오가 이토록 소란스러웠던 까닭은!!!!

근 이십년전 성당에서 세례를 받으려고 교리 공부를 하던 중에 하셨던 수녀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 시간 수녀님 말씀에 제가 붙인 제목은 '개가 된 예수' 였는데 그 얘기가 생각나더군요.
개가 된 예수...?^^

강아지를 사랑하는 아이는 강아지랑 놀땐 강아지가 되어버린다고 했지요. 저절로.
강아지가 되어주고 싶다는 인위적으로 일으키는 마음없이 그야말로 저절로.
좋아하다보면.. 사랑하다 사랑이 되고나면, 그래서 그냥 사랑이 되버리고 나면 아이는 절로 강아지랑 하나가 되버려 자신이 사람인걸 잊어버린다고. 애써 잊는게 아니라 그냥 절로.
그처럼 신이었던 예수는 사람을 너무나 사랑해서 사람이 되버렸다는......

전 그때 처음으로 예수에게서 사랑을 느꼈습니다. 나를 사랑해서 나 되어준 예수, 나 되어져버린 예수..
그처럼 난 에오에게서 처음으로 예수에게서 느꼈던 그런 사랑을 느꼈습니다.
도무지 미혹할 수 없는 존재가 미혹한 존재의 탈을 쓰고 미혹이 되어 내 앞에 있어준 사랑, 그 사랑...
아!!!! 전 그 순간 내 피 속을 아니, 내 척수 속을 파고드는 에오의 사랑에 몸이 떨려 책을 꼬옥 끌어안곤 그저 가만히 허리를 굽혔습니다.
새벽 세시가 지날 무렵이었지요. 어디에다 그 고마운 마음을 풀어놔야할지 몰라 막연히 하늘을 올려다 보는데 이 말이 절로 나오더군요
'님이여, 님이시여....너무나도 감사하나이다. 감사하나이다....하는.
아!!!!!
그 순간 에오는 나의 예수 였었었지요. 신이 되지 못하는 우리가 측은하여 사람되버린 예수와 같은....


사람들, 누구라도 한번쯤은 이런 생각들을 해 보았겠지요.
근원에 대하여, 순환에 대하여.
왜 태어났는지, 왜 사는지, 왜 죽는지, 왜 슬픈지, 왜 괴로운, 왜 아픈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죽어야하는지, 나는 누군지, 나는 무언지 등등등등....
저 또한 이런 의문을 지치고 지치게 물어도 답을 찾지 못해 그냥 덮어버리고 살던 중
몇 년 전 어느 날 황소좌 별자리에서 찾아온 프타아에 의해 제 나름의 흡족한 답을 찾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뻤던지요.
" 경험하기 위하여 " 전 이 말 한마디로 제가 가진 모든 물음에 마침표를 찍었었지요.
그랬구나..
내가 이런 부모를 만난것도, 이런 형제와 친구 이웃을 만난것도,  불행한 일을 만나는 것도, 웃음도, 눈물도, 환희도, 괴로움도, 싸움도 화해도,
당신을 사랑하는 것도, 당신을 미워하는 것도 그것이었구나. 단지, 경험하기 위하여....
전 그렇다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런걸로 생각이 되어졌습니다. 덕분에 전 아무리 어려운 일도 어렵지 않게 넘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날 울리는 건 당신의 수많은  여러 전생 동안 꼭 나 같은 사람을 꼭 오늘의 이런 일로는 울려본 적이 없어서 울려보고 싶은 당신의 경험을 위해서 이고
우는 나 역시 수많은 여러 생을 반복하는 동안 꼭 당신같은 사람을 만나 꼭 오늘의 이런 일로는 울어본적이 없어 이 생에서 울어보고 싶은 경험을 하기 위해서란 말이지요.
당신이 이렇게 비참하게 사는건, 이렇게 비참하게 죽는건  비참하게 살아보고 싶은, 비참하게 죽어보고 싶은 당신의 경험을 위해서란 말이지요....
내가 이렇게 슬픈건 단지 슬픔을 경험해보고 싶어서란 말이지요. 알았어요. 그럼 경험해 보지요.
수없이 많은 생을 반복하면서도 그 생애 동안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딱 이 슬픔, 딱 이 괴로움, 딱 이 고통을 경험해 보고싶어 태어난 것이라면 경험해보지요. 이 삶과 죽음을 지나가면서....
전 이 '경험하기 위해서'란 말 한마디로 삶의 평화를 찾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또 의심도 들지 않았었지요.
부지불식간에 비명횡사, 혹은 너무나 억울하고 안타깝게 죽거나 , 피해보는, 상하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은 존재가 어딛겠냐고 물을법도 하겠지만 전 아무런 의심이 들지 않았습니다. 좋고 나쁜건 그저 분리된 내가 가지는 있지도 않은 분별일 뿐인 것이기에.
그러나 단 하나의 새로운 물음이 생겼었지요.
'그럼, 사람(생명)은 왜 경험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하는....
그런데 전 너무나 뜻밖에도 그 답을 아주 쉽게 생각보다 너무도 빨리 에오에게서 찾아냈습니다.
우주는 왜 존재하는지, 우주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에오의  탐구로, 에오의 끊임없던 탐구 덕택에.
존재에 대해 이토록 탐구하고 그래서 마침낸 절망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절망으로 모든걸 통째로 다시 얻어 그 처음의 미혹한 내가 되어 나로 있어주는  에오를 통해서.
에오가 준 답은 바로 이것 이었습니다.  
"* * * * * * *"

다리를 통째로 잃은 사람앞에서 발가락 하나 잃은 아픔을 얘기 한다는건 참으로 미안한 일이었습니다.
발가락 하나라 하여 잃은 아픔이 아픔이 아닌건 물론 아니지만.
내가 왜 사는가에 대한 물음은 우주는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 앞에선 참으로 티끌보다 작고도 하찮은 것이었지요.  나는 고작 내 삶의 고뇌에만 절망했는데......에오는....
에오는 제 삶을 참으로 먼지보다 작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것도 너무나도 실감나게.

여러각도에서 조명해준 죽음을 통해 생을 더욱 완벽하게 안정되게 만들어준 에오가 얼마나 고맙던지,
우리들을 좀 더 편하게 해 주고 싶어서, 자주적인 순수 지성의 확립으로
갈팡질팡 이해 관계에 휘둘리는 인종이 되지 않게 하려고 기꺼이 시끄러움이 된 에오가 얼마나 고맙던지요.
이런 평화로운 지구에서 깨달음을 얻어, 그저 <있음>에 깊이 느긋하게 있지 못한다면
당신들은 <우주>라는 말을 쓸 자격이 없다고 가끔은 형편없는 심한 소리로 나무라곤 하지만
<암흑>과 친해지고 생의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그저 세계를 바라보듯 고요히 살며,
목적을 갖지 않고 느긋하게, 또는 자기를 되돌아보거나 분석하거나 뉘우치거나 하지 말고,
결코 <의문투성이 꼬마>는 되지 말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인 채로 있기를 바라는 에오는 분명 사랑이었습니다. 도무지 사랑일 수 밖에 없어서 사랑인 그런 사랑.

에오는 우리들의  에고를 완전히 박살내고 싶어했던 탓에, 에고를 박살낼 수만 있다면 우리들이 전혀 원치 않는 방법으로서의  표현을 마다하지 않았지요.
20세기 현자인 크리슈나무르티와 라즈니쉬가 道를 우아하고 詩적으로 읊은 데 반해 에오는 엄격함과 신랄함으로 지적했고 필요에 따라 낯설어도 보일 정도의 비약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이 마음대로 그린게 분명한거지만 이전의 覺者, 개척자, 대오자, 광명을 얻은 자라면 어딘가 성인군자 같은 그런 분위기가 연상되지만
에오는 그저 낯익은 우리 주변의 청년이나 가끔은 소년의 얼굴을 떠올려 보게하였습니다.
그의 말들은 화장기라곤 없는 맨 얼굴같은 느낌, 포장으로 부풀리지 않은 진실로 정성스러운 선물과도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선물이 참으로 초라한 것이었을지라도.

에오는 자신의 책을 독자가 공감되고 기분 좋은 경험이있었다 해도 결코 타인에게 그 기법을 무리하게 강요하거나 세상에 알리려고 하지말라 했지요.
어리석은 독자 중에는 에오책을 마음대로 타인에게 나눠주면서 마치 자신이 <참신하고 멋진 것>을
타인에게 가르쳐주는 양, 크게 <착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정말 어리석은 행위라 하며
그런 행위는 정치가나 상인 그리고 종교를 판매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지
불법, 타오, 선, 혹은 에오이즘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런 행위는
그저 도를 더럽히거나 본질적인 우주의 흐름에 대해 커다란 부조화를 만들어 낼 뿐이라 하며 자기의 책을 읽는 독자들은 이런 바보같은 짓을 하지 않도록 당부도 하였지만
전 바보이니 바보같은 짓을 할 수밖에요.
에오가 괜찮다고 말한 정보의 유통 차원이라는 각도에서 저는 에오를 나름의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소개 시켜드리고 싶었습니다.
표현을 빌자면 1억분의 1이 되는 자, 될 수 있는자가 누군지 알 수 없고 그 때를 알 수는 없지만 씨앗이 뿌려진 토양은  모든 조건만 맞아진다면
언제고 분명히 꽃피고 열매맺는 날 반드시 있을 테이니....그런 날을 그려보면서 말입니다.

오늘도 참 고단했던 몸,  무거운 시장 바구니 덕택에 휘청거려지는 걸음이었지만 한걸음 한걸음 내 딛는 동안
늘 보는 풀이며 이름 모를 꽃, 기어다니는 개미랑 또 이름 모르는 벌레들을 보면서 어느 인디언의 '오늘은 죽기 좋은 날' 이라는 시가 떠올랐지만 아니었습니다.
오늘만 죽기좋은 날이 아니라 사실은 어떤 날도 죽기 좋은 날이었음을 저는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것으로 비로소 어떤 날도 살기 좋은 날임을 저는 아주 확실히,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어때도 좋은 대 안심 속에 나를 있게 해준 에오에게 내가 드릴 수 있는 최대의 사랑과 감사가 절로 드려진 여러날 이었습니다.
이름없는 붓다, 무묘앙에오에게.
두손 모으며.....


*
'진정한 자비란 몸과 마음이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는 제가 받은 가르침의 실천으로  전 이 글을 썼습니다.
에오에 대한 정보와 그의 얘기는. 나를 이토록 편하게 만들어준 에오가 당신도 편하게 만들어 줄지 모른다는 단순한 한 생각으로
나를 너무나도 편하게 만들어준 에오의 사랑이 당신께도 스며들어 당신은 나보다 더 행복하고 아니 그저 당신이 필요로하는만큼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그 한 마음으로...
저는 당신이 참으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언제나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웃음 (2004-08-31 21:57:53)    
한 두달 가까이 전에 가끔씩 들러는 유기농식품 매장 채소과일코너에서
대충 꽃 같아 보이기는 했지만 뭔지 알수없던 처음 보는 식품이 하나 있었습니다.
채소과일 코너에 있는걸 보니까 틀림없이 과일이거나 채소인건 분명한거였겠지만
어른 두 주먹 만한 제 눈에 아주 큰 꽃봉오리 같아 보이던 그게 뭔지가 궁금해서 주인에게 물었더니
선인장 열맨데 용과라는 과일이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선인장 열매? 용과라고...?
전 선인장 열매라곤 제주에서 먹어보았던 손바닥 선인장 밖에 알지 못해서 혹시 주스로 먹는 붉은 색 과일이냐고 물었더니 붉은 색이 아니라 흰색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흰색이라...?
어떤 맛일까 궁금해서 물었더니,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데 대충, 일단은 혀에 살살녹게 아주 부드럽고
맛은 정말 무엇과 비슷하다고 말 해야할지를 잘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전 주인의 그 대답을 듣곤 얼른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파는 사람이 잘 모르겠다고 말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고객은 어떤걸 기준으로 저걸 살까...하는.
전 그 용과란 과일이 무슨 맛일까를 그냥 궁금해만 하며 지나갔는데
짙고 선명한 꽃분홍 색의 꼭 꽃봉오리처럼 생긴 용과가 매장에서 식품을 살때마다 눈에 띄어 며칠 뒤에 또 물어보았습니다.
" 용과 드셔보셨죠. 무슨 맛 이었어요? 맛이 어땠어요?"했더니 이번에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 키위랑 약간 비슷하다고 해야할까...? 키위맛은 아닌데...단 맛은 거의 없어 아이들은 별로 안 좋아할거 같고...
뭐라고 해야하나..."
전 주인의 그 설명을 듣고는 순간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 죄송해요.^^ 제가 진짜 힘들게 하죠? 그냥 먹어보면 되는 걸. 아가씨가 아무리 정확하게 느낌을 설명해도
아가씨랑 제 입맛은 다를텐데..^^ 무슨 긴 말이 필요하겠어요. 그냥 먹어보면 알걸. 하나주세요." 했지요.
며칠전에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그 용과를 어제 아침에 먹어보았습니다.

껍질은 바나나 껍질처럼 칼없이 손으로 벗길 수 있었고 속살의 과육은 배처럼 흰색에다
과육 전체엔 꼭 키위에 있는 까만 씨앗같은 것이 박혀 있었고 맛은 먹어보니 매장 주인이 왜 그렇게 설명을 잘 못하던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먹어보니 딱히 맛이 어떻다고 얘기하기가 정말 쉽지 않아서 말입니다. 부드러운 느낌도 바나나나 메론 키위나 망고 또는 황도나 백도란 과일의 그것과도 달랐고
달지도 시지도 떫지도 시금털털하지도 않고 수박처럼 시원한 느낌은 들었지만 수박의 그 맛과도 다른
정말 아주 특이한 맛이었습니다.
전 여태껏 제가 먹어본 여러 과일의 맛을 떠올리며 어떤 것과 가장 흡사하였나를 생각해 보았지만 도무지 흡사한 과일의 이름이 떠오르지를 않았습니다. 저에겐 참으로 생경한 맛이었습니다.
전 용과를 맛 본 뒤 내가 만약 그 가게 주인이었다면 꼭 나처럼 궁금해하는 고객에게 어떻게 설명해 줬을까...생각해보니 명답이 떠오르지를 않았습니다. 손님을 놓치기는 싫은데....
그래서 전 고객에게 이렇게 말하는게 가장 정직하고 이해하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말했을거 같았습니다.
" 궁금하세요? 저도 참 궁금했는데... 그래서 먼저 먹어본 사람에게 맛을 물었더니 나름대로 설명해 주었지만 그것으론 맛이 짐작이 되지 않아 그냥 먹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저도 먹어보긴 했지만 그 맛을 딱 어떻더라고 설명할 수가 없는데 그냥 한번 드셔보시죠.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건 아주 특이한 맛이었다는 거 밖인데..특이한 맛이라하여 거북한 그런 느낌은 아니고
아무리 입맛이 까다롭다해도 토한다거나 그럴일은 없을거 같은데...그래도 혹 드셔보시고 만약에 너무나 비위가 상했다던지 도무지 못 먹을 맛이었다한다면 전액 환불해드릴께요. 권해드린 제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고." 라고.

그렇잖아도 긴 글에 이처럼 쓸데없는 글을 왜 덧붙이지는지 아시려나....
에오를 한 번 먹어보시라구요. 내 눈앞에 이런 과일이 있었나... 할지도 모르고
어쩌면 있을거라 생각조차 안하고 못했지만 먹어보니 정말 내가 찾던 맛이었다 할지도 알 수 없는 일이고....
먹어보니 너무나 비위가 안맞아 환불하시겠다면 물론 책임지겠습니다. 권해드린 제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고. 죄송하지만 책임은 물질적인 손실 부분에 대해서로 국한시켜.^^
원정 (2004-09-01 10:31:57)    
전 언젠가 한 번 에오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1년여 전에 다른 명상홈에서 에오를 알았는데, 통찰력이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후 몇 번 접하였는데, 게을러서 제대로 접하지 못하였는데, 웃음님의 보시로 잘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바람 (2004-09-01 11:55:31)    
무묘양에오의 심정이 되어 웃음님께 드리는 글

매 순간은 가장 지상최대의 날이였습니다. 그러하기에 어떠한 날은 가장 죽기에 적합하였으며, 어떠한 날은 가장 살기에 적합하였습니다.
그러하기에 어떠한 날은 가장 참혹하기에 적합하였으며, 어떠한 날은 가장 찬란하기에 적합하였습니다. 그러하기에 어떠한 날은 지상최대의 형벌의 채찍이 내리기에 가장 적합하였으며, 어떠한 날은 지상최대의 환희로 들뜸에 가장 적합하였습니다.
그러하기에 어떠한 날은 지상최대의 죄를 범하기에 가장 적합하였으며, 어떠한 날은 지상최대의 무로 돌아가기에 적합하였습니다.
그러하기에 어떠한 날은 이 세상의 그 모든 인류들 가운데서 가장 비참한 거지가 되기에 적합하였으며, 어떠한 날은 이 세상의 그 모든 인류들 가운데서 가장 아무것도 아닌 온갖 찬란한 니르바나의 구슬로 꿰여짐이 적합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모든 것들은 바로 다름아닌 웃응님, 그 자체였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다 웃음님의 진정한 참나의 모습을 친히 맛 보아 알게 하려고 하는 그 모든 신비의 나툼들이였습니다.

웃음님은 이제 이 세상에 있지 아니함이다. 저 너머의 빛이 스스로의 웃음을 조용히 말없이 비추어줄 뿐이니, 웃음은 오히려 가장 아무것도 아닌 어둠이 되어 날마다 나 자신을 그 모든 것으로 화하는 모습으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선이 되든, 악이 되든 아무렇치도 않습니다.
그 모든 법들이 정말로 너무도 기뻐고 아름다워서 차라리 그 모든 것에서 나를 잃어버려 그 속을 낱낱이 살펴보고픈 나의 열망에 들뜨고는 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웃음님이되 웃음님이 아닌 모습을 위해 창조되였고, 빚어졌기에,
그 모든 것이 다 '그러함'과 다 '그러하지 아니함'을 통과시켜 그 하나의 얼짱으로서 비추어 지는 진아의 나툼들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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