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木花)꽃과 어머니
나는 하늘만 보이고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나주의 한 두메산골에서 자랐다.선산 아래의 마을에서 선영 땅에 할아버지께서 지은 가난한 집에서 광산김씨 집성촌 종갓집 후손으로 어렵게 살아왔다.겨우 외가에서 주신 논밭 서너 마지기를 물려받아 가난하게 나주로 학교 다녔다.어머니께서 만드신 검정 물들인 무명베를 교복으로 만들어 주시어 그 옷을 입고 초등학교,중학교에 다녔다.
이제 나이가 들고 인생사를 한 바퀴 돌아 서울에서 공직을 마치고 나의 할 일을 다 하고 나니,철이 드는지 그 어려웠던 시기에 어머니께서 손수 바느질로 해주신 교복과 무명으로 만들어 주신 버선발이 생각난다.
요즘처럼 산천이 푸르른 산골에는 목화(木花)를 심은 밭에는 목화 나무가 한창이었다.우린 그 싱그러운 목화가 쑥쑥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학교에 다녔다.우리 집에서는 약400평가량의 밭에다 목화를 심었고,부모님께서는 항상 목화에 퇴비와 비료를 주면서 열심히 가꾸셨다.
학교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는 목화밭을 가꾸시면서 하얀 손수건으로 땀을 흘리시는 모습을 보곤 하였다.목화는 여름이면 연노랑과 자주색 꽃들이 만발하여 우리들의 눈을 시원하게 하여주었으며 조금 더 크면 열매를 맺기 시작을 했다.산골에서 가난하게 자란 우리는 배가 고플 때 그 작은 열매를 간식거리로 따서 먹었던 추억이 엊그제 같다.
열매가 더 굵어 거기에서 하얀 목화꽃이 하얗게 피었다.어떻게 보면 꽃이 두 번 피게 되는 것이다.이렇게 아름다운 목화꽃이 우리들의 삶의 중요한 의식주 중에서 의(衣)를 해결하여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니 그 중요성을 재론할 여지가 없다.지금이야 화학성 물질로 메이커 있는 아웃도어니,모직이나 포레스톨의 양복들이 판을 치니 우리가 가난하고 어려울 때 그 무명베의 소중함을 잊을 수밖에 없다.그 무명베는 우리 민족의 상징인 백의민족의 표상인데도 말이다.
어렸을 적 어머니를 보면 이 하얀 목화를 하나하나 따서 목화를 트는 틀집이라는곳에 가서 기계로 이 목화를 틀게 된다.이렇게 틀어서 만든 목화를 조그맣게 떡가래처럼 가늘게 만들어 ‘물레’에서 잦아 실을 만든다.
기나긴 겨울철,한참 잠을 자다가 일어나 보면 어머니는 저녁 내내 물레를 돌리면서 가난의 한(恨)을 달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농가에서 가을 추수도 하여야지 이영도하고 울타리도 손을 봐야지 나뭇가지를 꺾어 지게에다 지고 와서 취사도 하여야지 그야말로 농가의 일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그러나 이 목화로 무명베를 만드는 일은 언제나 어머니의 몫이었다.이렇게 실로 만든 베를 풀질하여 마당의 한가운데에 나무로 불을 피운 그 위에서 풀로 빗질하여 빳빳하게 만다.그다음에 베틀에 앉아 북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베를 짜게 된다.이렇게 베를 짜는 날이 한 달 두 달쯤 되었던 것 같다.국문학 공부를 하다 보니 ‘베틀가’라는 노동요를 배우게 되었다.그 베를 짜는 노동의 고통을 한으로 품어 내시는 어머니의 구슬픈 가사가 아련해진다.
이렇게 어머니의 노력으로 우리는 겨울 한 철을 두툼하게 따뜻한 옷을 입을 수 있었다.특히 아버지의 무명 베옷은 그 속에 솜을 더 넣어 두툼하게 만들어 주셨고 내 교복은 검정 물을 들여 손수 만들어 학교에 다니게 하셨다.어려운 농경사회에 가난을 머리에 이고 노상 나주 장이나 영산포 장에 거셔서 행상으로 우리를 학교에 보내신 그 고마움을 갚을 길이 없어 아쉬울 뿐이다.
이렇게 힘든 어머니의 삶은 오늘날의 우리가 있게 한 자양분이다.어머니의 영양분으로 내가 태어나고 지금까지 성장하기까지 기나긴 인생의 여정에 어머니의 따듯한 모성애가 없었다면 한시도 존재할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하니 어머니의 그 따뜻한 모성애가 더욱 그리울 뿐이다.특히 나는 어머니께서45세에 산고를 겪고 낳으셨는데 누나들만3분이 계시는 집 외아들로 태어나서 초등학교까지도 남의 일을 보러 간 집에 찾아가서 꼭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랐다.늦둥이며 아들이다 보니 더욱 애지중지 키워주셨다.
특히 잊을 수 없는 것은 어머니는 바느질 솜씨가 좋아 여름이면 모시옷을 만들어 주시어 교복 외에도 시원하게 입고 다녔던 추억이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모시도 무명베처럼 모시를 경작하여 모시를 실로 만들어 물레에 돌려서 실을 만들고 베틀에서 베를 짜서 만든다.향교에 나가시는 아버지의 하얀 모시옷도 어머니의 지대한 노력 덕분이었다.
어머니는 가난하고 어려운 시대를 사신 여자이시다.가난을 이기려고 ‘무명베’를 생산해서 그 수익으로 논밭을 사는 등 피와 땀을 흘려 재산을 증식하신 여장부셨다.아침 새벽 일찍 밥상을 차려 놓으시고 나주 장이나 영산포 장으로 대봉감을 팔려 다니시는 등 내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본인의 몸을 아끼지 않으신 분이셨다.
순전히 어머니 덕분에 나는 지금 지역사회의 문화창달과 호남의 정신적인 문화유산을 알리는 정신적인 분야에 가치를 두고 현재의 삶을 살고 있다.
내 책상에는 하얀 목화꽃이 꽂혀 있다.어머니의 고마움을 간직하고자 하는 내 작은 마음은 언제나 변함없이 몽실몽실 피어있다.
첫댓글 동구리님~
어머니의 그 크신 사랑을 어디에다 비하리요
저도 어릴적 목화 넣은 이블 덮고 잤답니다
정말 따뜻하지요
글 잘 읽고 갑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요 ~
감사합니다
어찌 이필설로 어머니의 고생을 표현을 다 하겠습니까?
이제 나이가 들어가니 어머니의 고생이 눈에 그려짐니다
그러시군요 저와 그렇게 많은
차이가 나는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버선을 신으신 군번이셨네요
예전에는 바느질로 다 집에서 옷을
자작하여 입던 시절이라 그렇게 집에서
목화솜을 넣어 지은 옷은요즘 같은 옷을
비교 할수 없는 좋은 옷이 였지요
글 잘 보고 갑니다
저는 버선을 신고 다녔습니다
나주에 나이롱 양발이 나왔지요
서울에 사시는 누나가 양발을 사서주는데 그렇게 고마운지 ......
그리고 막네 남동생이라고 시계도 사서 주고 누나가 무척이나 그립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때의 어려운 시절을 잘 표현 해 주셨네요.
물레 라는 말만들어도
그리운 추억이 떠오르곤 합니다.
어머니는 항상 그립고 마음속에 그려져 있답니다.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목화에서 나의 검정교복이 될때까지 어머니의 삶은 가족들을 위한
삶이고 희생입니다 물레 ,베틀에서 북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베를 짜지요
서울 청계천 삼가 어디에선가 목화꽃밭이 있어 그때 실지로 본건 처음 이었지요 5~6년 전에요
어머니의 강한 생활력덕분 이라는 말씀에 뭉클 하네요
어머니의 강한 생활력으로 여기까지 온거 같습니다
늦둥이를 태어나서 부모님에게 효도한번 못해보고 .....
감사합니다.
목화꽃의 하얀 얼굴 어머니 얼굴이네요 ᆢ 선배님 어머니 참 고생 많으셨네오ㅡ 그래서 선배님도 훌륭하고 반듯 하신 분이 시지요 ᆢ
민정 운영자님의 댓글에서 진정한 이글을 쓴 보람을 느낌니다
과찬에 과분합니다 그냥 열심히 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어릴적 목화 열매를 따먹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자세히도 묘사하신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어부셨다니 ......
전 친적집에 가서 목화꽃 처음 보았어요 얼마나 신기하던지
그송이송이 따서 정리하고 이불도 만들고 했다니 노고가 얼마나 큰지 가히 짐작할수 있더군요
어머님의 정성을 힘입어 반듯한 일생을 살아오신것 또한 효도라고 생각 합니다
감사합니다 반듯하게 살았는지는 모르겠고요
허트러진 삶은 살지않았다고 자부를 해봅니다
선배님 어머님의 사랑이
제 어머니도 생각나게 하네요.
전 목화밭은 구경도 못했지만
늘 글로써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바르게 살아온
선배님의 인생길에
박수를 보냅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아이구 미안합니다
이제사 댓글을 보았네요
감사합니다 누구나 인생사가 만만치는 않지요
이제는 나이가 있으니 인생을 뒤돌아보는 일이나 하고 있지요
초등학교 저학년 시기쯤에 목화를 많이 심었었지요.
저도 익기전의 어린목화를 따먹기도 하였읍니다 ~.
맛이 괜찮았지요.
할머니께서 모시로 실을 만드시던
모습도 생각 나지요.
베틀.자리틀.가마니틀.이런 것들이 불과 한세대에 사라진 골동품 이 되는듯 세상이 빨리도 돌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사가 그렇게 빨리 한세대가 돌아감니다
월출산 등산을 하셨던데 더 젊을때 부지런히 다니세요
이제는 조그마한 남산도 못올라감니다 감합니다
우리부모님 새대는 낮과밤이 없을정도로 낮에는 들에나가 들일을 하고 밤에도 길쌈을 뿜앗이로
모기불 켜놓고 호야등 가운데 켜놓고 힘들게 삼삼던 기억까지 활동사진이 주마등처럼 일하시던 모습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목화 열매를 어릴때 길가를 지날때면 얼마나 따먹었는지 부모님께야단 맞아가며 따먹었던 기억을 어떻게 있겠어요.
부모님이 가시고 나니 제가 어머니 나이가 되어보니 넘나ㅇ그립고 생각나고 눈물 납니다.
동구리선배님 건강만 챙기시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이제는 우리가 부모님 세대의 나이가 되었으니
인생사를 자꾸 돌아보게 됩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어머니의 고생이 눈에 보입니다
늦게사 댓글을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동구리 제가 늣게 봤습니다.
죄송 합니다.
이젠 건강만을 챙기셔야 합니다.
건강이 안좋으신데도.우리고향 곡성까지
찾아주신 동구리선배님 무악 산후배님 늘 항상 감사 드립니다.
건가만을 챙기셔야 합니다,들깨도 꼭 드시고 건강만을 챙기시고 행복 하시길 빌며 12월의 첫날의 행운이 늘 함께 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