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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세기적인 만세함성∙호국안성의 재현
-3,1절 104주년에 붙여- 筆 華(수필가)
결기(決起)의 서곡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그해는 기미년(己未年)이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2019년은 기해년(己亥年)이다. 1세기를 격(隔)하여 간지(干支)는 다르고, 거듭된 역사의 영욕으로 세태와 산천은 변했으나, 여전히 기미독립선언이고 3.1운동이다. 3.1정신은 영원불변하는 민족혼의 활화산이다.
만세시위의 불길은 1919년 서울 탑골공원에서 일어나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박은식(朴殷植/민족사학자, 언론인) 저 『한국 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월에서 5월까지 3개월 간, 집회회수 1542회, 집회인원 202만3천명에 이른다. 그 3개월 이후에도 전국적으로 지속되었으며, 당시 전국의 인구 2천만이었으니 참여 인원 202만 이상이라면, 가히 전 민족이 참가한 운동이었다. 그러므로 3.1운동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어난 전 민족 항일 독립만세시위의 총칭이다.
탑골공원에서 열화 같은 만세소리가 울려 퍼진 3월1일,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1919년 3월 11일 오전 11시, 경기도 안성의 양성공립보통학교(현 양성초등학교) 교정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생도들의 열기는 탑골공원에 버금갈 만치 뜨거웠다. 서울에서 시위에 가담했던 학생들은, 3월 10일 총독부에서 단행한 모든 학교의 휴교 조치에 따라 대거 귀향했다.
양성보통학교 제1회 졸업생 남진우(南進祐/보성전문 학생, 덕봉리 출신)와 같은 학교 제2회 졸업생 고원근(高元根/선린상업학교 학생, 동항리 출신)도 고향으로 돌아와 모교 후배들에게 항일독립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만세운동을 선도(先導)한 것이다.
그때,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이 있었지만, 스무 살을 바라보는 고령 학생들의 나라 잃은 울분과 반항의 열기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같은 날 거의 같은 시간에 안성의 중심지역인 읍내 면에서는 시장 상인들 50여명이 철시(撤市)하고 만세를 불렀다. 철시의 파장과 만세함성은 순식간에 읍내 면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서부 안성 지역인 양성보통학교의 만세시위와 읍내면 철시 만세운동이 결코 동떨어진 별개의 상황일까 하는 의구심을 갖는다. 어쩌면 그렇게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 다른 지역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만세운동이 일어날 수 있을까. 당시로서는 엄밀한 기밀을 요하였으므로 노출되지 않았을 뿐, 읍내 면과 서부안성 지역 사이에 긴밀한 협의와 정보교류가 있지 않았을까 유추해 보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퍼져나가고 있었으므로 수원, 개성 등 도내의 선행지역 정보와 학교만세운동 및 안성시장의 정황이 전해지면서 역내(域內)의 여론은 극히 격앙되어 있었을 것이다.
식민지 수탈경제에 의해 서민들의 박탈감은 극으로 치달았고, 바야흐로 다가올 춘궁기 절량(絶糧)의 불안이 기아의 공포를 예고하고 있었다. 게다가 의분의 폭발을 불러일으키는 바람은 거세게 불어왔다. 그렇게 안성 사람들은 다시 한 번 호국의 고장다운 결기(決氣)에 불타고 있었다.
호국안성의 빛나는 역사
1세기 전, 안성의 3.1운동을 상기하면서, 호국 안성의 형형(炯炯)한 역사를 회고해 본다.
멀리 13세기 초엽, 제3차 몽골군 침입을 받았을 때, 죽주방호별감 송문주(宋文冑)장군을 중심으로 굳게 뭉친 안성 사람들이 죽주산성에서 몽골군을 격퇴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닌 고장이다.
14세기 중엽, 고려 공민왕 10년에, 포악한 홍건적(紅巾賊)이 쳐 들어왔을 때, 왕은 남하하여 경상도 안동에 몽진해 있었다. 파죽지세로 남진하는 홍건적의 침입을 받아 인근의 모든 지역이 대항하지 못하고 항복하였는데, 이 고장 안성에서는 전 군민이 일치단결하여 이를 섬멸함으로써 홍건적의 남진을 저지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안성시청 앞 네거리의 극적루(克賊樓)가 그때의 역사를 증거 한다.
임진 왜난 때에는 의병장 홍계남(洪季男), 이덕남(李德男) 장군이 일어나 일본군을 격퇴한 무용(武勇)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 안성의 구국 의병활동은 가히 전국적으로 손꼽힐 만큼 활발하여 그 세력범위는 경기 남부 권을 넘어서 충청지역까지 뻗어 나갔다.
안성 사람들의 의기와 용맹성이 맥맥히 이어내려 1919년 3.1운동 때는 4.1만세항쟁으로 만세고개에 그 충절이 응축되어 있다.
성역 화된 만세고개는 안성인의 항일투혼이 살아 숨 쉬는 만세현장의 중심이다. 100년 전 실력항쟁과 2일간의 해방, 그 발자취가 생생하게 전해 내려와 그 역동성이 맥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만세소리는 흐르는 세월과 함께 역사 속에 묻혀 갔지만 피 끓는 애국 혼은 오늘에 살아 만세고개 언저리에 그 숨결이 뜨겁다.
안성인의 항일투혼과 자주독립의 의지를 기리기 위하여 만세고개를 성역화 하였고, 여기에 새워진 안성3.1운동 기념관은 후인들에게 호국정신 수련을 위한 교육장이 되어 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공세적 실력항쟁과 2일간의 해방
서부안성 지역의 양성 면과 원곡 면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통합하기 이전까지는 같은 양성 군에 속해 있었다. 양 면 사이에 만세고개(당시의 성은고개/1991년 대한민국정부가 지명을 개정하였다.)가 있고, 그 동남쪽은 양성, 서북쪽은 원곡이다. 양성은 군청 소재지였으므로 일제강점기에도 행정기구 와 통치조직이 가추여져 있었다. 당시 원곡 면에는 면사무소만 있었고, 다른 행정서비스나 교육 및 편의 시설은 만세고개를 넘어 양성의 기관과 시설을 이용하고 있었다. 아마도 원곡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낙후된 생활의 편의성 때문에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원곡 면 생도들은 높은 고개를 넘나들며 7km나 떨어진 양성보통학교에 다녔으니 그 불편은 자칫 반발심으로 흘러갔을 법도 하다.
3.11학교만세 소식은 순식간에 두 면 각 동리까지 전파되어 갔다.
이 같은 국면에서 각 마을 동창생들끼리, 또는 마을 지도자들 끼리, 긴밀한 정보가 교류되고 만세운동에 대한 협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학교 만세운동 이후 각 마을에서 산발적으로 소규모적인 만세시위가 이어지다가 대규모 실력항쟁으로 활성화 된 것은 4월1일이었다.
3월28일부터 원곡 면에서는 가까운 동리와, 좀 거리가 떨어진 칠곡리까지 연락하여 면사무소 앞에서 매일 저녁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집회규모는 점점 커져갔고, 29일과 30일, 그리고 31일까지도 계속되었다.
원곡 면 시위에는 몇 사람의 주도그룹이 형성되어 있었고, 이들이 총체적인 계획을 협의 결정하였으며, 분담하여 각 동리 연락과 동원을 담당하고 있었다.
주동인물로 일곱 사람이 지칭되고 있다. 이유석(李裕奭), 이덕순(李德順), 최은식(崔殷植), 이근수(李根洙), 이희용(李熙龍), 홍창섭(洪昌燮), 이양섭(李陽燮)등 7명이 주동인물이었다고 한국독립운동사연구(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간)는 기록하고 있다. 주동인물에 속하는 이들은 면내에서 경제력, 학력, 명망에 있어서 상대적인 우위에 있었으므로 농민이 위주인 주민들의 앞장에 서서 지도력을 발휘하기에 적절했다. 31일 집회가 끝나고 해산할 때 시위지도부에서 “내일 저녁에도 모인다.”는 예고가 있었다.
4월1일 저녁 약 1.000명의 사람들이 한손에 태극기를 또 한손에 횃불을 밝혀들고 면사무소 앞에 모여들었다. 시위 주도자들은 친일면장 남길우(南吉祐)와 면서기 정종두(鄭鍾斗)를 끌어내어 태극기를 들려 만세를 부르게 하고 행진의 앞장에 세웠다.
대열은 사전계획대로 양성 면을 향했다. 행진이 진행될수록 주변 동리 주민들이 합세하여 만세고개에 이르렀을 때는 1.000명을 웃돌았다. 특히 칠곡리 경주이씨 집성촌 주민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만세고개에서 진용을 정비하고 전의를 재점검했다. 주도 그룹 중, 이유석은 한학자이면서 의학과 역학에도 통달한 칠곡리 서당 훈장으로 신망이 높았다. 그는 1.000여명 군중의 앞장에 나와 연설을 했다.
“오늘 이렇게 많은 군중이 모인 것은 천운이오. 우리는 지금 양성으로 가고 있소. 주재소로 가서 순사들에게 태극기를 들려 만세를 부르게 합시다. 만일 응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도 할 바가 있소이다.”
잇따라 지도그룹 인사들이 차례로 나와 사자후(獅子吼)의 연설을 했다.
“조선은 독립될 것이므로, 일본 식민지정책의 앞잡이인 관청은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밤 양성과 원곡에 있는 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모조리 때려 부수고, 양성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모두 내 쫓읍시다. 이 고개를 넘어 양성에 가면 순사가 총을 들고 나올 것이니 우리도 무장을 해야 합니다.”
군중은 힘찬 박수와 함성으로 호응했고, 공세적 실력항쟁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각기 돌을 주어 들었으며, 산에 나무를 잘라 몽둥이를 만들어 무장했다. 거대한 힘의 대열은 진용을 정비하여 “대한독립만세” 함성을 울리면서 양성 면을 향해 어둠을 밝혀나가고 있었다.
그날 저녁, 양성 면에서는 각 동리별로 산발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덕봉리는 임진 왜난 때, 선조임금의 의주 몽진을 안전하게 모신 오정방(吳定邦) 장군을 중시조로 하는 해주오씨 집성촌이다. 면내에서는 가장 먼저, 200여명의 동민들이 마을 뒷산에 올라가 만세를 부르고 하산하여, 오세경(吳世卿), 오관영(吳寬泳) 두 지도자의 주도하에 동항리 면소재지로 나아갔다. 산정리에서는 이희봉(李熙鳳)이 앞장서 마을 앞 행길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9시경 면 소재지로 나아갔다. 도곡리에서는 마을 뒷산에서 만세를 부르고 김영대(金永大)가 선도하여 동항리 주재소로 나아갔다. 구장리, 석화리, 명목리에서도 각 동리별로 마을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연합시위장인 면 소재지로 향했다. 양성면의 시위는 면소재지로부터 대략 2.5km이내의 거리에 있는 동리들이 참여하였으므로 드넓은 들판을 가운데 두고 서로 바라보이는 동리들이었다. 한밤중 각 동리에서 태극기를 앞세워 횃불을 들고 거의 같은 시각에 파상적으로 면소재지를 향하여 행진해 집결하는 모습은 감동과 흥분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었다. 약 1.000명의 만세군중이 일제히 9시에 집결한 것은 이 또한 각 동리들끼리 사전에 긴밀한 협의와 정보교류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동리별로 주재소와 보통학교를 돌면서 만세시위를 하고 마을로 돌아갈 차비를 하는데, 마침내 원곡면 시위대 1.000여명이 만세고개를 넘어 양성에 당도했다. 양면 시위자들은 부지불식간에 합류하여 2.000여명의 연합시위대를 이루었다. 한밤중에 나라 잃은 청장년 2.000여명이 횃불을 밝히고 모인 시위의 장은 필경 흥분의 도가니가 되는 것이다.
밤 10시경, 군중은 경찰주재소로 몰려갔다. 일본인 순사부장(파출소장 격) 다카노(高野 兵臧)가 총을 들고 나와 고압적으로 해산을 종용했으나 군중은 오히려 순사들이 만세를 부르기를 요구하였다. 군중은 수적인 우세로 기세를 제압했다. 순사부장과 주재소 안에 있던 순사 보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군중들은 주재소에 돌을 던지면서 불을 질렀다. 이 벽촌에서 치안을 빌미로 탄압과 수탈의 전초 구실을 하던 경찰관서가 한밤중에 불타고 있었다. 한 무리 군중들은 가까이 있는 우편소(지금의 우체국/소장:齊藤與茂七)로 몰려가 전신주를 잘라 불태우는 등 전신 전화시설을 파괴하여 통신을 차단했다. 그리고 벽에 걸린 일장기를 낚아채 우편소 기물을 태우는 불꽃 위에 던졌다. 다시 면 사무소로 몰려가 기물을 파괴하고 공용문서를 불태웠다.
양성에는 일찍부터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이 있었고, 고리대금업을 하는 악질 사채업자도 있었다. 시위군중은 잡화점주 토자토(外里與手)와 대금업자 타카시(隆秀知)의 상점 및 집을 습격하여 상품과 가재도구를 불태웠다. 일인들은 모두 도망쳤다.
그날 밤새도록 시위를 하였으며, 원곡 사람들은 새벽 2시, 만세고개를 넘어 원곡으로 돌아가 갓밝이가 다가오는 새벽 4시 원곡 면사무소에 불 질렀다. 일단의 열혈 시위자들은 평택으로 진출할 태세를 갖추었다. 일본군 병력과 군수물자가 유입되고 있는 경부선 철도를 절단하기 위해서였다. 그 지음에, 일본군 수비대가 내습해 온다는 정보가 들어와 해산하여 피신했다는 것이다.
치밀한 사전 계획과 공세적인 실력항쟁으로 일제 통치기관을 완전히 제압하였고, 짧지만 2일간의 해방을 이루었다. 전국적으로 유일한 사례다.
3월 하순과 4월 초에 걸쳐 안성 읍내에서도 각 동리마다 치열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마을 뒷산에서, 마을 앞 큰길에서, 또는 대열을 지워 마을들을 순회하면서 행진을 했다. 3월 30일 밤에는 조합기생들이 주도한 1.000여명의 시위대가 경찰서 앞과 군청 앞에서 치열하게 만세를 불렀다. 3월31일 밤에는 3.000명 군중이 등불행진을 하기도 했다.
동부지역인 죽산 지역에서도 각 동리별, 또는 집단적으로 시장에서 만세를 부르기도 하고 면사무소나 경찰 주재소, 우체국에 투석하는 등 공격적인 만세시위를 했다.
4월1일 이죽면 죽산 공립보통학교 생도 50여명이 경찰관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찾아가 만세를 부른 것을 시발로, 수백 명 또는 많게는 2.000명 규모의 대형 시위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특기할만한 사례는 문재홍(文在弘/25, 죽산리)은 4월2일 시장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조선이 독립할 때에는 일본정부가 발행하는 지폐는 통용되지 않게 될 터이니 가지고 있어도 소용이 없다.”고 외치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10전짜리 지폐를 찢어 보였다. 항일 독립의지의 강력한 표출이었다. 이렇게 안성 전역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무자비한 보복
전국적인 헌병경찰의 강압통치를 자행하던 일제는 큰 타격을 입었고, 식민통치체제에 위기감을 느꼈다. 질풍노도와 같은 만세시위가 끝나고 일제는 가공할 보복을 끈질기게 가해왔다. 1차로, 4월3일 조선주차군 제20사단 보병 제40여단 제79연대 소속 장교 이하 25명의 병력이 경찰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되어 원곡•양성 시위참여자를 색출했다. 주로 야음을 이용해 색출한 것은 시위자들이 주간에는 피신했다가 야간에 귀가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기 때문이다. 시위자들의 집을 찾아 방화를 하였는데, 그 와중에 사망 1명, 부상 20여명, 가옥 방화 9채의 만행을 자행한 것이다. 시위자들은 거주지를 떠나 멀리 처가나 친척집에 피신해 있어 검거실적은 부진을 면치 못했다. 이에 일제는 간계를 부렸다. 원곡면장을 시켜 “나와서 경찰서장의 연설을 듣기만 하면 사면하여 농사를 짓도록 해 주겠다.”고 감언이설로 회유했다. 농사철에 들어선 시기였다.
4월19일 피신했던 사람들과 16세~60세까지의 남자들을 현 원곡 초등학교 뒷산 참나무 밭에 모이게 했다. 안성경찰서장이 연설을 시작하는 척 하더니 느닷없이 일군 79연대 소속 병력 30명이 포위하여 몽둥이로 폭행하면서 4.1만세 참여자를 색출하기 시작했다. 도주하려던 주민 3명이 현장에서 살해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무자비한 폭행 끝에 361명을 줄줄이 상투로 엮어 도보로 안성경찰서까지 끌고 갔다. 이것이 두 번째 탄압이다.
만행은 재현되어 3차로 6월1일 육군병력 36명과 경무 관헌을 투입하여 만세시위자들을 색출했다.
이처럼 서부안성지역의 희생은 막심했다. 앞서 본바와 같이 참나무 밭 연설모임에서 현장참살 3명, 안성경찰서 고문치사 5명, 서대문 형무소에서 재판과정 또는 투옥중 옥사로 9명, 고문에 의한 부상 후유증 순국 7명, 이상 24명이 순국하였다. 그리고 127명이 기소되어 전원 징역형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12년 징역이 2명, 7년 이상 중형이 20명으로 가혹한 형벌이 언도 되었다. 가장 경미한 형벌이 1년3개월이었다.
40명은 60대 내지 90대의 비인도적인 태형을 당하기도 했다.
시위과정에서 발생한 기물 파손이나 일본인의 재산 손실에 대한 배상금으로 1만1천엔을 부과하였으며, 만세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자녀취학을 불허하는 등 후손들에게 까지도 보복을 가했다.
안성4.1만세항쟁의 특징과 평가
독립운동사상 부각되는 안성 4.1만세운동의 몇 가지 특징이 있다.
①전국 3대 실력 항쟁지다.
일제는 3.1운동에서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과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 그리고 경기 도 안성의 원곡•양성을 3대 소우지(騷憂地)로 지적하고 그 중에서도 안성을 으뜸가 는 지역으로 평가했다. 우리나라의 국사 편찬위원회에서는 이 3곳을 3대 실력항쟁 지로 명기하고 있다. 평안북도와 황해도는 북한지역이다. 3대 실력항쟁지 중 대한 민국의 유일한 곳이 바로 안성 만세고개다. 일찍이 필자는, 이같이 역사성이 깊은 안성 3.1운동 기념관을 활성화시켜 국민정신교육도장으로 활용하도록 제안한바 있 으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어 아쉽게 생각한다.
②2일간의 해방을 쟁취하였다.
일제는 농촌지역의 식민지 통치기관으로 세 기관을 앞장 세웠다. 경찰 주재소와 우 편소, 그리고 면사무소다. 경찰은 무단정치의 첨단에서 압제와 수탈을 강제하는 기 관이었다. 우편소는 편지뿐만 아니라 전신 전보 등 정보의 집산처다. 면사무소는 식민지 통치의 일반 행정 기관이다. 4월1일 밤, 이 지역에서는 통치기관을 완전히 방화 파괴하고 이틀 동안 치외 법권적인 무정부 상태, 즉 2일간의 해방을 쟁취 하 였다.
③순수한 농민항쟁이었다.
3.1운동 당시 전 인구의 8할이 농민이었다. 경향 간에 어디를 막론하고 농민이 참 여하지 않으면 집회도 시위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주도세력에는 양반계층이 나 지식인, 명망가가 주를 이루었다. 의주군에서는 민족대표 중 한분인 유여대(劉如 大)목사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가 주도하였다. 수안군에는 천도교 인쇄소 보성사 사 장이며 민족대표 33인의 1인인 이종일(李鍾一)로부터 독립선언서 등을 지원 받는 등 천도교가 주도하였다. 원곡•양성에서는 주도세력마저 농민이 담당하여 순 수한 농민항쟁이었다.
④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일제의 보복으로 24명이 순국한 것도 타 지역에 비하여 예사롭지 않으며, 투옥 127명은 서울의 희생자 363명에 다음가는 2번째이고 서울을 제외한 지방으로서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것이다. 1920년7월23일자 동아일보는 의주군과 수안군, 두 곳의 희생자를 합한 수자가 126명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⑤민족대표 재판에서도 인용되었다.
민족대표 33인 재판 중 안성을 인용하였다. 특히 천도교 출신(손병희, 오세창, 최 린, 권동진, 이종일 등)재판에서 3.1운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안성의 원곡•양성에서 폭동이 일어났다고 했다. 민족대표 33인중 가장 무거운 형벌이 징역 3년인데 비하 여 만세고개 지도자에 대하여는 내란죄를 적용하여 12년을 선고한 것이다.
이상에서 지적한 특징은 결과론적 상황을 반영한 특징이다.
주관적 동기(動機)에 의한 특징 몇 가지를 새겨 두어야 한다.
첫째, 전주민적 운동이다.
초기 서울 유학생에 의한 보통학교 시위에서 끝나지 않고 자발적으로 전 주민이 참 여하는 시위를 전개 하였다.
둘째, 계획적 조직성의 특징이다.
양성에서 더봉리를 필두로 각 동리 공히, 저녁 9시에 소재지로 집결한 것은 들어나 지는 않으나 극히 계획적인 조직의 움직임이라 하겠다. 원곡의 천여 명 시위대는 각 동리별 담당자가 치밀한 계획과 조직의 틀 위에서 움직인 흔적이 완연하다. 뿐 만 아니라 벌서 3월 초부터 이덕순이 주도하여 동지들이 3차에 걸쳐, 각 4명, 6명, 8명이 서울에 원정, 시위와 고종의 인산까지 보고 돌아와 거사계획을 짰다. 기록에 의하면 이유석과 홍창섭은 서울의 독립투사 이기종(李起鐘)의 밀지를 받고 상 경하여 월여간이나 만세시위의 사전 전략을 숙의하고 귀향했다. 시위주도자들은 인 근 동리의 혼례, 환갑잔치의 기회마다 만세운동 사발통문을 돌려 투쟁력을 단련 하 였다.
셋째, 공세적 특징이다.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에 대한 방화, 우편소와 일인 상점에 대한 습격 파괴는 우발 적이 아니라 당초부터 의도적인 공세였다. 전국적으로 무장하고 있는 통치기관에 대한 기습 공세는 다른 곳에서는 사례가 없다.
넷째, 목표와 도덕성의 엄격한 구분이다.
일제 통치기관을 철폐하고 일본인을 추방하였으나, 지방의 친일 인사 또는 일본 경 찰을 비롯, 일인들에 대한 살상행위는 일체 없었다. 다만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목 표는 명료하였으나 시위의 도덕성은 엄격히 지켰다.
다섯째, 투쟁역량의 결집을 들 수 있다.
각 면별로 동리간의 역량을 결집하였고, 결정적인 시기에 양성과 원곡 2면의 역량 을 결집함으로서 전의를 드높이고 상승효과를 거두었다.
1919년 3.1운동, 그때로부터 100년이 흘렀다.
그때, 자주 독립을 절규하면서 외쳤던 만세 함성은 뜨거웠다.
장장(長長)한 암흑기를 극복하고 8.15광복을 맞이하였을 때, 그때도 만세를 불렀다.
1948년 신생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감격하면서 그때도 만세를 불렀다.
해마다 3.1절과 광복절에 민족과 나라의 영원한 번성을 기약하면서 만세를 부른다.
그러나 3.1운동 그때와 같이 민족이 하나 되고 남과 북이 함께 부르는 만세는 아직 도 부르지 못하고 있다. 100년이 지나가도 3.1운동, 그때와 같이 뜨겁고, 때에 따라서는 감격에 찬 환희의 만세를 불러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세기가 지나도 그때 그런 만세를 불러보지 못하니 3.1운동 때의 그 만세함성은 “세기적인 만세”였다.
전 안성이 봉기하였고, 만세고개를 중심으로 한 서부안성지역에서는 당당한 실력항쟁을 통해서 2일간의 해방을 쟁취하여 짧은 기간이지만 일제의 마수를 물리쳤다. 빛나는 호국안성의 재현임에 다름 아니었다.
100년 전, 3.1운동을 상기하면서, 전 민족이 하나 되고 남북이 통일된 감격의 만세를 부르는 날이 오기를 바라고 있다. 다시 외치는 새 세기의 만세현장에는 자유와 민주주의와 번영을 구가하는 깃발이 펄럭여야 한다.
3.1정신의 교훈
벽두에 지적한바와 같이, 3.1정신은 민족혼의 영원한 활화산이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유구한 역사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천명하고 있다.
3.1정신은 우리 민족정기의 지열(地熱)이며, 대한민국 건국의지의 정수(精髓)이다.
2019년 봄, 3.1운동 1세기를 맞이하여 이 땅에 살고 있는 민족 구성원으로서 지켜 나가야 할 사명과 책무를 밝혀 두고자 한다.
3,1운동 1세기는,
오늘의 젊은이들과 청소년들에게 나라의 힘이 약했기 때문에 국권이 유린당했던 지난 세기의 역사를 가감 없이 사실대로 똑똑히 깨우쳐 주고, 나라의 앞날을 위해 어떻게 무엇을 해야 될 것인지 경각심(警覺心)을 촉구해 주는 역사 학습의 기회가 되어야 한다.
3.1운동 1세기는,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하여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따로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세대 간의 격절감도, 계층 간의 대립도, 지역 간의 갈등도 없이 거족적으로 봉기하였던 3.1정신을 새삼 명심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민족의 앞날에 기약되어야 할 통일을 앞당기는 것도, 남북한 7.500만 동포가 3.1정신에 충일(充溢)할 때 가능하다고 믿는다.
2019년 봄은 국민 대 각성을 다짐하는 3.1운동 100주년이다.
3.1운동 만세!/ 3.1정신 만세! (2019.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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