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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교회가 지금보다 더 성장하지 않는 이유
윤 성 호 목사
서울 예닮교회 . 샌프란시스 신학대학원 . 한국교회 장기목회연구원 교육위원
각
교회마다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그것을 통해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항상 그 만큼의 분량으로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있었던 성령의 역사만을 가지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의 체험일 뿐 지금도 성령 충만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받은 성령의 임재를 자랑하지 마십시오.
성령의 임재는 지금 나에게 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복음 24장 49절 말씀입니다. "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강남역 사거리에서 교역자 생활을 할 때 저는 개척 하기를 원치않았습니다. 개척이 힘들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학을 떠나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저에게 간밤에 꾼 꿈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상해요. 우리 집에 사람들이 꽉 차 있고, 수돗물을 트는데 수도
꼭지에서 불이 막 쏟아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개척하는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내에게는 "개 꿈이야. 유학준비 하는데 괜히
지장을 주는 말은 하지 마." 그렇게 말했습니다만은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강남역으로 가라'
언제까지 유학인지, 개척인지를 결정하지 않은 채로 세월만 보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금식
기도를 드리고 결정을 하고자 기도원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기도원에서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새벽녘 쯤이 되어 성령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강남역 사거리에 가서 개척을 해라.' 그러나 저로서는 성령님의 지시를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밤새 묵상을 하다가 성령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성령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강남에는
사랑의 교회, 충현 교회, 할렐루야 교회, 소망 교회, 광림 교회 등등 한국의 대형 교회들은 다 모여 있지 않습니까? 제가 어떻게 그곳에서
개척을 합니까?'
그러나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성령님께서는 무슨 지시를 한번 하신 후에 쓸데없는 말 대답을 하면 그
다음부터는 일체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시지 않습니까? 갑자기 기분이 섬뜩해져서 다시 여쭈어 보았습니다. '가겠습니다. 장소를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강남역 사거리에서 양대동 쪽입니까? 테헤란로 쪽입니까? 아니면 한남대교 쪽입니까, 법원 쪽입니까?' 그러자 법원 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시로 기도원을 출발해서 곧바로 강남역 사거리로
갔습니다. 강남역 사거리에서 법원 쪽으로 있는 첫번째 부동산으로 들어갔습니다. "혹시 교회 자리 나온 데 있습니까?"
경험이 있는 목사님들께서는 아시겠지만, 강남 지역에 있는 부동산들은
대개의 경우 교회 자리를 찾는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 부동산 주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제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어제 이 뒤에 50평짜리 교회자리가 나왔는데 그나마 내일이면 다른 사람이 계약을 하기로 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그래서 제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계시받고 왔습니다."
부동산 주인과 함께 교회를 얻을 장소로 갔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장소는 옥한흠 목사님께서 18년
전에 개척을 하셨던 곳이었습니다. 18년이나 된 3층 건물인데 층층이 주인이 모두 다른 관계로 서로 건물 내부를 돌보지 않아 완전히 강남의
난지도를 방불케 했습니다.
2층에 올라가서 예배당을 둘러보는데 먼저
교회를 담임하시던 목사님의 사모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왜 이사를 가시려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모님 말씀이 그 장소에서 3년 동안 목회를
했는데 교인은 목사님 가족까지 합해서 모두 5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랬더니 그 분
말씀이 "바로 근처에 있는 사랑의 교회에서 교인들을 모두 공기 흡입기로 빨아들이듯 해서 그렇지요"라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고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계약을 하고 싶은
마음이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장소를 미리 생각을 한 것도 아니고 성령님의 지시에 의하여 갔던 것인데 어떻게 계약을 안 할
수가 있겠습니까? 가지고 있던 전 재산으로 계약을 하고 94년 12월 18일 날 이사를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당시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대략 2억 정도의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반드시 승리하길 원한다면 돌아갈 다리를 완전히 끊어버리라."
처음에 기도원에서 성령님께서 강남역 사거리로 가서 개척하라고 지시하길 때 제가 분명하게 여쭌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필요한 돈은 어느 곳에서, 누구에게로부터 지원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성령님께서는 그 집사님의 남편으로부터
개척 비용이 지원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당시의 제 입장에서 볼 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그 집사님 붑를
알고는 지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을 빌려달라고 할 만큼의 관계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도 경험이 있으시겠지만 목회자들은 일단 성령님의 지시를 받으면 그 때는 자신들의
생각을 빨리 포기해야 되지 않습니까? 교회를 개척하는 비용은 성령님의 말씀대로 그 집사님의 부군으로부터 지원되었습니다.
교회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마침내 95년 1월 1일 주일날 시작되었습니다. 그 일을 통해서 제가
깊이 깨달은 것은 성령님께서 일단 지시하신 일이나, 지시를 받은 사항에 대해서는 옆에서 누가 뭐라해도 바꾸지 말고 밀어붙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경험을 해보니까 강남 지역에서 개척
멤버도 없이 개척을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신도시 교회 개척보다 몇 배는 어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척 이래 지금까지 자기 발로 찾아온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강남 지역의 특수성입니다.
성도가
한 명도 없으니까 참 난감했습니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렇다, 새벽 기도회를 활성화시켜야겠다.'
그래서 '다니엘 21일 새벽 기도회' 를 개척 즉시 개최했습니다. 그리고 국민일보에 광고를 냈습니다. 혹시 교회 주변에서 새벽 기도 다니기를
원하시지만 본교회가 멀어서 못다니시는 분들이 있으면 오셔서 같이 기도하지는 뜻의 광고였습니다.
96년 7월 21일 새벽 기도회는 여느 때의 새벽 기도회와는 달리 밤새 산에 가서 기도를 드리고
새벽에 내려와서 새벽 설교를 하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였습니다. 밤새 기도를 드리고 내려와서
새벽 예배를 인도하는데 첫날부터 성도들의 병이 치료되기 시작했습니다. 신유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제가 직접 안수를 해서 그들의 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마치고 "믿음으로 아픈 곳에 손을 얹겠습니다" 하고 통성 기도를 시키면 성령님께서 저에게 그 자리에서 치료된 성도들을 즉시
즉시 알려 주시는 덕이었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치유되었다는 선포를 하는 데에는 얼마나 많은
위험부담이 따르는지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제 가치관 중에 '행동하는 2%가 행동하지 않는 98%를 이끈다' 라는 말에 힘입어 믿음으로
선포했습니다. 사람들은 정말로 치료되었습니다.
이렇게 신유의 은사가
나타나고 새벽 기도회가 활성화 되었지만 저는 이것이 교회 부흥의 원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명일동의 명성교회가 새벽 기도회로 성장을
했다고 말합니다만 제견해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김삼환 목사님에게 영혼을 붙여주신 것이지 새벽 기도회 때문에 교회가 그렇게 부흥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교회에도 새벽 기도회가 있는데 왜 그 교회는 부흥이 안되는 것입니까? 교회 부흥은 어디가지나 하나님께서
영혼을 붙여주시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또 저는 조용기 목사님이
신유의 은사를 베풀었기 때문에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 사람들이 몰리는 줄 알았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거의 매 주일 신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 때 뿐입니다.
병 나음을 받으면 다 자기의 본 교회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교회의 부흥은 신유의 은사 때문도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새벽 기도회로도, 신유의
역사로도 교회가 활성화 되지 않고 부흥이 안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내린 결론은 교인들을
기도시키는 방법 밖에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21일 동안의 다니엘 집회를 끝내고 새벽 기도 시간에 교회 앞에 선포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기 위해서 작정하고 기도만 하기 위해 10일 동안 청계산 산 기도회르
선포합니다." 그래놓고 그날 저녁 청계산에 올라가서 방 하나를 얻었습니다. '이제 저녁에 얼마나 올라오느냐?'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과연
강남에서 바쁜 그 분들이 산기도를 올라와 주겠느냐?' 하면서 기다렸는데 그날 새벽 기도에 오셨던 분들의 90%가 산에 올라오셨습니다. 그래서
3시간 정도 산에 기도하고 교회로 내려와서 새벽 예배를 드리고 헤어지는 10일 동안의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렇게 21일 작정 새벽 기도와 10일 산 기도를 마치고 20일 정도가 지났습니다. 다음에는
금요일 날 불시에 전교인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21일 산 기도를 할 테니 전부 산으로 올라오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교인의 약 70%가 올라왔습니다. 그 인원 수에 저도 놀라고 올라오시는 분들도
놀랐습니다. 올라오시는 분들이 전부 보따리 하나씩을 들고 차에서 내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군대도 아니고 이게 뭡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불평들을 하면서도 또 21일을 다 채웁니다. 그렇게 21일 산 기도를 하면서
병자들이 낫고 귀신들이 쫓겨나가고 성령 세례를 받고 문제가 해결 되었습니다. 역시 기도밖에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또 30일
산기도와 10일 금식 및 철야를 진행했습니다.
제가 10일 금식 및
철야를 실시한 목적은 두 가지였습니다. 한 가지는 각자의 문제는 본인 스스로가 기도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과 또 한 가지는 셩령의 능력을
붙잡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에게 기회라는 것은 끊임없이 다가오는데 현대인들은 그 기회를 붙잡을 힘이 없습니다. 즉 성렬의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능력만 있으면 끊임없이 다가오는 기회를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10일 금식과 철야를 병행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려면 기도가 꼭 있어야 합니다. 이것들은 그 동안 제가 교회 성장에 대해서 기도를
드리면서 한 가지 한 가지 깨달은 것들을 메모해 두었다가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요소를 편의상 5M이라고 호칭하겠습니다.
교회가 성장하혀면 첫째로 사람(Man)이 괜찮아야 합니다.
설교를 아무리 잘 하고 신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기사와 표적이
일어나도 목회자가 괜찮지 않으면 사람들은 교회에 모이기를 싫어 합니다.
두번째로 전하는 내용(Message)이 좋아야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괜찮고 제 아무리 신유위 역사가 일어낙도 들을 것이 없으면 사람들은 식상해 합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합니다. 메시지가 살아있느냐? 그 메시지가 설령께서 하시는 메시지냐? 아니면 인간적으로 하는 메시지냐?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중요한 것은 방법(Method)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성령님의 뜻을 구별할 수있습니다.
네번째는 전하는 자의 태도(Manners)입니다.
이것은 은혜나 말씀이나 학식과는 다른 것입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다섯번째로 필요한 것은 시설(Machine)입니다.
현대 교회들에게는 시설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가 작으면 작은대로 크면 큰대로
인테리어를 잘 갖추는 면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 이것은 사치가 아닙니다. 효과적인 전달을 위한 노력입니다.
교회가 지금보다 더 성장하지 않는 이유
첫번째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마 22:37∼38)입니다.
사람은 감정만 가지고는 안되기 때문에 우리는 지·정·의를 동원해서
교회성장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마음에 성령님을
소유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각자가 목회
현장에서 하나님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그리고 내 명예를 소중이 여기고 있는지를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잘 하든 못 하든 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책임전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마 22:39∼40)입니다.
사람이라면 지성인이나 권세자나 상관 없이 다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사람의 가장 크고 아름다운 특성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원할 때 그저 한순간의 관계를 원하지 않습니다. 지속적이고 영원한 관계를 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사랑할 줄을 모르며 사랑받고 싶은 마음들을 채워주지
못합니다.
어느 새 사람들은 온전히 사랑받는 방법도 잃어가고 있습니다. 사랑 받기를 두려워하고 사랑 받기를
포기하다가 결국에는 사람들이 교회를 떠납니다.
또한 자신의
욕구불만을 교회에 대한 반발로 나타내기도 합니다.
아무리 강한 채
하고 혼자 선 채 하지만 뒤돌아서며 그들은 울고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욕구는 사랑에 대한 욕구입니다. 그런 것을 알고 있는 목회자가 그
욕구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한 모습으로 심어주어야 하는 데 그런 목회자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현대 교인들은 사랑이 없는 목회자를 빨리 알아봅니다. 이제는 학식이나 가진 것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 없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많은 교인을 얻기 위해 슬퍼하지 마십시오. 많은
것들을 소유하기 위해 경쟁하지 마십시오. 방법을 몰라 스트레스 받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방법입니다.
교인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돌보아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자녀만 많이 낳고 돌보지 않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자녀가 많다고, 후사가 든든하다고, 기뻐하지 마십시오. 기뻐하기에
앞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으며,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세번째로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른 예배가 드려지지 않기 때문(요 4:23∼24)입니다.
예배는 반드시 성령의 임재가 느껴져야 합니다. 성령의 임재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여기에서 목회자가 실수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주일날 설교자가 예배를 인도할 때 자신도 그 예배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예배 인도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는 제사장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게 하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성령 충만해야 하며, 진정으로 예배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각자가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스스로가 진정으로 온전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하나님이 주신 판단력으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배는 에너지를 공급받고, 육체의 피로를 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교회에서, 특히 예배 시간에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인도하는 자가
'성령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목회자 분들은 기도의 체험을 많이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기도를 많이 드리고 예배를 인도하면 몸 안
가득 전율이 느껴집니다. 찌릿찌릿 흥분이 됩니다. 그러나 기도를 충분히 하지 않은 채 인도를 하면 힘겹고, 누구에게 두들겨 맞은 것만 같습니다.
또 한 가지 목회자 분들이 잊지 마셔야 하는 것은 '성령님이 다 해
주시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성령님께만 일임하고 자신의 노력을 멈추는 테도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각자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노력으로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설교의 내용이 너무 공격적이거나 비판적인 경우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사랑으로 권면하고 위로하여 그들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제사가 되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교회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 네번째 이유는 레마가 없는 로고스의 말씀만을 전하기 때문(마
4:4)입니다.
레마는 성령께서 직접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며,
로고스는 성경 자체입니다. 우리는 시간에 쫓기고, 학식에 치우치고, 방법에 몰두하다가 막상 설교를 할 때는 성경 속에 들어있는 진리, 즉
성령님이 성경을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바로 전하지 못하고 성경의 내용 그 자체만을 전할 때가 있습니다.
일본인이 쓴 책 중에「목숨을 걸고 간부를 키워라」라는 책이 있습니다. 한 토목사업을 하는 회사가
부도가 났습니다. 그런데 그 회사가 간부는 재산을 다 모아 먼저 부도를 막은 것이 아니라 직원들의 급여를 지불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저기 부도를
막을 돈을 얻기 위해 뛰어다녔습니다. 이 사실을 안 직원들은 간부의 행도에 감동하여 자신들의 급여를 반납하고 다 함께 열심히 일해서 회사를 살려
냈습니다. 이 책이 말하는 요지는 사람은 감동에 의해서 움직여진다는 것입니다. 레마에 의해서 움직여 진다는 말입니다.
말씀 속에 숨겨진 성령님의 뜻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온전히 전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한 방법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매일 기도하면서 로고스 속에 숨은 레마를 알려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다섯번째로 양들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요 20:15∼17)입니다.
여러분은 자신들이 선지자라고 생각하십니까, 목자라고 생각하십니까? 목회자는 목자입니다. 저는
목회자는 선지자로서 사람들에게 외치고 경고하는 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목자입니다. 양들을 사랑해야 하는 목자입니다. 양들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권면하는 차원과는 다릅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오기만 하면 목사라는 사람은 강대상에 올라가 소리칩니다. 그들의 실수를 말하며
경고하기만 합니다. 정죄하는 말만 합니다. 강대상은 공격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이 화내셨던 모습으로
화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모습으로 사랑하십시오. 설교 시간을 이용하여 자신이 하고 싶거나 요구하는 것을 말하는 목회자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이것 역시 삼가해야 할 자세입니다.
저희 교회에는 전도
위원회나 교회성장 연구위원회를 두어 '설교 모니터'를 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하는 도중 조금이라도 듣기에 거북했거나 말씀과 다를 경우 적어서
저에게 달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보살펴야 하는 양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보다 그들에게 맞추어 목자가 변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분과를 두기
어려우신 경우에는 사모인 아내에게 부탁하십시오. 그들은 성령님으 도움을 입어 여러분의 감정과 의도를 바로 알게 될 것입니다.
교회성장이 안되는 여섯번째 이유는 시간 사용을 바로 하지 못하는
데에 있습니다(행 1:4).
우리는 어디에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까?
설교 준비에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마십시오. 물론 한 편의 설교를 위해서는 많은 시간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한 편의 설교를 통해서 한
사람의 인생이 변화될 수 있으므로 목회자인 우리는 그 인생을 위해 최선을 다해 설교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설교 준비를 하느라 돌보아야 할 양들을 잃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우리는 서로
돌아보아 은혜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없는지 돌아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목자인 우리 목회자들의 역할입니다. 시간 분배를 하는데 있어서
실수하지 마십시오.
일곱번째 이유는 목회자의 교만(행 5:29∼32)입니다.
갈수록 목회자들의 성령님의 지시에 순복하지 못합니다. 즉시 순종하지 않는 것도 불순종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런 기도를 하면서도 성령님이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하고는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결정해 버립니다(행 13:1∼3). 이는 기도하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성령님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실 것인가에 민감해야 합니다. 한 번 기다려 보십시오. 그로 인해
불이익을 당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의 순종을 보신 하나님은 다른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잠잠히 그리고 민감하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
노력해 보십시오.
또한 교회마다의 개성적인 분위기가 교회성장에
영향을 미칩니다(살전 5:23). 이것이 여덟번째 이유입니다.
성도들이 '우리 교회는 이런 분위기였으면 좋겠다'고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 같은 분위기로
교회를 이끌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홉번째는 교회 교역자들의 태도입니다.
여러분들 교회의 교역자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많은 교인들이
권위적인 교역자들을 어려워 합니다(벧전 2:21, 5:3). 양들을 사랑하고 치유해 주어야 할 목회자가 거만해서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면
성도들은 상처만 받고 돌아설 것입니다.
우스갯소리에 '부흥하기 싫은
교회는 현관에 인상이 나쁜 집사둘만 세워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존심도 없이 성도들의 비유를 맞추라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
자신들의 목회철학에 긍지를 가지고 성도를 대하십시오.
구성원 간에
얼마나 사랑이 있는가, 서로 얼마나 세워주며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서로 간에 얼마나 돌아보는가 등에 의해서 성도들은 움직여지고 교회는
부흥합니다. 교역자 여러분, 제발 자신의 지식만을 강요하지도, 성도들의 비위 맞추지에 여념하지도 마십시오. 그저 그들을 사랑하십시오. 항상
겸손하십시오.
열번째 이유는 개성없는 목회자의 모습입니다(렘 1:9).
목회자 개인의 개성이 있어야 합니다.
각자 목회자로서의 설교방식이 있어야 합니다. 개성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이 개척하는 곳의 특성, 그곳 사람들의 성향, 그 일대의 분위기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
지역의 분위기가 목회를 하고자 하는 자신의 분위기와 맞아야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자신과는 전혀 맞지 않는 곳에 가서 아무리
연구하고 준비하여 목회를 한다고 해도 자신이 어울릴 수 없다면 온전한 목회를 할 수 없습니다.
열한번째로 누구를 위한 목회인가를 아는 것(마 16:18, 행 8:1∼3, 9:1∼5)도
교회성장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아내면 되는 겁니다.
열두번째는 목회자의 성도들에 대한 과잉보호(마 28:19∼20)가 교회성장을 방해합니다.
제게는 아홉 살된 딸과 일곱 살된 아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
아이들이 하는 일들 하나하나를 세세히 가르쳐 주고, 알려 주고, 같이 움직여 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안 놓여서 아이들을
모두 제 품에 두려고만 했습니다. 제가 고생을 많이 한 덕에 아이들은 고생을 시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제 품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저 없이는 밖으로 나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가라'고 말해야 합니다. '가서
다른 사람들을 제자삼으라'고 해야 합니다. 마음을 강하게 다져 먹고 밖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를 살리는 길이며, 세상의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길입니다. 처음에는 어렵고 힘들겠지만 훗날을 생각하면 성도님들 스스로도 그것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열세번째로 위치적 특수성에 대한 전략 부족(수 6:1∼7)을 들 수 있습니다.
열네번째로 불만을 가지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을 굳이 붙잡지 않는
자세(요 21:1-14)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때로 목회가 싫고, 자신이 속한 교회가 싫고, 다른 이들로부터 조롱을 받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것들조차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떠나고자 하는 성도로부터 당하는 아픔도 이겨 내십시오. 그들을 잡아두어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굳이 잡는 우리의 모습 또한 아름답지 못합니다. 그저 그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며 보내십시오. 그것이 우리를
돌아서는 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대의 사랑입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조롱을 참아내지 못하고 위에서 뛰어내려와서 십자가를 뽑아들고 휘둘러봐야
그것은 칼의 역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십자가이어야합니다.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 인내심이 있어야 하며 덕을 보여야 합니다. 사람을 사람으로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떠나는 사람들로 인해 상처받는 것 대신에 '어떻게 하면, 현재 있는 이들과 하나될 수 있을까'에 주력해야 합니다.
떠나는 사람은 보낸다 해도 남은 성도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소그룹으로 활성화 시키는
방안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소그룹을 하려면, 성도 한
사람의 특성에 맞춰 그룹을 나누어야 합니다. 대표는 성령세례를 받고 각종 기도회에 빠지지 않는 사람으로 두어야 합니다. 소그룹 모임에서는
교회성장을 위한 연구도 하고, 성경공부도 합니다. 개인 관리도 소그룹 별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전도 역시 소그룹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교회성장 역시 그렇습니다. 목회자 혼자의 눈으로, 머리로, 가슴으로 하는 교회성장 노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교회성장은 목회자 혼자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는 이것 저것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합니다. 머릿 속으로 이미 모든 것을 이루어
놓고 혼자서 생각이 많습니다. 그러나 목회자 혼자서 할 일이 아닙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소그룹을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교회에 있는 집사님들이나 젊은 청년들을 과소평가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보다 더 훌륭한 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위임한다는
것, 이것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믿고 의지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도들은 이런 목회자를 기뻐합니다. 교회성장은
목회자 혼자의 몫이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이루어야 할 일입니다.
교회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 중 마지막 열다섯번째 이유는 성령의 권능 부족(행 1:4∼5,
8)입니다.
이것은 아주 결정적이고 중요한 이유입니다. 각 교회마다
이미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그것을 통해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항상 그만큼의 분량으로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있었던
성령의 역사만을 가지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에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것일 뿐 지금도 그렇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과거에
받은 성령의 임재를 자랑하지 마십시오.
혹시 성령의 역사는 과거에
있는 일이고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의 모든 내용은 현재형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미래에도 계속된다는 말입니다. 성령님의 임재는 초대 교회 시대에나 현대에나
미래에나 계속됩니다.
무엇 때문에 성령을 인정하지 않으십니까? 그것은 성령은 체험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우리는 성령
체험을 간구해야 하며, 그것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먼저 회개하십시오. 베드로가 풍랑이 이는 물 속으로 빠진
것은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풍랑의
원인은 죄 때문입니다. 야곱과 요나가 회개했을 때 회복되는 역사가 나타났으며, 하나님의 손길이 임하셨습니다. 회개 하십시오. 회개하고 부르짖어
기도드리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위로부터 능력을 입혀 주실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 목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도없이 무슨 일을 하면 아무 역사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이 좀 부족하더라도 기도하고 일을 하면 큰 역사가 나타난다."
예수님은 분주하신 가운데도 일하는 것을 절제하시면서까지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이 필요하지만 특히 성령의 권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권능이 위로부터 우리에게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는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사도행전 1장 4절 말씀처럼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려서 성령의 권능을 받아 수많은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려내는 저와 목사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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