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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의 영
의심의 영의 정체를 밝히고 찾아내는 것과 의심의 영을 축출하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가장 우선되어야 할 기초적인 일이다. ABCD를 모르고 영어를 배울 수 없듯이 의심의 영의 정체를 모르고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의심을 하는 것이나 의심을 품고 있는 것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심이 있는 곳에는 믿음이 있을 수 없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을뿐더러(히 11:6) 의심을 하면서 하나님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인식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다. 의심의 영은 신앙생활을 망친다. 영적 전쟁을 위해 의심의 영에 대해서는 다른 어떤 부분보다 깊게 연구해야 한다. 의심을 한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1. 의심의 발원
‘내가 만약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면?’이라는 의문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해봤던 질문일 것이다. 그러나 의심하는 가운데 드리는 예배, 의심하는 가운데 드리는 기도, 의심하는 가운데 드리는 회개, 의심하는 가운데 드리는 헌신, 의심하는 가운데 드리는 찬양 등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깊게 생각해야 한다. 의심하는 자는 어떤 것도 하나님께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약 1:6~7) 말씀을 상고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의심을 하는가?
의심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의심은 사탄이 넣어주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사탄의 공격은 의심으로부터 시작된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사탄은 “동산의 모든 과실을 정말로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고(창 3:1) 부추기면서 하와를 의심하게 했다. 또한 사탄은 주님께 찾아와서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마 4:3) 이라며 의심하도록 유도한다. 이처럼 의심은 사탄이 넣어주는 생각이고 사탄의 공격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여야 한다.
의심에 대해여 우리가 밝혀야 하는 것은 ‘의심할 때 우리의 신앙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과 ‘의심이 스며들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어느 순간에 우리 믿음 속에 불쑥 들어와서 평안을 깨뜨리는 이 불청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고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이 처리 방법을 모르고는 신앙생활이 겉돌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믿음을 가진 자들이건 아니건 간에 의심을 한다. 필자 역시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모든 것에 대해서 의심을 품고 생각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교회생활 가운데서도 의심이 있었고 세상 속에서도 의심이 있었다. 그 이유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의심에 명분을 세워 정당화시키려고 하면 안 된다. 믿는 자든 아니든 의심의 문제는 생활에서 해결해야 할 우선적 과제이다. 의심의 문제를 생활에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이유는 의심이 가져오는 삶의 피폐함 때문이다.
2. 의심에 대한 성경의 개념
성경에 있는 의심이란 단어의 헬라어 표현들은 다양하다. “의심”으로 번역된 구절의 표현이 다양하다는 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의심이라는 단어의 뜻이 서로 다르게 표현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서로 다르게 표현된 의미를 하나의 의미로 생각하고 사용한다면 성경 해석은 당연히 잘못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각 의심의 의미를 분석해서 신앙생활에서 주의해야 할 의심이 어떤 의심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야고보의 권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으니”(약 1:6)에서처럼 일반적인 의심의 의미로 쓰고 있는 헬라어 ‘Diakrino디아크리노’의 개념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어떤 것을 구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구하는 내용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없을 때 드는 의심이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은 자야, 어찌하여 의심하였느냐?”(마 14:31)라고 하셨을 때 의심은 헬라어로 ‘Edistasas에디스타사스’로 기록되어 있다. 이 단어가 사용된 장면을 보면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의심하여 물속에 빠져 들어갈 때 주님께서 손을 잡아주시며 이 단어를 사용하신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걷다가 의심을 하면서 물속으로 가라앉게 되었다. 즉 그 의심으로 인해 물속에 가라앉았다는 것을 볼 때 이 의심은 하나님의 능력이 소멸되는 의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은사 사역에서 가장 깊이 있게 다루어야 할 의심의 개념이라고 본다. 또한, 유대인들이 주님을 향해서 “언제까지 네가 우리를 의심하게 하려느냐?”(요 10:24)에서의 의심은 ‘Psuchen푸쉬켄’으로 표현된다. 의심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이 있고 그 표현 속에 다양한 의미들이 들어있음이 분명하다.
3. 의심에 대한 주님의 대처
의심에 대한 주님의 대처는 다양하다. 침례 요한의 의심에는 기적을 보여주셨다.(마 11:1~6) 도마의 의심에는 질책을 하셨다.(요 20:29) 유대인들의 의심에는 심한 질책을 하셨다.(마 16:1~4) 이 사례들을 살펴보면 의심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각 사례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3-1. 침례 요한의 의심과 주님의 대처
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에게 지시하시기를 마치신 후에, 그들의 성읍에서도 가르치며 전파하기 위하여 그곳을 떠나시더라.
2 그때 요한이 감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듣고 그의 두 제자를 보내어
3 주께 말씀드리기를 “당신이 오실 그분이시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또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리이까?”라고 하니,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가서, 너희가 듣고 보는 일들을 다시 요한에게 전하라.
5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걸으며, 문둥병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들이 일으켜지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누구나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마 11:1~6, 한글킹)
본문의 내용을 보면 침례 요한의 의심은 오실 메시아인가를 확인하는 의심이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자로서의 의심으로, 이것은 분별을 위한 검증 과정에서 나온 의심이었다. 요한은 하나님의 실존을 인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인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의 의심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이 의심에 대해서 너그러이 기적을 보여주셨다.
침례 요한의 의심은 사탄의 조종을 받은 의심이 아니었다. 이 경우는 메시아인가, 즉 하나님의 아들인가를 분별하는 상황에서 나온 것으로, 의심이라기보다는 확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경우에 주님께서는 요한을 꾸짖지 아니하시고 구약의 예언의 성취 사실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들을 말씀하셔서 전하게 하셨다.(사 61:1) 이 사실로 요한은 그분이 오실 메시아라는 것을 알았고 자신의 사명을 다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인가를 확인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질책을 하지 않으시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3-2. 도마의 의심과 주님의 대처
2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도마야, 네가 나를 보았으므로 믿는구나. 보지 않고 믿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고 하시니라.(요 20:29, 한글킹)
도마의 경우는 주님의 부활에 대하여 의심한 경우로서 상당한 꾸지람을 들었다. 그러나 도마의 경우도 사탄의 조종에 끌려 다니면서 하는 의심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주님께서 도마를 꾸짖으신 이유는, 아직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이지만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후에 부활할 것이라고 이미 말씀하신 상태였기 때문에 부활의 사실을 제자로서 충분히 이해할 만한데도 불구하고 의심한 것에 대해서 질책을 하신 것이다. 도마의 의심은 질책을 받아 마땅하다.
기독교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그 주장에만 근거하는 것이지 확립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아라는 사실은 구약의 예언의 성취라는 사실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을 공생애 기간에 행하신 것, 그리고 부활을 통해 확증된다. 어떤 종교도 부활 사실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단자를 부활시키실 이유도 없다. 이단자를 부활시키신다는 것은 논리적인 추론이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구약의 예언의 성취, 공생애의 기적, 부활은 기독교가 절대 진리라는 것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사실들이다. 아울러 기독교가 하나님과 조우하는, 하나님과 만나는 바른 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핵심적인 사실이다. 이 핵심적인 사실을 제자인 도마가 의심한 것이다. 주님은 아직 승천하지 않으셔서 사람이 만질 수 없는 몸이셨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도마의 의심은 분명히 밝혀야 할 중대한 사건이라는 것을 주님께서 아셨다. 이 의심을 잠재우지 않으면 후대에 문제가 되고 파장이 일어날 것을 분명히 보신 것이다. 그리고 여자들에게는 만지지 못하게 하신 부활의 신성한 육체를 도마에게는 못자국을 보여주시고 창자국에 손을 넣어 보게 하신 것이다.
3-3. 유대인의 의심과 주님의 대처
1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주께 와서 주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더라.
2 주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녁이 되어 하늘이 붉으면 ‘날씨가 좋겠구나.’라고 말하고
3 또 아침에 하늘이 붉고 찌푸리면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하나니, 오 너희 위선자들아, 너희가 하늘의 현상은 분별할 줄 알면서도 시대의 표적들은 분별할 줄 모르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줄 표적이 없도다.”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시니라. (마 16:1~4, 한글킹)
본문은 유대인들이 주님을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보여 달라고 의심한 경우이다. 이 경우는 사탄에게 사주된 의심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심한 질책을 하신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실존을 인정하지만 영적인 어두움에 가려져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사탄의 종이라는 관점에서 강한 질책을 하셨던 것이다.
4. 의심의 원인
의심의 원인에 대하여 각론적인 항목은 나열할 수가 없다. 모든 주제가회개, 기도, 예배, 봉사에 대한 의심 등 의심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총론적인 부분에서 의심의 원인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생활에서 사탄의 역사를 본다. 사탄이 분명히 일하는 것을 본다. 우리는 사탄이 일하는 것을 분별하고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방법을 구사하지 않고 영의 원리에 따라 기다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는 것을 종종 본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침묵을 보면서 회의적인 생각과 의심이 유발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악한 자들이 믿는 자들을 핍박함에도 불구하고 악한 자들은 형통하는 것과 같이 잘되고, 믿는 자들은 고통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몸부림을 칠 때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생활이 어느 정도 수준에 달해 있는 자들에게 생기는 의심의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하나님의 인도와 약속이 자신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의심이 유발된다.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임을 여러 번 확인하고 행보를 하였음에도 응답받은 결과가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을 때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인도와 약속이 자신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해서 의심이 유발되는 사례들을 보면, 하나님의 음성일 것이라고 추축하는 가운데 행한 일들이라는 것과 하나님을 도와준다고 행한 일들이 대부분이다. 즉 성경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의 뜻이 이럴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행하였던 일은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이스마엘을 생산한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경우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영의 원리를 모르고 행한 경우이다.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보다 앞서서 일하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나온 것으로, 이 사례가 아브라함에게도 있었다는 것은 그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다(약 5:17)고 말한 야고보 사도의 기록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런 의심은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즉, 욥이나 아브라함 등 믿음의 선각자들에게 닥친 시련 가운데 있었던 의심은 이들이 하나님의 실존을 의심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무신론자들의 의심하고는 비교될 수 없다. 이들의 삶에서 드러나는 것 가운데 분명한 것은 삶의 압박이 수인의 한계를 넘을 때 믿음이 성장되었다는 것이다. 믿음의 인물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하나님을 신뢰함에는 변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현실의 상황이 납득할 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변함이 없었다. 때문에 이들은 환경이 변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이다.
5. 의심이 가져오는 폐해
의심은 사악한 것이다.(딤전 6:4) 성경에서 말하는 사악한 의심이라는 것은 영적인 문제에서 비롯되는 의심이다. 사탄이 가룟 유다에게 예수를 팔 생각을 넣었듯이, 믿는 자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의심을 넣어주는 주체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제3의 인격, 즉 악한 영인 의심의 영에 의해서 유발되는 의심이다. 이 의심은 그야말로 사악한 것이다. 그 이유는 의심의 주제에 대해서 걱정 근심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뼈를 마르게 하고,(잠 17:22) 번뇌케 하고, 의기소침하게 한다.(잠 12:25)
의심의 영들이 의심을 넣어줌으로 유발되는 의처증이나 의부증의 사례들을 보면 그 결국이 어떻게 되는가? 의심하는 당사자의 심령 상태가 어떻게 되는가? 의심에 의심이 꼬리를 물고, 상상에 상상을 더하고, 분노와 복수심을 주체하지 못해서 저질러지는 결과들을 대할 때면 의심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얼마나 피폐해지고 근심하고 뼈를 마르게 하는가를 알 수 있다. 의심이 얼마나 그들의 삶을 갉아먹고 있는가를 볼 수 있다. 마귀가 넣어주는 의심의 정체를 알지 못하여 파괴되는 삶의 전형이다. 의심이 가져오는 폐해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소멸된다는 것이다. 이 논점은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 생활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싶으면 의심하면 안 된다.
31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드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오 너 믿음이 적은 자야, 어찌하여 의심하였느냐?”고 하시니라. (마 14:31, 한글킹)
본문은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두려워하면서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보시고 건져 주시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이 사건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베드로의 믿음이다.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하면서 많은 기적을 눈으로 확인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실존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베드로의 의심은 환경의 두려움에서 오는 염려의 일종이라고 보아도 될 만한 의심이었다. 물 위를 걷다가 바람이 사나워지는 것을 보면서 ‘내가 저기까지 갈 수 있을까?’하는 의심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있다, 없다.’의 문제도 아니고 ‘예수님이 살아계신다, 아니다.’의 문제도 아니었다. 단지 ‘그럴 수 있을까?’하는 의심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으로 유일하게 물 위를 걷게 했던 하나님의 능력이 그 순간 소멸되고 물속으로 가라앉은 것이다. 이제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의심하는 자는 어떤 것도 주께 얻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약 1:6~7)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역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까?’라는 의심, ‘내가 기도를 하면 나을까?’라는 의심, ‘내가 나사렛 선포를 하면 귀신들이 나갈까?’라는 의심 등 모든 의심이 하나님의 능력을 즉시 소멸시킨다는 것이다.
5-1. 의심의 기초 위에 신앙이 쌓여간다는 주장
이제는 의심의 기초 의에 신앙이 쌓여간다는 주장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할 차례이다. 신앙이 의심의 기초 위에서 성장해 간다면 신앙이 의심과 섞여서 성장한다는 결론이 이른다. 만약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면 신앙생활에서의 의심은 당연히 생활의 일부분이 될 것이다. 이런 주장은 의심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마치 아무렇지도 않고 당연한 것 같이 생각하게 하여 의심의 심각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이런 폐해 때문에 이런 주장들을 살펴볼 실익이 있다.
의심과 믿음이 공존할 수 있는가? 이 두 개념은 개념상 양립될 수 없다. 이론적으로는 어떻게 말해도 상관이 없겠지만 인격적인 영의 실재를 대할 때는 하나님을 의심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은 의심으로 인해 소멸된다는 사실, 즉 영의 원리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어떻게 믿음이 의심의 기초 위에 쌓여 간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신앙은 의심의 바탕 위에 설 수가 없다. 의심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심의 기초 위에 신앙이 쌓여간다는 주장은 의심의 심각성을 왜곡하여 치명적인 자상을 입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신앙생활을 하며 의심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여 의심의 심각성을 희석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심이 하나님의 능력을 생활 속에서 소멸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면 의심의 기초 위에 신앙이 쌓여간다는 주장들은 가볍게 뱉어낼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신앙에 접근할 때 처음부터 바로잡아야 할 문제이다. 술을 마시고 핸들을 잡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되지 않는 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운전에서 기본이듯이, 의심의 기초 위에 신앙이 쌓여 가는가의 여부는 신앙생활의 기초를 말할 때 반드시 주지시켜야 할 필수 교육과정이라는 것이다.
의심의 기초 위에 신앙이 쌓여간다는 주장은 의심과 분별의 개념을 혼동한 것에서 나온 건 아닌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영들을 분별하는 것은 의심이 아니다. 내적인 사고의 요소들을 이론적으로 선을 그어 구별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분별과 의심은 엄연히 다르다. 의심은 믿음과 반대되는 개념이고 분별은 믿음에 터 잡아 진위 여부를 파악하고 구별하는 것을 말한다. 의심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지 못하는 것이고 분별은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서 그 진위 여부를 구별하는 것이다. 대부분 의심에 대한 잘못된 주장들은 이 두 개념이나 개념의 요건, 또는 과정에서의 오류들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주장들이라고 본다. 분명한 것은 의심과 믿음은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의심은 믿음을 궤멸시키는 것이고 신앙생활은 의심에 터 잡고서 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입장이다.
6. 의심에 대한 처방
어떻게 의심을 떨쳐버리고 평안을 찾을 것인가? 의심의 본질에 접근하는 방법이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경우에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 이 해결 방법에 대해 지적인 능력을 사용하여, 즉 심리학의 이론이나 다른 상담학의 이론을 사용하는 것은 필자는 논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일은 혼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영의 원리이다. 의심의 영을 쫓아내는 방법은 주님과의 동행과 나사렛 선포 이외에는 해답이 없다. 나사렛 선포, 이 한 구절을 알지 못해서 가지 않아도 될 정신병원을 가고 죽지 않아도 될 자살의 길을 간다. 악한 영들에게 이끌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실감하게 하는 부분이다.
[회복시리즈 05. 믿는 자의 표적 中 일부 발췌 / 박찬빈 著]
이세벨의 영, 음란의 영, 거역의 영, 과시의 영들에 대한 특징 및 현상들, 분별 방법, 이 영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인식해야 할 것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책을 참조하세요. 회복시리즈는 모두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바로 알아야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헝클어져 가닥을 추리지 못했던,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의 피로를 조금이나마 풀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회복시리즈 제4권 그리스도의 영 중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는 사람들 [http://cafe.daum.net/onlyjesus1924] 카페에서 강의영상을 꼭 보세요.
간증들도 읽어 보시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만나주시고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셨는지,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고 있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분명 많은 도움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그 살아계신 하나님을 여러분도 반드시 만나서 동행하시길 바랍니다.
이젠 우리의 신앙을 진지하게 점검해야 합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영생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영혼구원의 문제를 내일로 미뤄도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책은 아래에서 구매하실 수 있으니 참고하세요.
http://sundori.kr (순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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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