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빌라도는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넘겨주었다."
(마태27,26)
빌라도는 공의에 따라 판결해야 할
재판장으로서의 소신을 저버리고
성난 군중들의 요구대로
흉악범 바라빠를 풀어 주는 대신
무죄하신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한다.
원문에는
'바라빠를 그들에게 풀어주고'인데,
새 성경 번역에서는
'그들에게'에 해당하는 '아우토이스'
(autois; to them)를 번역하지 않았다.
여기서 바라빠를 풀어 준 것은
빌라도 총독의 뜻이 아니라
백성들의 요구에 의한 것이기에
'그들을 위하여'(for them)라고
번역하는 것이 문맥에 더 적합하다.
어쨌든 빌라도가 이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얼마나 우유부단했던가!
이미 그의 아내를 통해 예수님이
의로운 분이라는 것을 들었고(마태27,19),
빌라도 본인 역시 예수님이 무죄한
분임을 알고 있었다(마태27,18.23).
그는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상실하고
백성들의 요구에 압도당하고 말았고,
혹시라도 이 일이 확대되어
민란이라도 크게 일어날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로마 황제는 반역자의
문제로 민란이 일어난 데 대한 책임을
총독인 자신에게 물어
자신을 해임할 수도 있기 때문에
빌라도는 군중들의 요구에 영합하여
바라빠를 석방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모든 책임을 백성들에게 전가하려
했어도(마태27,24), 정의와
양심을 속이고 재판의 최고 판결자로서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선고한 그는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교회의 역사 안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라는 오명을 벗지 못한 채
사도신경 안에서
끊임없이 되새겨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채찍질하게'에 해당하는
'프라겔로사스'(phragellosas)의
원형 '프라겔로오'(phragelloo)는
끝에 납덩이가 달린 가죽 채찍으로
사람에게 채찍질하여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록 하는 행위를 가리키며,
이것은 중죄인에게
시행하는 형벌의 한 방법이다.
본문은 부정(不定) 과거 분사로 쓰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기 전에 이러한 잔인한
채찍질이 가해졌음을 나타내고 있다.
성녀 비르짓다는
예수 수난 기도(15기도)를 계시받아
전하면서 예수님께서 크고 작은 매를
5,480대 맞으셨다는 것을 밝혔다.
물론 사형선고로부터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까지의 모든 과정에서
전지(全知)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은 다 헤아렸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묵주기도
고통의 신비 2단에서 '매맞으심'
혹은 '채찍질당하심'을 묵상하는 것은
바로 빌라도의 명령으로
십자가 사형 언도를 받아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를 지고 가시기 전에
기둥에 묶여 이루어진 사건을 말한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맨발의 카르멜 수녀원에서 기도 중에
이 '매맞으시는 예수님'의 환시를 보았고,
이것이 봉헌 생활 중에 가장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고, 그의
영성 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나에게 있어 매맞으시고
채찍질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뇌리와 가슴에 각인되게 한 것은 바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다.
예수님 곁에 늘려진 수많은 고문의 도구들,
결코 사람이 아닌 정육점의 고기처럼
짐짝처럼 취급당하며
잔인한 물리적 고통과 과격만이
계속되는 장면들을
차마 두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우리 믿음의 조상들인 순교자들도
이 고난과 핍박의 길을 가셨다.
문제는 무죄하신 예수님,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살기 가득한
죄인들인 인간들을 통해서, 아니
그 안에서 역사(役事)하는 악의 세력들인
마귀들에 의해서 짓밟혔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인류의 죄(罪)가
성부 하느님 대전에 용서받을 수 없고
하느님의 공의(公義)가 채워지지 않으며,
인류가 구제받을 수가 없고,
죄로 인해 사탄에게 빼앗긴 영혼들을
도로 찾아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죄없으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게 된다. 바로
나의 죄를 무죄하신 성부 하느님 대전에
대속(代贖)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참아야만 하고
참으시는 것이다. 단 하나의 영혼,
마지막 한 영혼을 구하시기 위해서
우리들의 마지막 죄와
그 흔적까지 피로 씻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채찍질당하시는 장면을
묵상할 때마다 우리 몸이 저지르는
순결치 못한 죄와 지나친 탐욕과
게으름을 속죄하고 울어야 한다.
"밭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고랑을 길게 내었네."(시편129,3)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이사50,6)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이사5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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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 맞으신 예수님 / 고-임언기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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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