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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HIS IS TOTAL WAR 원문보기 글쓴이: 블템포컴빌리
이냐시오 출판사가 간행하는 Catholic Dossier라는 격월간지에 흥미있는 내용이 실려 있어서 우리말로 옮겨 보았습니다. 역사를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전문적으로 번역하는 사람도 아니라서 잘못된 부분이 있을 줄 압니다. 지적 부탁드립니다. 원문은 영문 제목을 클릭하시면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필자의 이름을 클릭하시면 글쓴이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십자군에 관한 여덟 가지 미신
세인트 루이스 대학교
사학과 교수
최근 십자군이 뉴스에 많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테러리즘에 대한 전쟁을 "십자군 전쟁"이라 잘못 칭했습니다. 그는 전세계 이슬람 신자들의 심기를 거스르고 상처를 주는 그러한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가차없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 단어가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라면, 진실로 아랍인들 자신이 그 단어를 얼마나 자주 사용하고 있는가는 주목할만한 일입니다. 오사마 빈 라덴과 뮬라 오마르는 미국인을 "십자군"으로, 그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이슬람에 대한 십자군 전쟁"이라 불러 오곤 했습니다. 근 수십 년간 중동 아랍인들은 미국인을 "십자군"이나 "카우보이"같은 용어로 불러 왔습니다. 분명히 십자군은 이슬람 세계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십자군은 서방 세계에서도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동방과 서방 사이에 상존하는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동-서방 문화의 사람들 대부분은 십자군에 대해 어느 정도 의견 일치를 보입니다. 십자군은 일반적으로 서구 문명이, 특히 가톨릭 교회가 안고 있는 오점으로 흔히들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가톨릭을 비난하려 혈안이 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지체 없이 십자군과 종교재판을 이야기거리로 내어 놓을 것입니다. 십자군은 종교가 만들어낼 수 있는 악(惡)의 고전적인 실례(實例)로 자주 사용됩니다. 뉴욕이나 카이로를 불문하고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평상적인 사람들을 인터뷰 한다면, 그들은 십자군이 평화롭고 번영하고 있는 세련된 이슬람 세계에 광신도들이 자행한 음흉하고 냉소적이며 정당성 없는 침략이었다는 같은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중세기 유럽인들 중에는 십자군이 최고 선한 행동임을 믿지 않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이슬람 신도들조차 그들에 맞서 싸웠던 사람들의 신앙과 십자군의 이상을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과 더불어 바뀌어 버렸습니다. 이미 교황의 권위와 대사(代赦)라는 그리스도 교리를 저버린 마르틴 루터에게 십자군은 권력에 굶주린 교황이 저지른 계략에 불과했습니다. 진정으로 루터는 이슬람과 싸우는 것은 그리스도를 거슬러 싸우는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투르크인들은 그리스도교 세계의 신앙 결핍을 징벌하러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사람들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술탄 슐레이만과 그의 군대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기 시작했을 때, 루터는 싸워야 할 필요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십자군을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다음 두 세기동안 사람들은 십자군을 신앙고백이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보려 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도는 십자군을 악마처럼 생각한 반면, 가톨릭 신자들은 십자군을 칭송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슐레이만과 그 후계자들은 단지 몰아내면 속시원할 사람들일 따름이었습니다.
십자군에 대한 오늘날과 같은 시각이 탄생한 것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였습니다. 볼테르 같은 계몽 철학자들(philosophes)은 중세 그리스도교가 타락한 미신이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군은 광신과 탐욕과 정욕을 따라 이동하는 야만인에 불과했습니다. 그 이후 십자군에 대한 계몽주의식 관점은 유행할 때도 있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낭만주의 시기와 20세기 초에 십자군은 (종교적 의미에서는 아닐지라도) 숭고한 전쟁이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여론은 또다시 십자군에 적대적(敵對的)으로 변했습니다. 히틀러, 뭇솔리니, 스탈린의 등장으로 역사가들은 이데올로기-그것이 어떠한 이데올로기가 되었건 차별하지 않고-전쟁이 얼마나 혐오스러운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적대감은 스티븐 런시맨 경(Sir Steven Runciman)이 저술한 세 권 분량의 『십자군의 역사』A History of the Crusades (1951-54)에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런시맨에게 십자군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고 도덕적 모순으로 점철된 종교적 편협함의 극치였습니다. 십자가를 수여받고 중동 지역으로 진군했던 중세인들을 비관적일 정도로 악하고 강도처럼 탐욕스럽거나 유치할 정도로 잘 속아 넘어가는 자들로 평가했던 것입니다. 수려한 문체로 쓰여진 이 책은 곧 표준 역사서가 되었습니다. 거의 독보적으로 런시맨은 오늘날 인기를 얻고 있는 십자군에 대한 견해를 정의했습니다.
1970년대 이후 십자군은 촘촘히 탐침(探針)하는 방식으로 조사하는 수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성전(聖戰)에 대해 그 이전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수십 년간 학계가 맺어온 열매가 대중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는 속도는 느리기만 했습니다. 이는 전문 용어로 역사를 기술(記述)함으로써 학계 밖의 사람들이 접근하기에 쉽지 못한 연구를 출판하곤 했던 전문 역사가들에 부분적인 잘못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군에 대한 런시맨의 견해를 차마 떨쳐 버리지 못했던 현대 엘리트들의 주저(躊躇)하는 태도에도 분명히 잘못이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군에 대한 현대의 인기있는 책들-결국 대중의 인기를 얻기를 갈망하는 의도였겠지만-은 런시맨의 생각을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막강 파이톤」Monty Python에 출연했던 테리 존스가 사회를 보고 BBC/A&E가 제작한 연속 다큐멘터리 「십자군」The Crusades (1995)과 같은 대중매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작품에 역사 전문가들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프로듀서는 저명한 십자군 전문 역사가(歷史家) 다수의 인터뷰를 끼워 넣었습니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 역사가들이 런시맨과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로듀서는 녹화된 인터뷰를 교묘히 편집해서 그 역사가들이 런시맨에 동의하는 것처럼 만들어 버렸습니다. 조나단 릴리-스미츠 교수는 격분하여 저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실제로 믿지 않는 내용을 기정 사실로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위조해 버렸어요."
그렇다면 십자군에 관한 진짜 역사는 무엇일까요? 기대하고 계셨겠지만, 그것은 길고도 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지난 이십 년간 그에 관해 상당히 밝혀내고 있는 좋은 역사서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십자군이 받고 있는 집중 포화(砲火)를 생각한다면, 우선 단순히 오늘날 풍미(風味)하고 있는 십자군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을 지목(指目)하여 생각해 보는 것이 제일 좋을 것입니다. 다음은 십자군에 관한 가장 흔한 미신들이며 이어 그것이 왜 틀렸는지를 제시할 것입니다.
미신1: 십자군은 평화로운 이슬람 세계에 대한 선제 공격이었다.
이는 더할 나위없이 틀린 견해입니다. 모하메드 시대부터 이슬람은 그리스도 세계 정복을 추진했습니다. 그들은 그 계획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여러 세기 동안 이루어진 정벌에서 이슬람 군대는 북 아프리카 전역과 중동, 소아시아, 스페인 대부분 지역을 정복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11세기 말까지 이슬람 세력은 그리스도 세계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향 팔레스티나, 그리스도교 수도원 생활의 시발지(始發地)인 이집트, 성 바오로 사도가 첫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씨앗을 심었던 소아시아: 이곳들은 그리스도교 세계의 주변부가 아니라 핵심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이슬람 제국은 정복 전쟁을 아직 끝내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을 향하여 서쪽으로 압박해 들어왔으며 결국 그 도시를 지나 유럽 자체로 진입할 것이었습니다. 선제 공격은 전적으로 이슬람 진영에서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세계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자신을 방어하든지 아니면 단순히 이슬람 정벌군(征伐軍)에 무릎을 꿇는 것이었습니다. 1095년 우르바노 2세가 소집한 첫 번째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 황제의 긴급한 도움 요청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우르바노 교황은 그리스도교 세계의 기사(騎士)들에게 동방의 형제들을 도와달라 호소했습니다. 그것은 동방 그리스도교인들을 이슬람의 정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자비의 사명이 될 것이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십자군은 방어를 위한 전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동방에 파견되었던 십자군 전체 역사는 이슬람의 공격에 대한 대응의 일환입니다.
미신2: 십자군은 십자가를 지니고 다녔으나 실제로 전리품과 점령지를 노획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신앙은 단지 강탈과 탐욕을 은폐하기 위한 상투적인 것이었다.
기사도(騎士道) 전투 훈련을 받았음에도 아무런 봉건 영지를 상속받지 못한 "서자"(庶子) 출신 귀족들이 유럽 인구 증가로 인해 과포화 상태가 되는 위기가 초래되었다고 역사가들은 믿어오곤 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호전적(好戰的)인 남성들이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고 상속지를 양도받을 소지가 있었으므로, 십자군은 그들을 유럽으로부터 멀리 떠나 보낼 수 있는 명분(名分)을 제공하는 안전 밸브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컴퓨터 데이터 베이스를 도입하여 연구에 이용하고 있는 현대 학계는 그러한 미신을 논파(論破)해 버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1095년에 교황의 호소에 응답했고 추후(追後)에 조직되었던 십자군에 동참했던 사람들이 유럽의 "적자"(嫡子) 출신들이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십자군 전쟁은 막대한 희생을 요구한 작전이었습니다.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를 매각하거나 저당(抵當)잡힘으로써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멀리 해외에 있는 왕국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의 군인과 마찬가지로 중세 십자군은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데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고향으로 돌아가길 고대(苦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과 팔레스티나 상당 부분을 탈환한 제 1차 십자군의 극적인 승전 이후 실제로 모든 십자군들은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아주 소수만 잔류하여 새로이 차지한 지역을 정리하고 다스렸습니다. 약탈 역시 드문 일이었습니다. 사실 십자군이 의심의 여지없이 부유한 동방 도시들에 있을 엄청난 부(富)를 꿈꾸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아무도 그 대가에 대한 아무런 변상도 받지 않았습니다. 돈과 땅은 그들이 십자군으로서 그곳에 간 본래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타국에서 좋은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속죄하고 구원을 얻으러 갔던 것입니다.
미신 3: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은 길거리에 피가 발목까지 차오를 때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량학살 하였다.
이것은 십자군의 악한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이야기입니다. 최근 죠지타운 대학에서 있었던 연설에서 (이때 클린턴은 보다 극적인 효과를 내려고 피가 무릎까지 차올랐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만) 빌 클린턴은 미국이 이슬람 테러리즘의 희생자가 된 이유가 바로 십자군 때문이라 주장했습니다. 십자군이 도성을 점령하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살해된 것은 분명히 진실입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인 맥락에서 이해되어야만 합니다. 전근대(前近代) 유럽과 아시아 문명에서 인정되는 도덕적 기준이란 포위에 저항하다 무너진 도시는 승자에 속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건물과 재산 뿐만이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로 예속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도시나 요새가 포위군(包圍軍)에 대항해 버티어낼 힘이 있는지 조심스럽게 저울질해야 하는 이유였습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양도(讓渡) 협약을 맺는 쪽이 현명한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경우 도성을 방어하던 사람들이 끝까지 저항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집트로부터 구원군이 올 때까지 예루살렘의 튼튼한 성벽이 해안가에 진치고 있던 십자군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줄 거라 계산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전략은 어긋났습니다. 도성이 함락되었을 때 그곳은 강탈의 위험에 처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기도 했으나 여전히 많은 이들이 자유의 몸이 되거나 몸값을 치루고 석방되었습니다. 현대의 기준으로 본다면 이것은 잔인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세 기사가 지금 살아 있다면 하루 이틀동안 칼에 맞아 죽었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무고한 남녀노소가 폭격으로 살해당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지적할 것입니다.
십자군에 항복했던 이슬람 도시들의 시민은 간섭받지 않았으며 그들의 재산을 그대로 보유할 수 있었고 자유로이 신앙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사실(史實)은 주목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어느 역사가도 길에서 피가 발목까지 흘러 넘쳤다는 이야기를 관습적인 문학적 표현 이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은 무척 큰 도시입니다. 3인치 깊이로 피가 계속해서 흘러 넘치고 길거리를 가득 채우는데 필요한 피의 양은 그 도성 인구에 주변 지역 인구를 합한다 하더라도 결코 충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미신4: 십자군은 단지 종교적인 수사(修辭)를 붙인 중세 식민주의에 불과하다.
중세 서구세계는 낙후되거나 진보가 느린 지역에 대한 모험적인 도발(挑發)을 감행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 강력하고 주도적(主導的)인 문화가 아니었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동방의 이슬람은 강력하고 부유하며 수려한 문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럽은 제3세계였습니다. 제1차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창건된 십자군 국가(the Crusader States)는 이슬람 세계에 새로이 건설된 가톨릭 식민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영국의 미국 식민화 기도(企圖)와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군 국가에서 가톨릭 인구는 언제나 적은 수였고 10% 이하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들은 이탈리아 상인과 기사단, 그리고 통치자와 행정 담당관들이었습니다. 십자군 국가의 압도적 다수 인구는 이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영국이 인도(印度)에서 시행했던 플랜테이션이나 재외 상관(在外商館)의 맥락에서 생각해 보자면 그곳은 식민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전초지(前哨地)에 불과했습니다. 십자군 국가의 궁극적인 목적은 팔레스타인의 성지, 특별히 예루살렘을 수호하고 그곳을 여행하는 그리스도 순례자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군 국가에게는 경제적 이해 관계를 가졌던 어떠한 모국(母國)도 없었으며 유럽인들도 그들로부터 경제적 이득을 얻지 못했습니다. 정반대로, 동방 라틴을 유지하기 위해 십자군에 들어가는 경비는 유럽 자원의 심각한 유출을 초래했습니다. 전초지로서 십자군 국가는 군사적인 면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이슬람이 서로 전쟁을 벌는동안 십자군 국가는 안전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이슬람 세계가 단결하게 되자 그들은 요새를 부수고 도시를 함락시켜 결국 1291년 그리스도인들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미신 5: 십자군에게 유태인들은 공격의 표적이었다.
어떠한 교황도 십자군에게 유태인들을 적대시(敵對視)하라 명하지 않았습니다. 제1차 십자군 원정 기간 중, 정예 군대와 관련 없는 천민 집단이 대거 라인란트의 도시들도 내려와 그곳에 있는 유태인들을 강탈하고 죽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것은 순전한 탐욕이 부분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한편 그것은 유태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민족으로서 전쟁의 적법한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잘못된 신념으로부터 유래한 것이었습니다. 우르바노 2세와 후대 교황들은 유태인에 대한 공격을 강력히 규탄했습니다. 지역 주교들과 성직자, 평신도들도 유태인을 보호하려 노력했지만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2차 십자군 전쟁 초기에도 일단의 배교자(背敎者)들이 독일에 있는 수많은 유태인들을 죽였습니다. 그들의 학살은 성(聖) 베르나르도가 그들을 뒤쫓아 가서 중지시킬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이러한 빗나간 행동들은 십자군 운동에 대한 열정의 불행한 부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군 운동의 목적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현대적인 유비(類比)를 적용해 보자면,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부 미국 병사들이 해외에서 범죄를 저질렀던 경우를 예로 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들은 체포되어 범죄에 대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의 본래 목적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신6: 십자군은 어린이 십자군을 조직할 정도로 극도로 부패하고 타락했다.
1212년의 소위 "어린이 십자군"은 십자군도 어린이 군대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 10대들로 구성된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을 십자군이라 선언한 후 해안까지 행진했던 행사였습니다. 그것은 독일에서 대중적으로 일어난 종교적 열정의 분출이었습니다. 도정(道程)에서 그들은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고 심지어 산적이나 노상강도, 거지들마저 그들을 따라다녔습니다. 그 운동은 이탈리아에서 해산(解散)하였고 결국 지중해가 그들을 가로막아 서자 종료하게 되었습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이들을 가리켜 "십자군"이라 칭하지 않았습니다. 진정으로, 교황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집에 머물러 기도와 단식과 구호활동으로써 그를 도우라 거듭 촉구했습니다. 이 경우 교황은 먼 거리를 행진해 온 젊은이들의 열정을 칭찬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라 명했습니다.
미신7: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십자군에 대해 사과했다.
이는 뜻밖의 미신으로 보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그리스도인들이 정의를 거슬러 해악을 끼쳐온 모든 행위에 대해 용서를 청했을 당시, 교황은 십자군에 대해서 아무런 사과 언급도 없었다는 혹독한 비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요한 바오로 2세가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한데 대해 그리스인들에게 사과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역시 비슷한 유감(遺憾)을 표명했습니다. 그러한 약탈 사건 역시 인노첸시오 교황이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 방지해 보고자 했던 비극적인 사고였습니다.
미신8: 십자군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슬람은 서방세계를 미워할만한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이슬람 세계는 십자군과 더불어 서방세계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부정확하게 연관지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못 됩니다. 이슬람은 서구세계가 의지하고 있는 잘못된 역사기술로부터 십자군에 대한 정보를 얻습니다. 이슬람 세계는 그들이 굉장한 승전(勝戰)을 거둔 대상으로서 십자군을 기념하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서구의 저술가들은 현대 제국주의 인습(因襲)을 두고 고민한 나머지 십자군 전쟁을 선제 침략 약탈 전쟁으로, 그리고 이슬람을 묵묵이 고통받는 약자들로 개작(改作)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이슬람 승전의 영광된 세기(世紀)의 역사를 폐기시켜 버렸고, 그 대신 희생자들에 대한 위로(慰勞)만을 전해 줄 뿐이었습니다.
(Catholic Dossier, Volume 8, No. 1, January/February 2002)
토마스 F. 메든(Thomas F. Madden)은 세인트 루이스 대학교(예수회 설립) 사학과 교수입니다. 그는 『십자군의 약사(略史)』 A Concise History of the Crusades 의 저자이며 『제4차 십자군』 The Fourth Crusade의 공저자입니다.
첫댓글 어린이 십자군은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교황이 와 너님들 신앙심 좋은듯 하지만 돌아가는게 좋을듯 ㅇㅇ 이라고 보냈긴 했지만 알렉산드리아까지 배태워 준다는 말에 넘어거 노예태크를 탐..
그리고 십자군이 순수한 신앙심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볼수는 없눈게, 분명 자발적으로 영지 정리하고 참가한 사람도 있었다만 대부분은 중동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과 면죄부(...) 때문에 참가한거.
막장테크탔던 4차 십자군은 베네치아가 무슬림이랑 기독교 사이에 양다리 걸치면서 헝가리한테서 도시하나 뺏어달라고 요청함. 십자군들은 돈준다니까 냉큼 받아들여서 헝가리 약탈하고 비잔틴 제국 계승전쟁까지 용병으로 참전해서 하라는 성지회복은 안하고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함
이 외에도 지나가는 길에 유대인 학살이나 인육 파티라던가 팀킬같은 많은 병크가 있는데 작가가 정수를 쏙 빼놓은듯 ㅇㅇ
사실 이글에서 말하고 싶은것은 과거와 현재상황을 엮으려고 하다보니 현대인의 시각으로 십자군을 본다는 것이 문제라는 점이고. 오히려 십자군은 이슬람세력의 공세의 맞선 방어적인 성격의 공세라고 주장하고 있네요. 실제로 십자군의 참여한사람들의 동기는 신앙심이였고 부와 명예 재산은 참가한 인물마다 관점이 틀렸죠. 보두앵1세와 탕크레드 보에몽같은 사람들이야말로 그런사람들이였죠. 실제로 삼촌과 조카사이인 보에몽과 탕크레드는 십자군내내 불협화음을 일으켰고. 보두앵1세야 에데사먹고나서 탕크레드랑 투닥거린거 보면.
gelf/ 글의 주제를 완전히 놓치셨군요. 십자군 전쟁의 병크가 주제가 아니라, 그 병크가 당대에는 상당히 통상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다른 전쟁들보다 더 이미지가 나쁘냐, 그걸 묻는 것입니다.
중세시대의 세계관 시대상을 이해못하고 현대의 도덕적관점에서 볼려고 하니깐 문제였죠. 기실 십자군의 만행이라면 마라트 알 누만이 대표적이겠죠 .
파워 식인;
가는 곳마다 유대인을 학살하고 주민들을 약탈하던 군중십자군이 프로테스탄트 뒤의 십자군이었군요! 1096년도에 종교개혁이 있었는지는 몰랐는데...
본문에서는 이 행위를 단순히 '불행한 부산물'이라고 커버치고 있는데, 조지 부시가 중동을 조지고 부술 때 죽어가던 민간인들을 부수적 피해라고 말하던걸 연상시키는군요.
부수적인 피해 맞죠.
그 부수적인 피해가 뭔가 도덕적으로 방어할수 있다는것이 이 글의 주제가 아니라, 그런 부수적인 피해는 전근대사회에서 일어나던 전쟁의 일상중 하나였는데 어찌 십자군 전쟁에만 현대의 도덕적인 관념을 덮어씌워 비판을 하느냐가 이 글의 주제입니다. 실제로 십자군 전쟁이 현대 대중들에게 비해 다른 전쟁들보다 더 나쁜 인상을 주는것은 사실이잖아요? 한번 가만히 생각해보면 전혀 그럴만한 이유도 없는데 말이죠.
그렇다고 해도 유럽인의 학살행각을 최대한 축소하여 해석하는 저 글 자체는 역겹기 그지없습니다.
지나친 확대해석이 문제죠. 어째서 십자군 전쟁이 중세의 다른 팽창, 침략전쟁들보다 '더 심하게' 비난을 받아야 하는 걸까요. 심지어 전세계 인구의 10% 이상을 죽여버린 몽골의 팽창(중국에서 죽어나간 인구만 처도 4000만입니다.)도 십자군 전쟁보단 비난을 덜받는 이 기이한 현실이 정말 이상할 따름입니다.
어디부분을 축소했다는건지...
십자군이 중세의 다른 전쟁에 비해 딱히 비난 받을 일이 없다는 데에는 대체로 수긍하지만 저 글 자체는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모든 역사는 아무리 부정해도 결국 현대적으로 해석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십자군이 좀 더 심한건 사실이지만 현대인들은 중동과 미국간의 대립을 보기때문에 별 수 없죠.
뜬금없지만 위와 같은 자료는 어디서 구할 수 있을지요?
모 만화가식으로 제국주의적 침략전쟁논리로서 십자군을 바라볼수가 없는 근거가 있음에도 그렇게 바라보기위해 끼워맞추고 있는게 옳은걸까요;
아무리 현대인들이 그리본다한들요. 그리고 왜 굳이 십자군만 유독 저런 방식으로 접근하냔말이죠. 지금까지 무슬림들이 조로아스탄들을 모조리 박멸시키는걸 비난한 사람들을 본적이없음
그 모 작가는 너무 한거이긴 하죠.
그리고 냉정한 시각도 필요 하다는 것도 알고요.
하지만 어느정도의 편향성은 어쩔 수 없다는 겁니다. 최소한 일반인들 인식에는 십자군=나쁜 전쟁이 사라 질 수가 없는거죠. 저는 학문적 사실을 주장한게 아닙니다.
십자군 전쟁 자체는 분명 저 글 말대로 방어적 성격을 지닌 전쟁이었죠. 1차 십자군을 보면, 분명히 동로마제국이 콘스탄티노플 마저 위협받게 되자,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상황이 급박해 보이자, 당시 교황은 "이걸 기점으로 방어가 아닌 총 공격을 펼치자" 라며, 아예 성지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해 버립니다. 더이상 그냥 놔둿다간, 무슬림 광신도들이 유렵으로 들이닥칠게 뻔했기 때문이죠. - 무슬림이 카톨릭보다 더 광신도인건 사실이었죠. - 그렇기에, 십자군이 "종교 이름 걸고 선빵날린 침략전쟁" 이라는게 틀렸다는건 확실히 사실이죠. 확실히, 먼저 "이교도는 안돼" 라며 공격한건 무슬림 광신도들이니까요.
하지만, 십자군 전쟁이 날이 갈수록 종교라는 이름을 걸고 잘못된 길로 들어선건 사실이죠. 하라는 성지 탈환은 안하고 십자군이라는 타이틀을 단 상태로 다른델 침략하기도 했고, 하지 않아도 될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구요. 하지만, 전쟁중의 학살, 그러니까, 성을 함락하는 도중에 자행되는 학살이나, 함락한 성의 주민들을 학살한 건, 중세의 문화로 보면, 크게 잘못된 거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이교도라며 욕하는 상대를 그냥 두면 언제 봉기해서 역관광 당할지도 모르는데, 그들중에 광신도가 있을지도 모르는데(다 광신도 엿지만...) 그냥 뒀다가 다 죽어도 될까요? 중세의 논리는 그런 상황이면 다 죽이자..가 성립된다는거죠.
저 때 시점이 본격적인 동로마의 반격 시점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 때에는 이슬람이 수세였고 기독교측이 공세였습니다.
즉, 현대의 논리로 보면 십자군은 분명 잘못된 것이 맞지만, 당시의 문화나 논리를 따지고 보면, 그 당시의 입장에서는 크게 문제될 게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식으로 따지자면 '신대륙 정복' 이라고 하는 스페인 등의 학살은 십자군과는 보교도 안될 사악한 행위겠죠.
십자군이 더 문제제기를 받는건 종교의 이름을 걸고 자행한 일이라는 것 때문이고, 그 종교가 지금까지고 살아있기 때문에 그런거죠.
이 글의 요점은, "현대의 잣대로 판단하려 하기 때문에, 그 실제 문제보다 더 과장되어 평가받는게 문제다" 라는 게 아닐까요?
아마게돈//제가 역사학과도 아니고...자세한건 모르지만;;
당시 비잔틴이 수세였던건 맞습니다. 공세로 전환하던 시점이라는것도 맞구요. 하지만, 당시 비잔틴 힘만으로는 '확실한 승리'를 보장받기 어려운 상황이라는것도 사실입니다. 비잔틴제국이 결코 안정적인 상황은 아니엇으니까요.
근데 그렇게 중세적 입장으로만 제단 할 수 없는게 현실이라서요. 이미 중립적 입장이라는 것 자체가 현대적 관점인데요. 십자군이 좀 과장된 것은 사실이지만 현대이기 때문에 두고두고 씹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 합니다. 저 것이 없어질려면 아마 이슬람과 기독교의 대립이 사라져야 할듯.....
이쪽 주장만 따지면 까닥했다가 제국주의 서구의 침략 (19~20)을 미화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세 였던거 이제 탈환하러 간다!! 이런 식으로요.
당시 정세는 아니가 공격받은 1064년 이래로 가장 안정적인 상태였습니다;; 멍청한 조치라고 두고두고 욕은 먹었어도 미하일 7세가 어거지로 1078년에 셀축이 점령한 소아시아의 영토를 양도하였고 그 이후 소아시아가 거의 다 전몰되었지만 아미르 차카를 제외하고는 셀축이 해군이 전무하므로 콘스탄티누폴리를 노린다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반면 저쪽은 1071년부터 1096년 사이에 일어난 반란, 페체네그 족의 2차 침입을 분쇄하고 페체네그족을 흡수한데다 쿠만족도 막아내고 1095년부터는 다시 소아시아 내지로 출정을 시작하는 상황이니 안정적인 상황이 아니라고 하게 되면 이쪽 지방은 1150년대 이전에는 그냥 다 헬게이트가 됩니다.
무슬림이 카톨릭보다 광신도 였다는 말은 사실과 다릅니다. 무슬림이 불평등한 세금정책으로 개종을 유도하기는 했지만 이교도자체를 추악한 짐승만도 못한것으로 취급하지는 않았습니다 파문같은 사형판결은 안내렸다는거죠. 조로아스터교같은 경우 차별적인 정책과 멸시가 싫어서 타지역으로 이동하거나 경제적,정치적성공을 위해 개종한경우가 많았습니다. 오히려 권력과 결탁하여 세속화한 기독교가 교리를 앞세워 추악한 짓을 많이 했지요.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뺨을 맞을거같아 칼로 쳤다는 논리를 내세우는게 역설적이네요. 예수님이 오른쪽뺨 싸다구 맞으면 왼뺨도 대라하지 않았던가요.. 말로는 기독교인 그리스도인 하면서
왜 예수님의 가르침과 역행하는 언행을 일삼는걸까요. 역사적 사실을 대변하기보다는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느낌이 드네요
조로아스터들을 차별했다고요? 차별정도가 아닌데; 불교와 조로아스터 그리고 이슬람치하의 기독교도 초창기에나 관용관용했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교인수도 급감하고 유태인이랑 비슷한 취급받던게 중동의 기독교인들과 조로아스터교 야지디교 불교인데요? 종교적 광신성은 모든종교에있는데 말이죠
이교도한테 파문이 왜 사형판결인가요.
이교도라고 파문했다는 것이 아닐까요? 파문 당하면 당시 분위기상 사형...
4차 십자군은 강도떼임 그건 십자군이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