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한 51년 지 석 동
4.19 민주혁명은 내 열아홉 살 고2 때의 역사다. 3.15부정 선거로 세상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마산부두에서 최루탄 맞아죽은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떠올랐다. 이 끔찍한 모습이 신문에 보도가 되자 세상이 발칵 뒤집혔었다.
자유당을 둘러엎어야 산다는 소리가 사람모이는 곳이면 으레 나왔다. 라디오가 귀하던 때라 신문판매가 엄청나게 늘었다. 신문팔이 친구들이 재미를 봤다. 발생시간을 기다렸다가 신문벽보판 앞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기사 읽는 사람들로 길이 막혀 다니기 불편할 정도였다. 애어른 없이 정국에 관심이 많아 누군가 불만 붙이면 금방 터질 것 같았다.
그날은 아침부터 분이기가 이상했다. 전날 저녁 국회 앞에서 시위를 마치고 돌아가던 고대생들이 청계천4가를 지나다 깡패한테 테러 당 한일로 수군댔다. 학교서도 무슨 이야기가 도는지 귀가 근지러웠다. 그때 옆에 앉았던 친구가 우리도 나가서 시위에 합류해야 한다고 가방을 들고 야구장 담을 넘어갔다. 나도 궁둥이가 들썩거려 수업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언가 큰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시 한양공고와 서울운동야구장은 벽돌담이 경계였다. 경동고등학교의 백인천 선수나 인천 동삼고등학교의 오춘삼 선수가 뛰는 날은 수업을 까먹고 담을 넘어가는 학생이 많았었다. 그 담이 바로 우리 반 창이라 친구들이 넘어가는 날은 출석부를 때 대신 대답해주느라 땀을 흘리곤 했다.
그날 점심시간이 다 끊나 갈 즈음 우리도 시위에 합류하자고 여기저기서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때 담임선생님이 특유의 질긴 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나타나
"모두 집으로 가라. 다치지 말고!"
그 무서운 삼 년 전쟁에서도 살아남은 귀한 너희 아니냐.
"꼭 살아서 돌아오너라."
“지금 자유당정권을 무너트린다고 시내 모두가 야단이니 제발 조심해서 가라.”
“부모님 가슴에 못 박으면 안 돼!”
눈물로 당부하고 돌아선 선생님은 아우성치며 일어서는 우리를 보지 않고 보냈다.
학교 문을 나서 을지로6가에 갔을 때는 이미 차가 다니지 않았다. 걸어서 을지로 5가를 지날 때만 해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저 수많은 인파 속에 끼어 흘러갔다. 을지로4가 파출소를 들여다봤다. 텅 비었다. 기물은 부서지고 서류는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성난 시위대가 지나간 뒤였다. 이제야 어렴풋이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는 했지만, 무어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몰랐다. 을지로 그 큰 거리가 사람으로 꽉 막혀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교통비를 아껴 책을 사보느라 걸어 다닌 골목길로.
을지로와 청계천 사이 골목길을 돌아서 을지로 입구 치안국 앞으로 갔다. 사람들로 꽉 차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 많은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와와 함성 질러댔다. 그 틈에 끼어 한참 분위기를 살폈다. 아 지금 이 사람들이 치안국장을 만나 어젯밤에 고대생들을 폭행한 문제를 따지려나 부다 생각하고 와와 함성을 지르는 순간 탕 탕 탕 탕!
전쟁 속을 끌려다니며 수없이 들었던 소리지만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들어보기는 처음이었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아비규환을 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 건 전쟁이 끝난 지 불과 7년 만의 총소리였다. 참으로 순식간이었다. 총소리가 바로 이마 앞에서 나자 자동으로 땅바닥에 엎드렸다. 얼만가 지나 조용해지고 일어나 보니 그 많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나 도로가 텅 비었다. 휑하니 빈 도로에 주인 잃은 학생들의 모자 신발 가방 여자의 핸드백 힐··.
그 비참하고 황망한 모습에서 정신을 차리고 나를 보니 모자와 가방을 온전히 들고 혼자 서 있는 게 아닌가! 순간 겁이 났다.
다시 골목으로 들어서 삼각동을 건너 서린동으로 해서 시청 앞 광장에 갔다. 이미 누군가 시위를 막던 소방차에 불을 질러 하늘이 꺼멓게 타올랐다. 자동차 몇 대도 뒤집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덕수궁 담 밑에 있던 파출소 소장인 가는 자살을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국회 앞 서울신문사옥도 시커멓게 타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어깨동무하고 경무대로 간다고 몰려갔다. 젊은 인파가 꼬리를 물고 달렸다. 그 뒤를 따라 하얀 가운을 입은 의대생들이 들것을 들고 뒤따랐다. 머리에 띠를 두른 젊은이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트럭 가득가득 타고 광화문 쪽으로 달려가고 가고··. 한마디로 인파가 들끓었다!
경무대로 가는 군중의 뒤를 따라 불타는 서울신문 앞을 지나 세종로 사거리 국제극장 앞에서 돌아섰다. 총소리에 겁도 났지만 칠 남매를 키우시느라 야위어 가는 아버지어머니가 잡는 듯해 도도한 역사의 물결에서 발을 뺐다.
대한문 앞을 지나 긴 돌담을 끼고 가는 길은 역사의 물결에서 불과 몇 발짝 사인데 조용했다. 누군가 얌체라고 소리 지르는 것 같아 자꾸 뒤를 돌아다보며 걸었다. 이화여고를 지나 서대문 마루터기 전 문화방송 앞으로 해 동양극장자리를 지나 이기붕 국회의장 집을 지나다 들여다봤다. 조용했다. 이기붕의 집은 그 뒤 교수들이 가두행진을 하던 4월26일에 절단이 났다. 그날 젊은이들이 몰려가 든장질을 했다. 당시 사월로는 상상도 못하던 수박이 엄청 나왔고. 보도듣도 못한 냉장고에 열대과일이 꽉 차있었고. 꿀도 대독으로 하나에 쌀이며 밀가루도 상당히 쌓여 있었단다. 이걸 모두 의거하다 총 맞은 학생들이 입원해있던 적십자병원으로 날라다 주었다는 말을 참가했던 동생에게서 들었다.
해 어둑해서 서대문 천연동 변두리 우리 집에 들어섰다. 온종일 맏자식을 기다리느라 입술 타던 아버지어머니가 뛰쳐나오며 살아왔구나! 반기셔 그 품에 안겼다. 그 날밤 봄비가 추적추적 내려 젊은 영혼을 슬퍼했다.
같은 시대를 살은 많은 젊은이가 불의에 분연히 일어서 용감하게 몸을 던졌었다. 그들이 서슴없이 던진 몸이 거름이 돼 오늘의 민주와 번영을 이루었다. 그 뜨겁던 현장에 있었으면서도 대열에서 벗어나 골목을 택했던 내가 오십 년을 미웠다. 가끔 수유리에 가면 용감한 횃불이었던 영웅들에게 미안하다고 눈을 적신다.
첫댓글 저희 세대는 어리던 시기라 아무것도 모르고 엄마품에서 놀고 있었던 나이지만 지금도 선배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두주먹을 움켜쥔다,
지선생님은 연세가 높으시군요, 그런데도 글을 읽으면 마치 젊은 세대가 쓴 듯한 느낌을 많이 가졌답니다,
참 글을 잘 쓰십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송 강 님 안녕하세요.
해마다 이때가 되면
그날이 떠올라
산화한 영웅들에게 미안하답니다.
오래전 이지만 그들이 있어
우리가 오늘을 누리지 않나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은 많은 젊은이가 불의에 분연히 일어서 용감하게 몸을 던졌었다. 그들이 서슴없이 던진 몸이 거름이 돼 오늘의 민주와 번영을 이루었다.
같은 시대를 살은 많은 젊은이가 불의에 분연히 일어서 용감하게 몸을 던졌었다.
그들이 서슴없이 던진 몸이 거름이 돼 오늘의 민주와 번영을 이루었다.
그 뜨겁던 현장에 있었으면서도 대열에서 벗어나 골목을 택했던 내가 오십 년을 미웠다.
가끔 수유리에 가면 용감한 횃불이었던 영웅들에게 미안하다고 눈을 적신다.
선생님 잘 읽고갑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마치 그날의 현장에 있는듯 박진감 넘치는 글 잘 읽었습니다.
몸소 겪으신 일이긴 하지만 대단한 기억력이십니다.
이제는 편안하셨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군요.
마음 아프고 긴 여운이 남는 좋은글 고맙습니다.
4.19현장에 있던 선생님으로서는 4월이 되면 잊지 못할 추억이겠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역사속에 계셨던 선생님이시군요. 어릴적 일이이어서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만, 비겁했다고 말하기엔 너무나 참혹했던 현장이 아니었을까요.
이제 많은 세월이 흘렀으니 마음 편히 계셔도 좋을듯 싶네요. 감상 잘 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어느나라든지 피해가지 못하는 아픔들입니다.
이념과 갈등사이에서 고뇌하는 지식인들의 의연한 행동과 희생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어 감사합니다.
누구나 다 독립투사가 되지는 않듯이 누구나 다 민주화를 위해 아까운 생명을 데모하는데 던지지는 않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성실히 일하는 것도, 학생신분으로 열심히 공부 하는 것도 애국이고 각자 할일이라 생각합니다.
정치는 정치꾼들에게 맡기고, 과학은 과학자에게, 그리고 우리는 문학을 통하여 주변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합니다.
해서...선생님의 지나온 51년은 좋은글 쓰시는걸보니 보람있고 좋은 삶이셨습니다. 감상 잘 하고 갑니다.
허허석 선생님
바로 저와 같은 세대시네요. ㅎㅎ
전 그때 이곳에 유일한 남녀 공학이던 고교에서 3학년이었지요
5월5일 예술제에 참가할 남학생 독창 반주를 맡아서 대학교 강당에서 피아노 연습을하고
학교에 내려와보니 모든 고교생들이 시내로 데모하러 나가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만 빠진셈이였어요.
그날밤 늦게야 우리 친구들이 경찰서에서 풀려났다는 소식을 들었답니다. 그때 생각이 절로 나는 글 감상 잘
하였습니다. 좋은 주말 맞이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