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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열린아동문학 원문보기 글쓴이: 하빈
<열린아동문학> 2013 봄호 감상노트
지난 가을호와 겨울호에서는 <컨닝페이퍼>라는 이름으로 작가의 프로필이나 작품들에 관한 메모 형식의 글을 썼습니다만 이번호에서는 <감상 노트> 형식으로 써 볼까합니다.
일찍 T. S. 엘리엇은 '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고 했습니다. 어떤 정의도 시의 한 면을 말할 수 있을 뿐 전체를 말하지 못한다는 뜻이겠지요. 또한 시 감상이나 해석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정답은 없다는 얘기지요. 시의 해석을 두고 객관식 문항을 만들어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가르치는 교육 현실은 참 안타깝습니다.
문학작품, 특히 시 작품은 읽는 사람마다 다른 해석, 즉 여러 갈래의 감흥을 유발할 수 있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 했습니다. 하여 아래의 제 글은 그 한 갈래에 지나 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글을 배우는 사람의 입장에서의 지극히 주관적인 피력이오니 행여 외람된 부분이 있더라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쓰는 또 다른 이유는 이 글을 쓰기 위해 대상 작품을 좀 더 심도 있게 들여다 볼 수 있어 시 공부에도 크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동시나무의 숲
김개미 - <붉으락푸르락하는 고양이> <그 애와 우리와 선생님>
붉으락푸르락하는 고양이
욕심쟁이 고양이 머독이 어느 날
생쥐를 한 마리를 잡았어
머독은 침을 흘리며 말했지
“아니야, 아니야. 아직은 아니야.
눈도 못 뜬 쬐그만 생쥐를 잡아먹었다는 소문이라도 난다면
위대한 고양이 머독님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어?“
머독은 생쥐를 양파망에 가둬두고
먹이를 주기로 결정 했어
쥐구멍도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커다랗게 자라면
그때 잡아먹을 생각이었지
날이 가고, 날이 가고, 또 날이 가고
마침내 생쥐가 커다랗게 자라났어
쥐구멍은커녕 개구멍도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야
그러니 얼마나 윤기가 흘렀겠어.
“그래, 실컷 먹어라!
최후의 만찬이 될 테니.
날이 밝으면 넌 이 머독님의
아침식사가 되는 거야.
어때? 영광스럽지 않아?“
머독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잠이 들었지
그런데 다음 날, 항상 다음 날이 문제지
머독은 붉으락푸르락해서
자기 머리를 마구 때렸어
아침식사감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렸으니
왜 안 그랬겠어
머독은 치명적인 실수를 한 거지
통통하게 살이 찐 생쥐를 보느라
이빨이 면도날 같이 날카로운 생쥐를
미처 보지 못한 거야
그러니 누굴 탓하겠어
그 애와 우리와 선생님
우리 반에는
다리를 덜덜 떠는 애가 있다.
그러지 말라고 하면
이빨로 쉑쉑,
이상한 소리를 낸다
제발 좀 그러지 말라고 하면
주먹으로 벽을 때린다
어떤 때는
별 다른 이유도 없이
자기 머리를 막 때리고
또 어떤 때는
연필로 정수리를 찔러서
피가 나온다
그 애를 이해하고 싶지만,
그게 쉽지 않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도 모르겠고
같이 놀 때 그럴까 봐
같이 놀지도 못했다
우리보고만
그 애랑 놀라 그러지 말고
선생님이 좀
그 애랑 놀면 안 되나?
다분히 형식면에선 개성적이고 내용면에선 시사적이다.
제목부터가 보통의 경우보다 길다. 본문도 길어서 두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이게 동화야? 꽁트야? 산문이야? 시에 대한 고전적 정의의 잣대로 따진다면 다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내용면에선 훌륭한 후경을 마련해 두고 있다. 아이들이 읽는 <동시>니까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는 그 <재미>에 집착하다 가벼움에 머물러버리는 경우를 흔히 본다. 이 두 작품은 재미와 더불어 자기성찰 또는 세태에 대한 풍자가 날카롭다. ‘그러니 누굴 탓하겠어’라는 자탄 속엔 어쩌면 머독은 결과를 알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것을 전제로 한다면 독자로 하여금 휴머니티에까지 이르게 한다.
무미건조한 사회는 불완전 인격자를 만든다. 작품 속의 아이는 쎄미싸이코에 속한다. 사랑의 결핍이 만든 성격이다. 친구들이, 선생님이, 이웃이, 이 사회가 감싸 안아야할 아이다.
<붉으락...>의 2행, ‘생쥐를 한 마리를 잡았어’에서 왜 ‘생쥐 한 마리를 잡았어’라고 하지 않았는지가 궁금하다. <그 애와...>는 묘사가 아주 디테일하다.
김규학 - <지네> <카멜레온>
지네
발이
하도 많아
돌부리에
걸려도
고꾸라지지는 않겠다.
맨발로 다니기에
망정이지
신발을 신고 다닌다면 아마
찾는데도
몇 시간이 걸리겠다.
카멜레온
느려 터졌다고
그래서
속이 터진다고?
지금 난
기다리는 중이야!
살갖으로
물감이 배 나올 때까지
다음엔 또
무슨 색을 탈까
생각도 해야 하고
난, 걸어 다니는
물감 통이거든......
시인은 동물보다 식물지향적이 보통이다. 아마 시인의 본질이 정적이고 미학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의 소재를 보더라도 동물보다는 식물이 단연 우세하다.
그런데 김규학의 2편의 시는 모두 동물, 그 중에서도 작은 생물체 곤충과 파충류다. 의도 되었는지 우연인지는 몰라도 소재의 변별력은 확보한 샘이다. 또 한 가지, 김규학의 작품은 내용과 구성이 명료하다. 내용면에선 얘기 하고자 하는 것을 원 포인트로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구성면에서도 행의 길이나 연의 배치가 변화 있게 구성되어 지루하지 않고 산뜻하디.
그러나 ‘지네-신발’은 좀 진부한 발상이다. 그런데 ‘찾는데 몇 시간’에서 그 진부를 바로 만회했다. <카멜레온>에서는 카멜레온의 특성인 느림과 변색을 묘하게 결부시키면서 통쾌하게 독자의 의표를 찔렀다. ‘난 걸어 다니는 물감통 이거든...’
김규학 작가는 ‘다음엔 또/무슨’ 작품을 들고 나올까? 기대만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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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목 - <비밀> <빈자리>
비밀
할아버지와 기차를 타고 고향 의성에 갑니다.
대구에서 의성까지 가려면 한참을 가야합니다.
털그렁 털그렁 느릿느릿 서다 가다 서다 가다
바깥 구경을 하며 가다가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할아버지만 믿고 깜빡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할아버지도 졸고 계셨습니다.
덜커덩 기차가 멎었을 때,
바깥을 쳐다보니 안동이었습니다.
나는 할아버지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할아버지 안동이에요!
-뭐라고? 안동이야? 지나왔구먼!
우리는 낭패한 얼굴로 얼른 내렸습니다.
깜빡 졸다가 의성을 지나쳤다가
도로 내려왔으니 기가 막혔습니다.
할아버지는 나이 많아서 그렇고
나는 어려서 그렇고.
어쨌든 그날 일은
할아버지와 나만의 비밀이었습니다.
빈자리
버스를 탔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나는 키가 작아 의자 등받이를 잡고 섰다.
그때 할아버지 한 분이 올라오셨다.
한 젊은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할아버지! 앉으세요.
-괜찮아요! 그냥 앉아 가요.
기어이 앉지 않으셨다.
젊은 남자도 앉지 않고
할아버지도 앉지 않고.
할 수 없이 내가 앉았다.
두 편 다 감칠맛이 나는 작품이다. 또한 어깨에 힘 빼고 쓴 작품이다.
입가에 슬며시 번지는 미소, 그것은 공감 할 때의 현상이다. 작품에서 맛을 느꼈다는 얘기다. 쉬운듯하면서도 결코 쉽지 않은 것이 쉽게 읽히면서도 뒷맛까지 확보하는 것이다.
시 창작교실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사람들은 자꾸만 시를 어렵게 쓰려고만 한다. 그것은 경지에 이러지 못했다는 증거다.” 라고 했다.
‘인간관계가 더욱 돈독해지려면 비밀을 공유하라.’ ‘어부지리’ 나의 옅은 지식의 한계에서는 겨우 이런 구절과 접목 된다. 그러나 이런 연상만가지고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김현숙 - <화분> <알람>
화분
누구의 손길도 닫지 않는
마당 구석 빈 화분에
민들레꽃 피었다
햇빗도 들지 않는데
작은 화분은
꽃씨를 받았나 보다
빈 화분이 꽃씨를
민들레꽃이 화분을
살려 놓았다
나풀나풀
나비 한 마리
봄 햇살 이끌고 날아온다.
알람
엄마가
깨우지 않았는데
스르르 일어났다
음,
봄 냄새
쑥국이
오늘 아침
우리 집 알람
<화분>에서는 시각장애인이 지체장애인을 업고 가는 장면이 떠오른다. 한 사람은 눈이 되고 또 한사람은 다리가 되어 불완전을 극복하는 것이다. 서로를 보듬어 주는데서 온기가 생기고 그 온기는 세상을 따뜻하게 한다. 참 예쁘고 따뜻한 시편이다. 다만 ‘햇볕도 들지 않는데’에서는 음지다. 그런데 ‘나비가 봄 햇살을 이끌고 온다’에서는 양지의 가능성을 보여주어 (‘봄 햇살을 끌고 와 주었으면’하는 희망 사항이면 몰라도) 합리성이 부족해 보인다. 이 것은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3연까지만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아니면 4연을 ‘나풀나풀/햇살을/곡선으로 끌고 오는 나비’ 이렇게 나비의 행로처럼 곡선으로 와서 햇볕 들지 않는 곳을 비춰 주었으면 하고 소망하는 마음을 담으면 어떨까 하고 혼자 쓸데없는 생각도 해 본다.
쑥국과 알람은 참 거리가 멀다. 그 먼 거리를 무리 없이 연결시켜 놓았다. ‘낮설게 보기’의 성공적인 예라 하겠다.
박승배 - <거울>
거울
웃으면
같이 웃고
손 내밀면
따라 손 내 밀고
다가서면
먼저 다가오고
물러서면
멈칫 물러나는 거울
화난 친구에겐
냉큼 웃어주고
다툰 친구에게
먼저 손 내밀어보고
멀어진 친구에겐
앞서 다가서보렴
거울의 속성에서 반란을 꿈꾼다. 그 반란은 선의의 반란이다. 참 많이 쓰이는 소재에다 3연까지는 너무 상투적 전개여서 ‘뭐야?’ 하다가 4연부터 반전이다. 거울에게 속성에 반하는 주문을 하면서 자기반성을 투영한다. 쉬운 듯 하면서도 쉽지 않은 착상이다. 단지 주체가 거울인지 화자인지가 좀 아리송하다.
박일 - <하늘 아파트> <꼭두각시 춤>
하늘 아파트
바다 가까이
더 가까이
쑥 -
쑤욱 -
뒤에 선 아파트
옆에 선 아파트
코가 납작해지도록
팍팍
누르면서
- 바다는 내 차지.
나는 바다의 왕자닷!
이제는
- 구름까지.
하늘까지 치솟는 거야.
쓩 -
쓔웅 -
부산사람이면 너무나 공감 가는 얘기다. 해변을 끼고 어머어마한 마천루들이 다투어 솟는다. 5층에서 12층으로, 다시 24층으로, 다음엔 50층, 지금은 84층까지 솟았다. 언젠가 구름 위까지 올라갈지 모른다. 죽으면 자연스레 올라 갈 텐데… 환경, 경관, 스카이라인, 조망권, 일조권, 미관적 조화 따위는 부산에서는 무시되는 단어일 뿐이다. 그 안타까움을 아이들의 놀이에 빗대어 속도감 있는 동시로 빚어놓았다.
사회적 부조리를 힘 하나 들이지 않고, 큰소리 한 번 지르지 않고도 날카롭게 풍자하는 이 통쾌함. 이것이 바로 시의 힘이고 이것을 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시인이다. 누가 감히 동시를 낮추어 보는가?
꼭두각시 춤
1학년 아이들이
춤을 춥니다.
운동장이
꽃밭이 되었습니다.
꽃들이
방실방실 웃어줍니다.
오월 햇살도
반짝반짝
구경합니다.
사진사들이 몰려와
꽃사진 찍느라
야단났습니다.
한편의 시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가 너무나 선명하다. 우리 전통 춤 중에 <꼭두각시 춤>이란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또한 자랑스러운지 모르겠다. 세상 어디에 이렇게 앙증맞고 귀여운, 어린이의 정체성과 이토록 잘 어울리는 춤이 또 어디 있던가. 꽃보다 더 이쁜 아이들의, 꽃보다 더 고운 몸짓을 오래 간직하고자 엄마, 아빠, 언니, 오빠 모두의 렌즈는 바쁘다. 이런 장면을 투명한 시어로 풀어내어 독자에게 더할 수 없는 청량감을 안겨주는 시 이다.
박종현 - <꼭 해야지> <올라가고 내려오고>
꼭 해야지
할아버지를 즐겁게 하는 인사.
내일은 꼭 해야지.
친구를 즐겁게 하는 칭찬.
내일은 꼭 해야지.
동생을 즐겁게 하는 웃음.
내일은 꼭 해야지.
잠이 들기 전 또 꼽아보는
손가락 다짐 세 개.
행의 배열도 편하고 시어도 편하고 길이도 짧고 명료해서 아이들이 읽기에 참 안성마춤인 시다. 그렇게 편안하게 읽는 사이 아이들이, 아니 사람들이 가져야할 덕목들을 은연중 기억 속에 스며들게 만든다.
올라가고 내려오고
봄은 해마다 꽃소식 한아름 안고
종종걸음으로
북으로, 북으로 올라가고.
가을은 해마다 단풍소식 한아름 안고
종종걸음으로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고․․․․․․.
올해는 내가 먼저야.
아니, 내가 먼저야.
한 번쯤은 서로 먼저 가겠다고 다툴 만도 한데.
한결같이
봄 되면 변함없이 또 올라가고,
가을 되면 변함없이 또 내려오는․․․․․․.
시소처럼 언제나 정다운
우리나라 봄꽃 소식,
우리나라 단풍 소식.
참 그렀네. 꽃과 단풍이 서로 가겠다고, 아니 봄과 가을이 서로 앞서겠다고 자리다툼 하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그 혼란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정직한 자연의 질서가 고맙고 경이롭다. 그 고마운 자연현상을 잊고 지내는, 아니 의식초차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넌지시 그 은혜로움을 환기 시키는 작품이다.
반인자 - <돌아오시는 길>
돌아오시는 길
땅 위 자동차 길
꼬부랑 길
골목 길
학교 길
하늘밑 구름 길
바람 부는 길
비행기 길
새들의 길
진달래 지던 봄날
낮선 꼬부랑 길로
할머니 돌아가셨다.
수업 끝나면
나는 다시
집으로 휑하니 돌아오듯
지팡이 짚고 쉬엄쉬엄
할머니 다시
집으로 돌아오시면 안 될까?
이 작품에서 동시의 넓고 깊은 지평을 본다.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부재. 거기서 시작되는 철학적 명제 Motal과 맞닥트린다. 왜 사람은 죽어야 하나. 정말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것일까. 아이는 벌써 깨달은 것이다. 알면서도 자신이 학교에서 돌아오듯 할머니도 돌아오기를 바라는 간절함에 가슴이 찡해온다. 어떤 문학작품이 이렇게 짧은 언어의 구성으로 이런 큰 감동을 줄 수 있는가!
단지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 내지 부재에 따른 안타까움이 더 선명해 지려면 위 두 연은 없는 것이 났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3연부터 읽어보면 그 간절함의 집중도가 훨씬 커짐을 느낄 수가 있다.
송선미 - <나만의 세상 - 잠수> <내 친구 밋남흥>
나만의 세상
볼 수는 있지만 들을 순 없어
숨 쉴 수 없어서 고요한 세상
걸을 순 있지만 뛰지는 못해
여기선 모든 게 아주 느리지
두 팔을 내려 놓고 몸을 맡겨 봐
땅을 잊은 두 다리는
조금씩 둥둥
물살에도 결이 있어
그 틈을 따라
두 다리도 덩달아서
그래 그렇게
함께여도 혼자가 될 수 있는
여기
2분 30초
나만의 세상
소재가 아주 독특하다. 잠수를 한 경험을 시로 써 내는 작가정신은 세상의 어떤 것, 어떤 경험도 시의 소재가 될 수 있음을 일깨운다.
나는 잠수 해 본 경험이 없어서 미루어 생각 할 뿐이다. 둘째 줄, 고요함 속에서도 바다생물은 모두 숨 쉬고 산다. 당연히 화자도 숨은 쉰다. 다만 멈추었을 뿐이다. 그렇게 볼 때 ‘숨 쉴 수 없어서 고요한 세상’은 자칫 죽음을 연상 시킨다는 오해를 일으킬 수도 있겠다. 지나친 억측일지는 몰라도.
오히려 둘째 줄을 빼 버리니까 흐름이 자연스럽고 매끄럽다. 아니면 ‘멈춘 숨 속의 고요한 세상’으로 하면 합리적 연결은 확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내 친구 밋남흥-라오스에서
왓쯔 유어 네임?
마이 네임 이즈 선미. 왓쯔 유어 네임?
마이 네임 이즈 밋남흥
하니까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서 둘이서
손잡고 걸었다
마주보며 웃으며
함께 걸었다
땀 찬 손 얼른 닦고 손 바꿔 잡으며
우리 둘이 손잡고
함께 걸었다
와우! 박수를 보내고픈 작품이다. 국제화 시대 또는 다문화에 관련된 많은 작품을 보았고 나도 두어편의 관련 작품이 있지만 대다수가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다. 이렇게 담백한 작품은 처음이다. 수식어도 없고 비유도 없다. 그러나 그 행간에는 얼마나 우아한 설득을 숨겨 놓았는가!
여기엔 딱 두 개의 시추에이션이 있다. 서로 이름을 물어보는 장면, 손잡고 걷는 장면. 그런데 담백한 이 두 장면이 다문화 현상에 직면한 현실과 해결책을 한꺼번에 제시하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안오일 - <나비> <이상한 평수>
나비
거미줄에 걸린
나비 한 마리
벌버둥 치던 흔적일까
날개 한쪽이 찢겨졌다
거미줄을 조심히 걷어내자
파닥,
천천히 날갯짓을 시도하다
이내 팔랑 날아간다
꿈틀꿐틀
벗어나려 죽을힘 다한
저 나비는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상한 평수
아빠가 힘들어져서
이사를 했다
40평에서 단간방으로
아빠는 서재에서
엄마는 안방에서
나는 내 방에서
늘 혼자였는데
이제 한 방에서
다함께 지낸다
평수는 줄었는데
집은 확 넓어졌다
두 작품 다 결구가 의미심장하다. ‘저 나비는/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평수는 줄었는데/집은 확 넓어졌다.’
두 작품 다 문명비판적이다. 거대한 문명의 메커니즘 속에서 자꾸만 작아지는 인간을 본다. 문명의 혜택을 받아 생활이 윤택해 질수록 왜 인간관계는 피폐해질까. 현대문명사회가 안고 있는 오류를 작가들은 이렇게 문제제기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각자의 방이 있는 큰 집에 살아서, 각자 소유하고 있는 컴퓨터나 휴대폰 때문에 가족의 대화가 단절 되어 공동체의 미덕이 상처 받는다고 해서 20세기나 19세기로 돌아 갈 수는 없다. 그래서 생각이 많은 작가들은 답답한 것이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거미줄은 많아진다. 우리는 어쩌면 그 거미줄에 결려 파닥거리는 한 마리 나비일지 모른다. 설사 그렇더라도 상처가 두려워 죽을 때만 기다리는 나비는 되지 말자고 말한다. 거미줄을 걷어내 주는 최소한의 사회안전장치가 있었으면 좋겠다.
편리하고 윤택한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이며 찾아야할 것은 무엇인지를 ‘확’ 내보인다.
엄기원 - <글과 글자> <우리 옆집>
글과 글자
‘글’은 한 자
‘글자’는 두 자
그런데
참 이상하지?
글자가
수백 개. 수천 개 모여야
글이 되다니․․․․․․.
한 자밖에 안 되는
글의 힘
참 세군!
엄마는 앉아서 오줌 누니까 똥도 앉아서 누지, 아빠는 서서 오줌 누니까 똥도 서서 눠야지 왜 앉아서 뇨? 하고 엉뚱한 질문을 하면 어른들은 얘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하겠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질문도 아이 입장에서는 당연한 질문이 된다. 이러한 호기심이 동시의 원천이다. 아무도 의문을 갖지 않는 당연한 것에도 의문을 가지는 것. 또는 뒤집어 보는 것.
평소 무심히 보아 넘기는 것을 소재로 삼아 멋진 시를 길어 올릴 때. <글과 글자>도 무심히 보아 넘길 사안에 아이 같은 의문을 재기하여 멋진 시를 길어 올린 수작이다.
우리 옆집
할아버지 할머니만 사는
우리 옆집
겨울이면 너무 조용하다
눈이 와도 걱정
바람 불어도 걱정
할아버지 할머니는
추워서 밖으로 못나오신다
너무 조용해
이따금 궁금해 진다
혹시 편찮으시진 않은가?
아들도 있고 딸도 있고
손자도 있는데
명절 때만 자가용 타고 왔다가
금방 가 버린다
내가 대신
손자 노릇하고 싶다
할아버지 할머니만 사는
우리 옆집
요즘은 할아버지 할머니만 사는 ‘우리 옆집’이 너무 많다. 아마 이 글을 쓰신 엄기원 선생님도 ‘우리 옆집’에 속할 것이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우리 옆집’이다.
시골도 그렇지만 도시도 그렇다. 대가족 형태가 무너저 버린 요즘이 노부모는 모두 ‘우리 옆집’이다. 이 글의 화자인 아이가 있는 ‘옆집’은 그래도 다행인 편이다. 아이가 사라진 동네. 이것이 우리 시골 풍경이다. 귀농이 점차 늘고 다문화 가정의 확대로 그나마 앞날을 기약 할 수 있어 다행이다.
오승강 - <엄마의 꾸중>
엄마의 꾸중
그것도 모르느냐고
엄마에게 꾸중 들었다
바쁘다고 학교 담장을 넘어다니면 될까요
묻는 문제
급히 할머니 집 가야 된다며
지난 주 담장 밖에서
소리치던 엄마
교문으로 돌아나가려던 내게
바쁠 때는
담장을 넘어도 된다던 엄마
엄마말 생각나 된다고 썼다가
그것도 모르느냐고
바보 아니냐고
엄마 꾸중 들었다
정말 바보처럼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내 마음에 그어진
빨간 줄 하나
부모들이 흔히 저지르는 오류다. 자녀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관성이다. 그때그때 편의에 따라 옳고 그름의 정의가 바뀌면 아이들은 가치관의 혼란을 겪는다.
이 시는 융통성을 빌미로 원칙을 무시하는 행위는 아이들에게 혼란을 넘어 상처를 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조하연 - <가출> <만능사다리>
가출
엄마랑 싸우고 집을 나와
지하철을 탔다
의자에 앉은 한 아주머니
잠든 딸을 안고 있다
엄마와 딸이
X자로 겹쳐 있다
가슴은 겹쳐 있으나
손, 발은 반대로 향한 X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길을 걷도 싶어도
가슴이 꼭 붙어 있어
그러지 못하는 X
그래서일까?
내 발이 멀어질수록
가슴이 자꾸 엄마 쪽으로 당겨져
겨우 세 정거장 가다가
내리고 말았다
만능 사다리
눕히면
기찻길
세우면
사다리
시골 계신 할머니
보고 싶을 때
눕히면 되고
하늘나라에 계신 할아버지
보고 싶을 땐
세우면 되고
작가의 상상력은 참 기발하다. 엄마 품에 비스듬히 엇갈려 안겨 있는 엄마와 아이의 모양에서 X자를 발견 한다. X자 모양의 속성은 사방으로의 진출 또는 분산이다. 네 개의 가지가 아무리 뻗어나가도 진출 또는 분산은 될지언정 분리는 되지 않는다. 영원히 분리되지 않는 가족이라는 인과관계를 X의 축으로 본 것이다. X의 본질을 알아 낸 화자는 결국 가출을 포기하고 축으로 돌아간다.
X의 양 축을 지하철 안의 엄마와 딸로 설정하여 화자의 현재 처한 사항과 비교 대비 시키고 또 그 모양새를 X로 해석한 구도는 치밀하다. 그 치밀성이 만들어 낸 귀착점은 사랑, 화해이다.
작가는 가족애를 얘기 하면서도 ‘사랑’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X자 또는 사다리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빌려 살뜰한 가족애를 보여 준다. 관념적 언어를 쓰지 않고 이미지로 보여 주는 것. 이것은 현대 詩作의 ABC이다. 작가는 그 전제를 충실히 보여 주고 있다.
한상순 - <동박새 차지> <텃세네 공중목욕탕>
동박새 차지
나비 그림자 하나 없는
한 겨울
동백꽃 꽃가루
동박새가 나르네
동백 열매 잘 열어라
동박새 물어 나르네
동백꽃은 고마워
숨겨 놓은 꿀단지 내 놓았네
배고픈 동박새에게
통째로 열어 놓았네
동백꽃 꿀단지
겨우네 동박새 차지
이 작품은 복합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 수분(꽃가루받이)으로 인해 열매를 맺는다는 자연 원리, 서로 도우며 사는 아름다운 사회성, 추운 겨울에도 자연은 살아 움직인다는 것 등.
담백한 시어와 깔끔한 구성이 돋보인다.
텃새네 공중목욕탕
숲속
작은 웅덩이
뱁새네
씻고 가고 멧새네
씻고 가고 박새네
씻고 가고
곤줄박이랑
직박구리네 씻고 가고
손님 다 가고
파란 하늘 내려와
구름 때 벗기고 있네
분위기는 목가적이고 발상은 산뜻하다. 새들 지저귀는 숲속, 파란하늘을 담고 있는 고요한 웅덩이. 연상만 해도 가슴 속으로 맑은 바람이 지나간다. 그 풍경 속에 이야기를 담는다. 숲속의 새들, 요놈들이 언제 봐도 깨끗하다 했더니 아하! 숲속 공중목욕탕에 매일 씻어서 그렇구나. 새들도 가고 바람도 자고, 잔잔한 노천목욕탕에 마지막 손님 찾아온다. 구름은 파란하늘의 얼룩일까, 때일까. 구름은 흘러가고 파란하늘만 남았다. 구름때를 벗긴 것이다. 웅덩이 목욕탕에서. 시인은 못 말려.
작품들을 쭉 읽어가면서 <열린아동문학>은 ‘이름보다 작품을 우선하여 싣는 잡지’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이 모토에 충실하려는 모습을 역력하게 느낀다. 작품들이 하나 같이 반짝거리는 구슬과 옥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의 어줍은 감상의 변 중에 사리에 맞지 않거나 시건방진 언급이 있었다면 천지분간도 못하는 어리석은 후배의 객기라 여기시고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