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9:41-42 두 사람은 예수님의 시신을 아무도 장사지내지 않은 새 무덤에 서둘러 장사를 지냈다. 그 날은 유월절 축제가 시작되는 안식일 바로 전날 준비하는 날이었기 때문에 더 좋은 곳에 모시지 못하고 서둘러 그 무덤에 장사를 지낸 것이다.
이전 말씀에서 자신들의 명예 때문에 숨어서 예수를 따르던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의 죽음이 예언의 성취라는 것을 깨닫고 빌라도의 시체를 달라 하여 왕에 걸맞는 향료를 드리며 예수님의 장례식이 왕의 장례식으로 성대하게 치뤘다. 이어지는 말씀은 두 사람이 새 무덤에 예수님을 모셨다는 내용이다.
41절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곳에 동산이 있었는데 그 동산에는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하나 있었다” 라고 했다. 마태 마가 누가 모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가져다가 새 무덤에 장사지냈다고 했기 때문에 이 무덤의 주인은 요셉일 것이다. 마태복음 27:60절은 “자기의 새 무덤” 이라고 했기 때문에 거의 확실하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바위 속에 판 무덤이라고 했다. 부자들은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어 무덤으로 사용했다. 요셉은 자신과 자신의 자손들을 위해 새로운 무덤을 준비해 놓았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바위는 대부분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암석들이라서 바위를 뚫는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요단강 서편 지역은 대부분 석회암으로 되어있어 한국의 화강암보다는 파기가 수월하다. 하지만 다이너마이트나 다른 현대식 중장비가 없던 고대인들이 바위를 뚫는다는 것은 엄청난 인력이 필요한 일이다. 큰 부자들이 아니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요셉은 자신과 가족을 위해 많은 돈을 들여 새로 준비해 놓은 무덤을 예수님을 장사 지내는데 내 놓은 것이다.
율법에 따라 처형된 자들은 가족들 조차도 자신들의 묘지에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처형된 자는 더구나 절대로 가족의 묘지에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을 위해 많은 돈을 들여 새로 만든 무덤을 가족도 아닌 예수를 장사 지내기 위해 내 놓은 것이다. 이는 단순히 자비를 베푼 차원이 아니다. 만약 예수가 정말 죄인이고 하나님을 모독한 자라면 가족 모두가 대대로 저주를 받을 것으로 믿던 당시 사회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는 정말 대단한 헌신이다. 요셉은 예수가 진짜 왕이라는 것을 확신 했기에 니고데모와 연합하고 빌라도의 후원을 받아 유대인의 왕의 장례식을 명예롭게 분비한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요한은 새 무덤이라는 말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이라는 말까지 덧붙여 놓았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무덤은 가족이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가치있는 재산이었다. 한 사람이 장사되면 그 살이 다 썩을 때까지 두었다가 나중에는 뼈만 추려 작은 상자에 넣어 무덤의 다른 장소에 보관했던 것이다. 빈 무덤이라고만 한다면 과거에 이미 시체를 두었다가 뼈만 추려 옮겨놓은 무덤도 포함이 된다. 그렇기에 새 무덤이라고 한 뒤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다는 말을 덧붙인 것이다.
사실 새무덤이라고 하면 한번도 사용한 일이 없는 무덤이라는 뜻이다. 구태여 거기에 한마디 덧붙인 것은 특별히 강조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당시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었다. 너무나 많은 증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인들이 슬픔에 잠겨 정신이 없어 다른 무덤을 찾아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한국에 있던 공동묘지 같은 곳이 아니다. 당시 최고 부자였던 요셉이 자신이나 가족을 위해 새로 만든 무덤이었기 때문에 잘못 찾을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이다.
요한복음 20:1절의 “이른 새벽” 이라는 말은 “아직도 어두울 때에” 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완전히 캄캄한 때는 아니라는 뜻이다. 마태는 “동틀 무렵” 이라고 했고 누가는 “새벽” 이라고 했고 마가는 “해가 돋은 때” 라고 했다. 어느 무덤인지 분명히 식별할 수 있을 시간이었다. 게다가 여인들 중 최소한 두 사람은 요셉과 니고데모가 시체를 넣어 두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 보았다. 혼자도 아니고 여러 명의 여자들이 모두 함께 엉뚱한 곳에 가서 예수가 부활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엉터리 주장을 염두에 두고 사도 요한은 아무도 장사 지낸 일이 없는 새 무덤에 장사를 지냈다고 특별히 강조한 것이다. 새 무덤이라면 분명히 표가 나기에 절대로 혼동할 일이 없는 것이다.
바위를 뚫어서 만든 무덤은 부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여기저기 아무데나 있을 만큼 흔한 것은 아니다. 만약 공동묘지처럼 수많은 비석들이 같은 자리에 세워져 있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바위를 새로 뚫어 만든 무덤은 절대로 잘못 찾을 수 없다. 게다가 이런 경우 부자들은 입구를 막는 돌을 디스크 형태로 둥글게 다듬어 비교적 쉽게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다. 아무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은 절대로 실수로 잘못 찾을 수 없다.
42절은 “그 날은 유대사람들의 준비하는 날이었고 무덤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거기에 모셨다고 했다. 새번역은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이라고 했지만 원어는 단지 준비하는 날이라는 뜻이다. 이는 유월절의 준비하는 날이라는 뜻이다.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유월절 축제를 준비하는 하루 전날인 것이다. 이는 시간이 많았다면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을 더 좋은 곳에 장사 지냈을 것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기에 요셉 자신이 만들어 둔 새 무덤에 장사를 지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시간이 있었다면 두 사람은 분명히 만왕의 왕의 품격에 맞는 곳을 찾아서 모셨을 것이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사실 아직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도 못했고 성령을 받지도 못했기에 저들이 예수님이 부활할 것이라고 완전히 믿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두 사람은 구약성경에 정통한 학자들이었기에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본 것이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이 자신들이 기다리던 진짜 메시야이고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왕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인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자신들의 모든 것을 다 걸고 예수님의 시신을 왕의 장례식으로 모셔서 모든 이들에게 우리가 기다리던 왕을 우리가 죽였다는 것을 알린 것이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으니 알 수는 없다. 아마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성령도 선물로 받았을 것이다. 로만 카톨릭과 동방 정교회에서는 성자로 공경한다. 믿을 수 있는 기록은 아니지만 후대에 기록된 위경들과 교부들을 통해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요셉은 감옥에 갇혔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이 누리던 산헤드린 공회원 자격을 잃고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었을지도 모른다. 이들이 이렇게 모든 것을 다 걸고 예수님이 왕이라는 것을 왕의 장례식을 통해 선포한 것은 말씀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가 만왕의 왕이요 심판주로 다시 오실 분이라는 것을 선포한다 해도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모든 것을 잃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도 뭔가를 잃을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도 손해 볼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예수가 만왕의 왕이요 구세주라고 선포하려면 우리도 예수가 세상 어떤 것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자신들의 모든 것을 다 걸고 인생의 도박을 할 수 없다.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