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더위를 먹다
전 호준
내려앉은 구름 사이로 간간이 햇볕이 파고드는 초여름의 한낮, 녹음이 우거진 산길이지만 한동안 길을 오르니, 이마에 줄줄 땀이 흐른다.
등산객들을 위해 설치해 놓은 커다란 살평상이 우리를 기다린다. 배낭을 잠시 내려 기다란 땀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잠깐 숨을 돌린 동료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출발한다. 늘 꼴찌를 못 면하는 주제라, 딱 던 수건을 목에 걸고 서둘러 따라나섰다. 십여 미터를 오르니 비교적 평탄한 길이다. 조금 전 숨을 돌린 탓인지 순해진 길 탓인지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운 느낌이다. 때마침 불어주는 한줄기 산들바람에 등까지 시원하다. 순간 등이 허전함을 느끼고 뒤돌아보니 등에 달려 있어야 할 배낭이 없다. 수건을 꺼내느라 배낭을 벗고 땀 닦던 수건을 목에 건 것을 배낭으로 착각, 배낭 대신 수건을 걸치고 온 셈이다. 이런 정신머리하고는! 정신없이 오던 길을 뛰어 내려갔다.
잿빛 하늘이 통째로 내려앉은 우중충하고 무거운 날씨다. 6월 중 건우산악회 정기 산행일 금방 소나기라도 쏟아부을 것 같은 조바심에 우산까지 챙겨 나섰다. 오늘도 어김없이 8시 정각 땡 하면 출발하는 버스가 맘에 든다. 코리안 타임? 우리나라도 이젠 선진국 문턱에 들어서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거리는 온통 내일로 다가온 선거 열풍의 도가니다. 누구를 위한 몸부림일까? 불 보듯 뻔한 내일의 결과를 찌푸린 하늘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
상머슴을 자처한 애국자는 넘쳐 나는데 마음이 밝지만은 않는 것은 나만의 기우일까? TV 화면에는 북 핵의 갈등을 놓고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세기의 담판이라는 제목으로 다른 뉴스는 파고들 틈이 없다. 누구를 위해 울리는 종일까? 모든 것을 잊고 훌쩍 산행에 나선 졸부(拙夫)의 마음이 그들보다 훨씬 행복한 것 같다.
찌푸린 하늘 탓일까? 검푸른 녹색으로 무겁게 가라앉은 산야는 녹비홍수는 옛말이 된듯하다. 보리가 익어가는 그 옛날 초여름의 정취는 찾아볼 수 없고 엊그제 끝난 듯 어린 벼 포기가 물 위에 열을 지어 불어주는 바람결에 한들한들 인사한다.
상긋한 향을 자랑하며 하얗게 피었던 아카시아를 밀어내고 함박눈을 뒤집어쓴 하얀 밤꽃 무리가 녹색 자락에 얹혀 더욱 희다. 언뜻언뜻 스치는 금계국의 노란 꽃무리가 눈에 들어온다.
무량사 주차장에 내려 한동안 걸으니 만수산(萬壽山) 무량사(無量寺)라는 커다란 현판이 걸린 일주문이다. 여느 사찰의 일주문과 비슷하지만, 현판의 낙인이 재미있다. 현판의 두인(頭印)이 한반도 모형이다.
개울물이 졸졸 흐르는 작은 다리를 건너니 사천 문이다. 오른쪽으로 당간지주가 서 있고 그 뒤로 몇백의 수령을 자랑하듯 거대한 느티나무들이 고찰의 면면을 알려준다. 사천 문을 통과하니 2층으로 된 무량사 본전 극락전이 그 위용을 자랑하듯 우뚝하다.
무량(無量)이란 헤아릴 수 없다는 심오한 뜻으로 극락정토를 지향하는 부처님의 한량없는 자비를 상징하는 여기가 곧 극락이란 뜻에 무량사 본전을 대웅전이 아닌 극락전으로 표한 것이라 한다.
만수산(575m)기슭에 자리 잡은 무량사(無量寺)는 9세기경 범일 국사가 창건했고 신라 고승 무염(無染) 대사가 머물렀다 한다. 보물 제356호인 극락전은 이 층으로 지어진 것이 특색이다. 극락전 안에는 가운데 아미타불(5.4m) 양쪽으로 관세음보살(4.8m) 대세지보살(4.8m) 모셔져 있다. 거대한 불상 앞에 서니 절로 옷깃이 여미어진다.
아미타 삼존불은 흙으로 빚은 소조 불로 동양 최대 규모의 조선 후기 양식이라 한다, 극락전 앞에는 보물 제185호의 오층석탑이 있고 탑 앞에 보물 제233호인 아름다운 석등이 탑을 밝히듯 서 있다.
극락전 뒤 산신각에는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로 유명한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한다. 가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허락질 않아 돌아 나오며 조선중기 범종이 자리 잡은 범종 각에 눈도장 찍고 서둘러 만수산 정상을 향하는 동료들을 따라 나셨다.
배낭을 찾아 걸머메고 허겁지겁 달음박질하듯 산을 오르니 들숨인지 날숨인지 경황(驚惶)이 없다. 내가 왜 이러지? 초여름에 벌써 오지게 더위를 한 방 먹었나? 전화벨이 울린다. 기다리고 있으니 천천히 오라는 배려의 전화다. 숨이 턱에 차 말이 제대로 되질 앉는다. “오오. 올라갑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서두르지 않아도 되지만 몸과 마음이 더위를 먹은 듯 답답하고 황망(慌忙)하기만 하다. 문득 어느 요양원에서 본 치매 들린 할머니가 떠올라 섬뜩함 마저 느껴진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돌아온 나를 보고 “전 선생 오늘 산행에 좋은 글감이 하나 생겼습니다” 기다리던 산악회 회장님의 한마디가 진담인지 농담인지 맛적었는데 결국 진담이 되었다. 기다리던 일행들의 환한 미소에도 무안하고 미안한 마음을 멋쩍은 웃음으로 대신했다.
갈림길 선택이 잘못되어 만수산 정상을 70여m 남기고 하산을 해야만 했다. 돌아오는 길 옥천 휴게소 노천에서 마셔보는 하산 주 한잔, 그동안 치과에 다니며 고문받느라 석 달이나 굶었던 곡차다. 시원한 소맥 한잔과 구수한 돼지 수육이 철 이르게 먹은 더위를 말끔히 씻어준다. 때 이른 초여름에 아무나 먹을 수 없는 더위를 오지게 한 방 먹었으니, 아마도 올여름 더위 먹을 일이 더는 없기를 바랄 뿐이다. 2018. 6. 12 만수산 산행일 밤에
첫댓글 산행 여행을 하시면서도 선거 이야기, 시국에 대한 관심, 무량사 절에서의 감상, 잠깐 정신줄의 혼란으로 일어났던 경험을 이렇게 재미있고 실감나게 표현해주시는 선생님, 치매 라니요? 그 정도의 건망증은 치매가 아니고 애교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정월대보름날 아침에 다른 이에게 더위를 팔지 못하셨나 봅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그날 산행 모습이 그림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잠깐의 착각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고색 창연한 절과 문화재, 그리고 몇 백년은 됨직한 나무들의 위용이 글속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만수산 산행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누구나 깜빡할 수 있습니다. 글을 쓰는 문우님들은 치매와는 거리가 멉니다. 일종의 해프닝입니다. 아무튼 더운 날씨에 수고 많았습니다. 그 와중에 만수산 무량사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전선생님 덕분에 웃으며 즐거운 산행을 하였습니다. 배낭을 가지러 간후 걱정하였는데 정말 빨리왔습니다. 정신력이 강한모습을 보고 산악인의 자세를 보았습니다. 자세한 산행 수필을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수필반 문우들과 함께하는 산행 참 멋져보입니다. 은퇴를 하시고 인생의 이모작에서 만나신 글동무. 그속에서 산행도 하시고 그 함께한 모습을 글로 옮겨주셔서 동행을 하지 않았지만 힘들어도 행복해 하시는 모습이 눈에 그려집니다.
등에 담을 씻어주기 위해 배낭친구가 잠시 집을 나간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연유로 맛깔나는 수필이 되어 선보이게 되니 만수산 무량사는 참으로 무량한 공덕을 내리는 산사가 아닌가 합니다. 청량한 일기 속에 뜻깊은 산행 다시 한번 음미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에피소드가 있는 산행이야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도 친구들과 울산 나들이에서 선글라스를 벤치에 놓고와서 다시가보니 다행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우리 나이대는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슬로건을 서로 챙기자로 정했습니다. 산행은 하산주 한잔에서도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6월 산행으로 낳은 글은 새로운 멋이 있습니다. 경험하고 적은 글이라 생동감이 있어서 좋습니다. 덕분에 만수산 구경 잘 했습니다.
초여름의 만수산 산행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만수산 무량사를 잘 다녀오시고, 예상 못한 에피소드 하나가 좋은 글로 남은 것 같습니다. 여름산 산행을 통해 올 여름 폭염도 날아가리라 생각합니다. 건강하십시오 잘 읽었습니다.
함께 했던 무량사 산행의 여운을 더해 줍니다. 건망증 덕분에 웃을 일이 하나 더 생기고 오래 기억 될 추억거리도 생겼습니다. 그날 일을 실감있게 그려내어 한 번 더 산행 길을 떠올리게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