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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卯胡亂(정묘호란) 💢 3篇(3편)💢
陵墓(능묘).
陵(능)은 京畿道(경기도) 坡州市(파주시) 炭縣面(탄현면) 葛峴里(갈현리)에 있는 장릉(長陵)이다. 仁祖(인조)와 그의 元妃(원비) 인렬왕후[仁烈王后 韓氏: 1594年(년) 8月(월) 16日(일) (陰曆(음력) 7月(월) 1日(일) ~ 1636年(년) 1月(월) 16日(일) (1635年(년) 陰曆(음력) 12月(월) 9日(일)은 朝鮮(조선)의 第(제)16代(대) 王(왕)인 仁祖(인조)의 정비(正妃)로, 昭顯世子(소현세자)와 第(제)17代(대) 王(왕) 孝宗(효종) 의 母后(모후)이다. 正式(정식) 諡號(시호)는 정유명덕정순인열왕후(正裕明德貞順仁烈王后)이며, 本貫(본관)은 淸州(청주)이다.]가 같이 合葬(합장)된 陵(릉)이다. 仁祖(인조) 13年(년) 1635年(년) 12月(월) 9日(일) 産後病(산후병)으로 42歲(세)의 나이로 仁烈王后(인렬왕후)가 昇遐(승하)하자 陵號(능호)를 張陵(장릉)이라 하고 이듬해 1636年(년) 4月(월) 12日(일) 坡州(파주) 雲川里(운천리)의 언덕에 陵(능)을 造成(조성)하였다. 仁祖(인조)는 張陵(장릉)을 造成(조성)하면서 오른쪽에 미리 自身(자신)의 陵(능)을 마련해 두었다가 仁祖(인조) 27年(년) 1649年(년) 1月(월) 30日(일) 昇遐(승하)한 後(후) 그곳에 묻혔다.
그러나 後(후)에 火災(화재)가 일어나고 뱀과 전갈이 陵(능) 周圍(주위)로 무리를 이루어 石物(석물) 틈에 집을 짓는 等(등) 異變(이변)이 繼續(계속)되어 英祖(영조) 7年(년) 1731年(년) 8月(월) 30日(일) 遷葬(천장)을 決定(결정)하고 現在(현재)의 坡州市(파주시) 炭縣面(탄현면) 葛峴里(갈현리)로 옮겼다.
評價(평가).
옛으로 보나 只今(지금)으로 보나 仁祖(인조)는 朝鮮(조선) 最惡(최악)의 王(왕) 無能(무능)한 王(왕)으로 評價(평가)받는다. 萬若(만약) 그가 世界情勢(세계정세)에 조금만 關心(관심)이 있었더라면 丙子胡亂(병자호란)과 같은 慘事(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評價(평가)도 잇따른다. 親明排淸主義者(친명배청주의자)인 仁祖(인조)가 卽位(즉위)한 以後(이후) 朝鮮(조선)은 外交(외교) 基調(기조)를 實利外交(실리외교)에서 親明(친명)外交(외교)로 바꾸었다. 그래서 光海君(광해군)의 密命(밀명)을 받아 淸(청)에게 降伏(항복)했던 姜弘立(강홍립), 朴蘭英(박난영)의 一家(일가)親戚(친척)을 全部(전부) 沒殺(몰살)시켰고 斥和派(척화파)를 重用(중용)하였다.
그리고 仁祖(인조)는 淸(청)을 兄(형)의 나라로 認定(인정)하겠다고 妥協策(타협책)을 提示(제시)한 後(후) 姜弘立(강홍립)의 叔父(숙부)인 姜絪(강인)을 가짜 刑曹判書(형조판서)로 꾸며 回答書(회답서)를 보냈으나 이 文書(문서)엔 明(명)이 내려준 年號(연호)를 使用(사용)하는 等(등) 淸(청)을 刺戟(자극)하는 內容(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에 憤怒(분노)한 淸(청)나라 使臣(사신)은 4漫筆(만필)의 옷감과 소 4千(천) 마리를 提供(제공)하지 않으면 和議(화의)는 없다고 剛勁(강경)한 態度(태도)를 보였다. 朝鮮(조선)은 할 수 없이 이 條件(조건)을 받아들였다.
다른 逸話(일화)도 있다. 丙子胡亂(병자호란) 中(중)에 淸(청)나라가 包圍(포위)된 南漢山城(남한산성)을 向(향)해 "임금의 아우와 大臣(대신)을 人質(인질)로 보내면 降伏(항복)의 意味(의미)로 받아들이고 兵力(병력)을 물리겠다"고 提案(제안)하자 仁祖(인조)는 다른 사람을 보냈으나 龍骨大(용골대)가 本人(본인)들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이번엔 世子(세자)를 要求(요구)했다. 이처럼 仁祖(인조)는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일들에서도 꼭 損害(손해)를 보았다.]
정봉수[鄭鳳壽, 1572年(년) ~ 1645年(년)는 朝鮮(조선) 中期(중기)의 武臣(무신)으로 字(자)는 祥叟(상수), 諡號(시호)는 襄武(양무), 本貫(본관)은 河東(하동)이다.
1592年(년) 武科(무과)에 及第(급제)해 壬辰倭亂(임진왜란) 때 宣傳官(선전관)으로 王(왕) 宣祖(선조)를 扈從(호종)하여 副將(부장)이 되었다. 司僕寺主簿(사복시주부), 監察(감찰), 靈山縣監(영산현감)을 歷任(역임)했고 1605年(년) 務安縣大將(무안현대장)으로 黑山島(흑산도) 앞바다에 侵入(침입)한 倭寇(왜구) 6名(명)을 죽였다. 1627年(년) 丁卯胡亂(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흩어진 軍士(군사)들을 收拾(수습)해 鐵山(철산)의 義兵將(의병장)으로 龍骨山城(용골산성)에서 後金(후금)의 軍士(군사) 절반을 무찌르고 捕虜(포로)가 되었던 數千名(수천명)의 朝鮮人(조선인)을 救出(구출)하여 鐵山(철산) 府使(부사)로 特進(특진)되었다. 이어 龍天(용천)府使(부사)와 防禦使(방어사), 義州(의주)府尹(부윤)을 兼職(겸직)하고 敵軍(적군)이 撤收(철수)한 뒤 龜城府使(구성부사)와 价川郡守(개천군수), 五衛將(오위장) 副摠管(부총관)이 되었다. 1630年(년) 全羅左道水軍節度使(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어 이어 慶尙道兵馬節度使(경상도병마절도사), 全羅道兵馬節度使(전라도병마절도사)를 歷任(역임)하고 1635年(년) 同知中樞府知事(동지중추부 지사) 副摠管(부총관)과 訓鍊院都正(훈련원도정)을 兼任(겸임)하였다. 死後(사후) 鐵山(철산)의 忠武祠(충무사)에 配享(배향)되었다.]
정충신[鄭忠信, 1576年(년) ~ 1636年(년) 6月(월) 6日(일)(陰曆(음력) 5月(월) 4日(일)은 朝鮮(조선)中期(중기)의 武臣(무신)이다. 字(자)는 가행(可行), 號(호)는 만운(晚雲), 本貫(본관)은 금성정씨(錦城)이며, 全羅道(전라도) 羅州(나주)의 奴婢(노비) 出身(출신)이다. (아버지는 光州(광주) 향청(鄕廳)의 좌수(座首) 윤(綸)이고, 어머니는 奴婢(노비) 身分(신분)이라 어머니의 身分(신분)을 따라서 奴婢(노비)가 되는 奴婢從母法(노비종모법)에 따라서 奴婢(노비)가 됨.) 壬辰倭亂(임진왜란)때 權慄(권율)
麾下(휘하)에서 從軍(종군)했고 滿浦僉使(만포첨사)로 國境(국경)을 守備(수비)했다. 1614年(년)(光海君(광해군) 6年(년) 8月(월) 27日(일) 위성원종공신2등(衛聖原從功臣二等)에 策錄(책록)되었다. 李适(이괄)의 亂(난) 때 黃州(황주), 서울 鞍峴(안현)에서 싸워 이겼고 丁卯胡亂(정묘호란) 때 副元帥(부원수)가 되고 朝廷(조정)에서 後金(후금)과 斷交(단교)하려는 데 反對(반대)하여 流配(유배)되었다. 諡號(시호)는 충무(忠武), 封號(봉호)는 금남(錦南)이며, 高麗(고려)의 名將(명장) 정지(鄭地)의 後孫(후손)이다. 1576年(년) 全羅道(전라도) 羅州(나주)에서 父親(부친) 鄭綸(정륜)과 母親(모친) 永川李氏(영천이씨) 사이에서 出生(출생)하였다. 全羅道(전라도) 羅州(나주)의 奴婢(노비)出身(출신)이다.(아버지는 光州(광주) 향청(鄕廳)의 좌수(座首) 윤(綸)이고, 어머니는 奴婢(노비) 身分(신분)이라 어머니의 身分(신분)을 따라서 奴婢(노비)가 되는 奴婢從母法(노비종모법)에 따라서 奴婢(노비)가 됨.)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7歲(세)에 權慄(권율)의 麾下(휘하)에 들어가 從軍(종군)하였다. 나이는 어렸지만 敏捷(민첩)하고 怜悧(영리)하여 權慄(권율)의 信任(신임)을 받았으며 敵地(적지)를 偵察(정찰)하고 連絡責(연락책)으로 活動(활동)하였다. 權慄(권율)의 狀啓(장계)를 가지고 義州(의주)에 갔다가 李恒福(이항복)의 周旋(주선)으로 學問(학문)을 배우게 되면서 武官(무관)의 길을 걷게되었다. 李恒福(이항복)이 그에게 忠臣(충신)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고 朝鮮(조선) 宣祖(선조) 임금은 鄭忠信(정충신)을 奴婢(노비)에서 免賤(면천)을 시켜주었다. 鄭忠信(정충신)은 李恒福(이항복)의 집에 머물면서 學業(학업)을 익혔고 그해 武科(무과)에 兵科(병과)로 及第(급제)하였다. 1602年(년) 明(명)나라를 다녀왔으며 漸次(점차) 勢力(세력)을 擴張(확장)하는 女眞族(여진족)의 情勢(정세)를 把握(파악)하는 役割(역할)을 遂行(수행)했다. 1608年(년) 造山堡萬戶(조산보만호)에 任命(임명)되어 武官(무관)으로 活動(활동)했고 1618年(년) 仁穆大妃(인목대비) 廢母論(폐모론)에 反對(반대)하였고 스승인 李恒福(이항복)이 北靑(북청)으로 流配(유배)를 떠나자 同行(동행)했다. 1619年(년) 明(명)나라의 要請(요청)으로 都元帥(도원수) 姜弘立(강홍립)이出兵(출병)하였으나 後金(후금)에 大敗(대패)하는 일이 일어나자 女眞族(여진족)의 情況(정황)에 밝았던 그가 다시 登庸(등용)되었다. 1614年(년)(光海君(광해군) 6年(년) 8月(월) 27日(일) 위성원종공신2등(衛聖原從功臣二等)에 策錄(책록)되었다. 1621年(년) 滿浦僉使(만포첨사)로 國境(국경)을 守備(수비)를 整備(정비)하였고, 後金(후금)에 使臣(사신)으로 다녀온 後(후) 後金(후금)의 侵掠(침략)에 對備(대비)하고 朝鮮(조선)의 政治的(정치적) 中立(중립)을 主張(주장)하였다. 以後(이후) 安州牧使(안주목사) 兼(겸) 防禦使(방어사)가 되었을 때 1623年(년) 仁祖反正(인조반정)이 일어났으나 直接(직접) 加擔(가담)하지는 않았다. 이듬해 切親(절친)했던 李适(이괄) 將軍(장군)이 亂(난)이 일으키자, 한때 疑心(의심)을 받기도 하였지만 前部大將(전부대장)으로 나서 李适(이괄)의 亂(난)을 鎭壓(진압)하는 데 앞장섰다. 黃州(황주)와 서울 鞍峴(안현)에서 싸워 이겨서 振武功臣(진무공신) 1等(등)에 策錄(책록)되어 錦南君(금남군)에 封(봉)해지고, 이어 平安道兵馬節度使(평안도병마절도사) 兼(겸) 寧邊大都護府使(영변대도호부사)가 되었다. 病(병)을 얻어 官職(관직)에서 물러나 療養(요양)하였다가 1627年(년) 丁卯胡亂(정묘호란)이 일어나자 副元帥(부원수)에 任命(임명)되었다. 1633年(년) 朝廷(조정)에서 後金(후금)과 斷交(단교)하려는 데 反對(반대)하여 淸(청)나라와 和議(화의)를 主張(주장)하여 唐津(당진)에 流配(유배)되고, 後(후)에 長淵(장연)에 移配(이배)된 뒤 풀려났다. 이듬해 捕盜大將(포도대장)·慶尙道兵馬節度使(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636年(년) 3月(월) 그가 憂慮(우려)한 것과 같이 朝鮮(조선)의 朝廷(조정)에서는 淸(청)나라를 排斥(배척)하는 主戰論(주전론)이 得勢(득세)하여 淸(청)과 斷交(단교)하는 使臣(사신)을 보냈고 後日(후일) 丙子胡亂(병자호란)을 促發(촉발)하는 契機(계기)가 되었다.
1636年(년) 病(병)이 甚(심)해지자 王(왕)이 醫官(의관)에게 命(명)하여 治療(치료)에 盡力(진력)하였으나 效驗(효험)을 보지 못하고, 1636年(년) 5月(월) 死亡(사망)하였다. 天文(천문)·地理(지리)·卜筮(복서)·醫術(의술) 等(등) 多方面(다방면)에 該博(해박)하고, 淸廉(청렴)하기로도 이름이 높았다. 光州(광주)의 景烈祠(경렬사)에 配享(배향)되었다. 文集(문집)에 《晚雲集(만운집)》, 著書(저서)에 스승 李恒福(이항복)의 流配日誌(유배일지)를 記錄(기록)한《白沙北遷日錄(백사북천일록)》,《錦南集(금남집)》 等(등)이 있다. 그는 武術(무술)에 뛰어났으며 天文(천문)·地理(지리)·醫學(의학)·卜筮(복서)에도 밝았다. 光州廣域市(광주광역시)의 옛 全南道廳(전남도청) 앞에서 柳洞(유동) 4거리 가는 길인 錦南路(금남로)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諡號(시호)는 李舜臣(이순신)·金時敏(김시민)처럼 충무(忠武)이다.]
이완[李莞, 1579年(년) 5月(월)6日(일)(陰曆(음력) 4月(월) 11日(일)~1627年(년) 2月(월) 28日(일)(陰曆(음력) 1月(월) 13日(일)은 朝鮮(조선) 中期(중기)의 武臣(무신)이다. 本貫(본관)은 德水(덕수). 字(자)는 열보(悅甫)로 이희신(李羲臣)의 아들이고 忠武公(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조카이다. 李羲臣(이희신)이 일찍 世上(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叔父(숙부)였던 李舜臣(이순신)이 그를 부양하였다. 壬辰倭亂(임진왜란) 中(중)에는 叔父(숙부)였던 李舜臣(이순신)을 따라 海戰(해전)에 參戰(참전)하고 特(특)히 露梁大捷(노량대첩)에서 叔父(숙부)의 臨終(임종)을 지키면서 督戰(독전)하였다. 以後(이후) 武科(무과)에 及第(급제)하고 仁祖(인조) 初期(초기)의 李适(이괄)의 亂(난) 平定(평정)에도 功(공)을 세웠다. 義州(의주)府尹(부윤) 赴任(부임) 當時(당시) 椵島(가도)의 모문룡軍(군)과의 摩擦(마찰)이 爭點(쟁점)이 되어 降等(강등)되었다. 丁卯胡亂(정묘호란) 當時(당시) 後金軍(후금군)이 義州(의주)를 攻掠(공략)하자 奮戰(분전) 끝에 爆藥庫(폭약고)에서 自爆(자폭)으로 自決(자결)하였다.死後(사후)에 兵曹判書(병조판서)로 追贈(추증)되었으며, 아들의 地位(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아버지인 李羲臣(이희신)은 兵曹參判(병조참판)으로, 어머니는 貞夫人(정부인)으로 追贈(추증)되었다.] †
남이흥[南以興, 1576年(년) 8月(월) 21日(일)(陰曆(음력) 7月(월) 27日(일)~ 1627年(년) 3月(월) 8日(일)(陰曆(음력) 1月(월) 21日(일)은 朝鮮(조선) 中期(중기)의 武臣(무신)으로 字(자)는 士豪(사호), 號(호)는 성은(城隱), 諡號(시호)는 충장(忠壯), 本貫(본관)은 宜寧(의령)이다. 武科(무과)에 及第(급제)해 宣傳官(선전관), 副摠管(부총관), 捕盜大將(포도대장), 忠淸道兵馬節度使(충청도병마절도사), 慶尙道兵馬節度使(경상도병마절도사), 龜城府使(구성부사), 安州牧使(안주목사)等(등)을歷任(역임)했다. 1623年(년) 仁祖反正(인조반정)으로 彈劾(탄핵)을 받았으나 張晩(장만)의 辯護(변호)로 無事(무사)했고 1624年(년) 李适(이괄)의 亂(난) 當時(당시) 都元帥(도원수) 張晩(장만)의麾下(휘하) 將帥(장수)로 叛亂(반란)을 平定(평정)했다. 이 功勞(공로)로 延安府使(연안부사)가 되고, 振武功臣(진무공신)1等(등)에 策錄(책록)되었으며 宜春君(의춘군)에 封(봉)해졌다. 以後(이후) 平安道兵馬節度使(평안도병마절도사)로 寧邊府使(영변부사)를 歷任(역임)했다. 1627年(년) 丁卯胡亂(정묘호란) 當時(당시) 安州(안주)에서 淸軍(청군)에 對抗(대항)해 맞섰으나 武器(무기)가 떨어지고 城(성)이 陷落(함락)될 危機(위기)에 處(처)하자 城(성)에 불을 지르고 김언수, 함응수, 장돈, 양진국 等(등)과 함께 自決(자결)하였다.]†
이립[(李立, ? ~ 1627年(년)은 朝鮮(조선) 中期(중기)의 武臣(무신)이자 丁卯胡亂(정묘호란) 때 義兵將(의병장)이다. 本貫(본관)은 丹陽(단양)이다.《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과 《承政院日記(승정원일기)》에는 李立龍(이립용) 또는 李立(이립)이라고 混用(혼용)되어 記錄(기록)되어 있다. 1627年(년) 1月(월) 後金(후금)의 阿敏(아민)이 이끄는 3萬名(만명)의 淸軍(청군)이 쳐들어와 丁卯胡亂(정묘호란)이 일어나자 平安道(평안도) 龍天(용천)에서 義兵(의병)을 일으켰다. 1627年(년) 3月(월) 18日(일) 敵軍(적군) 1000名(명)이 侵入(침입)하자 2日(일) 동안 싸워 200名(명)을 射殺(사살)하고 3月(월) 23日(일) 북위포에서 敵軍(적군) 2000名(명)과 싸워 200名(명)을 射殺(사살)하고 甲冑(갑주) 等(등)을 鹵獲(노획)하는 戰果(전과)를 거두었다.이 功(공)으로 麟山僉使(인산첨사)에 任命(임명)되었고 6月(월) 25日(일)에는 關西義兵將(관서의병장)으로 任命(임명)되었다. 以後(이후) 섬과 육지를 오가며 여진족을 토벌하던 도중 섬에서 병사하였다.死後(사후) 1736年(년) 安州(안주)의 忠愍祠(충민사)에 配享(배향)되었다.] †
장만[(張晩, 1566年(년) ~ 1629年(년)은 朝鮮(조선)의 文臣(문신) 이다. 本貫(본관)은 인동(仁同). 字(자)는 호고(好古), 號(호)는 낙서(洛西)이다. 兵曹判書(병조판서) 및 八道都元帥(팔도도원수) 等(등)을 歷任(역임)하였다.]
김상용[金尙容, 1561年(년) ~ 1637年(년) 1月(월) 22日(일)은 朝鮮時代(조선시대) 中(중)·後期(후기)의 文人(문인), 詩人(시인), 政治家(정치가), 書藝家(서예가)로 宣祖(선조) 때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여 官爵(관작)은 輔國崇祿大夫(보국숭록대부) 議政府右議政(의정부우의정), 判敦寧府事(판돈녕부사)에 이르렀고, 丙子胡亂(병자호란) 때 江華島(강화도)가 陷落(함락)되자 門樓(문루)에 火藥(화약)을 쌓고 불을 붙여 자분(自焚) 殉節(순절)하였다. 字(자)는 경택(景擇), 號(호)는 선원(仙源)·풍계(楓溪)·계옹(溪翁), 諡號(시호)는 문충(文忠), 本貫(본관)은 (新(신)安東(안동) 이다. 1614年(년) (光海君(광해군) 6年(년) 8月(월) 27日(일) 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策錄(책록)되었다.]
모문룡[(중국어 간체자: 毛文龙, 정체자: 毛文龍, 병음: Máo Wénlóng 마오원룽[*], 만주어 : ᠮᠠᠣ ᠸᡝᠨ ᠯᡠᠩ Mao Wen Lung, 1576年(년) ~ 1629年(년) 6月(월) 30日(일)은 明(명)나라 末期(말기)의 武將(무장)이다.1621年(년) 後金(후금)의 遼東(요동) 攻擊(공격)으로 因(인)해 朝鮮(조선)으로 逃亡(도망)쳐온 毛文龍(모문룡)은 後金(후금)의 背後(배후)에서 싸운다는 名分(명분)으로 1629年(년)까지 平安道(평안도) 鐵山(철산) 앞바다의 가도(椵島)에 머무르며 1627年(년) 丁卯胡亂(정묘호란) 勃發(발발) 原因(원인)이 되었다. 字(자)는 진남(鎭南)이며, 陕西省(산시성) 随和(태평) (現(현) 襄汾县(샹펀현) 사람이다.]
장린,김종민,이광립.
강홍립[(姜弘立, 1560年(년) ~ 1627年(년) 9月(월) 6日(일) (陰曆(음력) 7月(월) 27日(일)은 朝鮮(조선)의 文官(문관), 軍人(군인)이다. 光海君(광해군) 때 明(명)나라에 志願兵(지원병)을 이끌고 參戰(참전)했으나 後金(후금)(淸(청)나라)의 交戰(교전)을 避(피)하다가 投降(투항)했다. 字(자) 군신(君信), 號(호) 내촌(耐村), 本貫(본관)은 진주(晉州)이다.1597年(년)(宣祖(선조) 30年(년) 文科(문과) 謁聖試(알성시)에 兵科(병과)1登位(등위)로 及第(급제)하였고,說書(설서),檢閱(검열)을歷任(역임)하고 1599年(년) 咸境道(함경도) 道使(도사), 1601年(년) 成均館(성균관) 典籍(전적), 工曹正郎(공조정랑), 1602年(년) 司憲府掌令(사헌부장령), 弘文館(홍문관) 修撰(수찬) 1604年(년) 校吏(교리), 副修撰(부수찬), 成均館司藝(성균관사예), 1605年(년) (宣祖(선조) 38년) 淸難(청난)原從功臣(원종공신) 2登(등)에 策錄(책록)되었다. 그해 都元帥(도원수) 한준겸 (韓浚謙)의 從事官(종사관)이 되었고, 같은 해 奏請使(주청사)의 書狀官(서장관)으로 明(명)나라에 갔다. 1606年(년) 禮曹正郎(예조정랑), 副校理(부교리), 1607年(년) 成均館(성균관) 直講(직강), 內資寺正(내자시정), 修撰(수찬)을 지냈다.光海君(광해군) 元年(원년) 1608年(년) 에 臨海君(임해군) 을 處理(처리)한 功(공)으로 보덕(輔德)의 벼슬을 얻었고, 陳奏使(진주사)의 書狀官(서장관)으로 明(명)나라에 갔다. 1609年(년) 7月(월) 漢城府(한성부) 右尹(우윤), 11月(월)에는 咸鏡南道(함경남도)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를 除授(제수)받았다. 1610年(년) 南兵使(남병사), 黃州府使(황주부사), 1611年(년) 水原府使(수원부사)를 지내고, 1618年(년) 아버지의 功臣號(공신호)를 繼承(계승)하여 진녕군(晉寧君)에 封(봉)해졌다. 1614年(년) (光海君(광해군) 7年(년)에 순검사(巡檢使)를 歷任(역임)했다. 이어 刑曹參判(형조참판), 左參贊(좌참찬), 漢城判尹(한성판윤)을 지냈다.1618年(년)(光海君(광해군) 11年(년) 閏(윤)4月(월) 23日(일) 明(명)나라가 遼東(요동) 半島(반도)를 侵犯(침범)한 後金(후금)을 討伐(토벌)할 때 朝鮮(조선)에 援兵(원병)을 請(청)하자, 輔國崇祿大夫(보국숭록대부), 5도도원수(五道都元帥)가 되어 軍士(군사)를 거느리고 遼東(요동)으로 出征(출정)했다. 1619年(년) 3月(월) 明(명)나라가 萨胡(사르후)戰鬪(전투)에서 大敗(대패)하고, 이어 尙間(상간)하다, 阿布达利(아부달리)에서 잇달아 各個(각개) 擊破(격파)를 當(당)하고, 이어 劉綎(유정)과 姜弘立(강홍립)이 이끄는 朝明(조명)聯合軍(연합군)도 富車戰鬪(부차전투)에서 氣象(기상) 惡化(악화)로 敗北(패배)하였다. 姜弘立(강홍립)이 이끄는 朝鮮軍(조선군)은 編制(편제)를 左營(좌영), 右營(우영), 中營(중영) 三營(삼영)으로 나눴는데, 朝鮮軍(조선군)의 姜弘立(강홍립)은 鳥銃(조총)과 長槍(장창)으로 前面(전면)에 防禦線(방어선)을 構築(구축)하고 이를 맞아 싸웠으나, 强(강)한 逆風(역풍)으로 因(인)해, 불이 꺼지고, 火器(화기)의 煙氣(연기)에 視野(시야)를 빼앗겼다. 그 틈을 利用(이용)해 後金軍(후금군) 騎兵(기병)이 突擊(돌격)하여 先鋒部隊(선봉부대)를 突破(돌파)하였다. 이때 左營(좌영)을 防禦(방어)하던 朝鮮郡(조선군) 將帥(장수) [金應河(김응하)]가 戰死(전사)하였다. 明軍(명군)도 致命的(치명적)인 打擊(타격)을 받았으며, 밤이 되자 朝鮮軍(조선군) 中營(중영) 本營(본영)은 5000名(명)만이 孤立(고립)되어 包圍(포위)되었다. 後金(후금)은 朝鮮軍(조선군)에 降伏(항복)을 權(권)했고, 結局(결국) 이틀을 굶은 姜弘立(강홍립)과 朝鮮軍(조선군)은 남은 兵力(병력)을 이끌고 누르하치에게 投降(투항)했다. 朝鮮軍(조선군)의 投降(투항) 事實(사실)을 알게 된 明軍(명군)의 將校(장교)는 自殺(자살)하고 東南路軍(동남로군)은 掃滅(소멸)했다.그는 일찍이 光海君(광해군)의 密旨(밀지)를 받고 明(명)-後金(후금)과의 싸움에 出戰(출전), 後金(후금)에 거짓 投降(투항)함으로써 光海君(광해군)의 中立(중립) 外交(외교)를 成事(성사)시켰다. 5月(월) 15日(일) 朝鮮(조선) 朝廷(조정)에서는 그의 官職(관직)(府尹(부윤)을 削除(삭제)했고, 家族(가족)을 拘禁(구금)하라고 光海君(광해군)에게 請(청)했으나 그것은 들어주지 않았다. 出征(출정) 前(전) 光海君(광해군)은 姜弘立(강홍립)에게 秘密(비밀)指令(지령)을 내려, 後金(후금)과 몰래 交流(교류)를 하고, 심하(深河)의 싸움에서 오랑캐의 陣中(진중)에서 먼저 通事(통사)를 부르자 姜弘立(강홍립)이 때를 맞추어 投降(투항)한 것이다. 또한 鄭應正(정응정)을 풀어서 朝鮮(조선)에 消息(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애초부터 姜弘立(강홍립)은 淸軍(청군)과의 交戰(교전)에서 弓師(궁사)들로 하여금 화살촉을 뺀 빈 막대기를 활에 넣어 쏘도록 하여 明(명)을 도와줄 수 밖에 없는 처지를 淸(청)에게 알리도록 조치했다.
그가 捕虜(포로)로 있는 사이, 1623年(년) 4月(월) 11日(일) 仁祖反正(인조반정)이 일어나, 그를 寵愛(총애)하였던 光海君(광해군)이 失脚(실각)하고 仁祖(인조)가 政權(정권)을 잡았다. 다음 해 1624年(년) 일어나 李适(이괄)의 亂(난) 때는 李适(이괄)과 함께 叛亂(반란)을 주도하였던, 한명윤의 아들 한윤과 한택 兄弟(형제)가 後金(후금)에 投降(투항)하여 姜弘立(강홍립) 麾下(휘하)로 들어가 丁卯胡亂(정묘호란)의 名分(명분)이 되기도 했다. 以後(이후) 한윤과 한택은 머리를 깎고, 城(성)까지 바꿔 完全(완전)히 淸(청)나라에 歸化(귀화)를 하여 그곳에서 淸(청)나라인과 結婚(결혼)을 한다. 1627年(년) 1月(월) 4日(일) 後金(후금)이 光海君(광해군)의 怨讐(원수)를 갚는다는 名分(명분)으로 朝鮮(조선)을 攻擊(공격)했다. 窮地(궁지)에 몰린 朝鮮(조선)은 講和(강화)를 提議(제의)했다. 이때 戰爭(전쟁)이 長期化(장기화)되는 것을 願(원)치 않은 後金(후금)은 交涉(교섭)에 應(응)했다. 이때 幕後(막후)에서 外交(외교)手腕(수완)을 發揮(발휘)한 人物(인물)이 바로 姜弘立(강홍립)이었다. 丁卯胡亂(정묘호란). 1627年(년) 3月(월) 3日(일) 丁卯胡亂(정묘호란) 때 後金軍(후금군)과 함께 내려와 義州(의주)를 攻略(공략)하면서 같이 내려왔다. 以後(이후) 朝鮮(조선)이 降伏(항복)하자 풀려나 8年(년)만에 歸國(귀국)하였다. (이때 한윤과 한택도 後金軍(후금군)으로 같이 내려왔다.) 그동안 朝廷(조정)에서는 그가 後金(후금)의 앞잡이로 丁卯胡亂(정묘호란)때 先導(선도)했다는 疑心(의심)도 받았지만, 비국에서 그를 접한 한 後(후) 10年間(년간) 節槪(절개)를 지켰다고 仁祖(인조)에게 알렸다. 그러나 西人(서인) 中心(중심)의 朝廷(조정)에서는 그가 降伏(항복)한 것을 들어 그를 斬首(참수)할 것을 主張(주장)하였다. 그러나 仁祖(인조)는 姜弘立(강홍립)과 朴蘭英(박난영)이 辮髮(변발)을 하지 않고 뜻을 꺾지 않았음을 들어 官職(관직) 回復(회복)을 시켜주도록 했다. 1627年(년) 9月(월) 6日(일) (陰曆(음력) 7月(월) 27日(일) 病(병)이 들어 몸이 弱(약)하던 姜弘立(강홍립)이 病死(병사)를 하였다. 仁祖(인조)는 그의 官爵(관작)을 回復(회복)시키도록 命(명)하고, 喪事(상사)에 需要(수요)되는 物品(물품)을 除給(제급)하게 하였다. 그가 죽은 後(후) 淸(청)나라에서 妾(첩)으로 주었던 女人(여인)은 明(명)나라 次官(차관)을 따라 돌아갔다. 姜弘立(강홍립)은 光海君(광해군)의 密命(밀명)에 依(의)해 明(명)과 淸(청) 中(중)에 有利(유리)한 쪽에 붙게 되어 있었으나 綾陽君(능양군)의 反正(반정) 때문에 放置(방치)돼 있었다. 以後(이후) 副車(부차) 戰鬪(전투)에서 戰死(전사)한 金應河(김응하)는 忠武公(충무공)의 諡號(시호)를 받았으며, 明(명)나라 神宗(신종)으로부터 遼東伯(요동백)을 追贈(추증)받았다. 그러나 降伏(항복)의 責任者(책임자)였던 그는 朝鮮王朝(조선왕조)의 歷史(역사)에 제대로 된 評價(평가)를 받지 못했다. 墓(묘)는 서울시 冠岳區(관악구) 蘭香洞(난향동)에 있다.
兵力(병력) | |
3萬名(만명) | 5萬名(만명) 以上(이상) |
被害(피해) 規模(규모) | |
約(약) 3千名(천명) | 1萬名(만명) 以上(이상) |
丁卯胡亂(정묘호란)
정묘호란(丁卯胡亂)은 1627年(년)(仁祖(인조) 5年(년)에 後金(후금)이 侵入(침입)해 일어난 戰爭(전쟁)이다. 仁祖(인조) 卽位(즉위) 後(후) 執權(집권)한 西人(서인)의 친명(親明) 政策(정책)과 後金(후금) 太宗(태종)의 朝鮮(조선)에 對(대)한 주전(主戰) 政策(정책)의 衝突(충돌)에 起因(기인)한 싸움이며, 이로 말미암아 後金(후금)은 明(명)나라와는 不可能(불가능)하였던 交易(교역)의 打開策(타개책)을 朝鮮(조선)에서 얻게 되었다.
背景(배경)
宣祖(선조)의 뒤를 이은 光海君(광해군)은 內政(내정)과 外交(외교)에 그의 非凡(비범)한 政治的(정치적) 力量(역량)을 發揮(발휘)하여 壬辰倭亂(임진왜란) 뒤의 사고[史庫)는 高麗時代(고려시대) 와 朝鮮時代(조선시대)에 實錄(실록) 및 重要(중요) 書籍(서적)의 산실(散失)을 防止(방지)하기 위하여 이를 수장(收藏)·保管(보관)하던 곳이다.] 整備(정비), 書籍(서적) 刊行(간행), 號牌(호패)의 實施(실시) 等(등)으로 눈부신 治績(치적)을 올렸다. 밖으로는 1616年(년) 女眞族(여진족) 奴兒哈赤(누르하치)가 세운 後金(후금)이 滿洲(만주)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國際情勢(국제정세)에 對處(대처)하여 眩亂(현란)한 外交(외교) 政策(정책)을 써서 國際的(국제적)인 戰亂(전란)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避(피)하려 努力(노력)하였다.
1619年(년) 明(명)나라가 後金(후금)을 치기 위하여 滿洲(만주)로 出兵(출병)하였을 때는 그 要請(요청)에 못 이겨 姜弘立(강홍립)으로 하여금 1萬餘(만여)의 軍隊(군대)를 거느리고 援助(원조)케 하였으나, 光海君(광해군)은 姜弘立(강홍립)에게 形勢(형세)를 보아 向拜(향배)를 定(정)하라는 密旨(밀지)를 주었다. 《사르후 戰鬪(전투)》에서 明(명)은 大敗(대패)를 하고, 이어 《아부달리 戰鬪(전투)》에서도 連敗(연패)한 明軍(명군)이 不利(불리)한 狀況(상황)에서 《부차 戰鬪(전투)》에서 包圍(포위) 攻擊(공격)을 當(당)해 孤立(고립)된 姜弘立(강홍립)은 後金(후금)에 降伏(항복)하였고, 이 때문에 後金(후금)의 朝鮮(조선)에 對(대)한 報復的(보복적) 行動(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兩國(양국) 間(간)에 別(별) 事端(사단)이 일어나지 않았다.
本來(본래) 홍타이지(淸(청) 太宗(태종)는 卽位(즉위) 前(전)부터 朝鮮(조선)에 對(대)한 和平(화평) 方針(방침)에 反對(반대)하여 主戰論(주전론)을 主張(주장)하여 왔는데, 이는 淸(청)나라의 南進(남진) 政策(정책)에 對(대)한 背後(배후)의 憂慮(우려)를 除去(제거)하기 위함에서였다. 그러나 光海君(광해군)이 在位(재위)하고 있는 동안은 朝鮮(조선)에는 戰意(전의)가 없었으므로 問題(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1622年(년) 明(명)나라 將帥(장수) 毛文龍[모문룡:(중국어 간체자: 毛文龙, 정체자: 毛文龍, 병음: Máo Wénlóng 마오원룽, 만주어 : ᠮᠠᠣ ᠸᡝᠨ ᠯᡠᠩ Mao Wen Lung, 1576年(년) ~ 1629年(년) 6月(월) 30日(일)은 明(명)나라 末期(말기)의 武將(무장)이다.이 光海君(광해군)의 勸誘(권유)로 平安北道(평안북도) 鐵山(철산)의 椵島(가도)에 駐屯(주둔)하여 遼東(요동)의 回復(회복)을 劃策(획책)하며 後金(후금)을 刺戟(자극)하였다.
1621年(년) 後金(후금)의 遼東(요동) 攻擊(공격)으로 因(인)해 朝鮮(조선)으로 逃亡(도망)쳐온 毛文龍(모문룡)은 後金(후금)의 背後(배후)에서 싸운다는 名分(명분)으로 1629年(년)까지 平安道(평안도) 鐵山(철산) 앞바다의 가도(椵島)에 머무르며 1627年(년) 丁卯胡亂(정묘호란) 勃發(발발)의 原因(원인)이 되었다. 字(자)는 진남(鎭南)이며, 陕西省(산시성) 随和 (태평) 現(현) 襄汾县(샹펀 현) 사람이다.
1576年(년) 毛文龍(모문룡)은 黄州(항저우)에서 태어났으며, 젊었을 때는 한때 점쟁이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 後(후) 그는 北(북)쪽의 山海關(산해관)으로 가서 1600年(년) 경에 軍人(군인)이 되었다.
1621年(년) 3月(월) 瀋陽(심양)과 遼陽(요양)이 涂八(누르하치)에 依(의)해 陷落(함락)되자 敗殘兵(패잔병)을 이끌고, 鴨綠江邊(압록강변) 津江(진강)을 占領(점령)했다. 1621年(년) 後金(후금)의 아민(阿敏)이 毛文龍(모문룡)을 치기 위해 5千名(천명)의 軍士(군사)를 이끌고 鴨綠江(압록강)을 건너 義州(의주), 假山(가산), 龍天(용천) 等(등)을 襲擊(습격)했다. 毛文龍(모문룡)은 遼東(요동) 全體(전체)를 收復(수복)하겠다고 壯談(장담)했으나, 龍天(용천) 官衙(관아)에 있다가 朝鮮人(조선인) 服裝(복장)을 하고서 逃亡(도망)쳤다. 이 奇襲(기습)으로 流民(유민) 578名(명)이 죽었다.
後金(후금)의 大兵力(대병력)이 내려오자 1621年(년) 7月(월) 平安道(평안도) 鐵山(철산) 앞바다의 가도(椵島)에 上陸(상륙)한 毛文龍(모문룡)은 鐵山(철산), 龍天(용천), 義州(의주) 等(등)을 돌아다니면서 明(명)의 敗殘兵(패잔병)과 亂民(난민)을 收拾(수습)하면서 民家(민가)에 對(대)한 掠奪(약탈)을 일삼았다. 平安監司(평안감사)는 光海君(광해군)에게 狀啓(장계)를 올려 對策(대책) 마련을 要求(요구)했다. 1622年(년)(光海君(광해군) 14年(년) 光海君(광해군)은 毛文龍(모문룡)이 鐵山(철산)의 椵島(가도)에 駐屯(주둔)하는 것을 許諾(허락)하면서 明軍(명군)과 亂民(난민) 1萬餘名(만여명)이 이곳에 머물렀다. 이들의 不足(부족)한 食糧(식량)은 朝鮮(조선)에 軍糧(군량)을 强要(강요)해 徵收(징수)했으며, 明(명)나라로부터도 志願(지원)을 받았다. 이때 徵收(징수)한 서량(西糧)은 毛文龍(모문룡)이 撤收(철수)한 뒤에도 繼續(계속) 徵收(징수)되다가 1648年(년)(仁祖(인조) 22年(년)에야 廢止(폐지)가 되었다.
毛文龍(모문룡)은 明(명)나라의 友邦(우방)인 朝鮮(조선)을 後金(후금)의 攻掠基地(공략기지)로 삼는다면서 한족(漢族)들을 動員(동원)해 後金(후금)을 刺戟(자극)하고 朝鮮(조선)의 國境(국경)을 어지럽혔는데, 1622年(년) 10月(월) 이러한 功(공)으로 明(명)나라로부터 摠兵(총병)을 除授(제수)받았다. 그러나, 毛文龍(모문룡)은 實際(실제)로는 椵島(가도)를 據點(거점)으로 朝鮮(조선)과 明(명)나라 사이의 交易(교역)에 열을 올렸다. 毛文龍(모문룡)의 存在(존재)는 1627年(년)(仁祖(인조) 5年(년) 朝鮮(조선)이 後金(후금)의 侵入(침입)(丁卯胡亂(정묘호란)을 받게 된 主要(주요)한 原因(원인)이었는데, 後金軍(후금군)이 朝鮮(조선)을 侵掠(침략)하자 毛文龍(모문룡)은 逃亡(도망)쳤다가 丁卯胡亂(정묘호란)이 끝난 後(후) 되돌아와 一部(일부) 朝鮮人(조선인)들이 後金(후금)과 함께 椵島(가도)를 公格(공격)했다는 理由(이유)로 平安道(평안도)의 良民(양민)들을 虐殺(학살)하였다.
毛文龍(모문룡)은 1629年(년)에는 左都督(좌도독)이 되었으나, 戰略的(전략적)인 利點(이점)이 있었음에도 不久(불구)하고 여러 主要(주요) 都市(도시)들을 防備(방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北京(베이진) 地域(지역) 住民(주민)들의 忿怒(분노)를 불러일으켰다. 特(특)히 毛文龍(모문룡)은 魏忠賢(위충현) 等(등) 많은 宦官(환관)들에게 賂物(뇌물)을 바치며 不正腐敗(부정부패)를 일삼았다. 結局(결국), 1629年(년) 6月(월) 30日(일) 明(명)나라의 忠臣(충신) 袁崇煥(원숭환)에 依(의)해 職務怠慢(직무태만)과 不正腐敗(부정부패)를 理由(이유)로 斬首當(참수당)했다.]
한편 光海君(광해군)은 國境(국경)의 警備(경비)에 留意(유의)하여 軍備(군비)를 게을리하지 않아 성지(城池)와 兵器(병기)를 修理(수리)하고 軍士(군사) 訓練(훈련)을 實施(실시)하는 等(등) 國防(국방)에 힘썼다. 그러나 光海君(광해군)은 臨海君(임해군), 永昌大君(영창대군), 綾昌君(능창군) 等(등) 많은 王族(왕족)들을 肅淸(숙청)하였고, 仁穆大妃(인목대비)를 廢(폐)하는 等(등) 當時(당시) 社會(사회)에서는 致命的(치명적)인 道德的(도덕적) 缺陷(결함)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1623年(년) 仁祖反正(인조반정)을 일으킨 西人(서인)에 依(의)하여 물러나게 되고 仁祖(인조)가 卽位(즉위)하게 되자, 仁祖(인조)를 擁立(옹립)한 西人(서인)은 國際(국제) 問題(문제)에서 光海君(광해군)의 觀望的(관망적) 態度(태도)를 버리고 향명배금(向明排金)의 政策(정책)을 뚜렷이 내세웠다. 朝鮮(조선)의 이러한 政策(정책)의 變化(변화)에 對(대)하여 後金(후금)에서 神經(신경)을 날카롭게 한 것은 當然(당연)하다.
이러한 때에 1624年(년) 仁祖反正(인조반정)의 論功行賞(논공행상)에 不滿(불만)을 품은 李适(이괄)의 亂(난)이 일어났다. 結局(결국) 鎭壓(진압)은 되었지만, 李适(이괄)과 함께 亂(난)을 일으킨 韓明璉(한명련)의 아들, 韓潤(한윤)이 後金(후금)으로 逃亡(도망)가 丁卯胡亂(정묘호란)의 名分(명분)이 되기도 했다.
이에 後金(후금)은 明(명)나라를 치기 위해서는 우선 毛文龍(모문룡)을 援助(원조)해 주며 後金(후금)의 背後(배후)를 威脅(위협)하고 있는 朝鮮(조선)을 쳐서 毛文龍(모문룡)을 孤立(고립)시킬 必要(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또한 1626年(년) 第(제)1次(차) 寧遠城(영원성) 戰鬪(전투)에서 淸(청)나라가 敗北(패배)를 하고 누르하치가 死亡(사망)을 하자, 後方(후방) 安定(안정)의 必要性(필요성)을 强(강)하게 認識(인식)하게 된다.
過程(과정).
叛亂(반란)에 失敗(실패)한 李适(이괄)의 殘黨(잔당) 中(중) 韓明璉(한명련)의 아들, 韓潤(한윤)과 韓澤(한택)은 後金(후금)으로 逃亡(도망)하여, 거기서 光海君(광해군)의 廢位(폐위)와 仁祖(인조) 卽位(즉위)의 不當性(부당성)을 呼訴(호소)하고, 또 朝鮮(조선)의 兵力(병력)이 弱(약)하며 毛文龍(모문룡)의 軍士(군사)가 오합(烏合)임을 말하여 속히 朝鮮(조선)을 칠 것을 慫慂(종용)하였다. 明(명)나라와의 交戰(교전)으로 因(인)한 경제단교(經濟斷交)로 深(심)한 物資(물자) 不足(부족)에 處(처)하여 있던 後金(후금) 太宗(태종)(홍 타이지, 崇德帝(숭덕제)에게, 李适(이괄) 殘黨(잔당)의 이러한 慫慂(종용)은 더욱 朝鮮(조선) 侵入(침입)의 決意(결의)를 促進(촉진)시켰다.
1627年(년) 3月(월) 1日(일) 仁祖(인조) 5年(년)에 後金(후금) 홍타이지崇德帝(숭덕제)는 光海君(광해군)을 위하여 報復(보복)한다는 口實(구실)을 내세우고, 버일러(beile, 貝勒 : 滿洲(만주)·蒙古(몽골)의 部族長(부족장) 아민(Amin, 阿敏)에게 軍士(군사) 3萬名(만명)을 주어 朝鮮(조선)을 侵入(침입)케 했다.
後金軍(후금군)의 一部(일부)는 椵島(가도)의 毛文龍(모문룡)을 치고, 主力(주력) 部隊(부대) 3萬名(만명)은 3月(월) 4日(일) 義州(의주)를 占領(점령)하고, 3月(월) 5日(일)엔 定州城(정주성)을 陷落(함락)시켰고, 3月(월) 11日(일) 安州城(안주성)에서 南以興(남이흥), 全尙毅(전상의), 楊晉國(양진국), 張暾(장돈), 김언수, 함응수, 金浚(김준), 金良彦(김양언), 宋德榮(송덕영)을 죽인 以後(이후) 陷落(함락)시켰고, 3月(월) 13日(일) 平壤城(평양성)에 到着(도착)했다. 이에 昭顯世子(소현세자)는 全州(전주)로 避難(피난)가고, 仁祖(인조)와 朝鮮(조선) 朝廷(조정)은 江華島(강화도)로 避難(피난)하였다.
朝鮮(조선) 곳곳에서 義兵(의병)이 일어나 平安北道(평안북도) 鐵山(철산)의 鄭鳳壽(정봉수)와 龍天(용천)의 李苙(이립)의 義兵(의병)이 戰鬪(전투)에서 勝利(승리)하자, 明(명)나라와 戰爭(전쟁) 中(중)이였던 後金(후금)은 朝鮮(조선)이 自身(자신)들의 背後(배후)를 攻擊(공격)할 것을 念慮(염려)하여 講和(강화)를 提議(제의)하였다. 1627年(년) 4月(월) 朝鮮(조선)과 後金(후금) 사이에 講和(강화)가 成立(성립)하였다. 以後(이후) 朝鮮(조선)은 後金(후금)과 兄弟(형제)關係(관계)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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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注(각주)
↑ 仁祖實錄(인조실록) 15卷(권), 1627年(년) 1月(월) 17日(일), 平安監司(평안감사) 尹暄(윤훤)이 義州(의주)가 金(금)나라에게 陷落(함락)되었다고 아뢰다.
↑ 仁祖實錄(인조실록) 15卷(권), 1627年(년) 1月(월) 26日(일), 戎服(융복)으로 갈아입고 鷺梁(노량)에 行次(행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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