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죽음, 우리의 선택
집회15,15-20; 1코린 2,6-10; 마태 5,17-37
연중 제6주일; 2023.2.12.; 이기우 신부
1. 입춘을 넘긴 지금도 아직 새벽녘과 밤에는 쌀쌀한 기운이 남아 있지만 바야흐로 봄기운이 서서히 스며드는 때입니다. 다음 주에 시작할 사순시기 한 달을 더 거쳐 부활시기가 되면 우리는 완연한 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사순시기의 봄에 움트는 자연의 생명은 부활시기의 봄에 피어나는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는 탁월한 비유입니다. 생명이 약동하는 봄을 맞이하는 한편 머지않아 다가올 부활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오늘, 과연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독서와 복음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2. 제1독서는 집회서 15장의 말씀입니다. 집회서가 쓰인 시대는 헬레니즘을 앞세운 알렉산더 장군이 유럽 남부와 아프리카 북부 그리고 아시아 서부까지 넓은 영토를 정복한 후 그의 뒤를 이은 부하들이 세운 왕조가 지배하던 때였습니다. 헬레니즘은 그리스의 다신교와 페르시아의 배화교와 인도의 불교 등 다양한 종교들을 혼합하는 것은 물론, 흑인과 황인과 백인 등 여러 인종과 문화의 경계를 없애버리면서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이라는 오직 하나의 세계시민이념만을 강요했던 까닭에 유일신을 신봉하던 유다교와는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정일치체제로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는 단지 종교적 위기만을 초래한 것이 아니었고 민족 정체성의 위기까지 닥쳤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절대절명의 정체성 위기 앞에서 ‘벤 시라’(시라의 아들)라고 알려진 저자는 위기의식도 희박한 채로 헬레니즘의 새로운 사조와 문화에 물들어가고 있는 유다 젊은이들에게 유다교 집회 때마다 조상들의 전통과 문화를 상기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구약성경을 총망라하여 집회서를 썼고 오늘 들으신 대목에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생명과 죽음을 내어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집회 15,16-17; 신명 30,19).
3. 그런가 하면 제2독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리스 문화권에 살던 이방인들에게 전하고자 쓰인 코린토 전서 제2장입니다. 파상적으로 밀려오던 그리스적인 헬레니즘의 공세 속에서 유다이즘을 지키려 했던 제1독서와는 반대로, 세속적 지혜를 추구하면서 헬레니즘의 본산이라는 자부심에 한껏 젖어 있던 그리스들에게 복음에서 나오는 참된 지혜를 알려주려고 쓰였습니다. 제1독서가 민족주의 차원에서 방어적으로 쓰여졌다면, 제2독서는 선교적인 차원에서 공세적으로 쓰여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세상과 인간의 기원을 추구하는 지혜를 사색했었습니다만, 사도 바오로는 이들의 세속적인 지혜들보다 훨씬 더 차원 높은 지혜를 설파하였습니다. 그 지혜는 한처음 창조되기 전부터 계시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진리로서, 그리스의 세속적 지혜보다 훨씬 더 신비로운 지혜였습니다. 다만 신앙을 모르던 그리스인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오로가 전한 메시지는 만일 우리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을 선택하려면 세속적인 지혜를 넘어 예수님께서 계시해 주신 거룩한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4.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계시하셨던 참된 지혜를 소개합니다. 이는 산상설교의 첫 머리인 진복팔단에 담겨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참된 행복의 지혜를 깨닫고 실천해야 하며 그러자면 전통적인 십계명을 사랑을 기준으로 새롭게 알아들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모세가 가르쳤던 본래의 입법취지와는 동떨어진 채 자구적인 해석에 매달려 엉뚱한 결론을 내리고 있었었습니다.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는 제5계명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시절에 너무나 히브리인들의 생명을 가벼이 여기어 함부로 죽이고 착취하며 매질하던 감독관들처럼 해서는 안 되고, 이스라엘에서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살인자를 재판에 넘겨 사형에 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형제로 여기는 동족에게는 성을 내지도 말고 ‘바보!’라고 욕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려 할 때에라도 형제인 동족과 화해해야 할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서라도 먼저 화해해서 공동체에 맞갖은 처신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공동체는 생명의 표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매우 근본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5. 또한 “간음하지 말라.”는 제6계명 역시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시절에 이집트 감독관들이 히브리 젊은 여성들을 성노리개로 삼아 희롱하거나 성폭력을 제 마음대로 저지르던 끔찍한 기억을 잊지 말고, 이스라엘에서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성을 존중해야 하며 특히 남자와 여자가 혼인하여 이룬 가정의 질서를 보호해야 한다는 뜻으로 갱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우자 이외에는 모든 이성을 그저 사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생명의 축복으로 허락하신 사람의 성이 쾌락의 도구로 타락하게 되면 얼마나 끔찍한 지옥이 현실에서 벌어지는지를 잘 알고 계시던 예수님께서는 성적인 범죄의 도구로 쓰여지는 눈이나 손을 극도로 경계하셨습니다. 그리고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제8계명 역시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시절에 아무리 억울한 갑질을 당해도 노예 신분이었던 히브리인들은 그 어떠한 법적 보호도 받지 못했고, 재판관과 감독관이 모두 한통속이어서 거짓 증인을 세우면 꼼짝없이 유죄 판결을 억울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에서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거짓말을 하지 말고 진실된 언어만을 말함으로써 사법질서를 개혁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6. 모세 시절부터 내려온 이스라엘의 율법을 포함해서 세상의 모든 법은 하느님께서 사람 누구나에게 부여하신 양심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심이 명령하는 도덕의 최소한이 법률로 규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도덕 기준이 미흡했던 시절에는 법률도 허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으로 양심의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믿음이 양심의 기준입니다. 그 믿음의 근거이자 대상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삶으로 보여주신 바에 따라서 믿을 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믿을 교리의 핵심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이며, 이것이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사는 지혜입니다. 이를 간추리면 이렇습니다: 믿음과 윤리, 신앙과 계명 그리고 공동체와 공동선. 이것이 생명을 선택하기 위한 믿을 교리의 알맹이입니다.
7. 믿을 교리에 따라서 지킬 계명이 따라 나옵니다. 계명은 믿음을 살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판이자 가이드라인입니다. 교회는 이를 윤리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생명을 존중하는 윤리, 성과 가정을 보호하는 윤리, 거짓말을 금지하고 진실된 말을 존중하는 언어 윤리 등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계명과 윤리는 결국 사회 안에서 공동체를 세우고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공동선을 증진시켜야 한다는 요청으로 나타납니다. 요컨대, 생명을 위한 지혜는 믿음과 윤리에서 시작되어서 신앙과 계명으로 구체화되고, 다시 공동체와 공동선으로 나아갑니다. 믿음과 윤리가 개인들이 실존적인 차원에서 추구해야 할 지혜라면, 신앙과 계명은 개인들이 모인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지혜이며, 공동체와 공동선은 한 사회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8.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내놓으신 생명과 죽음은 양자택일해야 할 가능성인데, 이는 실존적인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때 더욱 생생한 지혜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이 살아있는 동안 내내 우리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당신의 창조 계획을 따라서 생명을 선택하기를 바라실 뿐, 설사 우리가 하느님께서 제시하신 생명을 선택하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에 육신 생명을 거두어가지는 않으십니다. 하지만 육신의 죽음 이후에는 준엄한 심판 과정을 거쳐서 반드시 우리의 자유 선택에 따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생명과 죽음을 이해하고자 할 때, 생명을 지키고 존중하는 길은 믿음을 돈독히 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바로, 신앙과 신뢰와 신용입니다.
9.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믿음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서의 신앙도 있고, 이를 뿌리로 하여 사람들 상호간에 지켜져야 할 믿음으로서의 신뢰도 있으며, 이를 줄기로 하여 맺어야 할 열매는 사회적인 신용이라는 믿음도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믿음의 뿌리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며 이 신앙을 실천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가 하느님께 대해 지켜야 할 계명인 것입니다. 또한 신앙과 계명은 믿는 이들이 이룩한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여 공동선을 증진하고 촉진시키는 사도직 활동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믿음이 없는 이들도 이 공동체에서 풍기는 매력에 끌리고 믿는 이들이 실천하는 공동선 사도직 활동의 영향력에 이끌려서 점차적으로 하느님께로 나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전파되는 선교활동의 경로요 세상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에덴 동산으로 변화될 수 있는 복음화 과업의 청사진입니다.
10. 믿음이 없이 윤리를 저버린 세상은 지옥입니다. 신앙을 외면한 채 계명을 왜곡하고 죄를 저지르는 세상도 마찬가지로 지옥입니다. 이런 현실에서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요 죽음이나 별반 다를 바 없는 고통스런 현실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특히 사회적 약자들이 더 큰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와는 대조적인 사회를 이룩하도록 십계명을 받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과 신앙이 없는 지옥과는 대조적으로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사회를 이룩하도록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받았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고 이들을 포용할 수 있는 공동체를 세우며 공동선을 증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바, 신비롭고 감추어져 있는 하느님의 지혜로서,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하느님께서 당신과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해 놓으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참된 행복의 진리를 통해 생명에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주님의 지혜는 위대하시고""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지혜"임을 묵상해 봅니다. 믿음과 윤리, 신앙과 계명, 공동체와 공동선의 위계와 관계성도 생각해 봅니다. 신앙, 신뢰, 신용... 하느님과의 믿음, 인간과의 믿음임을 떠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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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6주일
오늘은 사랑의 계명을 우리에게 전해 주는 것 같습니다.
봄의 기운을 느끼게하는 남도의 산수유의 밝은 기운이 전해 오는듯
ppt의 그림이 많이 와 닿았습니다.
알렉산더대왕이 정복한영토와 바오로사도의 전도한 그리스 고린토
산성설교를 하신 산 위의 군중과 예수님의 모습
그림을 보면서 그 시대의 사건을 추측해 볼 수 있어 좋았답니다.
1독서는 민족주의차원에서
2독서는 선교적차원에서 쓰여졌다는것
복음인 5계명에서 8계명은 이웃을 대하는 신앙인의 자세가 어떠해야하는지를 말해주는것 같습니다.
믿음은 양심의 기준이며
우린
믿을교리와 지킬계명으로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
신뢰와 신용,신앙안에서 참 믿음을 만들어 생명이신 주님을 따르는것
깊이 새기며
미사를 참례하고 난 뒤의 부뜻함은 덕분이란 감사함으로~~
한 주를 잘 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강론을 제대로 듣고 이해하셨습니다. 북녘의 복음화를 비롯해서, 중국과 일본 등 동북아시아의 복음화, 더 나아가서는 아시아 대륙을 선포되어야 할 복음화의 명제가 바로 오늘 강론의 숨은 지향이었습니다.